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검술은 말 그대로 서양의 검술을 싸잡아 부르는 명칭이다. 편의상 '서양 검술'이라고 호칭하고 있지만 이는 편의적인 명칭일 뿐 구체적인 의미를 띠고 있지는 않다.
- 서양 검술의 정의
- 고대~중세의 서양검술
- 중세 후기의 서양 검술
3.1. 영상 예제
-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 검술
- 17세기의 변화
5.1. 검술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
- 18세기 이후
6.1. 세이버 검술의 변화
- 현대의 서양 검술
7.1. 복원의 시작
7.2. 현대의 복원
-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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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서양의 검술은 다 서양 검술이다. 이는 고대로마의 글라디우스부터 스포츠 펜싱까지 적용되므로 상당히 광범위한 부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대체적으로 고대~모던 펜싱까지의 범위를 지칭한다. 특히 국내에서는 『서양 검술』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ARMA나 AEMMA 등의 중세-르네상스 검술 단체의 스크립트와 동영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서양 검술이라고 하면 중세-르네상스 검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에서부터 근현대 펜싱까지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맞으며, 혼란을 피할 수 있다고 하겠다. 보다 세세한 부분은 중세-르네상스 같이 시대를 지칭하거나, 스몰소드, 레이피어 같은 무기의 이름, 혹은 볼로네스, 데스트레싸, 카포페로 등과 같이 유파명, 검술 이름, 마스터 이름 등을 지칭한다.
같은 이유로 미주유럽의 서양검술 단체들은 광범위한 범위에 속하는 WMA(Western Martial Arts)같은 호칭보다는 HEMA(Historical Europian Martial Arts)를 사용하고, 더욱 세분화시켜 RMA(Renaissance Martial Arts)나 그냥 『Historical Europian Swordmanship』이라고 하기도 한다.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는 클럽명도 많다. 가령 ARMA 같은 경우는 『the Association for Renaissance Martial Arts』의 약자이다.
계보가 꾸준히 이어지는 일본의 고류 무술과는 달리 서양 검술들은 모두 그 계보가 한참 동안
단절되어 있던 것들이다. 즉 현대의 서양 검술 단체들은 모두 복원이다. 그러나 연구와 복원이 이제 막 태동기에 지나지 않고, 소스도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무술적 복원이 매우 어려운 국내와는 달리, 서양에서는 여러 마스터들이 써낸 검술서와 스크립트가 굉장히 많고,[1]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앨프리드허턴, 에거턴 캐슬,
리처드 버튼과 같은 군인, 검객들에 의해 중세-르네상스 검술의 연구와 복원이 활발히 이루어져왔고,
학자들과 리인액터, 연구회
등의 상호간 교류를 통한 검증도 활발하다.
1990년대부터 활기를 띠고, 2000년대 들어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서양 검술 연구회나 단체들의 대대적인 참여로 이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으며 연구성과나 새롭게 발견된 고문서들, 조명받은 중세-르네상스 마스터들의 저작, 그리고 그에 기반한 출판물들의 갱신은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연구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가 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서양 검술계는 모든 소스를 오픈하고 있어서, 자신이나 단체의 연구성과를 포럼 등지에 올려 공개하거나, 책을 써서 공표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찬동,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누가 어떤 마스터의 고문서 매뉴얼의 자세나 움직임에 대한 해석을 올리면, 그 즉시 떼로 몰려들어서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고, 직접 몸으로 해 보아서 증명을 하는 식이다.
누구라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고 소스나 연구성과가 오픈되어 있는 것이 기본적인 풍조라 누구라도 평균적인 수준의 커리큘럼을 만들거나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서양 검술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어지간한 동네라면 서양 검술 단체가 하나씩쯤은 있고,
종목도 현존하는 검술서 중 가장 오래된 I.33문서에서부터 허턴의 세이버
검술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하고 다양하다. 물론 많은 만큼 사기꾼도 있으니[2]``[3]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는
해외의 포럼, 가령 Myarmoury.com이나, SFI(소드포럼 인터내셔널) 등의 포럼들에서 다양한 시각을 섭렵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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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거 없다.
물론 검술 자체가 없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De Re Militari》와 같은 병법서에서는 로마제국 군인들의 검술 훈련법과 싸움법에 대해 간략하게 해설하고 있으며, 다키아 원정시 펄스와 롬파이아 같은 도검의 위력과 사용법 등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나와 있으므로 검술 자체는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엄밀히 말해 검술 자체의 형태를 알 수 있는, 무술적 복원이 가능한 스크립트가 없다는 소리다.
