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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제국
大明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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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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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1368년 ~ 1644년
위치
중국 대륙 일부
남경(13681421)1644)
북경(1421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중국어
한족
주요사건
1356년 주원장세력의 독립
1368년 건국
1421년 북경 천도
1644년 멸망
(+ 남명 1644년~1661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 개요
- 행정과 조세
- 경제와 대외 교역
- 군대
- 조선과 명
5.1. 명조 유민
- 기타
- 역대 황제
- 추존 황제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AA%85%EB%82%98%EB%9D%BC?action= edit§ion=1)]
중국 역사 상의 통일 왕조 중 하나. 1368년
주원장이 난징에서
건국하여 원을 멸망시키고 중원과 만주에 이르는 지역까지를
장악하였으며[1]
, 15세기 중엽까지 대대적인 원정을 통해 국세를 떨쳤다. 조선,
류큐,
대월 등이 사대의 예를 취하였으며,
무로마치 막부도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부터 명나라에 조공하기 시작하였다[2]
[3]
15세기 후반부터는 조세 제도의 혼란과 향촌의 해체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는 한편 민간 교역이 성하였으며, 이는 필리핀을 통해 유입된 스페인 은 등의 영향으로 은 본위 경제 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 악화, 무능한 황제들의 실정, 북로남왜 등의 침공, 만주 왕조의 대두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다가, 빈발하는 농민 반란 속에서 직접적으로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청이 이자성과 장헌충 등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중국 내륙으로 장악하여, 명으로부터 천명(天命)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통일 왕조의 자리를 대신하였다. 멸망 이후에도 청에 대항하여 남명의 부흥 운동, 정성공의 대만 세력, 삼번의 난 등이 일어났으나 모두 청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민족과 공존하는 시대를 넘어 중화 제국의 구도를 완성한 점, 초기 자급자족적 질서를 추구하기도 랬지만 활발한 대외무역을 통해 흡수된 은
본위의 화폐 제도가 운영된 점, 마테오리치 등의 선교사가 활동하는 등
서양과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고 필리핀과 일본 등으로부터 수입된 은 무역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 점, 양명학등 보다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 추구되어 기존
주자학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전개된 점 등으로 인해 세계사적으로는
대개 중세를 완전히 넘어선 근세 왕조로
취급받고 있으며,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이민족에 의해 건립된 청나라인 탓에 중국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조금 더 추켜세워지고 있는 왕조이기도
하다. 사실 명에 대한 재평가는 명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청나라의 편향적인 역사서술에 의해 폄훼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점,
송과 비교하여 폐쇄적이고 상업적으로 다소 쇠퇴했다는 기존의 이론[4]
이 흔들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최근들어 상당히 재평가되는 왕조 중의 하나.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AA%85%EB%82%98%EB%9D%BC?action= edit§ion=2)]
명은 원의 중상주의 정책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소박한 농촌공동체의 이상을 구축해 회복하려고 했고 상당한 성과(식량 생산량 증가와 인구 증가가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 인 이유는 아래의 이유로 인구 파악이 미비했기 때문)를 거두었다. 자급자족 농민 질서의 회복을 추구한 것은 농민 반란을 주도하며 성장한 명 태조 주원장의 출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때문에 병크도 있었다. 예컨대 '장성'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성벽이 제일 길다는 남경성을 쌓을 때에도 현장에 공장을 세워서 벽돌을 생산하는 대신 일정 지역의 마을에서 벽돌을 십시일반으로 제공하게 했다. 벽돌을 만드는 일을 맡은 가구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벽돌을 남경까지 운반하는 부역을 맡게 된 가구에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쾌락의 혼돈」(티모시 브룩 저)에 따르면 전근대시기에 이렇게 전국적으로 통일된 행정집행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행정 제도로는 소박한 농촌공동체의 이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이갑제' 를 실시했는데, 주원장은 이러한 이갑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해 전
지역에 균질적인 농촌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갑제는 기본적으로 '이장', '이노인' 등의 유력 계층을 포괄하면서 성립되었기에
빈부격차를 결국 인정한 것이었고, 이갑제는 얼마 못가 한계를 드러냈다 [5]
주원장 자신도 말년에 이갑제로 이루어진 농촌 내에서도 상당한
빈부격차가 있는 것을 인정했다. 중요한 건 주원장 시기, 즉 명이 건국된 직후에도 실효성이 바라던 만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주원장시기의 이갑제는 최소한 상당히 정확도 높은 인구조사 제도로써 기능했던 것은 사실이며, 이갑제를 통한 최초의 인구조사는 실제
인구와 10여 %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건 전근대시기의 인구조사로써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달한 것이다 일반적인
인구사학자들은 중국사에서 믿을만한 인구통계가 명 초 1393년 인구조사를 시작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6]
그러나 전근대국가의 사회체제의 한계, 즉 호적에 오른 인구에게만 조세와 부역이 부과되기 때문에 이를 계속 피하려 든다는 점 때문에 미파악 인구가 늘어났고(나중가면 황제들이 '인구가 늘어나는 거 뻔히 보이는데 왜 파악되는 인구는 그대로(6천만 선)냐' 하면서 투덜거렸다) '농촌공동체의 이상' 때문에 미파악 인구에 대한 단속도 제한적이였다(당대에는 이를 '성현의 도'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이갑제는 막대한 대외 원정으로 부세가 파격적으로 증가한 영락제 시기 이후 해체 국면에 들어가고, 결국 명 조정은 중기 이후 인구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때려치고 그냥 세금 액수 정해줄테니까 지방에서 알아서 이만큼 거둬 보내 하는 식으로 전환한다. 근데 중앙 정부의 상납 요구액이 너무 많아서 부패를 저지르는 관료는 많아도 그걸로 잘먹고 잘사는 지방 관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다 중앙에 보내야 하니까... 결국 상습적으로 용인되는 지방의 부가세와 이를 통한 착취는 거의 공인받게 된다. 이것이 조금 해소 기조에 들어가려면 장거정의 개혁과 옹정제의 개혁을 기다려야 했다. 이나마도 불완전했지만.
