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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형래.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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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external image]](http://imgnews.naver.com/image/mtentertain/2007/07/11/2 007071111151446238_1.jpg)

이름 심형래(沈炯來)

출생 1958년 1월 3일, 서울특별시

신체 167cm, 75kg, B형

학력 여의도고등학교

데뷔 1982년 KBS 특채 개그맨

가족 2남 5녀 중 막내, 前 부인,

종교 천주교

KBS 코미디대상 대상

김형곤
(1987)

심형래
(1988)

임하룡
(1989)

Contents

  1. 소개
  2. 개그계 활동

2.1. 공중파 개그맨 - 레전드 오브 레전드

2.2. 영화배우 겸업

  1. 영화계 활동

3.1. 무모한 도전

3.2. 과대망상

3.3. 본격적으로 SF 영화에 뛰어들다

3.4. '신지식인' 1호. 그러나

3.5. 디 워 논란과 언플 및 마케팅

3.6. 라스트 갓파더, 한계에 봉착하다

  1. 몰락

4.1. 영구아트무비 도산

4.2. 파산 직전

4.3. 도덕성 타격

4.4. 회사 자금 유용

4.5. 국고 탕진

4.6. 기사화 된 그동안의 행적

4.7. 반응

4.8. 이 상황에서 디빠들의 반격

4.9. 디빠 진영의 붕괴

4.10. 시위의 달인

4.11. 사태 수습을 위한노력

4.12. 차기작

4.13. 개인파산 신청과 이혼

4.14. 빚 탕감 결정

  1. 아직도 버리지 못한 망상
  2. 코메디계 복귀 눈물의 똥꼬쇼?
  3. 심형래 영화의 문제점

7.1. 빨리 찍기는 자랑이 아니다

7.2. 아동 영화에 부적절한 장면들

7.3. 21세기 아이들의 수준을 무시하는 제작 철학

7.4. 스태프의 역량이 딸렸던 것도 아니다

7.5. 예산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7.6. 엉망인 각본과 연출

7.7. 총평

  1. 심형래와 언론
  2. 기타

9.1. 총덕후

9.2. 직원 폭행

9.3. 도박

  1. 망언

10.1. 내용

10.1.1. 2007년 이전

10.1.2. 2007년 이후 ~ 2011년 이전(망하기 전)

10.1.3. 2011년 이후(망한 후)

10.2. 망언에 대한 총평

  1. 주요 출연작

11.1. 공중파

  1. 영화
  2.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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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

한국코미디언, 영화배우, 영화감독. 1958년 1월 3일생.

개그계와 영화계의 레전드이자 바보.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개그계에서는 바보 연기레전드가 된 인물이라면, 반대로 영화 감독으로서는 레전드급 바보가 되어 안 좋은 의미로 남게 되었다는 뜻을 말한다. 과학 관련 인물에 비유하자면, 개그계의 우장춘이자 영화계의 황우석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심형래는 황우석 파동이 터졌을 때 "황우석 같은 영웅 짓밟지 마라!" 며 광적으로 황우석을 옹호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유머일번지 리즈시절에는 어린이들의 꿈과 웃음이었을지 모르나까방권 21세기 현재는 80년대식 민족 중흥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난 듯한 애국 마케팅과 졸렬하고 유치하고 대충 짓는 시나리오 작성능력, 시대와 전혀 맞지 않는 문화적 코드, 감정에 호소하는 언론플레이, 말만 번지르하게 내뱉는 언행불일치를 통해 돈을 시궁창에 내다버리는 저질 영화를 만든었던, 영화 감독으로서는 역량이 매우 떨어지는 인물이었고, 뿐만 아니라 온갖 연줄과 인맥을 동원한 부정한 수법과 월급 체불로 열정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사복을 채우는 등 그야말로 한국 문화 산업에 안 좋은 선례를 남긴 흑역사 그 자체. 영구까임권 심영래 한 마디로 개그맨과 영화 감독으로서의 행보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참고로 딴지일보에서는 심흉내라고 부른다. 흉내를 제대로 내냐면 그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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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그계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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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공중파 개그맨 - 레전드 오브 레전드 ¶

1982년 MBC 코미디언 공채로 연예계에 데뷔했으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KBS로 이적하고 나서이다. 이 당시 코미디계는 만담식의 개그가 주류였으나 심형래는 바보 연기에 능해서 곧 주목을 받게 된다.

**리즈시절에는 코미디계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였다. **굳이 비교한다면 한국의 찰리 채플린 정도라고 볼 수 있지만, 당시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린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채플린의 무성영화적 몸개그는 사실 심형래의 그것과는 다른 셈이다. 채플린 영화는 군사독재정권이 그의 반독재적이고 사회주의적 성향을 문제삼아 수입을 금지했고 1989년에서야 수입되었지만, 채플린에 대한 언급이나 채플린 코스프레는 많은 연기자들이 했었고 70년대 이상한/이상해 콤비가 채플린형 몸개그로 인기를 끌었다.

보통 슬랩스틱 코미디, 즉 몸개그의 전설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심형래라는 이름 외에 그의 닉네임인 **영구**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 방송계에서는 이주일과 더불어 최고의 개그맨으로 인정받으며 무수한 작품들을 남겼다. 아직까지도 심형래보다 몸개그를 잘한다는 평이 난 개그맨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이 입증된다. 특히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기 위해 다른 개그맨들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들을 살려 자신만의 캐릭터성을 확고히 했다. 때문에 똑같이 개그맨들 속에 섞여있어도 언제나 분장이나 의상면에서 더 웃기고 더 튀었기에 순식간에 주목을 받았다. 거기에 심형래와 같이 분하는 배우들이 일명 '심형래 바보 만들기' 식의 개그를 하면서 더욱 부각되었는데 주로 '문이 열려있다.→심형래에게 문을 닫으라고 한다.→심형래가 문을 닫고 오면 문이 자동으로 다시 열린다.→이후 심형래에게 츳코미를 건다.' 식이나 무언가를 하면 항상 심형래만 고생시키는 패턴은 상당히 잘 먹혔다. 개그콘서트에서 황현희변기수처럼 '정상인 바보 만들기' 개그와는 정 반대인 셈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후반이 리즈시절이었는데 대히트를 친 개그 캐릭터로는 토요일 저녁마다 하던 유머일번지의 영구가 대표적이며 일요일에 저녁에 방영되던 쇼 비디오쟈키의 파리, 펭귄이 있다. 그런데, 사실 파리와 펭귄은 일본 민방의 개그 프로에서 가져온 표절 캐릭터였다.

