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시대/[요](/wi ki/%EC%9A%94%EB%82%98%EB%9D%BC)/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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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1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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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遼 (Liao Dynasty)
실질적 직할 지배영역만 표시된 요나라 영토.
- 개요
- 요나라와 불교
- 역대 황제 목록
- 추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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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라는 국호는 2대 황제 태종 때 처음 썼는데, 정작 거란인들은 '요'라는 중국식 국호를 쓰다 말다를 반복했다. 요를 국호로 사용할 때에도 거란인들 스스로는 카라 키탄(Kara Khitan), 즉 '대거란'이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했다. 흔히 카라 키탄은 요의 후계국인 서요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요가 카라 키탄이라 칭한 것은 대거란이라는 본래의 국호를 계속 사용한 셈. 카라 키탄이라는 말을 한자로 흑거란(黑契丹)이라고도 쓰는데, 이는 '카라'가 튀르크어로 검다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거란(大契丹)'이 본래 의미이다.
다시 말해 거란이라는 이름은 민족 이름도 가리키지만 이들이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이기도 하다.
200여년동안 지속되며 독자적인 문자도 만들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동시대의 한족 왕조였던 송을 번번히
관광태웠다. 개조는 야율아보기. 황성은
야율(耶律). 거란어는 사라진 언어라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다. 거란어로 '엘뤼'라고 발음된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건 현대
중국어 발음 예뤼(Yélǜ)가 와전된 것이다. 거란 문자를 통해 재구한
음가에 따르면 '이라우우드(i.ra.u.ud)'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
5대10국의 혼란기 중에 후진의 석경당이 찬탈 과정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북방 영토인 연운 16주(燕雲十六州. 베이징 ~ 타이위안 지방을 위시한 중국 동북부 지방)를 획득하였다. 이후 혼란기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송이 태종대에 이 지역을 되찾고자 전쟁을 걸었으나 소태후가 이끄는 요군에게 관광당했다. 요는 진정 당나라군대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약해빠진 송나라를 어퍼컷 내리컷으로 마구 박살내고 끊임없이 송을 뜯어먹었다. 워낙 괴롭힘이 심했는지 수호지 등엔 원래 없던 요나라를 밟는 부분까지 추가되었다.
특징적으로는 통치제도를 분리했다는 것. 거란인과 한족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다스렸다. 본디 자신들이 살던 유목민족의 땅은 옛날처럼
다스렸고, 연운 16주를 위시한 새로 확보한 영토는 군현제를 채용하여 다스렸다. 독자적 문자를 만드는 등의 행위는 이런 과정에서 송의 문물을
너무 받아들여 자신들이 한화(漢化)할까봐 경계했기 때문. 1국2체제 경영에 성공한 나라. 이중 통치정책의 흔적은
의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송사 요열전에 따르면 황제와 한인 관료들은 중국식 복장을 착용하였지만 황후와 거란인 관료들은 거란식 복장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실제 요나라 시대 벽화들을 보면 고려나
북송 관복과 비슷한 단령과
사모를 입은 요나라 관리들과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같은 그림에 함께 그려져 있다.[2]
잘 나가던 나라였지만 7대째 흥종때부터 삐딱선을 타더니 결국 9대, 천조제때 여진족과 그간 얻어터진 걸 갚고자 몰래 결탁한 송의 협공을 받고 나라가 망해버렸다.
- 원래 요는 송은 적당히 상대하면서 공물과 약간의 영토를 받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 대신 힘을 아껴서 바이칼 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북방민족들을 통제했다. 이 때문에 의외로 요는 중앙아시아 쪽에서 상당히 유명하며, 요가 멸망한 후 서쪽으로 멀리 달아나서 세운 서요도 상당히 이름을 떨쳤다.
몇몇 국가들이 중국을 가리키는 명칭 중 키탄 혹은 키타이(영어로 하면 캐세이(Cathay)[3]
)가 있는데, 이는 바로 거란족들이
스스로를 부른 명칭인 키탄에서 온 것이다. 참고로 마르코폴로의 여행기에서도 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중국인들을 키타이스키[4]``[5]``[6]
라 부르는 것을 보면
요의 역사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선 고려 초기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애초에 이들이 생긴 게 발해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거라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동북아시아의 세력구도를 엿보던 고려와는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잘 해보자고 보낸 요의 낙타선물을 모두 다리에 묶어놓고 굶겨 죽인 것을 계기로 3번의 큰 전쟁을 치르게 되어, 한 번은 서희의 말빨에 휘둘려 엄한 땅만 삥 뜯기고, 한 번은 수도 개경도 털고, 한 번은 강감찬에게 탈탈 털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여요전쟁 항목 참조. 고려와 요나라의 교역 관계는 항목 참조
이 전쟁 후 요는 고려는 물론, 송까지 더 이상 공략할 여력과 의욕을 상실하여 약 120여 년 간은 고려-요-송의 3강 구도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며 무역과 문화를 활발히 나누게 된다.