이는 13세기까지의 서양 검술도 마찬가지이고, 7세기 이슬람 검법도 마찬가지이다. 서사시 《일리아드》의 영웅들도 분명히 자신들의 무술로 싸우는 묘사가 있지만 그 형태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지 무술적 복원이 가능한 것은 없다. 이 점은 바이킹 무술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이 사용한 무기의 형태와 바이킹 영웅담인 《사가》(Saga)에 나오는 싸움 장면에서의 묘사를 통해 그 무술의 양상이나 형태만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의 무술을 명확하게 알려주며 무술로써 복원이 가능한 그들의 스크립트는 없는 것이다.
현대의 서양 검술 단체들에 의해 이러한 시대의 검술·창술 등에 대한 리컨스트럭트(재구축)는 활발하게 이루어지도 있으며, 특히 바이킹 검술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리컨스트럭트는 다른 무술서에서 비슷한 점을 떼어와 적용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버클러와 아밍소드 검술서인 I.33문서의 방패술을 적용해보거나, 르네상스 시대의 쉴드&레이피어 스크립트의 방패술을 적용해보는 식이다. 이것은 비슷하게 따와서 한번 해보는 것이며 결코 바이킹들이 남긴 방패술도 아니고 바이킹 시대에 그렇게 싸웠을 것이란 확신도 불가능하므로 해보는 사람이나 단체들은 물론 보는 사람들도 그것을 『바이킹 방패술 그 자체』 혹은 『의미있는 복원』이라고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흥미성 가설로만 볼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이킹 사가에 등장하는 검술의 묘사를 토대로 한 재현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검술적인 합리성을 분명히 띠는 것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검술서가 아닌 《사가》, 즉 소설의 묘사이기 때문이다. 무리한 해석이나 억지가 그나마 통하는 국내와는 달리 의외로 철저하게 근거 따지고 입증 요구하며 기준에 엄격한 것이 서양 검술계이다.
현재 인정받는 가장 오래된 검술서는 독일어로 되어 있으며 현재 런던탑에 원본이 있는 I.33문서로써, 지름 30cm정도의 작은 방패인 버클러와 한손으로 사용하는 아밍소드를 사용하는 문서이다. 현대의 거의 모든 소드&버클러 검술의 가장 중요한 소스다. 연대는 12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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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의 서양 검술 매뉴얼들은 대부분 15세기 것이 많다. 특히 대부분 양손으로 사용하는 롱소드 검술서들인데, 14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방패와 아밍 소드가 선호되었지만 15세기부터는 롱소드(獨:랑엔슈베르트)가 선호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무엇보다 갑옷의 개량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받는데, 14세기까지의 플레이트메일 혹은 트랜지셔널 아머는 움직임이 격렬한 부위의 방어를 위해 체인메일을 상당부분 사용하고 있었고 체인메일은 기본적으로 칼날이나 화살은 막을 수 있어도 충격까지는 막을 수 없다 보니 검에 베였을 때 칼에 몸이 잘리지는 않아도 충격 때문에 뼈가 부러질 수 있는 등의 문제점이 있어서 방패로 부족한 방어력을 보충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덕분에 체인메일과 투구만 입었던 11세기경에는 이른바 카이트실드(Kite Shield)라고 하여 들면 다리까지 완전히 가리는 방패를 사용하였다가, 14세기 초반 쯤에는 다리와 팔을 플레이트 방호구로 보호하게 되어 방패의 필요성이 감소하였으므로 아래가 짧아진 히터 쉴드(Heater Shield)를 사용하게 된다. 14세기는 트랜지셔널 아머가 플레이트 아머로 이행해나가는 시기로써 14세기 후반쯤 되면 방패는 대부분 도태된다. 그 이전부터 롱소드와 비슷한 개념의 장검은 존재했으며 워소드라고 불렸는데, 과거 방패가 필수였던 시절에는 이 워소드가 부수적인 물건에 지나지 않았지만 14세기 후반 갑옷의 발달로 방패의 사용 비율이 크게 감소하고 양손으로 무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됨에 따라 과거의 워소드가 롱소드로 계승되어 15세기에는 기사와 용병을 가리지 않고 주요 도검으로 격상하게 된 것이다.