중간에 SBS 개국 때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SBS로 이적했다. 지금과 달리 타 방송국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왔던 감자골 4인방이 KBS에서 줄빠다 거의 매장되다시피 잔인한 처우를 당했던 경우가 있을 정도로 전속 출연의 개념이 심할 때라서 화제가 되었다. 나중에야 원로 중의 원로 임하룡이 코미디언 프리선언을 할 정도였으니 최고 개그맨이 이적은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SBS에서 자리를 못 잡고 KBS로 다시 이적했고 이 이적은 KBS의 좋은 선전거리가 되어서 아침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SBS 디스와 KBS에 대한 회한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SBS로 이적한 타방송 출신 원로 개그맨 거의 대부분도 용도 폐기되다시피 했던 경우도 있었지만, 심형래의 경우 그래도 90년대 중반 KBS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코미디 일번지'에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등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걸 보여줬다. 이 와중에 영화 용가리를 제작하게 된다.

이후 개그 콘서트에서는 2000년에 몇 주 출연하다 말았고, 2000년대 초중반 쇼행운열차가 그의 마지막 TV코미디 커리어가 된다. 하지만 쇼 행운열차는 꽤나 마이너한 프로그램인지라 사람들의 기억 속엔 용가리 이후로 코미디는 은퇴한 줄 알고 있다. 물론, 복권을 주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간간히 심형래를 봤다.

여담으로 코미디 스타일이 새터민에게도 먹히는 모양이다. 새터민들이 한국에 와서 접하는 개그콘서트 같은 것은 이해도 어렵고 웃음 코드도 다른데 1980년대 심형래 코미디는 그렇게 재미있다고.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 블로그로 유명한 새터민 주성하 기자는 북한 주민들의 문화적 코드가 한국의 30~40년 전과 거의 같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북한 주민이 개그 콘서트 보면 웃길까?"

당시의 개그맨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똥군기와 관련한 사건이 하나 존재하는데 한 번은 지석진이 맘에 안 든다고 김수용과 유재석에게 군기를 잡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석진이 후배긴 했지만 둘 보다 나이가 많은 탓에 김수용과 유재석이 전전긍긍하다 하는 수 없이 밀실로 데려가 군기를 잡는 척만 했는데 심형래에게 들켜서 셋 다 맞았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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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영화배우 겸업 ¶

이렇게 개그계를 섭렵하고 가끔씩 영화도 찍었다. 김형곤이나 이주일 같은 이들도 이렇게 원맨쇼에 의존하던 영화를 찍던 시절이었다. 이런 원맨쇼 영화중에서 김형곤이 주연한 대표작은 "여자는 괴로워"가 있고, 이주일이 주연한 영화는 "이주일의 리빠똥 사장",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등이 있다.

1984년 "각설이 품바 타령" 을 시작으로 영화배우도 겸업하기 시작했다. 김청기 감독과 함께 한 한국 어린이 영화에 한 획을 그은 SF물 "우뢰매" 의 에스퍼맨 역으로 영화배우로서도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우뢰매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합성된 특촬물로서 그때부터 SF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뢰매 시리즈는 꽤 성공을 거두어 총 9편이 나왔는데 관중 동원력이 탁월했던 그가 등장하지 않은 6편은 관중수가 크게 줄어 이후 시리즈에서 다시 복귀하기도 했다.

우뢰매를 떠난 그는 남기남 감독과 함께 영구 캐릭터로 대성공을 거둔다. "영구와 땡칠이" 를 비롯한 영구 시리즈로 많은 어린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외에도 남기남 감독과 '따귀 일곱대' 등 어린이 영화 외적인 장르에서도 열연을 했고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슈퍼홍길동이라는 사극성 코미디 영화도 찍었다. 단, 이 작품은 7편까지 나온 나름 비디오물 중에서는 준수한 작품인데 심형래는 1편만 찍었다. 사실 1편은 이경규, 조춘, 국정환 등 출연진이 의외로 빵빵한 작품. 2편 이후부터는 김정식이 심형래에게 바톤을 넘겨받았다.

"우뢰매" 가 200만 관객이네, "영구와 땡칠이" 의 관객 동원이 흥행 1위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심형래는 영화계에서 자기 영화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영화 잡지들만 봐도 이런 양산형 어린이 영화는 영화 취급을 안했다. 로드쇼는 1990년 1월호를 비롯하여 아예 영구와 땡칠이를 흥행 순위에 넣지도 않았지만 스크린은 1990년 1월호에서 영구와 땡칠이가 서울관객 43만으로 로드쇼에서 1위로 선정한 서울무지개의 30만을 제치고 한국 영화 흥행 1위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8~90년대 시대상 지금처럼 전산망 집계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관중 집계는 주먹구구식이었고 이것은 높으신분이나 영화계를 흔드는 조폭들의 세금 포탈로 악용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와서는 이때의 이야기를 명확히 검증할 방법이 없다. 단지 실시간으로 당시 상황을 체험했던 사람이라면 매 상영 때마다 극장이 터져나가라 자리를 채우던 꼬마 관객들의 모습이 기억날 거다.

게다가 당시 영구와 땡칠이를 비롯한 소위 어린이영화는 일반 영화관이 아닌 어린이회관 같은 공공기관 위주로 상영을 했는데 이는 어린이 영화라는 공공성을 생각해서 극장보다 문턱이 훨씬 낮고 대관료도 상당히 싸서 전략적으로 접근을 한 것이지 상영할 곳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 영화들과는 레벨 자체가 다른 영화 하얀전쟁이나 돌로레스 클레이본도 시사회나 상영은 호암 아트홀에서 했다. 역시 전략적인 접근이다.

