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 Vietnam War
베트남어 : Chiến tranh Việt Nam

[JPG image (27.98 KB)]
사진은 1972년 베트남 전쟁 때 촬영된 소녀의절규. 네이팜탄 공습 때문에 소녀가
불이 옮겨 붙은 옷을 모두 벗고 울부짖으며 달리고 있다.[1]
- 개요
1.1. 배경
1.1.1. 프랑스 식민기와 2차 대전
1.1.2. 2차 대전 이후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2.1. 1950~60년대
2.1.1. 남베트남의 대혼란
2.1.2. 북베트남의 적화 정책
-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
3.1.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개전
3.2. 연합군 결성과 미국의 참전
3.2.1. 월남전 한국군 파병
3.3. 전개
3.3.1. 게릴라전과 호치민 루트
3.3.2. 북베트남 공격 금지
3.3.3. 미국의 막장 상황
3.3.4. 낭비
3.4. 구정 공세와 수렁
3.5. 케산 전투
3.5.1. 전개
3.5.2. 케산 전투와 구정공세를 포괄한 배경 및 영향
3.6. 전쟁의 종결과 남베트남의 멸망
3.6.1. 미국 정치 정세의 변화
3.6.2. 끝없는 전쟁과 미국의 철수
3.6.3. 홀로 남은 남베트남의 막장
3.6.4. 남베트남의 정권교체와 베트남의 통일
3.7. 전후
3.7.1. 미국에 끼친 영향
3.7.2. 고엽제 문제
3.7.3. 한장의 사진
3.7.4. 베트남전의 전쟁범죄/민간인 학살
3.7.5. 전후 베트남의 사정
-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 기타
5.1. 베트남 전쟁의 교훈?
5.2. 전쟁 중 사용한 장비 목록
5.3. 베트남 전쟁을 다룬 창작물
5.3.1. 소설
5.3.2. 드라마
5.3.3. 영화
5.3.4. 뮤지컬
5.3.5. 만화
5.3.6. 게임
5.3.7. 노래
- 관련 항목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
1956년~1975년까지(미군 철수 시점까지만 치면 1973년)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
베트콩(Vietnamese Communists, V.C.)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 산하의 무장단체를 이르는 말인데, 이들은 북베트남 정부와는 다른 조직으로서 기존 남베트남의 친미 정권을 무너트리고 공산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에 통일시키는것이 목표였다. 참고로,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운 베트민(Viet minh)과는 엄연히 다른 조직이다.
베트남전의 배경은 길게는 19세기부터, 짧게는 2차대전 이후인 1950년대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들은 사실 상당히 긴 시기동안 발생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이 남베트남에 첫 원조를 시작하고부터 베트남전이 발발하기 전까진 거의 10여년 가까운 시기가 있었다.
참고로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우리가 미국 쳐들어가서 전쟁 일으켰냐면서 아메리카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베트남 가서 사귄 친구들이나 관광가이드들이 왜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느냐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보인 경우가 꽤 있다. 어느 이는 미국인들도 여럿 있던 관광단에서 베트남인끼리 싸우는 전쟁에 통킹만 조작으로 멋대로 들어와 전쟁에 끼어든 미국은 뭐냐고 비웃듯이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걸 보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미국인 관광객들은 입다물고 이런 비난을 애써 모른 척 했다고. 그러나 걸프전(Gulf War)이나 이라크전쟁(Iraq War), 남오세티야 전쟁( South Ossetia War), 그리고 우리나라 6.25 전쟁을 영어로 한국전쟁(Korea War)이라고 부르듯이 지명에서 명칭을 따오는 용법도 흔하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게 틀린 건 아니다.
본 페이지명인 베트남 전쟁은 공식적으로 볼 때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며, 1차는 프랑스, 2차는 미국과 연합국, 3차는 중국과의 전쟁이다. 이 문서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배경에서, 2차인 베트남 전쟁을 본문에서 서술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얻을 것도 명분도 없는 전쟁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 해서 The Quagmire라는 약칭으로 부른다[2]
.
'출구 전략(Exit Strategy)'도 베트남 전쟁에서 나온 말이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도, 지속하기도 애매해진 미국이 굴욕적이지 않으면서도 별 피해 없이 전쟁을 끝내고 빠져 나오기 위해 찾던 전략을 출구 전략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용어가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2)]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3)]
19세기 이래로 베트남 지역은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인도차이나'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식민지 지역 통치와 지배는 현지인들에게는 혹독하기만 하고 주는 것은 거의 없이 착취만 하는 식이라 불만이 상당했는데, 프랑스는 독립운동 세력들을 역시 군대를 앞세워 혹독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반감이 더욱 쌓여만 갔다.(자세한 내용은 베트남/역사 항목 참조.)
1930년에 있었던 민족주의 세력의 무장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공산주의 세력으로 기울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프랑스 본토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배우고 온 호치민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프랑스 본토가 독일군에게 나가리되자 총독부는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도리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인도차이나의 운명은 일본군과 비시정부가 손을 잡는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된다.