그렇게 이갑제 체제에서 이탈하는 농민이 늘어났음에도 명의 부세 제도는 기본적인 틀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삼정의문란을 통해 알려진, '농민 이탈 → 부세가 다른 농민에게 이월 → 농민 부담 증가 → 농민 이탈 → …'의 악순환이 명 중기 이후에도 나타났다. 이로 인해 유민(流民)이 급증하였는데, 문제는 명의 조세 구조는 철저히 원적지에 의거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민들이 다른 데 가서 농사 짓더라도 제대로 세금을 걷을 수 없었다. 자연히 국가 재정은 부실해지고 지방 관청에 대한 압력은 커졌다.
그 외에 각종 공금의 흐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홍무제는 관에서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다시 군인에게 봉급을 주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 각 농민이 할당된 군인에게 직접 쌀을 전달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부대를 다른 곳으로 재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지는 상황이였으며[7]
결국 이것도 명 중기 이후에 병사들에게 은을 월급으로 주고 알아서 곡식을 사먹게 하는
형태로 변화한다. 이게 은근히 상업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어쨌든 중기 이후 명은 수입을 판단하고 거기에 맞춰 지출을 결정하는 양입제출이 아니라 지출을 결정하고 거기에 맞춰 세금을 거둬들이는 양출제입에 가까운 국가 운용을 했으며, 이는 토목의변이후 높아진 방위 부담을 고려하면 어쩔수 없어 보이긴 하나 또한 재정 운용의 방만함과 높은 세율을 낳았다. 정부가 알아서 지출을 조절해야 하는데 지출이 늘면 늘었지 조절은 안 됐다.
물론 명 정부가 노는 것만은 아니었고, 꾸준히 조세 구조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강남에서 쌀을 걷어서 위로 올라오는 사이 발생하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조세가 서서히 은납화된 것도 그러했고, 지나치게 과중해지는 잡역도 서서히 은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대체해 나갔다. 법제적으로도 이갑제 하의 갑을 묶어 행정을 재정비하고 재산에 따라 세금을 거두게 하는 균요법, 조세의 단계를 나누어 차등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십단법, 호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달리 거두자는 문은과 정은 제도, 세금을 지세와 인두세로 통합하자는 일조편법 등이 지역별로 시행되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조세가 서서히 은납화되어 나갔다는 것이고, 둘째로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책이 나타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제 이갑제를 벗어났던 지역의 행정 단위를 나름대로 탄력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지방관들의 노력과 여기에 자발적인 사회 지배계층들과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외적의 침입과 잦은 반란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신사들이 일조했다. 이 때 두각을 보인 인물이 십가패법과 남가향약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자치 집단이자 방위 집단을 구축하려 했던 왕수인, 즉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이었다. 16세기 초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으면서, 명 후기에는 중국 전역에 향촌이 재건되었고 이를 명 정부에서도 행정 단위로 활용하게 된다. 따라서 명말기에는 지역적으로 이갑제를 보갑제가 대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전국에서 다양하게 진행되던 조세의 개혁은 명재신이던 장거정이 대대적인 토지 조사와 통합적인 일조편법을 진행하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조사를 기획, 실현하자 지주층과 왕족, 관리층을 비롯한 특권계층에서 엄청난 반발을 나타냈고 장거정은 수많은 정적들의 공격 끝에 사후 모든 명예를 몰수당하게 되는것은 명나라가 목표로 했던 '농촌공동체'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장거정이 살아있을 때도 몇몇 사람들이 '당신은 부국강병만을 신경쓸 뿐 성현의 도에는 신경쓰지 않으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며 매도한 바 있고, 이에 장거정은 칭찬이 지나치십니다라고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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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에는 전통적인 식량생산의 농업에서 탈피하여 상품작물의 재배가 활발했는데 이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분업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런 원료를 싸게 사서 직공들에게 비싸게 팔고 가공물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아 차익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송, 원 대에 개방적으로 세계
곳곳의 기술들을 받아들이던 모습과 대비되어 15 ~ 17세기에 중국이 유럽에 따라잡히고 형세가 역전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이 시기에 서유럽이 급작스레 등장한 아메리카와
대항해시대에 활발한 대외 원정을 통해
급격히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대의 중국 경제가 황제까지도 대외무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던
송대까지와는 달리 내수에 중점을 두고 폐쇄적인 사회를 지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며, 정화가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다녀오는 등의 일을 벌였기도 했지만
"해금령"을 통해 공식적인 해상활동을 억제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8]
[9]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해상세력에 대한 견제나 유교적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하기도 한다.