그렇다고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회관으로 돌면서 상영하면 더욱 실제 관객수를 집계하기 어렵고 다른 상업 영화와 같은 라인에서 비교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쨌든 영구와땡칠이가 흥행해서 당시로써는 엄청난 수입을 올린건 사실이다. 당시 이 영화를 지원했던 '대원' 이 이 영화 덕에 파산 직전에서 기사회생해서 대원 사장인 정욱은 지금도 심형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고 감독인 남기남도 어느 호러영화 사이트와 인터뷰에서 "내 영화 인생에서 영구와 땡칠이만큼 돈 많이 번 적이 없어." 라고 말할 정도로 고마워하고 있다.

이렇게 심형래의 출연작은 20여편이나 된다. 이 정도면 중견 영화배우로 봐줘도 무방하다.

이 상태에서 바로 은퇴하고 가만히 있어도 편안한 생활을 했을 것이고 크게 까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고 TV에 출연 못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서장훈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쇼 프로그램에 자주 초대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 문서가 쓸데없이 길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몇 년 간 연예인 소득 종합 1위를 할 정도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으며 재산 축적에도 힘써 강남에 빌딩이 몇 채나 되고 수도권에 알짜배기 땅이 몇 군데나 되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당시 심형래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으며, 현재 김연아급의 인기를 가졌던 아시안 게임 금메달 리스트와 사귀고 있었다는 데서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심형래는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후반까지 강남에 대규모 유흥업소를 여러 개 운영하고 있었다. 본인은 유흥업소의 운영이 흑역사라고 생각하는지 자서전에는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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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화계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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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무모한 도전 ¶

그런데 그는 그런 편안한 삶을 걷어차고 영화감독에 도전하기 시작했다.그 삶을 지속했다면 욕을 덜먹었을텐데... 아마 남기남을 보면서 "영화 연출이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네"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심형래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영화계에서 배우가 제작 내지는 감독을 하는 역사는 의외로 유구하다. 박준규의 아버지 故 박노식 옹도 전성기 말년에는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 열차를 타라애꾸눈 박 등 본인이 주연으로 분한 여러 편의 조폭영화를 연출했고 허준호의 아버지 허장강 옹도 이런 쪽에서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박준규와 허준호가 모 토크쇼에서 한 말에 의하면 어릴 때 두 사람이 같이 크고 같이 사고치고 집안도 같이 망해서 더 친하다고 한다.

개그맨 출신으로 영화감독 및 주연을 맡았던 경우는 여럿 된다. 서세원이 심형래보다 먼저 희대의 흑역사 납자루떼를 감독했다가 쫄딱 망하고 나서 '조폭 마누라'의 제작자로 잠깐 성공했다가 감독으로 다시 말아먹었던 '도마 안중근' 이 있고 이경규가 감독 겸 주연을 맡아서 제작한 복수혈전이나 심형래가 유머 1번지에서 나오던 코미디를 영화로 만든 전유성 감독, 심형래 주연의 내일은 챔피언 같은 영화도 있으나 죄다 흥행에서 망했다. 그나마 개그맨출신 중 유일하게 한국영화협회 정감독 출신인 박세민 감독의 "토요일밤부터 일요일새벽까지"란 영화는 대박의 히트를 친 유일한 개그맨출신의 영화[1]이다.

그러나 서세원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은 심형래처럼 후술할 만한 병크 및 논쟁을 고의로 일으키지 않았다. 더불어 서세원도 심형래 못지 않게 논쟁 및 범죄, 아주 화려한 병크가 많긴 하다. 조폭마누라가 성공할 당시 서세원이 하던 말은 디 워 때 심형래 수준이었으며 이후로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인수 과정에서 일, 탈세 같은 여러 일로 역시 범죄 및 논쟁거리를 만들었고 2014년에는 이승만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서 하던 말로 역시 심형래와 똑같이 한국 영화계가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는 망상과 허세나 되풀이하고 있다. 상세한 건 서세원 항목 참고.

반면 이경규같은 경우는 배우와 영화의 분위기가 전혀 맞지 않아서 망했을 뿐 각본 자체는 꽤 준수한 편이였다. 이경규는 복수혈전에서 연기력도 꽤 준수했고 대본도 당시 한국영화 치고는 상당한 수작에 속했음에도 **이경규의본업**이 복수혈전 흥행 최대의 걸림돌로 다가왔다. 진지해야 하는 장면도 관객들이 단지 이경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폭소를 터뜨린 게 아쉬웠던 점이었다. 그러니 되려 심형래가 주장한 "개그맨에 대한 전업 편견"은 이경규가 할말이지, 자신이 주연도 하지 않은 용가리와 디워로도 말아먹은 심형래는 편견에 대해 말 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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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과대망상 ¶

심형래의 과대망상은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는 때부터 눈에 띄었는데 1990년대 초반 "사랑방 중계" 라는 토크쇼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 한 일반인 학부모가 "어떻게 그런 영화로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끌어모을 생각을 하냐?" 고 하자 씩씩거리면서 "자신의 영화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 때문에 한국 영화가 발전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감독의 면전 앞에서 대놓고 저질이란 식으로 면박을 주는걸 보면 과거 악명높았던 모아줌마단체가 연상되는데, 절대로 그단체가 아니라 방청객으로 나온 한 학부모가 영구영화를 본 자신의 아들이 영구의 어투를 흉내내며 다니기 때문에 심형래 영화가 매우 비교육적이라는 견지에서 한 말이다.

비록 1990년대 초반 한국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에 치이고 홍콩 영화에 채이는 암흑기이긴 했어도 그가 당시 만든 영화의 질에 비하면 심형래는 스스로를 너무나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류 영화계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심지어는 울먹이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아래에 언급되었듯이 실제로 인터뷰마다 충무로 영화를 무시하고 디스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물론 충무로 사람들이 심형래를 우습게 본 건 사실인데[2] 심형래의 언플 능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벌떼 같은 디빠들 때문에 귀찮아질까봐 공식적인 인터뷰에서는 아예 심형래를 존중해주는 척하면서 언급하는 것 자체를 꺼려했다.