막장 둘이 만나 막장 오브 막장이 되자 공산세력은 민족주의자들과도 손을 잡고 통일전선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일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는 베트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 즉 **월맹(베트민)**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군한테 지원을 받아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 일본은 패전이 가까워지자 응우옌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합친 괴뢰국인 베트남 제국(1945년 3월11일 ~ 1945년 8월23일)을 성립, 비시 정부와 자유프랑스 모두의 뒤통수를 치며 독립을 지지하는 척하는 쇼를 벌였으나 이는 베트남인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결국 일본의 패배와 함께 베트남 제국도 무너지며 베트남은 무주공산이 된다.
이후 호찌민은 미군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자신들의 독립을 미국 정부가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미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베트민에게 군사적 지원만 한 것이었고[3]
,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은 유럽에서의 공산권 국가와의 대치상황으로
유럽의 세력구도를 재편성해야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프랑스가 필요했었고 프랑스가 다시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였다.
드골은 식민지 회복을 위해 비시 정부 협력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며 독려했고 프랑스의 깃발
아래 돌아온 것은 바로 과거의 압제자들이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4)]
일본군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항복을 하자 이 지역에는 영국군과 중화민국의 군대가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는데,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각각 남쪽과 북쪽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북쪽의 경우 중화민국군은 곧 자국 영토 내의 공산세력과 싸우러 가버려 사실상 공백지역이 돼버리는 바람에 무장해제된 일본군 장비를 넘겨받은 베트민이 북쪽을 장악하여 호찌민을 국가주석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w iki/%EB%B2%A0%ED%8A%B8%EB%82%A8%20%EB%AF%BC%EC%A3%BC%20%EA%B3%B5%ED%99%94%EA%B 5%AD)(월맹)을 세운다.
베트민은 전쟁 시작과 함께 공산주의 세력이 독립운동 중에 협력했던 민족주의자, 불교도 세력을 분열주의자로 몰아세우며 공직에서 추방하는 등 숙청작업을 단행한다. 그리하여 베트남노동당의 일당독재체재를 확립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남부의 영국군은 이 지역에 선거를 통한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자주 했지만 프랑스 영토였던지라, 결국 프랑스에 돌려줘버리고 돌아가버린다. 사실 영국은 인도와 버마의 독립 요구에 시달리고 있어 훈수 둘 처지도 못 되었으며 병력 부족으로 비시 잔당들과 일본군 포로 일부까지 치안 유지에 동원한 탓에 깽판치던 국민당군보다 더 미움을 받았다.
이런 영국군의 정책은 프랑스가 다시 한 번 베트남을 식민지 영향 아래에 둘 수 있다는 착각을 주었는데, 영국은 증가하는 민족주의가 주변의 인도나 버마의 영국 영향력을 줄일수 있다 판단, 베트민과 협상을 하지않고 계엄령을 선포하는등,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책을 썼다. 이로 인해 영향력 있던 베트민과 협상 한번 하지않고 들어간 프랑스는 베트남이 순순히 식민지가 될 것이라 착각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5)]

[JPG image (37.31 KB)]
프랑스는 최초에 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해주는 듯 하였으나, 이내 약속을 깨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 항구에 대한 프랑스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최소한 6,000명의 베트남 시민이 사망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사실상의 베트남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참고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1950년에야 소련으로부터 정부로서 인정을 받아 이 시점에서도 공식문서에는 베트민으로 취급된다.
최초 베트민은 프랑스와 협상을 하려 했고 예비 협정까지 성사되었으나 "프랑스 주권을 재확립하라."는 샤를 드골의 명령을 받고 있던 프랑스군은 협정을 깨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프랑스군의 함포 사격으로 하이퐁 시에서 6,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자, 호찌민은 무장 투쟁을 선언하고 프랑스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다. 1946년 12월 19일,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다.
개전 직후, 흔히 뒷이름을 따서 "잡" 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령관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 武元甲, 무원갑)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패퇴하여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이후 4년 동안 베트민은 소극적 게릴라 공세를 계속하며 그 사이 정치 운동을 통해 북부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
반대로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에서도 독립 압력이 가중되면서 전력이 분산되기 시작했고 "전후 재건에도 사람이 부족한데 애먼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몰거냐"는 여론의 악화, 미국, 영국등의 외교적 압력으로 서서히 베트남에서의 우위를 잃어간다.
