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일랜드 단체
1.1. 매체에서의 IRA
1.1.1. 영화
1.1.2. 만화, 애니메이션
1.1.3.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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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아일랜드 공화국군. 이름 그대로 아일랜드에서 결성된 무장단체다. 1910년대 말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든 독립군으로 시작해, 각 시기별로 IRA의 이름을 쓴 수많은 단체가 있었으나, 다른 설명이 없이 언급할 경우의 IRA는 1969년부터 존재해온 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 즉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이라는 단체를 일컫는다. 1970, 80년대에는 많은 테러를 행했으나 현재는 온건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2000년도에 들어서 무장투쟁을 포기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IRA는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실패 이후 마이클콜린스, 리처드 멀카니 등 아일랜드 독립군의 잔여 세력이 재규합하여 결성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1919년에서 1921년까지 영국군과 싸우다가 결국 아일랜드 독립을 이루어냈으나, 1922년 영국 -아일랜드 협정에서 영국계 주민이 다수인 얼스터 지방은 영국 내에 잔류한다는 조건이 문제시되어 이에 대한 찬성, 반대 입장으로 갈라져 IRA 또한 양분되었다. 이후 협정에 찬성한 쪽은 현대 아일랜드 국방군의 전신이 되었고, 반협정 IRA (Anti-Treaty IRA)라고 불린 반대파는 여전히 영국은 물론 아일랜드공화국 정부와도 싸우며 무장투쟁을 계속 해오다가 결국 50~60년대에 들어서는 말라 죽어가는 사멸 직전의 조직이 되었다.
다 죽어가던 IRA가 다시 힘을 키워 20세기 후반 서유럽 최대의 무장투쟁의 핵심에 있는 단체가 된 것은,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 분쟁의 시작과 IRA의 분열 때문이었다.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에서는 다시 가톨릭계 주민들과 영국계 성공회 주민들의 분쟁이 터졌는데, 말이 분쟁이었지 사실상 수적으로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인 프로테스탄트(혹은 성공회) 영국계 주민들의 일방적인 가톨릭 박해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IRA는 공식적으로 전통적인 가톨릭 민족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세력 자체가 너무도 약해져서 효과적으로 가톨릭 주민들을 보호하지 못하였다. 이에 반발한 IRA 내부의 세력들이 IRA를 탈퇴하고 PIRA(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를 새우고 잔류한 IRA는 스스로를 OIRA(Official IRA : OIRA)로 부름으로서 IRA는 양분되었다.
초기에는 IRA의 그나마 남아있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OIRA가 더 세력이 강하였으나, OIRA는 무장투쟁을 포기한 반면 PIRA는 가열찬 투쟁을 벌여 점점 더 가톨릭 주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72년 영국군 공수부대가 데리 시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13명의 민간인이 죽은 **피의 일요일사건**을 계기로 PIRA는 대대적인 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1970년대면 양차 대전이 끝난지도 4반세기가 흘렀고 1960년대의 각종 시위들도 끝물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선진국 중에 선진국이란 썩어도 준치라는 영국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만 해도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주민들은 영국을 적이 아니라 개신교 주민들의 박해에서 보호해 줄 정부의 보호자이자 중재자로 보았으나, 이 날을 계기로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 자체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기운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이 날부터 IRA는 줄기차게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영국군과 프로테스탄트계 무장세력을 상대로 나름 의로운, 또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투쟁 과정에서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 과정에서 IRA는 1979년 영국 왕족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1]
을
폭탄으로 끔살해버렸는데, 요트에 탄 채로
수행원들과 형체도 없이 박살났다. IRA를 지지하던 현지 언론은 "영국 왕족도 바다 위에서 죽으니까 한낱
물고기밥이 되었을 뿐이다."라고 찬양했던
적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잉글랜드[2]
의 정부요인을 노린
테러를 행하면서 영국군에 대한 공격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해마다
영국이
아일랜드에 쏟아붓는 인명과 예산은 날로 불어났고 그에
비례해서 IRA의 활동도 더욱 과격해지기 마련이었다.[3]
그러나 문제는 영국군만이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민간인들까지 말려들어서
피해를 입는 일이 늘어나는 데에 있었다. 이를 구실로 내부적으로도 IRA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고
냉전이 해체되면서 화해 무드도 불겠다, 이래저래 테러활동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1990년대 들어 신 페인당도 강경노선을 전환해서 테러보다 민주적인 정치적 투쟁으로
아일랜드 통일을 달성하겠다고 점차 노선을 바꾸게 된다[4]
. 결국 이들은 1998년 아일랜드공화국
정부, 영국 정부와의 3자 협상으로 굿프라이데이 조약을
체결했으며, 2005년에는 공식적으로 무장투쟁을 철회하고 비축한 무기들을 파기함으로서