"[봉준호 감독은 누구 말대로 이무기 나오는 영화 찍다가 망하는,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한국 영화 산업에 파탄을 일으킬 수 있는 대재앙이 안 일어나 천만다행이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 76&aid=0000069148)" 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이를 보면 심형래의 영화 작업을 매우 비판적으로 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심형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대놓고 디스한 적은 없으며 이는 김조광수를 제외한 다른 충무로 영화인도 마찬가지다.

![c0000487_09080042.jpg](//rv.wkcdn.net/http://rigvedawiki.net/r1/pds/c0000487 _0908004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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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의 눈에 띄기 위한 내 작전은 다양했다
조직, 규율, 통제를 싫어한다는 인간이 회사에서 하는짓은 독재자 뺨쳤다.하기사 연산군도 조직, 규율, 통제는 싫어 했었지

심형래는 이렇듯 자의식이 굉장히 강했으며 **학력위조**도 서슴지 않았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고 수십 년간 주장하면서 '개그맨이지만 머리도 좋다' 라는 것을 은근슬쩍 어필했으나, 사실 고려대학교 평생교육과정 단기 수료였을 뿐이었다는 게 학력위조 열풍 때 밝혀졌다. 거기다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 한 번 한 것을 가지고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 겸임교수(…)**라고 자칭하고 다니다가 서울대학교 측에서 이를 문제삼자 "담당자의 착오였다." 고 발뺌했다.

실제 알려진 것은 여의도 고등학교 졸업. 즉, **고졸이다. **이 부분도 미묘한 흑역사인데, 여의도 고등학교 출신들은 심형래 리즈시절에도 동문 취급을 안했다. 1973년 개교한 여의도 고등학교는 초창기 주간반과 야간반이 있었는데 심형래는 야간반 출신이란 설이 파다하다.

허나, 이후에 출연한 방송 등에서 오해드립을 시전했지만 이미 자서전에 자랑스럽게 고려대학교 출신이라고 써넣은 건 이미 전설이다. 영구아트가 도산한 현재, 어차피 이미지가 막장이 된지 오래전이라 문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심형래는 고려대학교 동문이 아니라 고려대학교 홍보대사라고 보는 쪽이 정확하다.

1980년대부터 심형래의 고려대 동문 드립은 아주 유명하며, 2000년 방송된 개그 콘서트를 비롯하여 그 밖의 예능 프로에서 연고대 출신 연예인들이 나와서 동문대결을 했을 때 심형래는 자주 참가했다. 사실 고려대 측도 할 말이 없는 게 학력위조를 확인을 해 줘야 할 학교 측이 나서서 오히려 심형래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개그콘서트를 고려대에서 촬영한 적이 있는데, 특별 초대손님으로 자랑스런 선배라며 심형래가 나오기도 했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공식행사에서 대놓고 말하는데 암말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력위조가 밝혀진 다음에 고려대는 "학부는 아니지만 고대에서 개설한 과정을 수료했으므로 넓은 의미의 동문으로 본다." 는 드립을 시연했는데, 당시 명문대학들이 돈을 벌고 유명인사들을 이용해 학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최고경영자과정, 평생교육원 등을 운영했다. 교육도 하지만 수강자들을 자기 학교 인맥으로 묶어 동문의식을 심어주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중장년들이 서로 소통해 동업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가방끈 비슷한 것 하나 걸쳐주고, 학교는 수업료받고 기부도 받고 유명인 홍보도 하고 했다.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아직도 유명 연예인들을 학력과 상관없이 입학시키는 관행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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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본격적으로 SF 영화에 뛰어들다 ¶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호기롭게 영화계에 도전하였다. "영구와 공룡 쮸쮸" 를 찍었을 때 동시에 "쥬라기공원" 이 개봉하여 말아먹었다.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강남의 빌딩을 비롯한 수도권의 알짜배기 부동산을 모조리 팔아버렸다. 그냥 10년만 기다린 후에 팔아서 찍지....

흔히 "티라노의발톱" 이 "쥬라기공원" 때문에 신나게 깨졌다고들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쥬라기 공원은 1993년 7월 17일에 개봉되었고 티라노의 발톱은 1994년 7월 16일 개봉했으므로 시기상으로 쥬라기 공원이 1년 일찍 개봉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쥬라기공원과 맞붙어 망한 것은 '영구와 공룡 쮸쮸'였다. 이는 심형래 본인이 토크쇼에 나와서 밝혔던 사실. 영구와 공룡 쮸쮸 포스터를 붙여놓으니 바로 그 옆에 턱하니 쥬라기 공원 포스터가 붙더라… 라는 식으로 반 농담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아니야 언제부턴가 티라노의 발톱이 쥬라기 공원과 얽혔던 걸로 와전되기 시작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독자로 하는 과학잡지 과학소년 1996년 12월호에 심형래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역시 티라노의 발톱이 쥬라기 공원에 의해 참패했다고 언급 되었다. 본인이 직접 언급했는지는 미지수이고, 혹여나 그가 이를 직접 언급했더라도 헷갈려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본인이 용가리 개봉을 앞두고 쓴 자서전에서는 '티라노의 발톱은 쥬라기 공원에 밀려 대참패를 겪었다.'라고 썼다. 심지어 티라노의 발톱 시사회 맞은편에서 쥬라기 공원이 상영되었다는 대목도 있다.