요와 서요의 멸망 후 유민들은 몽골의 전위부대로 활용되면서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래서 몽골과 중국은 현재 이 민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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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시대에 그려진 벽화들이 유명한데 당시 의복, 생활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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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쇠퇴의 원인으로는 권신의 전횡으로 인한 국정의 혼란이 거론되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 불교 관련 잦은 토목공사로 인한 재정 악화도 꼽힌다. 요나라 황실은 중,후반기로 들어갈수록 불심이 아주 깊어졌는데 절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시주는 기본이었고 대규모 불상과 절을 건설하느라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요나라 황실의 국찰이었던 산시성의 화엄사는 금나라때 다시 중건하였긴 했지만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며 고려도 대장경을 만들때 요나라 불경을 참조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요나라 불교 관련 유물, 유적들을 보면 그 스케일과 화려함에 거란을 단순히 야만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쇼킹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근데 과연 거란족이만들었을까는 의문이다. 요서에 의하면 싸우고 태우고 빼앗는게 주특기였던 북방민족인 거란족이 불교 경전 건축물을 만들때 대거의 한족 장인들을 채용했기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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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궁사 목탑. 현존 최고 목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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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시대 관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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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 다통 화엄사의 요나라 시대 불상들[7]
요가 이렇게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중원의 한족 문화에 맞서 거란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수단으로 불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요는 그 당시 고려나 일본보다도 더 불교가 우선시되던 불교 국가였다. 불교는 국교로 공인되었으며 황실의 보호를 받고 불교 신앙이 장려되었다. 거대한 사찰과 불상 건립, 대장경 간행은 물론이고 말기에 가면 승려들이 관직 진출이 두드러지는등 정교 일체화 현상까지 일어났다. 동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유학이 교육을 담당하였지만 요에서는 사찰이 서민들의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었고 사찰이 관리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불교 국가가 된 요나라는 화려한 불교 문화 유산들을 남길 수 있었지만 동시에 거란 고유의 샤머니즘 신앙은 크게 쇠퇴하였으며 상무 정신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요나라의 불교는 친척인 몽골의 티베트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였다. 요나라 시대의 유명한 승려로는 선연(鮮演)대사가 있다. 화엄 사상을 토대로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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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 황제와 추존 황제는 목록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대수
묘호
시호
휘(거란식/중국식)
연호
재위기간
초대
태조(太祖)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야율억(耶律億)
신책(神冊, 916922),926),
천찬(天贊, 922
천현(天顯, 926)
916~926
2대
태종(太宗)
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야율요골(耶律堯骨)/
야율덕광(耶律德光)
천현(天顯, 927938),938),
회동(天顯, 927
대동(大同, 947)
926~947
3대
세종(世宗)
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야율올욕(耶律兀欲)/
야율원(耶律阮)
천록(天祿, 947~951)
947~951
4대
목종(穆宗)
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야율술률(耶律述律)/
야율경(耶律璟)
응력(應曆, 951~969)
951~969
5대
경종(景宗)
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야율명의(耶律明扆)/
야율현(耶律賢)
보녕(保寧, 969979),982)
건형(乾亨, 979
969~982
6대
성종(聖宗)
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
야율융서(耶律隆緖)
건형(乾亨, 982),
통화(統和, 9831012),1021),
개태(開泰, 1012
태평(太平, 1021~1031)
982~1031
7대
흥종(興宗)
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야율지골(耶律只骨)/
야율종진(耶律宗眞)
경복(景福, 10311032),1054)
중희(重熙, 1032
1031~1055
8대
도종(道宗)
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야율열린(耶律查剌)/
야율홍기(耶律洪基)
청녕(清寧, 10551064),1074),
함옹(咸雍, 1065
태강(太康, 10751084),1094),[8]
대안(大安, 1085
수창(壽昌, 1095~1101)[9]
1055~1101
9대
-
천조황제
(天祚皇帝)
야율아과(耶律阿果)/
야율연희(耶律延禧)
건통(乾統, 11011110),1120),
천경(天慶, 1111
보대(保大, 1121~1125)
110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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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능호
비고
숙조(肅祖)
소열황제(昭烈皇帝)
야율누리사(耶律耨里思)
-
-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의조(懿祖)
장경황제(莊敬皇帝)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
-
-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현조(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
-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덕조(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적노(耶律的魯)
-
-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의종(義宗)
문헌흠의황제(文獻欽義皇帝)
야율배(耶律倍)
-
현릉(顯陵)
세종 추숭, 태조의 장자
-
장숙황제(章肅皇帝)
야율이호(耶律李胡)
-
-
목종 추숭, 태조의 3자
-
익무황제(翼武皇帝)
야율찰할(耶律察割)
951
-
임시 황제
순종(順宗)
대효순성황제(大孝順聖皇帝)
야율준(耶律濬)
-
-
천조제 추숭, 천조제의 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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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항공사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의 그 캐세이[4]
참고로 이 단어는 굉장히 경멸적인 의미로 쓰이니 조심하자. 특히 스킨헤드들은 키타이스키라고 하면 정말로 죽이려고 할 정도로 중국인을 싫어한다.[5]
한국인은 '카레이스키'라 부른다. 만약 러시아에서 스킨헤드들에게 둘러싸였는데 '키타이스키'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리면 "No No No! 카레이스키!"를 열심히 어필하도록 하자(...) 스킨헤드가 아무리 유색인종을 혐오한다지만, 그래도 키타이스키로 오인(?)되었을 때보다는 무사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진다.[6]
카레이스키는 예전의 한국 MBC 시대극 드라마의 제목으로 일반에 유명해진 단어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드라마는 많은 제작비를 들인 야심작이었는데... 하필이면 모래시계를 상대하는 바람에 시청률 4~5%의 흑역사급으로 망해버렸다(...)[7]
화엄사의 요나라 불상들은 그 조형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중국의 비너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8]
혹은 대강(大康)[9]
혹은 수륭(壽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