전세계를 배회하던 은이 중국에 도착하면 마치 여기가 자연의 중심이라는 듯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 Gomes solis, "은에 대해서 논함(Arbitrio sobre la plata)", 1621
그러나 명의 대외무역은 민간무역의 영역에서 상당히 활발했으며 특히 은본위경제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한 중기 이후의 명은 대외무역이
활발하여 전세계의 은을 긁어 모았다.[10]
명 조정은 공식적인 무역은 조공무역 외에는 하지 않았으나 [11]
민간무역, 비공식적인
무역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방관하는 상태였다. 가끔씩 해얀선을 비워버리는 폐쇄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특히 북로남왜의 화 시기에)
일시적인 일에 그첬다. 뭣보다도 그러면 세금이 안들어 오니까... 포르투칼이 마카오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것도 명 중기이며 포르투칼이
명 지방정부에 불만을 품고 마카오를 폐쇄하자 상인들이 들고 일어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라 한 적도 있다. 결국 1567년 제한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에서의 무역을 허가했으나 명나라 상인들은 그러한 제한을 무시하고 급속히 사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하지만 명 중기 이후 15세기부터 금, 은이 다시 화폐로 유통될 수 있었는데 일단 황폐해진 토지가 정리되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외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은의 수입이 증가했다. 민간에서 유통되는 은의 양이 늘어나면서 세금을 은으로 걷기 시작하였고 중앙에서 꾸준한 회수를 통해 주도적으로 화폐 경제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잠재 역량을 깨우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던 것이지 명나라의 경제가 침체되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세수를 통해서 비교해 보면 명대의 경제력이 송대를 따라잡지 못했고 강남 지역만을 확보했던 남송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치 상으로는 따라잡지 못했다'는 말에 불과하다. 송대에는 아직 화폐 경제가 완성되지 못해서 화폐상의 경제력과 실제 경제력에 거품이 끼어있었고, 도량형의 단위도 더 작았기 때문이다. 결국 송대에 경제가 융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 청을 능가했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비슷한 예로 북송의 동전 발행량이 명, 청대보다 많았다는 떡밥이 있는데 그건 단지 동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12]
마찬가지로
송대의 경제력이 전세계의 50%였다는 계산도 과장된 감이 있다는게 최근의 연구. 더 자세한 건 송항목을
참조하도록 하자.
명나라의 전 시기인 몽골 진출 초기와 원 제국 초기, 그리고 말기에 엄청난 난세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쇠퇴한 점도 고려해줘야 한다.
몽골 진출 극초기의 학살[13]
, 그리고 원나라의 가혹하고 무능한 통치와 극심한 인종 차별[14]
,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염병[15]
의 발병으로 인해 중국의 인구는 많게는 30 ~ 40%가 감소했으며, 특히 북중국 지역은 4천만을 바라보던 인구가 1천
5백만 이하로 감소해 버렸다. 경제에 관해서는 사실, 원 대 대부분엔 중상주의적 정책과 항저우와 대도(베이징)를 잇는 운하, 그리고 원의
국내 상업로와 국제무역선의 연결을 통한 수공업생산과 판매와 톈산 남,북로를 통한 내륙의 상업로등의 이유로 경제력이 강력했다.[16]
애초에 몽골제국이 해준 역할로서 언급되는 것이 '역전설치와 도로정비등을 통한 동서문물 교류 촉진'이 있다. 하지만 원은 말기에 유목민
지배층의 낭비와 엄청난 군사비로 인한 적자를 교초를 많이 발행해 해결하려고 해 지폐가치가 폭락하게 했었다.[17]
명 초기에 자급자족의
경제정책을 선택한 원인은 원이 교초를 무더기로 찍어내면서 화폐 경제 자체가 무너져 버린 탓도 있다.
중국에서도 자생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자본주의맹아론의 관점에서 명 후기의 경제적 발전 양상은 매우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하다.[18]
자본주의맹아론이 최근에는 좀 시든 분위기이기는 한데 사실 자본주의의 맹아라는 개념은 모택동의 내재적 발전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나친 푸시를 받았다는 지적이 있으며 학문적으로 보다는 정치적으로 활용된 감이 있다. 자본주의맹아론은 현재 힘을 잃고 뒤처진 이론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연구 과정에서 명나라의 경제력이 다시금 재평가될 수 있었다.
고대 중국부터 당나라 대까지 중국의 중심이었던 관중 지방의 생산력은 계속 감소하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조달받는 안습한 위치로 떨어졌다. 하지만 명나라 말기에 황제와 환관들의 부패로 관중 지방에 식량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게 되자 지역민들의 반발심은 커졌고, 결국 이자성의 난이 관중 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전 시대에 비해 양자강 중류 지역에 대한 개발이 많았는데, 이런 과정에서 현대의 호북성과 호남성에 해당하는 호광성[19]
은 엄청난
곡창지대로 발전해 湖廣熟 天下足(호광숙 천하족)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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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장수들을 묘사한 기록화
명나라 말기 정규군의 추태와 임진왜란 등의 이유로 한국에서는 명나라 군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못하다 이를테면
임진왜란 당시 파병왔던 명군은 벽제관 전투 이후 줄곧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남원성 전투같은 추태도 자주 보였다는 이야기라든가[20]
무엇보다 대민 약탈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명군은 약체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뒤이은 광해군 시기에는 사르후 전투에서 아군
지휘관들끼리 다툼을 벌이고 제대간 협력이 전혀 되지 않는 한심한 모습을 보이며 전멸했기에 이러한 인식은 더 널리 퍼졌다.