1951년, 베트민은 공세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하노이 해방을 목표로 전면 공세를 시작한다. 프랑스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베트민은 하노이 입성에 실패하고 도리어 후퇴하게 되나 이미 전세는 베트민 측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프랑스는 20만명의 월남군이 거의 쓸모가 없어 18만의 프랑스군만으로 전쟁을 해야 했다. 반면 초반에는 어리버리하기까지 했던 베트민군은 전투를 통해 순식간에 정예로 탈바꿈하였다. 거기다 프랑스군은 여기저기서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미국의 전비 지원 삭감에 따른 재정부담이 가중되자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8만의 병력을 철수시키는 지경에 이르른다.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패배하게 되고 위신을 있는대로 깎아먹은 채로 철수하게 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6)]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7)]
그리고 이 정부를 공격해 들어가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게 이번엔 미국이 끼어들었다. 미국은 어찌됐든 이 지역의 복잡한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하고 있었고[4]
, 남베트남을 보호하는데 적극 나서게
된다(그리고 이 예견은 도리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으로서 이 정책을 주장했던 사람 중 한 명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나중에 아무래도 그때 우리가 좀 미친 것 같았죠.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우리가 지레 겁을 먹은 겁니다라고 회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미국은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5]
.
덧붙여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호찌민이 프랑스와 중국을 경계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6]
. 호찌민은 일찍이 해리 S.트루먼 대통령에게 8차례나
서한을 보내 독립을 지지해주길 호소했으나 <불간섭> 소리만 들으며 묵살당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권도
마찬가지로 호찌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약속을 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부터 군사
훈련, 무장 등 일련의 원조가 시작된다.
황제가 경찰권을 폭력단에게 공식적으로 팔아넘겼다고 할 정도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정권이었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정부에 저항하는 폭력단과 군벌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고 80만에 달하는 피난민의 재정착을 완수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된다(농업 국가 주제에 비료수입에 200만 달러를 쓰면서 양담배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막장을 달렸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누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말그대로 **"신악(新惡)이 구악(舊惡) 뺨친다"**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막장성으로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도로 악화되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는 공산당의 세력화를 불러온다. 1960년 12월에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 와중에 남베트남에서는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 반부패 운동 조직은 공산당 및 좌파들이 대거 침투하여, 시작부터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서의 색깔이 농후했다는 것이
문제였다.[7]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일부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 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아무나 이겨라(...) 상황이
되었다.
물론 반대편에서도 똑같은 테러와 암살이 행해졌다.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에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관변단체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병림픽양상을 띄게 된다. 이쯤 되니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라 좀 조용하게 해달라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사이공의 대학생들도 초기에는 평화주의적 노선을 견지하다가 점점 나라가 막장으로 흐르자 그냥 나라를 버린다. 워낙 나라가 개판이었기 때문에...사실상 남베트남 내부의 부패가 숙주가 되어 좌파의 확산을 불렀고, 여기에 이념적 유혈갈등으로 병림픽이 벌어진 셈이다.
온 나라가 불교도,
가톨릭교도,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극좌/극우파 등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끊임없는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불교도들의 반정부 시위가 극심했는데[8]
, 지엠 정권의 공공연한 탄압으로 불교는 남베트남 정권
존립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불교도 시위를 경찰로는 감당못해 군대까지 동원하는
지경에 이르는데도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탓이라는 헛소리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유명한 승려인 틱광둑의
소신공양 사건이 일어났다[9]
. 결국에는 군부가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거론하는 상황까지 이르른다. 여기에 한술 더떠 대통령
영부인 역할을 하던 지엠의 제수(응오딘 누의 아내) "마담 누" 쩐레수언이
세기에 남을 대 병크를 터뜨리니, 분신자살을 두고 "중놈들이 한게 뭐 있나요? 기껏해야 자기네 하나를
바베큐로 만든게 고작이죠."라고 지껄이더니 "Let them burn
and we shall clap our hands(불타게 놔두고 박수나 칩시다)"라는 망언[10]
을 하여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다.
한국말로는 **"중놈 몇 명 죽어서 뭐 어떻다고요."**로 받아들여도 되는 발언. 이건 뭐 통구이 드립을 영부인급 인물이 공중파로 전세계에
떠들어댄거니... 불교를 국교로 삼다시피하던 베트남 사람들은 당연히도 이 말을 듣자 분기탱천하게 된다.
분신공양 사건 1달 후인 1963년 11월, 미국의 방관 하에 쿠데타가 발발, 지엠은 동생과 함께 가톨릭 성당으로 숨으려다 체포, 사살당한다. 쿠데타 세력 내에서도 지엠의 처리에 관해서는 의견이 대립했지만 해외 추방으로 의견을 모아 지시를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사살당한 뒤였다. 이에 어쩔줄 몰라하던 군부는 미국에 지엠이 자살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쩐레수언은 겨우 달아나서 프랑스로 망명했고 48년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병사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녀는 조국에서 죽게해달라고 베트남 정부에 간청했지만 베트남 정부는 싸늘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이것은 혼란의 1막에 불과했다. 지연, 학연, 종교와 미국과의 연줄로 분열되거나 또는 난마처럼 얽힌 남베트남 군부는 갑자기 손에 떨어진 권력에 어쩔줄 몰라 했으며 지엠정권 추종자를 모조리 축출한 정치공백에 권력의 맛을 본 군인들의 야욕에 의해 쿠데타가 두 자리수나 터지는 막장 사태의 수렁에 빠진다. 북베트남군에 항복하는 하루 전날까지 쿠데타가 일어날 지경이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일부 종교인들은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북베트남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와중에 응웬 까오 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한국의 해방정국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단 지도부 자체가 국가 정통성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버렸고, 쿠데타와 부패가 횡행하고, 우익좌익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대놓고 반정부(국가를 비판하는 것도 아닌 아예 부정하는) 시위들이 벌어지는데 정부는 손놓고 있고, 간첩과 게릴라(빨치산)들이 영토 내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이걸 한국의 정치상황에 빗대 비판하는 자체가 한국에 대한 모독일 지경.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8)]
한편, 북베트남은 달랐다.
