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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95. 대한민국의
외과의사이다. 바보의사, 한국의
슈바이처라고도 불리운다. 한마디로
대인배
EBS-e 1부
EBS-e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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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용천군 태생. 의사양반 모델이 되었던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의전 외과 조수로 입문하고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 외과 과장자리를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고, 아마도 백인제는 자신이 퇴임한 후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을 장기려가 이끌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이나, 장기려는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세브란스 외과 이용설의 추천으로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한다. 그 이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차남 장가용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난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다.
혹부리수령을 수술해준 인연 덕에 장기려는 북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모범근로자로 선정되어서 포상도 자주 받았고 여러차례 상도 받았다. 김일성이 맹장염으로 앓아누은 적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장기려부터 찾았지만 그와 연락이 안돼서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는데 북에서는 장기려가 수술했다더라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장기려의 명성은 높았고 북에서의 지위도 높았다. 심지어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교회에도 가고 예배를 할 특권도 주어졌다. 그가 월남한 후에도 북에서는 그가 월남한 것이 아니라 납남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덕분인지 이북에 남은 아내와 딸과 아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북에 남은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월남 직후에 북에서 우대받은 일로 인해 자주 방첩대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다. 이러한 일을 평전에서는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온전하게 있었을까?라는
표현으로 서술되어있다. 같이 월남한 아들에게서 본 손자는 목수[1]
를 원했는데,
중앙대 의대에 들어가서, 의사가 되었다.
춘원 이광수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만나고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말이 있는데 장기려 본인은 부정했다. 사실 안빈이 과학에
미쳐, 인도주의적 이미지가 없는 광기 가진 인물로 그린 티가 있는 것과 이광수가 보이는 비극적 죽음을 선택한 여성을 비하한 예를 생각한다면,
자기가 모델이란 점에 굉장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후에 한국 최초 부검의가 되는
문국진이 제자인데, 부검을 1950년대만 해도 두번 죽인다는 인식이 깊게
깔려, 반대를 외쳤던 일화가 있다는 점에서 추측하는 시각도 있다.[2]
일제시대때부터 외과의사로 살아왔고, 그의 아래에서 일한 제자들은 모두 다 외과 전문이이긴 하나, 해방이후 국가가 주관하는 첫 외과전문의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가 되려고 공부한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대한외과학회 회장까지 한 적 있다.
부산에서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진로하였다. 이외에도 부산에 설립한 의료시설이 많다. 부산지역 대학병원 외과의 뿌리는 장기려로 시작되거나 직간접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심지어 모대학병원에는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지병인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별세하셨다.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매우 청빈한 삶을 살았다. 어느정도였냐 하면, 죽을 때까지 자기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고. 죽을 때까지 본인의 개인 사택 없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옥탑방에서 기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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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청십자 의료보험이라는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을 창설,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나은 의료혜택을
입도록 한 장본인 되겠다. 청십자 의료보험[3]
은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토대가 되었다.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한 의료환경변화의 여파를
생각한다면, 그가 한국 의료계에 끼친 영향은 독보적이다.
그는 의료보험을 도입한 의료행정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외과의사였는데, 국내에서 대량 간절제를 최초로 시도 성공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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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의료수가를 책정할때 장기려 선생님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참고했는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일종의 봉사단체의 성격으로 의료수가 중 인건비
부분이 빠진 상태였고 이것은 현재 의료수가가 낮아지게 된 요인이라는 설이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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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정이 매우 많건 성격이였다고 한다. 지나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는 것을 수표로 주는 바람에 경찰서에 끌려가 이 거지에게 수표를 도난당한 것이 아니냐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고. 치료비가 없었던 환자에게 자신의 급여를 가불시켜 지불해주기도 했고, 병원측의 반대로 치료비 대납이 원활하지 않자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든지, 죽을때까지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부인을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살았다든지하는 이야기가 있고, 원리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일화에 대해 무수히 많은 일화가 있으나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긴 어려우니, 평전 '장기려 그사람'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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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정부가 제안한 특별 상봉을 거절한 것. 누가 보아도 그만한 특혜를 받고도 남을 자격이 있는 그였으나, 수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다른 이산가족들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며 결국 거절하였다. 