그래도 괴수물 매니아들에겐 꽤 컬트적인 인기를 모았다. 국내 호러영화 사이트 호러존에서는 티라노의 발톱에 별점 5개 만점을 매기기도 했고, 디까의 대표주자 중 한 명인 허지웅도 디 워는 티라노의 발톱이 이룩한 장르적인 성취를 다 까먹은 망작이다 라는 식으로 평한 적 있다. 디 워는 망작이지만 티라노의 발톱은 높이 친다는 뜻이다. 해외 매니아들 중에서도 괜찮은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덕분에 한국에서 중고 비디오를 팔던 한 사이트에서는 해외로부터 온 티라노의 발톱 비디오를 찾는 주문이 꽤나 많았던 적도 있다. 하긴 수공업으로 만든 공룡 모형은 열악한 조건에선 괜찮았던 건 사실. 다만 줄거리 및 여러가지가 문제였지만 괴수물 치고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영화는 몇 안된다.[3]

티라노의 발톱의 처참한 실패를 맛본 이후 그는 특수효과와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크게 집착을 하게 된다. 토크쇼에 나와서 회상한 바에 의하면 공룡 쮸쮸는 애초에 제작이 잘못되어 양팔을 크게 펼치지도 못했다고 한다. 반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탄생한 쥬라기 공원의 공룡들은 훨훨 날아다니는 걸 보고 그래픽 분야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쥬라기 공원에서도 스탠 윈스턴이 참여한 실사로 만든 움직이는 공룡 로봇이 꽤 많이 쓰였다는 점이다.

사실 티라노의 발톱이나 공룡 쮸쮸 이후에 나온 '파워킹(1995)' 이나 '드래곤 투카' 는 당시의 국내 수준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높은 퀄리티의 특촬효과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뢰매나 혹은 그 아류 작품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하지만 호평을 받은 파워킹은 심형래가 제작만 했을 뿐 감독은 김청기였고, 적어도 감독으로서는 김청기가 심형래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 드래곤 투카는 아무튼 당시 3DO 게임기를 수입하던 LG의 협찬을 받아 PC용 게임도 나오려는 등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게임의 실제 개발은 당시 국내 굴지의 PC게임 개발사 중 하나였던 미리내 소프트웨어. 드래곤 투카 3D라는 이름이다. 터미널 벨로시티 같은 비행형 FPS로 추정된다. [하드코어게이밍101의 한국게임 소개 페이지에서](http://www.hardcoregaming101.net/korea/part1/company- mirinae2.htm#dragontuca)

그리고 그는 제로나인 엔터테인먼트라는 영화사를 설립하지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특성상 자금이 빨리 바닥날 수밖에 없었고 해당 직원들은 라면을 먹어가면서 근근히 회사를 꾸려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영화사 설립 뒤에 하도 처리할 일들이 많았던 나머지 그는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하도 많아서 하루는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다시 나갈 때가 되어 가려고 하니, 그의 어린 딸이 나가는 그에게 **"아빠, 다음에도 우리 집에 꼭 놀러 오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딸에게 아버지는 어쩌다가 놀러 오는 사람이지 함께 사는 사람으로 인지가 안 되었던 것이다. 그는 꽤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이 말이 항상 마음에 많이 맺혔다고 한다.

90년대 말 쯤에 인터넷 영화로 저질 섹스&조폭 코미디 '조폭닷컴' 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다지 관심을 못 받았는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심형래 팬들에게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조폭의 덜떨어진 아들 설정은 라스트갓파더의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사실 심형래의 영화, 특히 용가리디워SFX라면 모를까 SF라고 보기 어렵다. 디 워는 오히려 설정만 보면 판타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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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신지식인' 1호.

그러나… ¶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일본의 괴수 영화 고지라의 미국 리메이크 버전인 고질라(Godzilla, 1997)에 비견되는 한국형 괴수 영화인 용가리라는 영화로 272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뉴스에 뜨면서 다시 한 번 급관심을 얻게 된다. 1998년 당시의 달러 환율로 보자면 272만 달러는 우리나라 돈으로 _39억 원_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공중파 뉴스에서도 이와 관련된 뉴스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건 구라였고 심형래의 언플질이었다. 모든 언론사에서 심형래를 찬양하기 바쁜 가운데 씨네 21만 이것이 부풀려졌다고 보도했다. 오오 씨네 21 오오 이에 발끈한 심형래는, 영구아트의 직원들을 보내 씨네 21의 모 회사인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도록 했다. 후에 영구아트가 망하고 나서 그 때 시위를 한 직원 중의 한 명이 한겨레신문사 기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계약은 영화를 다 만들고 맺는 게 아니다. 프로모션 동영상을 가지고 선계약을 맺는 건데 물론 이 과정에서 실제 나온 물건을 보고 가격을 깎거나 계약 파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훗날 2011년, 심형래가 완전히 몰락하고 난 이후에 MBC의 PD수첩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용가리의 실질적인 계약금은 272만 달러가 아니라 180만 달러였다. 이 가운데에 150만 달러는 일본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심형래는 항상 "용가리가 고질라보다 재밌다." 고 주장했는데 고질라 자체가 미국에서 혹평을 받은 영화였음에도 용가리는 막상 나오자 그 막장 고질라보다도 훨씬 더 막장이었다. 당시 프로모션 동영상은, 떡밥 영상 + EBS 교육방송 영어 강사 아줌마들이 비명 지르는 흉내 내는 수준이었다.

괴수 영화 팬들 중에서는 그래도 '용가리가 고질라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말 그대로 괴수물 팬 입장에서는 X만한 전투기를 피해 달아나는 고질라 따위보다는 그래도 용가리가 낫다는 논리. 사실 괴수 영화 팬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이야기다. 특히 원조 고지라 시리즈 골수팬들은 미국판 고질라를 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단, 영화 완성도 자체가 용가리가 고질라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디빠들은 용가리가 고질라보다 낫다고 주장할지도 게다가 고질라는 원작파괴를 심하게 했으며 몇몇 고증오류 때문에 고지라 팬들에게 막장 소리를 듣는 거지 **용가리 따위보다는 cg나 스토리도 훨씬 더 좋고 잘 만들었으며 괴수영화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 게다가 용가리는 1999년에 고질라는 1998년에 개봉했다.[4]

거기에 용가리는 애초에 수원시의 지원을 받아서 제작했는데 심형래는 이 용가리가 대차게 망해버렸기 때문에 수원시와 한바탕 시원하게 소송을 벌였다. 결과는 심형래가 신나게 두들겨 맞고 심형래는 빚더미에 올랐다. 물론 디워의 흥행 수입으로 이 빚을 갚을 정도의 돈을 벌긴 했다. [이 빚을 모두 회수하는 데 6년이 걸렸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 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24623)

김대중 정부는 이렇게 한국이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SF 영화로 할리우드에 도전하는 심형래를 "신지식인 운동"의 모델로 선정하였고 심형래와 같은 인재가 많이 나와야 IMF를 빨리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심형래를 터무니없이 치켜세워주었다.