총이 아니라 선거로 투쟁방식을 바꾸었다. 말이 좋아
화해지, 20년전 당시만 해도 이 문제는 거의 발칸반도급
문제로 답이 없다고 취급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다만 여기서도 소수의 과격파는 무장해제에 반대하며 지금까지도 산발적으로 테러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런 무장투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이후
레알 리얼(REAL) IRA라고 지칭되고 있다. 그리고 2012년 7월 26일, 이런 잔존 분파들의 대부분이
새로운 IRA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영국이
북아일랜드에서 철수해야만
아일랜드의 자유를 얻기 위한 무장투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도발과 분쟁을 선택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영국'이라고 주장하였다.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에게는[5]
독립군이자[6]
애국자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아일랜드
출신 여가수 시네이드 오코너를 비롯한 이들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그렇게 따지자면
잉글랜드는 민간인 학살과 고문을 저지른 테러 유발국가
아니던가?'라면서 옹호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 정부나 정부관계처를 공격하는 것 이외에도 경비가 느슨한 민간인, 민간시설을 노리고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RIRA는 1998년 8월 15일 민간시설에 폭탄을 장치하여 약 30여명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전형적인 테러리스트의 작태를 보였다. 물론 위에 나온 시네이드 오코너도 이런 건 옹호하지 않고 비난했지만.
이러한 막장성은 RIRA가 분리되어 나오면서 더욱 강해졌지만 이전부터 그러한 경향은 있었다. 원래 RIRA가 분열되기 전인 PIRA 시절부터 활동자금을 얻기 위하여 밀수나 협박,갈취,강도 등의 범죄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고, 그 희생자에는 외국인은 물론이고 정치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포인 아일랜드인까지 포함되었다. 원류가 동일함에도 무장투쟁을 포기했다는 이유만으로 OIRA도 그 공격대상이 된 시기가 있었다. 조폭집단처럼 변해 이권 다툼에 열을 올리고 목격자들에겐 IRA일이라고 침묵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이 자신들의 테러활동에 불법으로 입수, 개조한 미국산, 일본산 무기를 사용한 것 때문에 양국의 IRA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특히 일본의 경우, 이들이 사용한 소총이 면허생산된 AR-18이었다는 점때문에 무기수출에 대해서 자체적인 규제를 하게 되었고 AR- 18은 과부제조기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테러활동만을 폭력적으로 부각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테러활동의 근원은 바로 영국의 식민 지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IRA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개신교 측에서 조직한 반IRA 폭력단체(예 : UDA(얼스터 방위협회), UVF(얼스터 의용군))또한 극성을 부렸다. 특히 UVF가 1974년에 벌인 더블린 폭탄 테러에서는 약 33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이들이 죽인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 또한 수백명에 달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IRA 측은 적어도 가능하다면 민간 시설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사전 경고를 하거나, 테러의 목표도 알반적으로는 개신교 신자 친영파 민간인이 아니라 북아일랜드 왕립 경찰단, 영국군 등의 '교전 상대'를 대상으로 설정했지만, UVF와 UDA 등의 친영파 계열의 무장 단체들은 교전 상대와 일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가톨릭계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당장 희생자 비율만 봐도 IRA 측은 군대나 경찰, 개신교계 민병대 등이 70%, 민간인이 30% 정도인 반면 개신교계 무장단체는 그 비율이 정반대이다. 물론 IRA의 테러행위를 전면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지만, 무조건적으로 IRA만을 악의 근원으로 몰아세우는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궁극적인 원인을 결국 따지고 보면 80년대까지도 주거, 취업, 참정권에서 악질적으로 가톨릭계를 차별했던 스토어몬트의 개신교가 지배하던 북아일랜드 의회와 이를 철저히 방임했던 런던 영국 정부에 있다. 놀랍게도 북아일랜드는 80년대 까지도 1인 1표의 보통 선거제가 아니라 보유한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의 원칙에 어긋나는 제한선거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니 당연히 경제력에서 게임이 안되는 가톨릭계가 정치적으로도 제대로 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이러한 차별에 항거해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과 당시 유럽을 휩쓸던 68혁명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 시민 저항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으나, 피의일요일 사태로 인하여 '평화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무력 충돌이 본격화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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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터 키튼
- 기동전사 건담 00에서 리얼 IRA라는 명칭으로 3화 마지막에 잠깐 등장한다. 무려 400년 동안이나 항쟁했다고(...)