롱소드 검술은 크게 나누어 독일계와 이탈리아계로 나뉘나 이탈리아계도 독일검술을 배워 독자적인 풍격을 추가한 것이며 근본은 동일하다. 독일검술을 정립한 사람이 14세기의 인물인 요하네스 리히테나워인데, 전 유럽을 여행하며 각지의 검술을 배워 통합-체계화시켰으며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유럽에 퍼진 것이다. 저서를 남기지 않았고 운문시의 형태로 구결을 만들어 남겼는데, 원리를 한코 되브링어(Hanko Dobringer)가 해설하고 구결 해석을 페터 폰 단직(Peter von danzig)이 하면서 처음으로 문서화된다. 이 이후로 롱소드 검술서가 늘어난다.
방패가 사라진 대신 버클러의 활용도는 늘어난다. 매우 작고 간단한 방패였기 때문에 휴대가 편했고 아밍 소드단독으로 쓰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나았기 때문에 많이 활용되었으며 15세기에도 중요한 항목으로 검술서에 수록되었다.
평복 검술(blossfechten)과 갑주 검술(harnischfechten)이 구분된 것도 이 시대부터의 특징이다. 갑옷을 입으면 살상부위가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갑주검술은 롱소드를 하프 소드(Half sword)로 잡고 틈새에 찔러넣거나 칼날을 잡고 폼멜로 후려치고 가드를 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거나, 가드로 눈을 찍는 다양한 방법으로 싸우며, 기본적으로 레슬링 즉 캄프링겐(Kampf ringen)과 연계하는 방식으로 싸운다. 링겐은 단검술도 포함하고 있다.
독일 지방의 외날도인 메서(Messer)검술도 이때 많이 등장하는데 롱소드와는 다른 풍격을 지니고 있다. 한손으로 사용하되 왼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칼을 얽고는 상대의 팔을 쳐내어 빈틈을 만들고 공격하는 기술 등이 있으며, 크로스가드 측면에 튀어나온 나겔(Nagel)이라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양손으로 쓰는 크릭메서(Kriegmesser)등의 검술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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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소드 검술의 반격기를 다룬다.
독일검술 마스터인 지그문트 링에크(Sigmund Ringeck)와 페터 폰 단치히(Peter von Danzig)의 검술서에 의거한 재현. 하나의 싸움을 묘사하는 시나리오 같은 검결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한문장씩 추가해 나감으로써 공격을 어떻게 반격하고 싸워서 승리하는가를 보여준다.
갑주검술의 예제.
역시 독일검술 마스터인 요하네스 레퀴히너(Johannes Lecküchner)의 매뉴얼과, 검술가 겸 비리공무원[4]
인 파울루스 헥토르
메어(Paulus Hector Mair)의 소장 문서중 하나인 《코덱스 발렌슈타인》의 기술을 근거로 재현한 메서 검술.
ARMA의 소드&버클러 시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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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계에서 르네상스 시대라고 하면 16~17세기를 말한다. 이 시대 또한 전쟁 양상의 변화와 함께 검술의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서양 검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Rapier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15세기가 빛나는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와 맨앳암즈가 주축이 되어 활약한 전쟁터라고 한다면, 16세기는 파이크 장창과 화승총의 콤비 플레이, 즉 파이크&샷 전법으로 대표되는 테르시오 진법이 전장의 주력으로 등장한 시대이다.
15세기의 전쟁 양상은 기사와 맨앳암즈의 격돌, 그리고 폴액스, 할버드와 같은 폴암과 롱소드, 워햄머와 메이스같은 백병전 무기의 황금기로 대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스위스 용병대의 파이크 전법에 의해 기사의 위력의 근본인 랜스차징이 상당부분 저지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전투에 의해 입증되었고, 16세기에 들어 스페인의 명장 곤살로 데 코르도바에 의해 테르시오 진법이 완성되면서 15세기식의 백병전 경향은 크게 사라지게 된다.