이후 자서전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해서 못하는 겁니다』도 펴냈고 이 때문에 그동안의 영화 인생과 성공 실패담이 동시에 세상에 알려졌다. 실리콘으로 만든 공룡 인형 속에서 배우가 탈진해 쓰러진 에피소드나, 빚을 내가며 집을 팔아가며 돈을 모아 찍은 티라노의 발톱 개봉일 썰렁한 극장 입구에서 비를 맞으며 서있던 이야기나, 용가리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특수효과 회사인 영구아트무비 등을 만든 일화 등이 알려지자 위대한 도전자로서의 이미지가 생겨났고, 그동안 그를 비웃던 사람들조차 어느 정도 그에게 호의를 가졌다.

하지만, 국내 개봉을 시작한 용가리는 제작비에 걸맞지 않게 완전 개판이었고 그의 기대는 유리처럼 처참하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 후 해외 판매용으로 다시 재편집을 해서 판매를 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결국 평생의 꿈이었던 SF 영화를 찍었지만, 첫 국내 개봉도 영 시원찮았고 미국에서는 사기당하여 돈까지 날려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작비 증발에 대한 핑계처럼 보이는 것은 왠지 좀 그렇다. 결국, 용가리 치킨이나 장난감 등 부가상품만 몇 개 팔아먹고 끝냈다.

더더욱 안습인 건 일본에서도 렌탈시장에 비디오를 내놨지만 한 번도 대여되지 않은 비디오로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런데 반대로 미국에서는, 한때 대여점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진실은 모 대여점 체인업체의 SF 부문 극장 미개봉작 대여인기순위 1위. 흠좀무. 미국 수출을 일본계 회사가 거의 다 하다시피 해서 주인공 이름이 일본 이름으로 바뀌는 등 이런저런 흑역사가 많다. 아직도 미국 괴수물 덕후들에게 물어보면 '일본영화 용가리' 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조금 있다고 한다. 그나마도 용가리를 알고 있는 경우도 김기덕 감독의 60년대 용가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론은 용가리는 그냥 망한 것이다.

본인의 설명으로는 저작권 처리를 잘못하여, 해외에서는 아무리 판매 실적을 올려봐야 심형래씨 본인에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웬 애먼 변호사가 그 수입을 다 가져간다고… 이후로 '디 워' 에서는 그 부분을 더 철저하게 체크하게 되었다고 하나 그건 심형래의 거짓말 변명이고 실제로는 저작권으로 돈이 나올 만한 작품이 전혀 아니라서 하나도 못 받는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과연 그런 막장 변호사가 정말 존재하며 공개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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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디 워 논란과 언플 및 마케팅 ¶

그 뒤에 그 유명한 '디 워' 를 발표했고 개봉 몇 년 전부터 언플에 입소문을 타서 관객수는 국내에서 어느 정도 얻었고 호응은 그럭저럭 얻었지만 호평 이상으로 악평도 많았다. 게다가 디 워가 끝난 뒤 마지막 장면에아리랑 BGM을 딱 틀어놓고 세피아 톤 배경에 자신의 사진과 일대기 비슷한 것, 디 워로 세계시장을 정복하겠다는 요지의 장면을 삽입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 본인의 자의식과 망상이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마케팅에 이용하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시켜주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물론 해외판에는 이런 것을 넣지 않았다.

요컨데 영화 감독으로써의 심형래는 좋게 말하면 위에 언급된 자서전 제목처럼 근성 가이, 나쁘게 말하면 감독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모른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능력은, 그야말로 안습 그 자체지만 개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감성 마케팅이나 언론플레이의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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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온갖 고초를 겪어왔다고 주장하며 악어의 눈물 눈시울까지 붉히는 심형래.

언론에 인터뷰할 때는 충무로로 대표되는 한국 주류영화계가 자신을 무시하며 자신은 온갖 악조건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며 약자 드립을 시전, 뭇 영화팬들의 동정을 샀으나, 실제로 그는 언플질과 정치질로 한국의 그 어떤 제작자보다도 자금을 끌어오는데 성공적이었으며 완성도와 미학성을 중시하는 영화 평론가들의 입김이 센 씨네21을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그에 대해 실드와 호의적 보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약자가 아니라 투자금을 독식하는 강자였다.

이 외에 한국 국민의 정서에 걸맞는 애국심과 도전정신 및 기타 등등 감정적 심리를 자극한 효과가 있었는지, 디워는 한국에서 842만 6973명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의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제작비가 300억원이라고 가정해도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의미는 없다. 심지어 심형래는 제작비가 700억원까지 들어갔다고 했고, 2009년에 나온 최종 정산으로는 322억원을 들여 약 170억원이라는 거액의 적자를 봤음이 확인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제작비 100억을 들여 275억원의 순익을 낸 것과 정말로 대조적이다.