당시 북에서는 남한이 장기려를 납치해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장기려가 북에 가지 않으면 세계 여론이 북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정부는 거의 반강제로 장기려를 북에 보내려 했으나 이에 분노한 장기려가 "오냐, 그럼 가주겠는데 대신에 북에 가면 안 돌아올거다."라고 엄포를 놓자 경악하여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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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부산에 와서, 청한 만남요구에 자기가 결혼 주례를 맡았던 신혼 부부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거절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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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총리 여동생이 되는 수녀원장과의 한국전쟁 전 이북에서 인연과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회장 여동생이 되는 유순한과의 인연도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다른 줄기라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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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장기려 박사가 해외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사치라곤 모르던 박사가 해외 여행을 가고 싶어하길래 사람들이 대체 어디를 얼마나 가고 싶으면 저러시나 싶어서 어디를 가고 싶으시냐고 물었는데 장기려 박사는 동베를린에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국가이자 적성국인 동독엔 왜 가고 싶냐고 묻자 장기려 박사는 내 아들 학용이가 거기 있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실제로 북에서 의사가 된 장기려 박사의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도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동베를린에 열린 사회주의권의 의학학술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소식을 장기려 박사가 들은 것이다. 당장 가더라도 아들을 만나긴 불가능했겠지만 아들이 밟았던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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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상봉은 못했지만 같이 월남한 차남 장가용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북의 아내에게 보냈는데 아내는 사진을 보더니 장기려 박사의 사진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면서 "이게 가용이구나, 아버지와 꼭 닮았어."라고 했는데 사진을 가져온 사람이 "그 분이 장기려 박사님이고 옆의 젊은이가 가용입니다."라고 말해주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평양에서 살며 고생을 덜 하긴 했어도 그래도 홀몸으로 시부모와 5남매를 키우느라 원체 고생을 하느라 당연히 자기 남편도 자기만큼 늙었을 줄 알았고 그래서 생각보다 훨씬 덜 늙은 남편을 아들로 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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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까지도 아내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며 아내를 그리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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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고문사였다는 진실을 밝히는데, 공헌한 부검의 2명. 오연상과 황적준은 중앙대와 고려대 출신 국과수에 속해 있음에도 장기려 박사와 연관이 짙게 되어 있다. 위에서 손주가 다닌 당시 중앙대 의대 교수가 오연상이었고, 황적준은 위에서 소개한 문국진으로부터 부검을 배운 부검의이었다. 국과수로 가기 전에는 고신대 의대에서 있었다는 퇴임 기념 인터뷰에서 밝힌 점으로 보아 장기려 박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 고신대 의대에는 국내에서 유일한 곤충법의학 전공 교수인 문태영은 바로 문국진의 아들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립에 장기려 박사가 알게 모르게 세운 업적이 있지 않는가란 의문이 발생한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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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가 죽기 직전에 장기려의 애제자들이 장기려의 흉상을 만들어주려 했는데 중환으로 죽어가던 장기려는 분노하여 "내 흉상을 만드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일갈했고 제자들은 기겁하여 주저앉아버렸고 놀란 사진기사는 방밖으로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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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바자기 씌우려는 상인들이 부르는 값보다 언제나 비싼 값을 주고 물건을 샀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박사님이 그래서 바보 소릴 듣는겁니다. 그게 바가지 씌우는 값인줄 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라고 하자 "그 바가지 씌운 값을 깎으려 해봤자 그 사람들이 앞으로 바가지를 씌우지 않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올려서 주면 앞으로 겁이 나서라도 그러지 않겠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상인들의 멘탈은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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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려 -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봄나무
- 《장기려, 그 사람》/지강유철 지음.홍성사,2007년 2월 20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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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래도 예수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랬던 모양일 가능성이 높아 너무하신 것 아니냐는 불만도 있다.[2]
그러나 사회의 눈총과 고된 업무로 지친 제자 문국진이 부검의를 관두려고 할때도 극구 말리며 바로 잡아준 인물이 장기려 박사였다.[3]
ET 할아버지로 유명해지는 채규철, 김서민 등과 함께 설립. 아직 부산 전포동에 청십자병원(행복한병원)으로 남아있다.[4]
한국의 의료수가는 미국을 제외한 동남아 국가보다도 낮은 상태로 대부분 의료기관이 보험수가 이외의 방법으로 수입을 올려 유지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장기려 선생님은 선의로 인건비를 뺐지만 이는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저수가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니 마냥 좋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당연히 장기려 선생님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정부 관료들이나 정치인들도 자신들 밥줄이 걸려있는 문제라 십자포화를 맞기가 두려워서 못나서는 판국이라... 실제 한국의 경우 장비를 사용하는 의료비용이 의료인이 직접 참가해서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의료비용보다 높다. 실제 맹장염 수술수가는 26만원(2015년기준)인데 비해 MRI 는 40-100만원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