파이크&샷 전법 하에서는 과거와 같은 도검 백병전이 일어나기 힘들었는데 보병이 견고한 방진을 형성하고 창으로 서로 찔러대는 것이 주된 백병전 양상이었으며, 이 빽빽히 들어선 창 앞에서 과거처럼 롱소드를 마음껏 휘두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파이크 방진 내부에서도 할버드, 츠바이핸더를 비롯한 폴암을 소지한 병사들이 지휘관이나 군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이들이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는 사실상 패배하여 진형이 와해되기 전까지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중반까지는 야전축성된 진지에 대한 돌격이라든가, 파이크 방진이 서로 교전에 들어갈 때 방패와 검을 든 로델레로나 쯔바이핸더를 든 도펠졸트너들이 측면을 치며 지원을 하는 등 격렬한 백병전이 간간히 일어났지만,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숫제 파이크 방진끼리 직접 창으로 교전하기보다는 서로 총질을 해대는 양상으로 변하면서 백병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맞추어 검술도 새롭게 변화하는데, 다시 롱소드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한손으로 사용하는 아밍 소드의 계보를
잇지만 보다 경량화되고 방어기제가 강화된 사이드소드가 보편화된다. 즉 도검이 주된
전투장비에서 보조적 역할로 바뀌어 가고 있었으며, 다소 크고 거추장스럽지만 백병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롱소드 대신, 휴대가 편한 사이드
소드가 전쟁터에서 점차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버클러를 함께
소지하고 다니는 경향도 유행하게 된다.[5]
16세기는 민간인들에게 돈을 받고 검술을 교습하는 fechtschule이 많이 개설되었으며, 당시의 좋지 않은 치안상황과 맞물려 민간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비록 전쟁터에서는 중요성이 한층 감소되었지만 fechtschule에서는 "모든 무기술의 기본"으로써 롱소드 검술을 항상 중요하게 교육하였고 지금 남아있는 롱소드 검술의 매뉴얼도 16세기 것들이 많다. 특히 상당히 자세해지고 상세하게 해설하는 경향이 있으며, 비리공무원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통칭 PHM)과 요아힘 메이어(Joachim Meyer)의 검술서가 롱소드 검술 복원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fechtschule에서 주로 교습하는 검술은 롱소드 검술, 사이드소드 검술, 버클러&소드 검술, 레이피어 검술 등이고 가르치는 종목이나 스타일은 유파나 마스터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16세기의 대세는 사이드소드였다. 롱소드는 독일계 스쿨에서 검술 원리를 가르치기 위한 기본 종목으로 취급되었으며 실전무기로 쓰이지는 않았으며, 이에 따라 안전을 위해 찌르기를 금지하는 변화가 있었다. 사이드소드는 이탈리아 볼로네스 지방의 검술 유파들이 대세를 차지하면서 급격하게 발전시켰고, 아킬레 마로쪼, 안토니오 만치올리노 같은 마스터들의 저작들이 남아 있다. 여전히 롱소드도 취급하지만 사이드소드를 중심으로 버클러, 로텔라(원형방패), 단검 등을 함께 사용하는 기법을 남겨놓은 것이 특징. 독일계에서도 당시 실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무기인만큼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이 사이드소드가 민간 싸움에서 더 우위를 얻기 위해 베기성능을 포기하고 길어진 것이 바로 레이피어이다.[6]
레이피어는 근본적으로
르네상스 검술 체계로 운용하지만 그 형태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사이드소드 검술은 베는 검술이고 칼날에 다칠 수 있으므로 왼손을 뒷짐을 져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레이피어 검술은 베기성능이 매우 떨어지는 특성상 왼손을 앞에 내밀고 적극적으로 칼을 치우는
기법이 기본이 되었다. 레이피어 검술은 '살인자 검객' 카포페로, 니콜라도 기간티, 카밀로 아그리파 같은 마스터들이 유명하며 특히 카포
페로는 실전에서 수십명의 적들을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기존의 메서는 더이상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았고, 그대신 메서를 스포츠화시킨 두삭(Dussack)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검리 자체는 전통 메서 검리를 그대로 잇고 있었으나 왼손을 사용해 오른손을 보조하는 자세로 변형되었고, 장비도 철제 장비가 아닌 목검이나 가죽제의 안전한 도구로 변경되었다. 덕분에 크게 다치는 일은 많지 않았고 안전하게 기세를 살려서 스파링할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 높은 종목으로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 지역에서 17세기 말까지 유행했다.
이탈리아의 레이피어 마스터 살바토르 파브리스(Salvator Fabris)의 매뉴얼에 의거한 레이피어 검술 재현.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4%9C%EC%96%91%20%EA%B2%80%EC%8 8%A0?action=edit§ion=6)]
17세기 중반까지는 16세기의 검술 경향이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지나,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검술계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째는 롱소드 검술의 비중이 크게 쇠퇴한 것과, 브로드소드[7]
단독으로 사용하는 검술의
비중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17세기 중반부터 레이피어가 쇠퇴하고 그 자리를 스몰소드가 차지하게 된다. 스몰소드가 대세를 이루기 시작한 데에는 이전 시대에 비해 좋아진 치안으로 도검 휴대의 필요성이 실질적으로 줄어든 것과 더불어 수석식 발화장치의 보급으로 권총의 휴대가 편해졌다는 점, 따라서 이 점에 대응하여 도검의 실전적 우위보다는 장식성과 휴대성을 더욱 강조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베는 날이 사라지고, 방어를 위한 컵가드나 스웹트 힐트같은 크고 복잡한 가드가 작은 쉘가드로 간소화되었으며, 전체 길이도 짧아져 무게도 레이피어의 1~1.3kg정도에서 450g 정도로 크게 경량화된다. 물론 무게는 같은 종류라도 차이가 있지만, 과거의 절반 가까이 경량화되었다고 보면 된다.