게다가, 정작 그 목표 시장이라는 미국에서의 흥행 성적을 보면 디 워의 거품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한국 감독이 만든 영화로선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1097만 7721달러를 벌어들이며 일단 한국 감독 영화로 최고 대박을 이뤘다고 주장하나 이는 수치상의 착시현상이다. 먼저 이 영화의 미국 "배급" 을 맡은 프리스타일사는 배급회사가 아니라 배급 대행 회사이다. 즉, 디 워의 배급을 판권을 "매수" 한 것이 아니라 "대행" 만 해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디 워가 극장에서 흥행 실패를 해도 프리스타일사는 전혀 손해를 보지 않고 수수료를 챙긴다. **참고로 프리스타일사의 "고객" 중에는 괴작 감독 우베 볼도 있다. 순수하게 얻은 극장 수입은 단 400만 달러이며 DVD 및 부가판권 합쳐봐야 1000만 달러를 넘긴다. 그런데 현지 마케팅비 1500만 달러는 배급사인 프리스타일이 한 것이 아니라 심형래 측이 부담해서 결과적으로 5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

이에 비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2007년 3월 9일에 미국에서 개봉하여 2007년 7월 12일까지 극장에서 220만 1923달러를 벌었고 2004년 4월 2일에 미국 현지에서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238만 788달러를 벌었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경우에는 2005년 3월 25일에 미국에 개봉하여 2005년 12월 8일까지 극장에서 70만 7481달러를 벌었으나 이것은 미국 대행사가 완전히 영화의 판권을 사서 자신들의 돈 들여 마케팅을 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각각 220만 1923달러, 238만 788달러, 70만 7481달러의 순이익이다. 게다가 세 영화의 미국 평가는 디 워와 차원이 다른 호평이며 극장도 작게 차려서 작은 홍보를 하면서 수익을 건졌기에 호들갑 떤 디 워와 차원이 다르다. IMDB에 올라온 네 영화 감상평만 봐도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세 영화는 호평하고 찬양하는 글들이 수두룩하지만 디 워그런 거없다.

이렇게 못 만든 B급 영화를 블록버스터 대작인 것처럼 포장하거나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영화 외적 방법으로 마케팅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팔아먹는 건 아주 능했는데 그렇게 낚고도 손해를 봤다니 참으로 투자 대비 산출 효과는 막장 중 막장이다. 그래서 거품이 가라앉자 [사기 혐의로 형사 고소를 당하는 등](http://media.daum.net/entertain/others/view.html?cateid=100030&news id=20090306104517738&p=ilyo) 여러가지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심형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사기 혐의는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갚을 의지는 있지만 돈이 없어 못 갚는 것이기에 사기가 아니라고 한다. 디빠들은 이런 결과글을 철저히 외면하고 왜곡하는 것으로 자아위안을 했다. 정신승리 원래 끼리끼리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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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라스트 갓파더, 한계에 봉착하다 ¶

디 워가 어느 정도 성공[5]한 것처럼 보이자, 심형래는 뜬금없이 자신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이겠다며, 영구영화로 되돌아가겠다고 한것. "슬랩스틱(Slapstick)"이라는 이 단어도 라스트 갓파더 이전에는 거의 쓰이지 않다가, 심형래 및 디빠 기자들이 유행시킨 단어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심형래 장기인 "몸개그", 즉 영구짓을 미국인도 잘 모르는 코미디 장르 용어슬랩스틱이 장르 용어이긴 하지만 원어민들까지 모르는 단어는 아니다... 사용하여 불러준 어법으로 심형래의 중증 미국병 증세 및 외국어 남용의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 몸개그라는 말을 두고 원어민도 잘 모르는 굳이 어려운 영어단어까지 찾아내서 자신이 뭔가 있어보이려고 한 이유는** 위에 나온 심형래의 그릇된 자의식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비슷한 예로 앙드레김 선생이 있지만, 앙드레 선생은 자신의 브랜드를 확고히 쌓아올렸고 남의 돈을 탕진하지도 않았다..

심형래는 항상 당시 한국 영화계의 유행이던 조폭영화를 비난했고, 디빠들은 항상 심형래를 인용해 충무로를 비난해왔는데, 그 자신이 마피아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모순중의 모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임에 틀림없었다. 또는 심형래의 미국병은 중증이라서, 위의 "슬랩스틱"의 외국어 남용에서 보여준 것처럼, "마피아"는 조폭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심형래의 미국병은 이렇게 중증이다.

어쨌든 이 영화 라스트갓파더대부를 패러디하고 말론브란도비토콜레오네를 CG로 재현한다고 했지만 __결국 무산되었다. 아무리 패러디라 하더라도 돈 비토 콜레오네가 한국에 출장 가서 사생아 영구를 만들었다는 정신줄 놓은 줄거리가 시작 전부터 논란을 자아냈다. 심형래에게는 불륜이 그냥 쪽팔리고 마는일의 하나일지 몰라도, 미국은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 가족영화를 표방한 라스트 갓파더에서 초장부터 불륜이나 불륜에 의한 설정이 나온다는 것은, 미국에서는 종교영화에 포르노장면을 넣는것과 마찬가진데, 이게 바로 심형래의 맛간 정신상태였다. 가족주의와 기독교 문화가 강한 미국에서 개봉한다면 한국인의 이미지가 어떻게 될 지 벌써부터 예측이 가능한 상황. 하지만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바대로 다행히 초상권 침해 문제에 걸려서 좌초크리. 말론브란도 유가족들이 저런걸 허용했을 것이라고 예상한 심형래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맛간 상태인지를 잘 보여준 촌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덜떨어진 마피아의 아버지 역은 실사배우인 하비 케이틀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2010년 11월 29일에 예고편 티저가 나오자 반응은 의외로 호의 쪽에 가까운 분위기. 영구 시절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자신이 그대로 재현했다. 그리고 헐리우드의 명배우 하비케이틀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것에 이어 웬만한 헐리우드 영화 같이 화면의 때깔이나 색감이 준수하여[6] 평작 이상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라스트 갓파더는 2010년 12월 29일에 개봉됐다. 결과는 황해 등의 경쟁작을 제치고 1위 입성, 이듬해 1월 첫 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 172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수성했다. 잠깐 박해일김윤진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심장이뛴다 등에 밀려 3위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주말이 되자마자 1위 재탈환. 그러나 좋지 못한 평가들이 줄을 이었고 결국 손익분기점은 450-500만인데 최종 관객수는 254만 1603명으로 끝났다. 미국에서도 개봉했지만 혹평과 함께 3주만에 종영하며 처참하게 망했다. 이는 연기파 배우 하비케이틀의 흑역사로 남을 듯.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것일까? 일설에 의하면 그동안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모두 성인용이라서 늦게 본 4살짜리 늦둥이 아이에게 보여줄 영화로 어린이용 영화를 찾고 있다가 그만 심형래에게 낚였다고. 2011년 4월 1일에 개봉한 라스트갓파더는 2011년 4월 21일까지 총 16만 4247달러 밖에 벌어들이지 못하며 처참하게 망하고 말았다. 이는 라스트 갓파더의 전체 흥행 수익의 1%밖에 되지 않는 수익이다. 미국에서 2억원도 못 벌었다고. 망했어요.