호찌민은 베트남 공화국 성립 직후 군사회의에서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우리는 베트남을 통일한다"라고 결정한다. 이미 남북으로 갈라지기 이전부터 각지에 추종세력과 무기를 은닉해두었고 COSVN(남베트남 해방사령부)를 조직하여 후일 호찌민의 후계자가 되는 레 두안이 그 수장이 된다.
휴전선 형성 이후 북베트남에서는 인민재판을 빙자한 대규모 숙청이 단행, 반대자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리고 사실상의 전시체제 선언인 1953년 농업 강령을 선포한다. 이 과정에서 집단농장화를 무리하게 추진,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 1956년 말 호찌민의 고향이기도 한 게안성(省)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성을 거의 장악했다.)가 휴전선에서 동원된 정규군 사단에게 무너지며 일단락된다.
결국 이 2차 토지개혁 기간중 학살 된 농민수는 10만여명으로 추정되며[11]
이 때문에 소련, 중국같은 공산주의 대국들은 호찌민의
리더쉽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으나 다행인지 풍년이 계속되었고 경제원조도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체제와 경제 모두 안정권에 들어간다. 다만,
공산주의적 농업 방식은 이러한 막장 결과를 안겨준다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지엠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명의 군세로 확대된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군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안되어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명의 정부군이 200여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데꿀멍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9)]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0)]

[JPG image (40.83 KB)]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 와중에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은 이 사건에 없던 사실을 끼워넣고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전쟁을 시작한다. 미 해군 구축함이 공격받은건 사실이나, 날조된 사건이
덧붙여져 크게 부풀려졌다. 더구나 이 과정도 웃기지도 않았는데, 이 사건을 들은 린든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즉시 북폭을 지시했다. 즉
북베트남을 직접 공격하라는 것. 이 때가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의회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는커녕 통고도 없이 벌인 행동이었다. 한순간에 직접 전쟁의 늪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12]
.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 1964년 8월 5일. 미 해군 항공모함 항공대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의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북베트남군은 대공망을 강화하는 것으로 맞섰고, 조종기술이 빈약했던 미공군은 이
단계에서 이미 2기가 격추되면서 험난한 미래를 예고하게 된다. 그리고 북폭 실시 2일후에 미의회에서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된다.
선조치 후보고?. 이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해 11월 1일에는 미군 기지가 베트콩에게 기습을 받아 B-57등 항공기 27대가 파괴되었다. 당연히 다시 미국의 보복이 있었는데, 바로 배럴 롤 작전. 목표는 라오스에 존재했던 호치민 루트 타격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라오스 정부군을 돕는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다만 직접적으로 라오스 국경을 넘어서 폭격을 하는 것은 협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간에 조명탄에 의존해서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공격했다. 물론 당연히 다시 보복이 있어서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미군 장교 막사가 폭파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듬해인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미군의 푸레이쿠 기지를 습격한다. 8명 전사, 헬기 7대
파괴. 순서대로 때리는 것이 틀어지자 분노한 존슨은 같은 날 30대의 전투기(A-1, F-100)을 동원해서 월맹군
병영을 공습한다. 플레이밍 다트 작전 1. 2월 10일 베트콩은 쿼논의 미군 기지를 습격해서 23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다시 미군은 11일과
19일 공습으로 보복을...(플레이밍 다트 작전 2) 그리고 3월 2일 마침내 대규모 북폭인 롤링썬더작전이 시작된다.
원래는 2월 20일에 월남 공군과 합동으로 작전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월남 내부의 정치적 소요로 4차례로 작전이 연기되는 막장 상황이
이어져서 작전의 시작이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때까진 대규모 지상전투 수준으론 확산되지 않았으나, 결정적으로 1965년 3월 30일에 사이공의 미 대사관 폭파로 2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다.