군용검 면에서는 동유럽으로부터 세이버가 도입되어 브로드소드와 함께 유럽의 군용검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4%9C%EC%96%91%20%EA%B2%80%EC%8 8%A0?action=edit§ion=7)]
과거 독일검술로 대표되는 중세-르네상스 롱소드 검술과의 차이가 현격해지며 훗날 스포츠 펜싱까지의 성격을 결정지어버리는 시대가 이 시점이다. 중세 롱소드 검술의 보법은 보폭이 넓고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왼발 오른발이 자유롭게 나가는 방식이었다면 이 시대의 검술은 이미 16세기부터의 변화를 계승한 것으로써 다각적인 보법에서 일직선적인 보법으로 바뀌고 오른발을 앞에 두고 몸의 오른편만 앞에 노출시키는 방식이 된다.
이는 17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칼 한자루만 쓰기보다는 왼손에 버클러나 단검을 쥐고, 심지어는 망토나 장검 또 한자루를 잡아 어떻게든 실전에서 유리함을 얻기 위해 발악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으며 이에 따라 왼발과 왼손이 앞으로 나설 때도 있었지만 이후 칼 한자루만 사용하는 풍토가 정착된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왼손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으므로 몸을 옆으로 돌려 세우고 칼을 든 오른손이 앞으로 나서 보다 긴 간격을 얻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몸을 옆으로 돌려 세우면 전방에서 상대에게 노출되는 몸의 면적이 작아지므로 칼 한자루로도 방어하기가 수월해진다.
이러한 점을 유지해야 하므로 다각적인 보법은 오히려 전방에 노출되는 몸의 면적을 크게 하고 칼을 내밀어 생긴 간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 되므로 일직선으로 앞으로 뻗어나가고 후퇴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런지(Lunge)의 비중이 커지고, 좌우로 이동하는 보법의 비중은 줄어들게 된다.
검술의 경향도 변하는데 과거에는 위의 영상들과 같이 공방이 일체가 된 한박자(stresso tempo) 경향에서 탈피하여 공격과 방어가 확실히 분리가 되는 두박자(dui tempi) 경향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민간용 도검인 스몰소드의 경우 워낙 가볍고 간소하므로 칼의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으며 이에 따라 고전 레이피어에서 사용되던 한박자 방어로는 완전히 방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확실히 걷어낸 이후 공격에 들어가는 경향이 대세를 타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경향들은 세이버와 브로드소드 검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이와 같은 경향이 계속해서 이어져 현대 펜싱까지 관통하는 검리가 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4%9C%EC%96%91%20%EA%B2%80%EC%8 8%A0?action=edit§ion=8)]
18세기 내내 검술의 경향은 이전 시대와 같은 특출난 변화는 없었으나, 점차적으로 스몰소드의 패용률이 떨어져가고, 18세기 후반이 되면 과거 스몰소드로 이루어졌던 결투문화도 권총을 사용하는 형태로 바뀐다. 결투용 권총도 따로 판매를 했는데, 이러한 권총 결투는 사생결단을 내는 결투에 쓰였고, 분쟁이 발생하여 체면을 차리고 가오를 살리는 결투에서는 결투용으로 따로 만든 듀얼링 소드를 사용했다. 점차 도검 결투도 상대를 죽여야 끝나는 것에서 서로 피만 보면 피를 보인 쪽이 패배하게 되는 First Blood규칙으로 바뀌게 되면서, 상대를 공격하고 사살하는 데 목적이 있던 스몰소드 검술은 의미가 사라지고, 현실의 First Blood규칙에서 유리해지기 위해 검술은 몸 전체를 노리고, 쭉 뻗은 팔을 먼저 공격하는데 중점을 두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항하여 스몰소드의 조그마한 쉘가드는 커다란 컵가드로 바뀌게 된다. 바로 현대 스포츠 펜싱의 에뻬 종목의 직계 조상이다.