명 초기에 병력은 120만에 가까웠고 명 말기에 가면 군대의 숫자가 크게 증가해서 장부상의 총병력은 3백만에 달했지만 실제 유지되는 군사력은
훨씬 적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명 말기에는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였기 때문에 그런 규율을 갖춘 부대를 양성하기엔 부족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된 뒤에는 좋은 군인을 양성하는데 시간과 돈이 필요했지만 명 말기에 가면 이게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21]
이러한 문제점은
명나라 장수들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딱히 명쾌한 해결책이 없었다.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도 자기 부하들이 기강이 없어서 약탈이
심하다는 걸 인정할 정도였다.[22]
흑역사도 많아서 토목의 변 등의 굴욕사건도 있었고.
말기에는 이자성과 싸우는 동안에도 20만 대군이 이자성의 농민군을
두려워하여 싸우지도 않고 달아난다거나, 협공하기로 하고는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서 공격한 부대만 격파당한다거나 하는 추태를 여러번 선보이기도
했다.[23]
물론 전체적인 전력은 이자성 등의 농민군보다 월등했으며, 명나라가 농민군에게 멸망당하는 지경까지 간 배경에는 명의 정예군이
청군을 막아내느라 발이 묶여서 이자성군을 요격하지 못한 점이 크다. 청나라의 위협이 심화되어 명군이 북방에 집중해야 하기 전에는 이자성 등의
농민군은 명나라 관군의 진압으로 대부분 궤멸당한 상태였다. 이자성이 농민군의 중심이 된 것도 사실 관군의 진압으로 이자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사망했기 때문이며, 이 때 이자성군도 무너져서 이자성 역시 한동안 숨어지냈다. 1639년경이 되면 명나라 관군의 진압으로
대부분의 네임드가 박살나고 이자성도 18명만 데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문제는 명나라 말기로 가면 명나라 군대 중에서 병사들을 보건
장교들을 보건 실질적으로 군대의 기본을 갖춘 전력의 비율이 높지 않았다는데 있다. 이 때문에 청나라가 다시 북쪽에서 활개를 치게 되니까
명나라에서는 농민군 진압의 에이스 및 정예병들을 북쪽으로 전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24]
하지만 명나라 전 시기에 걸쳐 명나라의 군대는 동아시아에서 막강한 위용을 자랑했으며 특히 홍무제와 영락제 당시의 명군은 막강했다. 영락제 때는 50만 대군을 다섯 번이나 북방으로 보내고 7번에 걸쳐 중국 남부에서 인도와 중동, 아프리카까지 해군을 보낸 나라가 명이다. 명나라 말기의 경우에는 명군의 동원가능한 총병력은 자그마치 300만에 달했다. 한 연구자는 명나라 역사 전체에 치러진 전쟁의 횟수와 공격/방어를 통계낸 뒤 명나라는 당나라 이후에 보기 드물게 공세적인 전략을 취한 국가였다는 결론을 내기도 했다. 만력3정도 명나라 말기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두 난은 진압했고, 임진왜란도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 불만이 많았던 것이지 져서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무리한 원정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어 국가 경제력이 붕괴되는 원인이 되고 만다. 특히 지나치게 많은 병력은 군비지출을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게 만들어 재정을 압박했기에 국고를 파탄내고 말았다.
임진왜란 시기에 명군의 추태가 절정에 달했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25]
, 지휘관이 전투 의지를 갖고 독전할
경우에는 전과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사실 군사 기강이 문제였을 뿐이지 병력의 구성 자체는 일본에는 없는 기병[26]
을 대거 운용하고
절강병법으로 단련된 보병과 각종 화약무기를 갖추고 있어 왜군도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평양성 전투나 직산 전투 등이 명나라
군대가 거둔 대표적인 승전으로 꼽힌다.
