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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略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서. 《위략》이라는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위나라를 중심으로 집필되었다. 지은이는 낭중을 지낸 어환(魚豢)으로 서진 태강 연간(280 ~ 289년)에 지었다고 전해지며, 위략은 당나라 때 유실되었다.

Contents

  1. 설명
  2. 한국사와 위략
  3.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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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

삼국지 시대의 역사서로 현재는 사라진 책이지만 정사삼국지에는 배송지의 주석을 통해 그 내용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삼국이 통일되기 전에 서술된 역사서이며 저자가 위나라 사람이라 주로 위나라 시대의 일을 다루고 있다. 특징은 위나라, 진나라 황제들의 이름을 전혀 피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대 사료이므로 가치는 대단히 높으며, 진수의 삼국지 중 위서 부분에선 왕침의 위서와 함께 주요한 참고 문헌이다. 그러나 삼국이 통일되기 전에 서술된 역사서라서 적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나 등에 대해서는 뻘글급의 기사를 쏟아낼 때가 있다. 교차검증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위험한 기록이다. 다만 이런 뻘글들이라도 당시 위나라 관점에서 본 시선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가치는 있다. 대표적인 뻘글로는 유선이 어릴 때 노예로 팔렸다가 유비가 입촉한 후에 다시 만나서 태자가 되었다는 유선 벤허[1] 제갈량삼고초려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위략은 대부분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부분들이고 일단 그의 감수를 한 번 거친 상태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은 곤란하다. 예를 들어 유선벤허설같은 경우는 "괴이한 망설(妄說)"이라며 대차게 비판했고,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내용도 "괴이하다"며 의문을 표했다. 아예 말도 안되는 얘기같으면 배송지가 이를 인용하되 반박 역시 준비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위략의 기록이라도 배송지가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료와의 교차 검증을 통해 오류가 없을 경우 받아들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어환이 위진의 인물이었다는 점을 들어 "동시대 적국에 대해 세세한 기록을 남길 수 없다"며 염행의 마초폭행설이나 위연 자오곡계책 등이 비판받기도 하나 이것 역시 잘못된 시각이다. 애초에 위략의 편찬시기는 태강 연간으로 이는 서기 280 ~ 289년 사이이기 때문에 이미 촉이 멸망한지 약 20년은 지난 후다. 마초나 위연의 에피소드는 이미 수십년 전의 일이고 적국에 대한 접근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은 몇몇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허황돼서 그렇지 전체적으로는 신뢰성있는 기록들이 더 많다. 역대 사가들의 비판도 신뢰성을 문제삼기보다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부 기록하는 바람에 내용이 난잡하다는 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만 그때문에 이민족들의 풍습같은 진귀한 기록들도 많이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현재까지도 한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심지어 로마 제국에 대한 기록까지 존재할 정도인데 이때문인지 "특별한 기록이 있다"는 호평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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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사와 위략 ¶

한국사에서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 초까지 고조선에 대해 남긴 위략의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에 인용되어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다. 기자조선설에 따른 윤색 기록 등이 일부 보이기는 하나 사기 조선열전에서도 기원전 2세기 전의 상황은 전하지 않기 때문에 위략의 기록을 배제하면 고조선 역사 절반은 추측만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외에도 삼한낙랑군 등에 관련하여 남은 기록도 중요하다. 애초에 한국 고대사는 사료 자체가 원체 귀하다 보니...

7세기 『토원책부』에서 새로운 위략의 인용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동예의 풍속으로 알려진 무천은 고조선의 풍속이며, 부여의 제사 풍속으로 알려진 소 발굽을 이용한 점도 고조선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 사실이라면 고조선 연구에 새로운 가설 몇 개쯤은 세울 수 있는 자료이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 시대에는 위략이 있었으므로 이것을 인용했더라면 고대사에 대해 지금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안타깝게도 김부식은 고대사 부분을 사실상 기록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시대에는 이미 없어진 상황이었으나, 고려에서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본을 부탁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1091년 북송황제 철종은 사신을 보내 고려의 임금 선종에게 다른 희귀본들과 함께 위략의 필사본을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왕실에 요청했다면 당연히 당시 쳥연각, 보문각 등이 건립된 상황을 보아 왕실 도서관에 보관했을 것인데 몽골 침입 등으로 유실되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의 고문서를 잘 살펴보도록 하자.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C%84%EB%9E%B5?action=edit&sect ion=3)]

3.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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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촉한의 기록과는 도저히 일치하지 않는다. 어쩌면 유선의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