미국에서 엄청난 흥행을 하는 짐 캐리의 코미디 영화들이 웃음코드가 다른 한국에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그가 한국에서도 한참 유행이 지난 80년대식 코미디로 미국에서 흥행을 기대한 것은 참으로 영구스러운 발상이었다. 결론은 제일 최악이 제일 마지막에 나왔다는 것이다.뭔가 폼은 잡았는데 아무 의미도 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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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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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영구아트무비 도산 ¶

2011년 7월, 영구아트무비가 도산했다. 곧바로 부인 기사가 나왔으나 직원들이나 관계자들은 다른 증언을 했다. [전 직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증언](http://dvdprime.cultureland.co.kr/bbs/view.asp?bbslist_id=1978714&mas ter_id=40). 원문-댓글 참조. 8월 30일, 심형래의 임금 체불에 대한 소식이 기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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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파산 직전 ¶

그리고 고등법원으로부터 "D-War 제작비 명목으로 일으킨 PF대출의 원리금을 갚으라" 라는 판결을 받았다. 기사 제목이 'D-War 심형래 빚더미... 250억 수입은 어디로' 다. 안습.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된 상태이나 여기서도 지면 심형래씨는 현대스위스저축은행에 25억원을 갚아야 한다.

또한 현재 심형래의 집과 회사도 모두 가압류 상태라고 한다. [기사 내용](http://m.news.naver.com/read.nhn?mod e=LSD&mid=sec&sid1=106&oid=112&aid=0002222250)을 보면 채무액이 장난이 아니다. 이와 같은 폐업 쇼크에 스포츠 서울 기자가 직접 영구아트무비를 방문해봤는데 사람은 한 명도 안 보이고 황량 그 자체라고 한다. 기사내용. 그런데 심형래 측에서는 차기작 '유령도둑' 의 제작을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사 제목부터가 안습. 유령 도둑을 도둑맞아서 개봉을 못하는 건가?

심형래와 김모씨가 공동 소유한 도곡동 타워팰리스[7]와 담보로 제공한 이모씨 소유의 압구정 현대아파트[8]가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다. 강서구 오곡동 소재 영구아트 본사[9] 역시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다.

10월 31일, 영구아트 본사 건물이 한 사업가에 의해 40억에 낙찰되어 팔렸다. 타워팰리스는 감정가 53억원으로 시작한 1차 입찰에서 유찰되자 2012년 4월 25일에 최저 응찰 가격을 42억 4천만원으로 내려 2차 입찰에 들어갔지만 여기서도 또 유찰되어 다시 최저 응찰가 33억 9200만원으로 8월 8일에 3차 입찰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3차 입찰에서 어느 유동화전문유한회사가 40억을 주고 사갔다. [관련 기사.](http://www.fnnews.com/view?ra=S ent1301m_View&corp=fnnews&arcid=12080822514017&cDateYear=2012&cDateMonth=08&cD ateDay=08)

2013년 4월 30일. 결국 보다못한 심형래의 선후배 개그맨 150여명이 집단으로 탄원서를 제출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B%AC%ED%98%95%EB%9E%98?action= edit&section=15)]

4.3. 도덕성 타격 ¶

게다가 이와 [같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2&aid=00 02222962) 성 상납설, 정관계 로비설, 카지노 출입설이 기사화 되는데 이쯤 되면 심형래의 이미지는 회복 불능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2011년 9월 2일, 영구아트무비 직원 기자회견이 있었다. 여기서 이들은 정관계 로비설은 불확실하다 했지만 도박설, 횡령설, 총기 제작 등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10] 또한 퇴직금, 임금 체불 진정서를 낸 사실을 밝히고 도박 및 횡령 혐의와 관련해 심형래 감독에 대한 수사를 의뢰할 계획을 밝혔다.

2011년 10월 18일, PD수첩에서는 영구아트 직원의 폭로가 나왔다. 전 직원의 인터뷰를 통해 "심형래가 술은 먹지 않았으나 여자는 좋아했다" 며 심형래가 자신의 네트워크 내에 있는 여자 400명의 연락처가 담긴 '여자수첩' 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자랑했고 회의 도중 회장이라는 인물과 전화 통화를 하며 대놓고 로비를 하는 등 이용했다고 주장했다.[11] 이쯤 되면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셈이다.

2012년 4월 5일 회사 자금 22억원 횡령 혐의와 불법 총포 개조 혐의로 입건되었다. 기사.

위와 같은 사실로 인해 경찰청에서 압수수색을 했지만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2014년 심형래는 임금 체불로 인해 영구아트 직원이 자신을 고소한 것은 심형래가 본인이 지시한 것이라 밝혔다. 회사가 경매로 넘어가게 되면 밀린 임금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고. 기사. 다만 어디까지나 심형래 개인의 주장이기 때문에 진위는 확실치 않다. 실제로 경매를 통해 넘어간 회사에 대한 금액은 임금체불자에 대해 우선변제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회사가 경매를 통해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경우[12]인데, 결국 영구아트무비는 폐업, 심형래 본인은 파산신청을 하여 빚을 탕감받은 상황이다. # 그리고 이후 채널A과의 인터뷰에서 "밀린 월급은 디워2 감독료를 받으면 갚겠다"고 말한 상황. [기사](http://reviewstar.wowtv.co.kr/Artic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