또한 서구의 중국사가들 사이에서는 전근대 시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지어 청나라 보다도) 선진화된 군대를 운용했다는 평가도 있다. 영토가
크고 지역이 다양한 중국의 특성상 선진 무기가 전체 군대에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각 지역에서 상대하는 적군에 맞춰서 군대를 운용했다. 예를
들면 몽골을 상대해야 하는 북방에서는 기병 중심의 군대를, 왜구를 상대로 하는 남방에서는 수군과 보병중심의 군대를 운용하는 식이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조선과 일본의 기록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명나라 군대에서 다수의 대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대포야 일본이나
조선에도 있었지만 대형 대포를 군대의 주력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명나라 군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불랑기포나 홍이포 및 조총 등
외국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발달된 무기를 수입하고 이걸 상당히 잘 활용했다. (일반적으로 유목문명과 정주문명 사이의 군사력이 역전된 시기를
화약무기의 등장부터로 잡는데 이게 바로 명나라 시기였다. 그래서 몽골군대의 침입이 명나라를 괴롭힐 수는 있었어도 결국 명나라를 쓰러뜨리지
못했다.[27]
)
명나라는 서양 무기의 막강한 화력에 열광했고 홍이포를 처음 수입한지 불과 3년만에 홍이포의 완성된 복제품을 자체 생산하는 기염을 토한다. 특히 조총의 경우 적극적인 개량과 실험을 통하여 수많은 바리에이션이 존재했다. 5연발 총인 오뢰신기, 조사정이 개발한 후장식 화승총 및 총검 탈착식 화승총, 거치식 대구경 화승총, 포르투갈식 화승총, 오스만식 화승총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임진왜란 당시 활약하고 대량으로 사용된 명군의 주력 화기로는 휴대가 간편하고 1회 사격으로 조린탄 100여개를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경포(라고는 하지만 대형의 경우 최대 사거리가 무려 2km에 달한)인 호준포와 멸로포, 최대 사거리가 중형의 경우 1.7km, 대형의 경우 무려 3.4km에 달한 거포인 위원포 등이 있었다. 특히 호준포는 그 강력한 위력과 편리한 휴대성으로 조선군을 경탄시켜 임진왜란 시기에 곧바로 제식화기로 채택, 복제품이 생산되었다. 이외에도 독가스탄을 발사하는 비운벽력포나 독가스를 방사하는 독무신연포, 최대 5백여개에 달하는 산탄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백자연주포와 같은 특수한 화포 역시 사용되었다. 또 비록 화포처럼 주력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다종다양한 로켓 무기를 운용하였으며, 대표적으로 2단 로켓과 다탄두 로켓이 결합된 선구적인 병기인 화룡출수가 있다. 명나라가 개발하고 활용한 지뢰와 수뢰, 수류탄과 총류탄 역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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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중국과 한국이 가장 우호적이었던 시기가 명나라와 조선 시기였다. 조선 초기 양국간의 관계가 살짝 냉랭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기 동안 명나라와 조선은 친교를 유지했고,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하고 명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관계로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명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도왔으며, 조선 역시 명나라가 후금과 전쟁을 할 때 사르후전투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양국이 차례로 군대를 파견하여 서로를 도와주는 모습은 다른 시대의 모습과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으며, 조선은 소중화 사상에 입각해 청을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했고,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엄청난 모욕을 당한 뒤에도 형님 나라에 대한 복수를 하자며 북벌론 등이 일어났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내부 불안을 완화하고 군주권 혹은 군사 기관을 장악한 신하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 점을 제대로 깐 게 박지원의 허생전.
소중화 사상과 북벌론의 진짜 의미와 실효성을 따지더라도, 청에 대한 멸시는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례로 일반적으로 중국 왕조에 조공하러 가는 것을 조천(朝天)하러 간다고 했던 반면 청에 대해서는 연행(燕行)한다고 했는데, 청 내부에서 청이 다스리는 베이징을 연(燕) 어쩌구로 지칭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자연히 이렇게 청을 멸시하면서 명에 대한 평가는 올라갔는데, 대표적으로 연호도 조선은 근대적인 연호를 쓰기 전까지 숭정(崇正) 4갑자니 하는 식으로 연호를 썼다.
사실 전근대의 화(華) 관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대주의적인 것만은 아니긴 했다. 소중화 이론이라는 것도 '중국은 화(華)를 잃었지만, 조선은 화(華)를 보전하고 있으므로 소중화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었고, 북학론도 '청도 이제 화(華)를 받아들였으니 청에게서 배워볼 만하다'는 이론이었다. 청도 내부적으로 화(華)를 받아들였음을 주장했고, 일본이나 대월 등도 내부적으로는 소중화 사상을 이용했다. 말하자면 기본적으로는 중국 문화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보편 문화를 숭상하는 것에 가까웠던 셈. 하지만 그 실제는 뒤틀린 형태로 나타났고, 비판받을 만한 점을 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조선시대에는 명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많다. 이는 아마 조선보다 땅도 크고 사람도 많고 하니 쓸 이야기가 많고, 조선을 직접 그 안에서 그리면 꼬투리 잡힐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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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공세가 요동을 공격하자, 많은 요동의 명나라 백성들이 일단 안전한 조선으로 피신하였는데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수군 요새를 건설하고 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들은 '상국(上國)'의 백성과 군대라는 명분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으며, 심하게 횡포를 부려서 조정에서 청천강 이북을 포기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폐해가 극심했다. 이 요동 난민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나빠서, 모문룡이 죽고 가도를 토벌하게 되자 조선 군대는 가도의 명인들을 철저하게 살육 해버린다.[기사](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B4s_Rn33p0IJ:ww w.inhakoreanology.kr/science/kor_study_dn.php%3Fsq%3D36%26att_sq%3D301+&cd=10& hl=ko&ct=clnk&gl=jp)
명나라가 멸망하자 많은 수의 유민이 또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시기 수군 도독으로 참전하였던 진린의 후손이다. 명조 무신들은 임란 이후에 청나라와의 전투에 나섯던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때문에 명이 멸망하게 되자 청 치하에서는 좋은 꼴을 보기 어려웠던 것. 조선에서도 과거의 '의리' 때문에 이들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고 많은 망명자가 발생한다. 청나라에서는 명조 유민의 쇄환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을 남부 섬지방으로 피신시켜서 보호하기도 하였다.