스포츠 펜싱의 에뻬는 전신이 타격점이고 어느쪽이 먼저 공격하면 그에 방어하고 다시 반격하는 『프라즈 드 아르므』가 없으며, 서로 같이 찔러도 인정이 되는데, 이것이 다 과거의 결투용 에뻬 검술의 규칙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이 시대에는 총검술도 당당한 검술로 인정받았으며 에뻬(결투용)/플뢰레(스몰소드 훈련도구)/사브르(세이버)/바요넷(총검)을 포함한 4대검법에 속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총검은 꼬챙이에 가까웠고 착검시 170cm에 가까울 만큼 길었으므로 창술에 더 가까웠으나, 유럽에서 교습하던 근대 총검술은 스몰소드 검술을 변형하여 정립하였다. 그래서 검술의 일부로 취급하였다. 포병이나 라이플병은 백병전에 노출될 여지가 많았으므로 도검 형태의 총검인 소드 바요넷(Sword bayonet)을 지급하였으며, 이 경우 검술을 따로 가르치기도 했다.
세이버&브로드소드 검술은 18세기까지는 존 테일러(John Taylor)와 같은 마스터들이 다이나믹한 검술을 보전하기도 하였으나 18세기 후반부터는 눈에 띄게 단순화된다.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전쟁에서 검술의 비중이 과거에 비하면 크게 낮아졌으며 당시의 도검 전투란 대부분 기병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이버 마상전투였고, 보병에서는 하사관은 장창인 스펀툰, 보병들은 총과 총검이 있었으므로 굳이 검을 빼서 싸워야 할 계층이란 장교들 뿐이어서 실질적으로 도검끼리의 전투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패트리어트>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에 의해 마치 당시의 전투가 총 한두 발 쏘고 총검돌격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상당한 총격전을 주고 받고 나서야 비로소 총검 돌격을 실시했고, 대부분은 포격전과 총격전 와중에 대부분 승부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총격전을 버티지 못하고 약해지는 것을 포착하거나 무언가 교착을 타개할 한 수가 필요할 때 총검 돌격, 혹은 총격전 와중에 적 부대가 와해되어 패주하기 시작하면 그 때 엽기병(獵機兵)이나 경기병이 출동하여 추격하면서 칼로 베어 죽이는데 이러한 기병전투가 당시 도검이 전면에서 활약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무대였다.
따라서 군용 보병검술이 변화해야 할 요소가 없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커리큘럼은 대규모의 군대를 가르쳐야 하였으므로 공방의 원칙과 자세, 스텝을 간략하면서도 요점을 잡아 알기 쉽게 가르쳤으며, 복잡한 것은 제외시켰다. 펜싱 마스터들의 감수 아래 검리를 나타낸 그림을 붙이게 해서 항상 보고 참고할 수 있도록 하던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http://s3.amazonaws.com/magnoliasoft.imageweb/nmm/supersize/a1553.jpg](http: //s3.amazonaws.com/magnoliasoft.imageweb/nmm/supersize/a1553.jpg)
헨리 안젤로의 영국해군 커틀러스술 훈련도.[8]
척탄병 같은 정예 보병이나 해군 수병들은 행어/커틀러스 같은 짧은 칼을 지급받았으나 이 검술도 세이버 검술을 그대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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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세이버 검술의 변화 ¶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이버와 세이버 검술은 변화를 맞기 시작하는데 동유럽에서 전파되어 유러피안 브로드소드 검술과 융합된 것을 고전 세이버라고 하고, 펜싱적 요소를 받아들여 변화된 세이버와 그 검술을 근대 세이버라고 부른다.
양자의 경우 우선 형태부터가 다른데, 과거의 단순한 너클 보우나 D-가드의 간단한 손 보호구에서 스포츠 펜싱의 세이버 형태의 커다란 가드를 적용하게 되고 단순히 주먹을 쥐고 운용하는 과거의 손잡이 형태에서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운용하는 형태의 운용법으로 바뀐다.
고전 세이버는 크게 휜 편이지만 근대 세이버는 휨이 작으며, 고전 세이버에 비해 근대 세이버는 가벼운 편이다. 운용에 있어서의 차이는 고전 세이버는 어깨와 팔꿈치를 축으로 크게 휘두르지만, 근대 세이버는 손목을 주요 축으로 휘두른다.
양자의 차이는 세이버 검술 항목을 참조하자. 다음은 폴란드의 검술 어드바이저인 Janusz Sieniawski의 영상이다. 레이피어부터 롱소드 검술에 이르기까지 그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뛰어난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긴가민가한 부분은 이 영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 순서는 이하와 같다.