결국 미국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베트남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1)]
1965년부터 베트남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미군의 대규모 증강이 이루어지며, 호주, 뉴질랜드, 한국이 전투병을 파병하고 다른 국가들은 비전투병 등을 파병하였다.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도 무기원조나 유격대 등으로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남베트남 베트콩(with 북베트남, 소련, 중국을 비롯한 비공식 몇몇 국가 북한도 포함이다)
VS
미군 + 남베트남(with 한국, 호주, 태국, 뉴질랜드, 기타 등등의 연합군)
의 대결이었다. 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아닌 남베트남 해방전선(N.L.F)과 기타 저항세력들이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는 지역으로 베트콩에 의한 기습+북베트남 정규군의 공격이 벌어지는 양상이 베트남전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거의 내전 양상을 보였다고 보면 된다.(무기야 북베트남이 제공했겠지만) 물론 이런 행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백한 북-남 베트남간 휴전협정 위반.** 하지만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남베트남 측이 제네바 회담에서 약조한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의 이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전쟁 발생전까지 지도부는 전쟁 발생 가능성을 "설마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는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응오딘 디엠의 다음 정권이나 역시
독재정권인 티우 대통령은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북베트남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하는 등, 유비무환을 잊었다. 뭔가 점심은 평양 저녁은신의주가 생각나지 말입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북베트남도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적을 얕보고 우습게 보는 나라는 결국 망하게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2)]
미국의 동맹국으로써, 한국도 전투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 참조바람.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3)]
196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 공군의 1966년 6월 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된다. 7월 17일에 북베트남은 전 국민과 군대에 비상동원령을 선포하였고 중국은 각종 전쟁물자와 무기, 후방 기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물론 1966년 1월에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기에 비공식적으로는 지원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 때부터 진짜로 엄청난 물자와 장비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8월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이 30여만명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으나, 미국은 10월에 발표한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 공동성명발표를 통해 전쟁의 조기 종결을 계획하고 있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4)]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아무 무리없이 상황이 종료되리라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갔다. 펜타곤은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트콩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싸우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다. 태평양전쟁때 일본군하고 싸운 경험은
잊은건가.
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 덕분에,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소총을 든 미군이 UH-1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우는 전형적인 베트남 전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베트콩과 북베트남은 몰래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찌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소련 등은 주변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베트남 국내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치민 루트를 타격한 흔적이 보이지만, 일단 정규적 공격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캄보디아나 라오스는 막을 능력도 없고, 자기들한테 크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묵인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아누크 국왕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사라지자 오히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같은 공산계 게릴라가 준동해,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 혼란에 빠져버려 호찌민 루트를 막는 것은 더 어려워져 버렸다.
그렇다고 남베트남이 그래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에서 주로 공세를 펼치는 세력은 북베트남군이라기 보다는 남쪽에서 양산된 베트콩이다. 물론, 북베트남에서 지원병력이나 지도를 위한 간부, 싸움을 위한 물자를 계속 내려보내기는 했지만 자국 내에서 반란군이 발생하는 실정이니 자국 통제도 제대로 못했던 셈이다. 더 막장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떠돌다가 월맹군/베트콩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5)]
전투 대상이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 내의 베트콩 세력이었고, 미군의 신분 역시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의한 인도적 원조군>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었고 "북베트남을 직접 침공하면 소련이나 중국이 끼어들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짐!" 하는 입장이었던지라 무슨 일이 있어도 북베트남
영토로 지상군이 쳐들어가지는 못하게 못이 박힌 상태였다.[13]
물론 그린베레를 비롯한 특수부대는 잘만 들어갔지만 특수부대는 성격상 절대로 주공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숫자도 적어서 국지전에서는 강력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없다.[14]
대신에 Operation RollingThunder 등의 북폭이라 불리는 항공 공세 작전은 수차례
했지만, 결정적으로 밀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몇십 년이 걸려도 남베트남을 어떻게든 군사력으로 통일할 목표를 세운 상태에서, 미국이
뭔 짓을 해도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북폭이 북베트남 대도시에 B-52를 동원해 융단 폭격을 가한 작전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북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소련제
SA-2 지대공 미사일 포대가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술기도 아닌 대형 전략폭격기의 작전은 불가능했다.[15]
흔히 생각하는
융단폭격은 어디까지나 밀림지대, 특히 호치민루트 제압을 목적으로 행해졌을 뿐, 도시와 민간지역에 대한 폭격은 어디까지나 군수공장이나 철도망
같은 전략목표에 대한 조준 폭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폭이나 부수피해로 인한 민간인 사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미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일방적으로 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당장 베트남전 기간 미공군/해군 항공대의 교환비는
역대 최악이었던 것으로 이름 높기도 하고...[16]
더구나 베트남의 북부 영토는 중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오폭시 중국에 폭격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북부 국경지대는 애초에 폭격 불가.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6)]
게다가 미국에서도 반전운동 여파와 여러가지 부정적인 일들도 크게 퍼져버리면서
프래깅(하극상)이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으로까지 언급되어버렸다.
1967년만 해도 공식적으로 800건이 넘는 프래깅이 적발될 정도[17]
였으니, 미군 장교들은 적군보다 뒤에 부하들을 무서워해야 했다.