인조 대부터 시작된 망명은 현종조에 절정을 이루어 수십명 단위의 유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했고 후일 효종으로 즉위하는 봉림대군은 요동에서 명나라 출신 인물들과 친해졌는데 왕이문(王以文: 일명 王鳳 岡)・양복길(楊福吉)・풍삼사(馮三仕)・왕미승(王美承)・배삼생(裵三生)・왕문 상(王文祥)・정선갑(鄭先甲)・황공(黃功) 등의 8인이 반청복명을 위하여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훈련도감에 속한 명나라 출신 아병만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명나라 궁녀들을 데려오기도 했는데 이들은 매우 장수하여 숙종시기까지 살았다.
조선에 건너온 명나라 사람들을 향화인이라고 불렀다.(우대해줄 때는 '황조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이 세금도 안내고 자기네들끼리
뭉쳐 살면서 따로 놀았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들의 숫자는 과거 조선을 위협했던 모문룡 세력과는 비교 불능이었고 모문룡 세력처럼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뒤를 봐주는 명나라도 없었다. 명목상으로는 세금을 내지 않지만, 실제로는 왕실에서 강제로 부역을 할당했기 때문에
차라리 세금 내는게 더 나을 정도의 착취당했다.나라없는 백성의 설움 부분적으로 우대를 받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멸시를
당했다. 결국 이들은 조선 사회의 압력 속에서 빠르게 조선 사회 속으로 동화되었다.
조선은 명의 복식을 받아들였으며, 명나라가 청나라에 침공당하여 멸망한 뒤에도 많은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 때문에 명나라 문화가 조선에서 보존되는 효과가 일어났는데,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는 한족의 복식은 만주족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족이 겪은 문화적 상실감을 조선에서 보충받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같은 일화가 있다.
(전략) 그래서 고(故) 상신(相臣) 박규수(朴珪壽)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와룡관(臥龍冠)을
쓴 채 조사(朝士)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손으로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선왕의 법복이다.’ 하고는 그 옷을 벗기를 청하여 그 집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조선만이 주공이 제정한 예를 보존한 나머지 의관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라고 하였는데, 그 후 사명을 받들고 들어간 자가 있으면 매번 그랬다고 합니다.
작년 봄에 중국 사람이 동학(東學)에 들어가 우리의 의관을 어루만지며 울먹이기를, ‘200년 전 사람들과 같으며, 역시 명나라의
유민(遺民)이다.’ 하였으니, 옛것에 감동하고 우리의 의리를 사모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아, 명나라의 남은 빛이 유독 우리 청구(靑邱) 한쪽
구석에 비치고 있으니, 한 가닥 유제(遺制)의 의관이 예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 자신에 이르러서 변경한다면 참으로 성인의
제도를 지키고 명나라에 보답하는 의리가 아니며, (하략)
- 고종 21년남원부 유생 이흥우(李興宇)의 상소문[28]
조선 외에도 베트남같은 동남아시아에도 유민들이 피신하였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 당시 인구가 희박했던 메콩강 하구 등의 남부 지방의 개척
이라고 쓰고 크메르와
참파에 대한 침략으로 읽는다. 에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이들도 베트남의
남북조시대에는 대충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응우옌 왕조가 들어서 통일된 이후 강력한 동화 정책으로 결국 그들의 풍속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로 간 명나라 유민들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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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묘호
연호
이름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능호
1대
홍무(洪武, 1368.1.23~1399.2.5)
주원장(朱元璋)
1368.1.23
1398.6.24
30년 152일
효릉(孝陵)
2대
건문(建文, 1399.2.6~1402.7.29)
주윤문(朱允炆)
1398.6.30
1402.7.13
4년 13일
-
3대
영락(永樂, 1403.1.23~1424.1.19)
주체(朱棣)
1402.7.17
1424.8.12
22년 26일
장릉(長陵)
4대
홍희(洪熙, 1425.1.20~1426.2.7)
주고치(朱高熾)
1424.9.7
1425.5.29
264일
헌릉(獻陵)
5대
선덕(宣德, 1426.2.8~1436.1.17)
주첨기(朱瞻基)
1425.6.27
1435.1.31
9년 218일
경릉(景陵)
6대
정통(正統, 1436.1.18~1450.1.13)
주기진(朱祁鎭)
1435.2.7
1449.9.1
14년 206일
유릉(裕陵)
7대
경태(景泰, 1450.1.14~1457.2.14)
주기옥(朱祁鈺)
1449.9.22
1457.2.11
7년 142일
경태릉(景泰陵)
복위
천순(天順, 1457.2.15~1465.1.26)
주기진(朱祁鎭)
1457.2.11
1464.2.23
7년 12일
유릉(裕陵)
8대
성화(成化, 1465.1.27~1488.2.13)
주견심(朱見深)
1464.2.28
1487.9.9
23년 193일
무릉(茂陵)
9대
홍치(弘治, 1488.1.14~1506.1.23)
주우당(朱祐樘)
1487.9.22
1505.6.8
17년 259일
태릉(泰陵)
10대
정덕(正德, 1506.1.24~1522.1.27)
주후조(朱厚照)
1505.6.19
1521.4.20
15년 305일
강릉(康陵)
11대
가정(嘉靖, 1522.1.28~1567.2.8)
주후총(朱厚熜)
1521.5.27
1567.1.23
45년 241일대
영릉(永陵)
12대
융경(隆慶, 1567.2.9~1573.2.1)
주재후(朱載垕)
1567.2.4
1572.7.5
5년 152일
