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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迅(노신)
출생
사망
- 개요
- 연표
-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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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루쉰이 본명이 아니다. 저우(周)씨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본명으로 알려진 수런(樹人)은 그가 17세 때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바꾼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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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 9월 25일, 중국 저장성 샤오싱 시의 성 안 마을에서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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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9월, 삼미서재에 들어가 "맹자" 등의 경서를 배움
이 무렵부터 고전 소설이나 야사 등을 즐겨 읽고, 민간 목각화, 그림 등을 수집함 -
1893년
청나라 관리였던 할아버지가 과거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힘(~1901)
겨울, 성 밖의 외가에 맡겨져, 뒷날 소설 창작에 영향을 준 농촌 생활을 체험함 -
1894년 -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전당포와 약방을 돌아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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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 1월, 아버지가 37세로 죽고, 집안이 더욱 궁핍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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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 5월, 새 학문을 익히기 위해 난징에 있는 강남 수사 학당에 들어갔으나, 곧 그만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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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월, 강남 육사 학당 부설 광무 철도 학당에 입학
이 때부터 서양 근대 사상을 전하는 책과 잡지, 신문 등을 읽고, 진화론에 영향을 받으면서 과학과 민주 사상에 눈뜸 -
1902년
3월,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의 쿄붕 학원에 입학
새로운 의학이 중국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리라 생각하고 의학을 배우기로 함 -
1904년
9월, 일본 센다이 의학 전문 학교에 입학
12월, 광복회에 가입 -
1906년 - 2월, 문학 예술 활동으로 중국 민족 의식을 개조하리라 결심하고, 의학 공부를 그만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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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 3월, 문예 잡지 "신생" 출판을 계획했지만 실패함. 혁명적 잡지에 여러 가지 글을 발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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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 8월, 중국으로 돌아와 사오싱 중학당 등에서 교사를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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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남. 사오싱에서 열린 민중대회의 주석직을 맡고 적극적으로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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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 임시 정부의 교육부 관리가 되어 난징을 거쳐 베이징에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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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 4월, "광인 일기"를 써서 "신청년"에 발표함. 처음으로 루쉰이란 이름을 사용함. 이후 계속하여 "신청년에 소설 등을 발표하여 신문화 운동을 이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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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 '''12월, "아큐정전"을 "신보부간"에 연재하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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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 8월, 베이징 여자 사범 대학교 해산 사건으로 군벌 정부의 교육 당국에 맞서 투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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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월, 베이징 여자 사범 대학교 복귀, 교육부 검사로 복직
8월, 군벌 정부의 탄압을 피해 하문으로 가서 하문 대학 문과 교수를 지냄 -
1927년 - 2월, 광저우 중산 대학 문과 주임으로 있다가, 국민당의 청당 운동에 항의하여 물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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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월,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에서 도피 생활을 함
2월, 창조사, 신월사 등과 문학 논쟁을 벌이며 마르크스주의 문예론을 연구함 -
1929년
목판화 민중 예술 보급 운동을 벌임. 이후 여러 민주 단체에 가입하여 국민당의 반공 독재 정치에 항의하는 운동을 벌임 -
1936년 - 10월 19일, 동지 취추바이의 유작집을 편집하던 도중 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남
※ 출처 :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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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57년에 누군가가[1]
마오쩌둥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만약 루쉰이
살아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마침 반우파 투쟁이 한창이던 무렵이라 문화계 인사들의 행로가 화제에 올랐는데 마오쩌둥이 상하이를
방문한 틈을 타서 물어본 것. 그러자 마오쩌둥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루쉰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소." 그리고 약 10년 뒤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너희들도 가만히 있어, 라는 경고일지도
약간 더 자세히 알려면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37 65&path=%7C183%7C194%7C&leafId=232) 참조.
자기 나라의 중국인에 대해 안좋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인을
이기적이고 허세와
정신승리를 잘 드러내며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고 쓸데없이
외래문화에 배타적이라고 주장했다.[2]
생전에 리영희가 매우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리영희의 자서전 격인 '대화'를 보면 루쉰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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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쉰의 아들 저우하이잉이 쓴 '나의 아버지 루쉰'(2008, 도서출판 강)의 에필로그에 따르면 저우하이힝의 어머니 쉬광핑의 친구이자 번역가였으며 루쉰을 몹시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진 뤄지난이라는 인물이다.[2]
서성,'한권으로 읽는 중국문화',넥서스,2005,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