일례로 1967년 11월 미군 헌병이 입수한 어느 포스터에는 베트남어와 영어로 어느 미군 대위 이름과 여러가지 신상명세, 심지어 주둔지 정보까지 써있고 적군들에게 제발 이 XX 좀 죽이면 1500달러 포상금을 선물하겠다...라는 말까지 쓰여있었다. 미군 측이 난리가 난 건 물론이다. 하지만, 헌병들 수사에도 결국 이걸 만든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얼마 뒤 그 중대장은 기관총에 벌집이 된 시체로 발견된다. 헌병들은 미군 기지 안에서 등 뒤에 M-16 총알로 벌집이 된 점을 주목했으나 부대원 전원이 적군 공격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터라 결국 전사로 처리되었다. 이것은 **작은 사회**로 서로가 서로를 묵인하는 것이다(...).
게다가 징집된 장병들은 당시는 실체도 드러나지 않았던 PTSD로 공포에 질려야 했고, 징집을 거부하며 반전운동
시위, 징집영장 불태우기, 전쟁규탄 시위까지 터지면서 미국은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스러워졌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나온 것을 보면 술에 질펀하게 취한 연대장이 휘하 소대장에게 찰리(베트콩) 몇 놈 잡아와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밀림 깊숙히 들어가서. 그러면 미군들만 죽어나가는 게 뻔하지만...명령은 명령. 결국 소대장 브로일스 중위는 부하들을
불러와서 웃기게도 연극을 했었단다. 나뭇가지도 꺾어오고, 물도 그릇에 떠와서 무전기로 나무를 밟는 소리를 내고, 나뭇가지를 꺾으며 숲을
지나는 것처럼 들리게 하고 물을 첨벙첨벙 치면서 강물도 건넌다고 무전기로 뻥을 쳐가면서 1시간 넘게 보고했다! 당연히 취한 연대장은
속아넘어갔고 나중에 그냥 잠을 자버렸는데, 다음 날 그 연대장은 그런 명령을 내린 걸 전혀 기억 못하더란다. 이런 어처구니 없지만 실제로
벌어진 뻘짓 이야기들은 이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던 상황 속에서 미군들은 말 그대로 미쳐갔다. 상급 장교들은 사이공의 장교 클럽에서 휴가를 즐기고 더운 한낮의 땡볕을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보냈는데 이 판국에 하급 장교, 부사관, 사병들이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헬기 조종사들은 맥주에 절어있었고 다른 장병들은 마약까지 손을 댔다.
당연히 1969년에서 1971년 사이에 환각제 사용자는 5%에서 14%로, 헤로인 복용자는 2%에서 22%로 폭증했다. 더구나 이는
상원위원회의 보고서로 실상은 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18]
덕분에 1971년 미군 야전병원에는 전투로 부상당한
병사가 5천명도 되지 않던 상황에서 마약문제로 입원한 환자는 2만명이 넘었다라는 엽기적 기록이 남아있다.
이따위 상황이니 당연히 열심히 싸우겠다는 의욕이 있을리가 없다. 1969년 전투기피로 기소된 건만 117건, 1970년에는 131건 등
꾸준히 증가추세였다. 종전이 다 되어가던 1972년에는 탈영한 이들만 무려 7.3%나 되었고, 미군 기준의 그 여유롭고
느슨한 무단이탈은 무려 17.6%나 되었다. 이렇게 탈영한 이중 근성이 강한 이들은 북베트남을 거쳐서 중국이나 소련까지
넘어가서 미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망명하기까지 하였다.[19]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7)]
미군의 낭비는 개념을 상실한 상태였다.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인들은 모두 미군들 보급 나오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건 지금 기준으로봐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물량 소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전쟁시기 베트콩 하나 잡겠다고 평균적으로 들어간 비용이 무려 1명당 33만 2천 달러였다. 애초에 포병들은 하루 평균 1만발을 쏘아대었고, 소총수들은 새로 등장한 M16을 맹신한 채 자동으로 놓고 갈기기가 일쑤 였다.
여기에 압권은 B-52 폭격기였다. B-52 폭격기가 호치민 루트의 베트콩 하나 잡는데 필요한 폭탄량은 무려...100톤. 실제로 B-52는 한참 심할 때는 년간 20억 달러를 폭격으로 소모했고, 그 결과 약 150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에 그 100배의 숫자가 남파되었다라는 것이다. 20억 달러 들여서 평균적으로 100명 중에 1명 잡았던 셈이다.
B-52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앞서 언급한 북폭 역시 돈 많이 들어가고 효율 없기는 돈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평균적으로 10억
달러를 북폭에 소모했는데, 그 타격이 평균 1억 달러 정도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B-52보다는 무려 효율이 10배
이정도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금방 복구되었다.