소릉(昭陵)
13대
만력(萬曆, 1573.2.2~1620.8.27)
주익균(朱翊鈞)
1572.7.19
1620.8.18
48년 30일
정릉(定陵)
14대
태창(泰昌, 1620.8.28~1621.1.21)
주상락(朱常洛)
1620.8.28
1620.9.26
29일
경릉(慶陵)
15대
천계(天啓, 1621.1.22~1628.2.4)
주유교(朱由校)
1620.10.1
1627.9.30
6년 364일
덕릉(德陵)
16대
숭정(崇禎, 1628.2.5~1644.4.25)
주유검(朱由檢)
1627.10.2
1644.4.25
16년 206일
사릉(思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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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시호
이름
능호
비고
덕조(德祖)
현황제(玄皇帝)
주백륙(朱百六)
조릉(祖陵)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의조(懿祖)
유황제(裕皇帝)
주사구(朱四九)
조릉(祖陵)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희조(熙祖)
항황제(恒皇帝)
주초일(朱初一)
조릉(祖陵)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인조(仁祖)
순황제(淳皇帝)
주세진(朱世珍)
황릉(皇陵)
태조 추숭, 태조의 부
흥종(興宗)
화천경도헌의근민돈문도무명인자효강황제
(和天敬道憲懿勤敏淳文度武仁慈孝康皇帝)
주표(朱標)
동릉(東陵)
혜종 추숭, 혜종의 부, 태조의 장남
예종(睿宗)
지천수도홍덕연인관목순성공간경문헌황제
(知天守道洪德淵仁寬穆純聖恭簡敬文獻皇帝)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
현릉(顯陵)
세종 추숭, 세종의 생부, 헌종의 4남
\----
[1]
단, 만주의 경우 대부분의 기간동안 랴오둥 반도 일대만을 직접 지배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이를 중심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다.[2]
물론 조선이나 대월 등이 이유 없이 수그린 것만은 아니다. 두 나라 같은 경우에는 중국과의 조공으로 얻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안정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 놈의 재조지은 드립 때문에 관계가 일방향적으로 변해버린다. 한편 최근에는 '조공 무역'에 주목한 시각이 부각되고 있으나 사신 접대비의 폐해나 조선 초 공녀 문제 등 조공 무역이 수틀릴 경우 그 폐해가 심각했기 때문에 경제적 의미는 주의해서 바라보아야 할 문제다. 반면 일본 같은 경우에는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덴노 권한의 침식을 시도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기 위해 대놓고 자신을 일본의 왕이자 명나라의 신하로 자처한 정치적 의미도 있지만, 감합 무역으로 얻은 이익이 상당히 컸다.[3]
무로마치 막부의 조공무역은 감합무역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무로마치 막부는 1404년 영락제에 의해 일본국왕으로 책봉이 되었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충분히 중앙집권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1410년 이후에는 막부 이외에도 다른 유력 다이묘들도 감합무역에 끼어들었고 1467년 오닌의 난 이후 전국시대가 시작되자 일본의 조공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합무역은 1547년까지 약 150년간 유지되었다.[4]
근대 서양의 충격이 있은 뒤 중국이 유럽보다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언제였냐는 질문에서 나왔다. 기존의 입장은 명나라 시기에 서양에 역전되었다는 관점이었으나 최근 이것을 부정하는 연구가 속속 등장하면서 설득력를 잃어 가고 있다.[5]
원래의 목적이 세수입을 확보하는 호구 통제 제도였다. 전근대시기에 호구조사 하는 이유가 뭘지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6]
조선만 하더라도 파악 호구수가 실제 인구의 최소 40%가 넘는 격차가 있을 것으로 본다. 국가가 교회를 털어서 세례자 명단만 확보하면 매우 정밀도 높은 인구조사가 완료되던(실제로 스웨덴, 프랑스 등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다. 거긴 태어나면 기본적으로 유아세례를 받고 죽으면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며 그 명단이 교회에 올라가니까. 세금을 내야 하지만 종교 문제가 걸려 있으니 농부들은 세금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7]
이 때 보급로는 재조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8]
황제가 정화의 원정기를 읽어보려고 하자 신하들이 임의로 불태워버리고는 없어졌다고 거짓 보고를 올릴 정도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정화가 정확히 어디까지 갔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항해를 재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영락제는 황위를 탈취한 자신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정치적 이유라도 있었지 후대 황제에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극구 반대했던 것이다.[9]
해금령은 화둥 지방의 푸젠 성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푸젠 성은 바다에 면해 있으면서도 산악 지역인 데다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성의 경제는 어업, 해운업 등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해금령으로 인해 푸젠 성의 산업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푸젠 성 주민들은 밀무역에 종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기 왜구에 가담하기까지도 했으며 가왜(假倭)로 왜구인 척하면서 중국 해안을 노략질하곤 했다.[10]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 아카풀코→필리핀→명으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를 통해 유입된 은은 아메리카 전체 은 산출량의 절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1]
