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생 한국의 전 농구선수 및 감독
1.1. 소개
1.2. 선수 시절
1.3. 지도자, 해설자 시절
- 1979년생 농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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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하나 외환 여자농구단 감독
박종천(朴鍾千)
생년월일
국적
출신지
출신학교
서울체고 - 연세대학교
포지션
센터
신체사이즈
194Cm, 94Kg
실업입단
1981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소속팀
현대전자 (1981~1988)
지도자
현대전자/대전 현대 걸리버스/전주 KCC이지스 코치
(19942002)2004)
청주 현대건설 하이페리온 (2002)
창원 LG세이커스
수석코치 (2003
창원 LG세이커스
(20042005)2009)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수석코치 (2006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2009)
랴오닝성 청소년 여자 농구 대표팀 (중국) (20132014))
부천 하나 외환 여자농구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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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회의원전
농구선수, 전 해설자,
현 여자농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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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여수지만, 고등학교는 서울체육고를 나왔다. 서울체고 재학 시절에 이미 고교에서 손꼽히는 유망주 센터로 군림했고,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끝에 연세대학교가 그를 손에 넣었다. 연세대 시절에 착실히 성장하면서 대학 무대에서도 괜찮은 센터로 활약했고, 한 때는 고려대학교의 49연승 기록을 바라만 봐야 했지만, 4학년 때는 주장으로 고려대를 누르고 다시 패권을 연세대가 가져오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무렵에는 고교 졸업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거취를 두고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의 승리자는 현대전자.
실업 무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선보이면서 현대전자의 농구대잔치 3회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남자 농구가 중국을 누르고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이바지하였다. 당시 대표로서 활약하면서 농구 금메달을 차지하며, 일약 스타급 선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뒤로는 점차 무릎 부상이 악화되면서 다소 이른 나이인 28세에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이후에 현대증권에서 평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농구와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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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도자, 해설자 시절 ¶
지도자로 다시 복귀한 것은 1994년 학교 선배이자, 팀 선배이자, 직장 선배인
신선우[1]
가 현대전자의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아끼는 후배인
박종천을 코치로 지명하면서부터였다. 박종천은 이 때부터 2002년까지 현대-KCC[2]
의 코치로
재직하면서 신선우를 보좌해 두 번의
한국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2002년 한국여자프로농구 청주 현대 하이페리온[3]
의 새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처음 감독 자리를 맡게 되었다. 2002년 5월 감독에 부임했는데, 놀랍게도 2002년 8월 여름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데뷔
3개월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대는 창단 이래로
농구대잔치와 [한국여자프로농구](/wiki
/%ED%95%9C%EA%B5%AD%EC%97%AC%EC%9E%90%ED%94%84%EB%A1%9C%EB%86%8D%EA%B5%AC)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콩라인 구단이었는데, 이를 말끔하게 깨뜨린
것. 이 우승으로 박종천은 일약 농구 감독 인재 풀의 촉망받는 인재로 떠올랐다. 앞으로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지만...
우승하고 그 다음 달에 사임했다. 이유는 프런트와의 심각한 불화. KCC
코치 당시 받았던 연봉 1억 5백만원에서 2천만원을 깎고 여자 농구 감독으로 왔는데, 우승을 했는데도 당시 어렵던 그룹 사정을 이유로
보너스도 안 주고 날로 먹으려고 한 것이다.[4]
이 때문에 박종천은 프런트와 심각한 불화를 거듭하다가 자진사퇴했다.
해설자로 1년 재직한 후, 창원 LG세이커스의
수석코치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그의 흑역사가 개막한다.
김태환 감독을 보좌해서 수석코치로 시즌을 보낸 그는 2004년
김태환 감독을 대신해 LG의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문제는 이 경우
일반적으로 수석코치는 감독과 운명을 같이하는데, 혼자 감독이 임명되었다는 것. 이 때문에 박종천은 김태환을 배신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딱히 근거는 없다. 단지 모양새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성적을 내야
하는데, 문제는 박종천은 그 전해까지 6강 PO에 꾸준히 오르던 LG에게 6강 PO 탈락과 9위 추락[5]
이라는 굴욕을 선사하고 말았던
것. 결국 한 시즌만에 자진사임 형식으로 짤렸다.
한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다시 자리를 얻은 것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수석코치였다. 대학 선배인 최희암이 불러서 간 것인데, 여기서도 LG와 똑같이 최희암이 2009년 재계약에 실패하자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또 똑같은 소리가 나왔는데, 다만 이번에는 최희암이 나서서 자기가 추천했다고 실드는 쳐줬다. 하지만, 역시 성적이 막장(...) 초반 10연패라는 막장 성적을 내면서 스트레스로 입원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총감독으로 물러나는 형식으로 12경기만에 중도 하차하고 만다. 같은 팀 제이 험프리스의 20경기를 경신한 역대 최단명 감독 기록이다.(...)
2012년에 농구 해설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가 8월에 중국 요령성 청소년여자농구팀 감독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중국 무대로 건너갔다.
2014년 4월, 한국여자프로농구 하나외환 여자농구단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관련기사
하나외환이라는 팀이 몇 년 전부터 하위권에서 놀던 약팀이던 탓에 감독 부임 첫시즌은 5위로 마감했다. 남자농구에서의 연이은 실패 때문에
현재까지 농구팬들로부터 지도자로서의 평판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되나 하나외환 감독 부임 이후 카메라를 주시하는 현란한
인터뷰 기술로 팬들의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데 현재는 그의 어록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오죽하면 그의 인터뷰를 보기 위해 하나외환을
응원한다는 팬들도 있다는데 심지어 이런 기사까지 떴다. [코트에 나타난 국회의원?…박종천 감독 인터뷰 '화제'](http://ne
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861872&plink=ORI&cooper=NAVER)
그의 인터뷰가 등장할때마다 재선 인터뷰라고 하고 현재 13선 국회의원으로 추대하고있다.
마지막 라운드를 5연속재선전승으로 마감하며 인터뷰를 기대하는 팬들에게 막판 선물 보따리를 안겼다. 남자농구 때와 달리
하나외환의 강이슬, 신지현 등 봉사들유망주들이 시즌 후반에 들어갈수록 가능성을 터트리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하고 있다.
그의 어록대로 짱인팀이 되지않을까라고 기대하는 팬들이 하나둘 늘고있다.
\----
[1]
신선우 역시 현대산업개발 여자농구단 코치를 잠시 지낸 뒤 현대증권의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다가 농구계로 컴백한 것이었다.[2]
이 시절 팀이 계속 개편되었다. 현대전자 실업농구단->대전 현대 다이냇->대전 현대 걸리버스->전주 KCC 이지스[3]
모기업인 현대건설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한국산업은행이 임시로 관리하다가 2004년 신한은행에 팔렸다.[4]
근데 당시 모기업인 현대건설의 상황이 심각하긴 했다. 결국 엄청난 액수의 공적자금이 투입되고, 자산매각 과정에서 여자농구단도 팔아치운다.[5]
최하위 전자랜드와 승차는 같았으나 연승에서 앞서 9위.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0%95%EC%A2%85%EC%B2%9C?action= edit§ion=5)]
박종천(1979) 항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