- 이탈리안 레이피어&대거
- 스몰소드
- 브로드소드 검술(훈련도구인 싱글스틱으로 시연)
- 고전 세이버 검술
- 근대 세이버 검술
- 롱소드 검술(캄프링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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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검술의 풍조의 격변과 함께 한때 크게 성행했던 롱소드와 소드&버클러, 레이피어 검술은 아무도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보존해야할 이유도 느끼지 못해서 결국 모두 소멸했다. 다행히도 과거 마스터의 저작물들은 귀족들의 수장고나 박물관, 도서관 등에 남아있었지만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19세기에는 기사도 문학이라든가 과거에 대한 환상, 동경, 억측과 호사가들의 허풍이 합쳐져 이미 그 당시에도 옛 서양 검술에 대한 잘못된 시각은 많았던 것 같다. 이때 옛 서양 검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앨프리드허턴(Alfred Hutton)과 작가 애거턴 캐슬(Egerton Castle)이었다. 당장 허턴의 저서 《Old swordPlay》에서 자신의 연구 목적은 환상과 거짓으로 가득한 옛 검술에 대한 편견을 타파하는 것이라 적고 있으니 그가 연구를 시작한 데에는 순수한 검객으로써의 열망과 열정도 있었겠지만 옛 검술을 둘러싼 수많은 추측과 환상에 대한 불만도 한몫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3/3c/Alfred_Hutton.JPG /400px-Alfred_Hutton.JPG](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 3/3c/Alfred_Hutton.JPG/400px-Alfred_Hutt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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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허턴(Alfred Hutton) 영국 용기병대 장교. 최종계급은 대위. 1839~1910.
그는 저서 swordplay》를 통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는데,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고전검술연구는 당대의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여러 매뉴얼들의 내용들을 취사선택한 이후, 당시의 검술적 경향, 즉 일직선 보법이나 더블타임 공방 등의 요소와 합체시켜 자기식으로 변형시켜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복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자기식 재구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일계 매뉴얼을 참고하지 못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매뉴얼을 주로 소스로 삼아 자료 자체가 부족하기도 했다.
![http://ejmas.com/jmanly/articles/2001/assault/fencinglecture.jpg](http://ejm as.com/jmanly/articles/2001/assault/fencinglecture.jpg)
A Lecture on Fencing (7th March, 1891)
![http://ejmas.com/jmanly/articles/2001/assault/2handers.jpg](http://ejmas.com /jmanly/articles/2001/assault/2handers.jpg)
Exercise with Two-Handed Sword
(14th April, 1894)
![http://ejmas.com/jmanly/articles/2001/assault/swordbuckler.jpg](http://ejmas .com/jmanly/articles/2001/assault/swordbuckler.jpg)
Old English Sword and Buckler Display
(28th March, 1891)
비록 잘못된 방법론과 자료의 부족으로 그의 고전검술 복원은 연구성과가 많이 싾인 현대에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던 고전서양검술을 연구하고 끌어내어 대중들에게 올바른 모습을 알리려고 노력했으며, 무엇보다 현대 서양검술 연구의 시초이자 대선배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 그가 남긴 세이버 검술 서적인 Cold steel은 19세기 후반의 근대 세이버 검술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료로써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으며 그 내용대로 검술을 배우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Cold steel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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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턴과 바롱 드 코숑을 비롯한 19세기 후반의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중세 검술 복원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반대로 6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동양무술에 대한 신비감이 전통 서양무술 복원의 열쇠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저런 게 없는가 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에는 학술적 차원의 연구가 매우 부족하여 사료와 연구가 없어 중세-르네상스 검술은 여전히 상상의 영역에 머물렀고, 그 대신 교범이 잘 남아있는 근대검술은 1970년대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매우 일찍 완료되었다.
중세-르네상스 검술 부문에서도 학계의 지속적인 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검술 문서들이 발견되어 1980년대에는 체계적으로 롱소드 검술을 해설했던 요아힘 메이어의 교범, 롱소드뿐만 아니라 온갖 농기구 무술까지 다량 수집했던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의 교범 등이 발굴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며, 마스터들의 계통과 계보까지 작성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허턴 시대와는 발굴된 매뉴얼의 양과 질 자체가 이미 큰 차이가 벌어져 있었으며, 이것이 그전까지 미지의 영역이었던 중세-르네상스 검술 복원의 배경이 된다.