전근대에서 공식무역은 조공무역밖에 없다[12]
명은 심각한 구리 인플레이션을 겪던 국가였다. 이건 청대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건 조선을 통해 혹은 직접적으로 일본을 통해 교역을 트고 윈난 지방의 개토귀류를 통해 동광을 확보하면서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일본이 교호 개혁으로 동 수출을 금지했을 때 동전 값이 등귀하고 동전에 아연을 더 섞어서 동전이 물러졌다고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면도 있었다.[13]
이 학살은 오고타이 칸 시절에 끝난다. 북중국을 다 정복했기도 했고 쿠빌라이가 북중국 통치를 잘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통치를 잘 해서 얻은 세력으로 아릭부카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남송의 경우도 쿠빌라이 칸이 친중적이어서 전과같은 학살은 없었다. 그래서 학살로 인한 인구감소는 생각보다 적었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14]
위에서 말했다시피 북중국의 경우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시기 이후로는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등 이 원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쿠빌라이 칸 항목 참조), 그 후에도 중국 전체로 보더라도 이 원인으론 인구감소가 일어나지 않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령, 원나라의 인구는 대부분이 한족(몽골과 색목인 층의 수는 약2~300만인데 비해 한족의 수는 일단 한인의 수는 약1,000만, 남인의 수는 약6,000만, 합쳐서 약 7,000만 정도. 한인이 아무리 발해인, 거란, 여진 등을 포함한다 쳐도 원나라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이었다.)인데도 계속 늘고 있었다. 1290년에 약77,000,000, 1293년에 약79,816,000, 1330년에 약83,873,000, 1350년에 약87,147,000, 명나라의 인구는 1393년에 약65,000,000. 영문위키참조.[15]
흑사병으로 죽은 인구수는 중국이 유럽보다 더 많았다. 약 3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흑사병항목 참조[16]
두산백과 '원의 사회경제' 참고[17]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참고[18]
중국 학자들이쪽학계 말은 믿기 힘든데...가운데 이미 송대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명대나 청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19]
삼국지에서의 형주 지방[20]
이건 북병(요동마병) 기준. 왜구를 주적으로 훈련된 남병(절강보병)은 그나마 적극적인 편이었다. 다만 북병이 소극적이였던건, 이들의 주력은 기병인데 조선측의 보급 미스로 군마의 반절인 1만 2천필이 죽어나가며 전력이 반토막난 탓이 크다. 또한 명 본국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이전에 조선군에게 받은 정보가 잘못된 거라 일본군 깔보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고, 군량 공급도 부실했다. 소극적으로 움직일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21]
왜 모병제로 했냐면 징병제로 했을때 병사에 대한 처우가 너무나 형편없고 열악하다보니 병사들의 탈영이랑 병역기피가 심했다. 모병제로도 병력 부족이 심각해서 근왕군을 모집하거나 용병을 고용해서 싸워야 할 정도였다.[22]
그런데 사실 현대 이전에는 이런 일들이 많았다. 당장 명뿐만 아니라 고려의 여몽전쟁 시기나 조선만 봐도 관군이 의병 혹은 백성들을 학살한 전적이 있으니.[23]
흔히들 명나라가 단순히 만주에서 일어난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멸망당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명을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것은 이자성과 장헌충으로 대표되는 농민 반란군이다.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도 팔기군은 고작 18만 명에 불과하지만, 국내의 유적(떠돌이 도적)들은 그 수가 60만이 넘으니 이들이야말로 진짜 명나라의 화근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다.[24]
그 뒤에 에이스와 정예병이 빠진 진압군은 위에서 언급한 추태를 벌이며 이자성에게 속속 궤멸당했다. 게다가 탈영한 군인들이 이자성군에게 가담하면서 반란군의 전력이 강화되고 만다.[25]
이런 잘못된 인식이 세간에 널리 펴져 있는 원인에는 상기된 민간에 대한 명군의 심각한 수탈 문제도 있지만 후대에 들어서 국내에서 이루어진 중국에 대한 전반적 저평가의 영향이 더 크다.[26]
물론 명나라 역시 다른 왕조들처럼 군마 부족이 정말 심각해서 한인들로서는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기에 한인 기병들조차 몽골 기병의 풍속을 모방해서 장교들조차 한인 기병과 몽골 기병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27]
물론 결국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에게 패배하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청의 운빨(사르후 전투만 봐도 자연이 알아서 명군을 조져준다.) + 연이은 삽질과 병크가 누적되어 튀어나온 결과물일 뿐이지 결코 당대 명군이 만주 팔기나 농민 반란군보다 약체였기 때문이 아니다.[28]
읽어 보면 알겠지만, 개화기에 이르러 복제를 바꾸려 하자 '왜 중국 사람들도 좋다고 하는 걸 굳이 바꿔여징징' 이런 내용이다. 전통과의 단절을 안타까워했던 당시 대다수 유생들의 반응이 느껴지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