이 돈 때문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1년에 금태환제도(금본위제도)를 폐지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의회의 동의 없이![20]
낭비한 것은 돈 뿐이 아니었다. 병력 낭비도 상당히 심각했다. 앞서 미군이 30만 명이 파병되었다고 했는데, 가장 많은 시기에는 무려 55만 명이나 되었다. 문제는 이 55만명이 모조리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라는 점이다. 미군의 위엄은 엄청나서 이 병력의 적어도 4분의 3은 비전투병력이었다. 오타가 아니다. 4분의 1이 비전투병력이고 나머지가 전투병력인 것도 아니고, 4분의 3이 비전투병력이었다. 이는 접시닦이, 요리사, 수선공 등을 포함한 것이다.
그리고 이 4분의 1은 또 열심히 싸웠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병력은 총병력의 10분의 1수준이고, 실제로 최일선에 투입되어서 매일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전투병력의 다시 10분의 1, 즉 '''파병된 병력중에서 1%인 5천명 정도__를 넘어선 적이 거의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미군이 전쟁을 할 의욕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워진다.
뭣보다, 고립된 부대에게 후식용 아이스크림을 헬기로 보급했다는 게 바로 베트남 전쟁에서 있던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쟁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엄청난 낭비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나?(단, 물론 아이스크림만 나른 건 아니고, 전투물자를 보급할 때 남는 공간에 아이스크림도 함께 나른 거기도 하지만, 공중수송능력이 얼마나 남아돌았으면 공간이 남겠는가?)
물론 정규전에 한정해서, 물량으로 적을 깔아뭉개는 건 효율적인 판단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전쟁은 그게 아니잖아?!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8)]
3.4. 구정 공세와 수렁 ¶
1968년, NVA(북베트남군)와 베트콩이 설 연휴 동안의 관습적 휴전을 이용해 공격을 하였다. 설 이전부터 미리 대규모로 병력을 잠입시켜 설 연휴에 남베트남 주요 대도시에 동시다발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정공세다. 사실상 이 구정 공세를 통해 베트남전의 운명이 갈리고 만다. 구정공세가 벌어지는 동안 베트콩들은 남베트남의 주요 기관들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고, 도리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만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 등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미국에도 중계가 되었고, 미국민들은 심한 정신적 충격을 입고 반전여론이 고조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19)]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20)]
1968년 1월에 벌어진 포위전투로 시작 자체는 구정 공세보다 일렀던 전투이다. 디엔 비엔푸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프랑스
군의 요새였던 케산은 북 베트남과 남 베트남 사이의 국경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이 케산을 미군이 아니라 북베트남 군이 포위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즉 케산에 주둔한 미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을 북 베트남 2개 사단이 포위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애초에
동원된 사단이 디엔 비엔 푸에 참전했던 사단이었고, 디엔비엔푸 당시 베트민군을 지휘했던 보 구엔지압이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설레발이 서방 기자단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21]
이 전투의 재현이 가까웠다. 하지만 하루 평균 300회라는 어처구니
없는 미군의 공중지원이 이뤄진 케산은 결국 77일을 버텨서 포위진을 풀어버리게 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21)]
케산 공세는 대놓고 디엔 비엔 푸를 흉내낸 것에 알 수 있듯이 미군에 그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고, 그것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실제로 미국의 매스컴들은 구정 공세로 불타는 대사관 만큼이나 포위된 케산이 제 2의 디엔 비엔 푸가 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으며, 게릴라전이나 벌이던 베트남 군이 이제는 미군을 포위 섬멸하는 시도를 할 정도로 나오게 된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게 되었다. 결국 대통령은 핵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사령관에게 부탁하고, 사령관인 웨스티모얼랜드는 케산과 디엔 비엔 푸는 다르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구정 공세와 같은 맥락에 있었다. 애초에 구정 공세와 케산 전투는 모두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왜 같은 시기에 시도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은 시기에 있다. 1968년. 이는 바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인 것이다. 북 베트남은 미국의 존슨 행정부를 엿먹이기 위해서, 그리고 반전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보 구엔지압이 말한 우리는 전투에는 몇 번 진 적이 있지만 전쟁에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라는 말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북 베트남군은 전쟁과 정치를 동시에 실행했던 것이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22)]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23)]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공화당의 리처드닉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결국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다. 게다가 반전여론과 경제 인플레이션 및 재정적자로 인해 아시아에 주둔 미군을 대폭적으로 감축시키겠다는 요지의 **"닉슨독트린"**이 발표 된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아시아의 군사적/정치적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베트남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남한과 북한에서도 긴장이 흐르게 되어 각각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미국은 중국과 대립하는 노선에서 선회하여 친 중국적인 노선으로 바뀌게 된다.(핑퐁 외교)
1969년 9월 2일에는 호치민이 사망하였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24)]
미국의 동맹국은 처음부터 이 전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전통적인 동맹인 영국을 포함해서 다른 친했던 나라들이 파병을 일부 하긴 해도 전투병은 잘 안보낸다든가 하는 식으로 크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가 대한민국. 미국 다음으로 전투병 숫자가 많았다.