[7]
- 용오 - 한국 정발이름은 용오인데 일어판 원제는 유고. 여기서에서 IRA 리더가 일부러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영국 정보부원을 자극하며 권총을 겨누기에 사살당하는데 그 뜻을 알아차린 주인공 유고가 막으려했으나 늦은 다음이었다. 그가 가진 권총은 총알이 없었기에 이 모든 게 티브이 화면 속으로 북아일랜드 전역에 방영했던 터라 그 리더는 목숨걸고 희생한 거였다. 화면을 보던 북아일랜드 민중들이 분노하면서 여론이 편들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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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 - 2004년 대한민국 드라마. 여주인공의 가족이 IRA에 의해 피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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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야구용어 ¶
Inherited Run Allowed. 해석하면 '승계주자 실점'. 어떤 투수가 한 경기에서 이전에 등판했던 투수와 교체되어 등판할때 이전 투수가 출루를 허용한 채로 루상에 주자가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이 때 후발로 등판한 투수가 이 주자들에게 득점을 내줄 경우 수치가 올라가는 지표이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올라온 구원투수가 이렇게 득점을 허용하면 실점(자책점 포함)은 이전 투수의 기록으로 올라간다. 올라온 구원투수가 주자를 다 불러들인뒤 추가실점없이 이닝을 종료했을때 올라온 구원투수는 1이닝 무실점으로 기록된다. 주자를 남긴 선행투수가 실점을 전부 뒤집어쓰는 억울한 상황인 것이다. 이를 요즘 야구판의 은어로 분식회계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펜 투수의 이닝과 방어율 기록이 좋다고 해서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이런 식으로 불펜투수의 덕목인 팀의 위기상황 구원에 실패하고 자기 기록만 무실점으로 챙긴 투수의 실제 투구내용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수치가 불펜 투수의 절대적인 평가기준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예를 들어 무사 3루에서 등판한 투수가 승계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인 것과 2사 1루에서 등판한 투수가 승계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인 것 모두 승계주자 실점률이 100%로 취급되는 것처럼, 불펜 투수가 어떤 상황에서 등판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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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EN의 명의 중 하나. Eraser Rain forGAIA, TempusPraeterita를 이 명의로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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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숙부로 당시 79세의 나이였다. 2차대전 당시 서남아시아 전선 사령관이기도 했다.이 사건후,IRA는 엘리자베스 2세에게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죽은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복수라 하였다.[2]
영국의 정식명칭은 "대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다. 적어도 나라 이름만큼은. 월드컵에 영국팀이 안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지어 자국에서 열린 2012 런던 올림픽조차도 다른 나라들이 단일팀을 결사거부하여 겨우겨우 웨일즈와 반쪽짜리 단일팀을 이루었다. 결과는 8강에서 대한민국을 만나서 탈락….[3]
아일랜드 시가지에서 FN FAL을 쓰고있는 영국군 병사들이 찍힌 사진에는 이런 뒷배경이 있는 것이다. 총이나 군복보고 멋있다고 할 게 아니라 그 이면에는 이런 피눈물나는 역사가 있다는 걸 명심할 일이다.[4]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파, 얼스터 연방주의파, 영국 정부 사이의 지지부진한 교섭과정으로 인해 제대로 된 평화협정은 1998년에야 체결됐다.[5]
이전에는 '북아일랜드에서는'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북아일랜드에는 영국의 일부로 남길 바라는 연합주의자(unionist)들이 아일랜드 통일을 바라는 민족주의자(nationalist)보다 인구가 많다.[6]
북아일랜드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의 언론사들이 아일랜드 통일을 지향하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을 북아일랜드 독립운동가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이들은 북아일랜드 지역이 영국의 일부인 것을 싫어하여 아일랜드 섬 전체를 영토로 하는 통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독립'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일하려는 상대는 이미 독립을 쟁취한 아일랜드 공화국이다. 오히려 현재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적대 세력인 loyalist들 중 일부 분파만이 북아일랜드에서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을 독립론자로 서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7]
IRA 저항가요 중 Go On Home British Soldiers라는 노래 가사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너희(영국)와 800년 동안 싸워왔고, 앞으로도 800년간 싸울 것이다.' 라는 가사가 있다. 그 일이 실제로....버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