여기에 검술 문서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시드니 앵글로 박사(Professor Sydney Anglo)가 관련 논문들과 서적들을 출간하면서 대중적으로 중세-르네상스의 검술문화 전반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며 이것이 현대 중세-르네상스 검술 복원의 뿌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드니 앵글로 박사의 책을 본 사람들이 검술사료를 직접 찾아서 번역하여 공유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중요한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이러한 사료적 데이터베이스의 확충에 의해 중세-르네상스 검술 단체가 90년대부터 태동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중세검술 연구 단체가 증가했다. 연구 수준도 상당히 발전했다. 사료들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올려놓고 해석까지 제공하는 중세-르네상스 검술 사료 위키인 위키테나워도 발족하여 활동하고 있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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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소드 검술(Langschwertfech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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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총검술(Modern bayonet exerc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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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버 검술(Saber exerc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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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소드 검술(Broadsword Exerc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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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플레이(Free-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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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허턴(Alfred Hu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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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밍 소드/숏소드(ArmingSword / Shortsword)
- 펄션(Falc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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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소드(Longsword, Langenschw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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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피어(Rapier)
- 스몰 소드(Smalls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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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소드(Broadsword)
- 백소드(Backs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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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버(saber, sab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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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웨폰(Training Wea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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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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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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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17세기로만 한정해도 140여권에 달한다.[2]
이쪽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휴 나이트(Hugh knight)와 토블러이다. 휴 나이트의 경우 체형은 둘째 치더라도, 프리 플레이 시스템을 부정하며, 모든 베기는 중단에서 멈춰야만 한다고 주장하여 중세-르네상스 마스터들의 가르침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중세-르네상스 마스터들의 저작을 바탕으로 세워진 서양검술계의 연구성과에서 마스터들의 저작을 부정하는 것은 가장 크게 비난받는 내용이다. 서양검술 연구의 선두로 평가받는 ARMA의 존 클레멘츠조차도, 그의 저서 르네상스 소드맨쉽에서, 카포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마스터들의 내용과 검리를 무시하고 자기류에 가까운 해설을 했다는 점 때문에 큰 비난을 받은 바 있을 정도다. 휴 나이트는 그런 점도 있지만, 연구 동호회 형식을 띠는 서양 검술계에서 돈을 받고 교습하는 체계를 취하는 점도 있고(이 점이 그의 교육 내용과 맞물려 큰 비난거리가 된다) 서양 검술계에서 자처하는 것을 자제하는 마스터의 호칭을 스스로 자처하는 것도 비난 거리가 된다. 실력도 검증되지 않았는데 마스터를 자처하는 것이 비난을 받자, 마스터가 꼭 실전에서 승률이 높아야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해서, '마스터'의 역사적인 개념까지 왜곡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의 추종자들이 여러 포럼에서 휴나이트의 논리를 신봉하며 분란을 일으키곤 한다.[3]
토블러는 여러 연구회에서 짧은 기간 수련한 것 정도로 단체를 열고 영상물을 내어 파는 것으로 비난을 받는 편이다. 즉 그 자신의 실력도 그렇지만, 남의 연구 성과를 빨리 베껴서는 자신의 것인양 선전하는 점도 비난을 받는 점이다. 거기에 그의 추종자들이 다른 단체가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어 놓으면 토블러의 가르침을 진리로 떠받들고 일단 태클부터 거는 것 때문에 ARMA를 비롯해서 많은 단체가 이러한 행태에 학을 떼어 연구성과를 비공개하려는 경향도 있고, 존 클레멘츠의 성격이 더 까칠해진 원인이기도 하다. 주로 SwordForum International에서 많이 볼 수 있다.[4]
그는 시 재정을 횡령하여 당시로써는 초호화판인 풀컬러 검술서를 편찬했으며, 이 작업에 평생을 쏟아부었다. 결국 그는 횡령혐의로 사형당하게 되지만, 그의 저작은 서양검술계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5]
다만 전쟁터에서 버클러의 사용은 장교나, 장교 혹은 군기를 호위하는 병사들 정도였다. 버클러와 롱소드는 민간무술계에서 더 각광을 받게 된다.[6]
단, 당시에는 레이피어는 사이드소드와 우리가 아는 레이피어를 전부 포괄해서 쓰인 보통명사에 가까웠다.[7]
이 시대부터 브로드 소드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사용된다. 컷앤스러스트 소드라는 것은 후대의 수집가들이 붙인 명칭. 그 이전에는 그냥 Sword라고만 불렀다.[8]
칼자루는 방어할 때의 위치, 원 안의 선들은 벨 때의 궤도이며, 둥근 원은 물리네(Moulinet)를 나타낸다. 물리네란 한손칼은 강하게 베었을 때 멈추기가 쉽지 않으므로 벤 그 방향대로 그대로 가서 원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