아무튼 미국은 단계적 철수 발표 이후로는 희망도 없는 전쟁에서 지리멸렬한 전쟁을 이어져 나간다. 미군의 철수는 6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매년 순차적으로 부대들이 떠났다. 큰 전투도, 목표도, 뚜렷한 적도 보이지 않는 마치 안개 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듯한 전쟁이 수 년간 이이진다. 그리고 도와줄려고 했던 놈(남베트남)까지 막장 짓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1971년이 끝날무렵에는 지상전투부대의 대부분은 떠나며 1972년 3월 북베트남의 춘계공세가 일어날때 미국은 지상군 재파병이 아닌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을 재소집하여 대응하고 지상군은 그대로 나가게한다.
1972년에는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게 되고, 단계적인 철군은 계속 이어진다. 결국 1973년에 북베트남과 미국은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완전 철수하게 된다.
이 때도 보기 좋은 철수를 위해서 핵 협박을 했다.[22]
물론 소련도 핵을 가진 상황이었고, 전쟁을 끝내려는 마당에 핵전쟁을 벌리기는
싫었으므로 일단 위협만 하고 쓰지는 않았다.[23]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25)]
그래도 이왕 도와준 놈인데 그냥 손 빼기는 찝찝했는지, 미국은 철수하면서 남베트남에게 많은 수의 무기를 공여한다. 남베트남이 그거 갖고 잘 싸우라는 거였는데...1975년에 북베트남이 쳐들어 오자 대부분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박살나 버렸다.
사실 미국이 무기는 줬지만, 이 무기들의 유지를 위한 예산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베트남 군대는 일상적인 전투에도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례로 미군 철수 전에는 전투 한번에 100발을 쏘던 포대가 단 3발만을 쏠 수 있었다! 특히 유지 보수에 민감한 공군의 타격이 커서 전투기는 많았지만 부품과 기름, 탄약이 없어서 제대로 출격할 수 없었다. 급기야 C-130 수송기에서 폐유 드럼통과 폭탄을 함께 투하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전투기 조종사 중에도 위장 잠입한 사람이 있어서, 공습 명령을 받자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폭탄을 떨구고 북베트남에 귀순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출격을 위해 뇌물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가 닥치자 타이까지 날아가서 타이에 망명한 조종사들이 수십명이다. 공군참모총장이자 전직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탈출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귀중한 조종사와 전투기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던가. 흠좀무. 이 때 탈출한 항공기들은 타이 측에서 임시로 보관하다가 미국에 반환하였다.
보병들은 미군 따라서 싸운 기억이 남아있었는지 공군 지원 없이는 한 발도 못 움직인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1975년 3월 초에야 응우옌티에우 대통령은 더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게 잘못되면서 오히려 패망을 앞당기는 꼴이 되었다.
물론 남베트남군이 무능력했던 면도 있긴 했으나 그밖에 지휘체계의 붕괴와 전략, 전술적인 문제도 상당히 컸다. 무엇보다도 보급과 병참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가, 북베트남의 대공세에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가 내린 무모한 철수 작전으로 인해 피난민들과 군이 뒤섞이는 대혼란에 빠지면서
일개 야전군이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철수 작전은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음도 사령관은
그자리에 없었고, 사령관 대리는 막 진급해서 별을 단 여단급 지휘관에 불과했다. 게다가
보안을 유지한답시고 철수작전 자체가 부대장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도 레 민다오[24]
준장이 지휘하는 6천명 남짓의
18사단은 쑤엔록에서 4만여명 규모의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1주일간이나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당시 북베트남군을 지휘하던 반 티엔 둥 장군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전투"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1개 사단의 분투가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게다가 18사단의 분투는 대세가 기울어진 후 이야기. 따라서 재배치를 틈타서 호찌민 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북베트남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휴전선인 북위 17도선과 중부 고원지대가 넘어가면서 남베트남은 내리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쟁과 쿠데타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2%A0%ED%8A%B8%EB%82%A8%20%EC%A 0%84%EC%9F%81?action=edit§ion=26)]

[[JPG external image]](http://kinimage.naver.net/20111117_199/1321478722525BfAH6_JPEG/nva- tank.jpg)
남베트남 해방전선 전차가 대통령 독립궁으로 진격하는 사진[25]
.
결국 1975년 3월 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 4월21일에 응우옌티에우 대통령이 사임하고 바로 탈출한 이후에 4월 30일에는 결국 사이공까지 함락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월맹군은 최소 2년이 걸릴 것 같던 미군 후퇴 이후의 남베트남 점령작전이 55일만에 끝나자 놀랐다고 한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파리협정」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남베트남의 패망과 아비규환에
빠진 남베트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그리고 40여년 뒤 동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비슷한 현상이벌어지는데 물론 남베트남이 망한
뒤 보복이라는 걸 해주긴 했지만...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