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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順(? ~ 1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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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에서 함께 여포의 부하장수로 묘사되는 장료와 장패는 엄밀히 말해 반독립적으로 존재한 군벌이었고, 이해관계에 따랐을 뿐 여포에게 진심으로 충성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포 휘하에서 가장 능력있고 충성심 깊은 장군은 고순이라고 볼 수 있다.
정사에 따로 열전을 남기진 못했고 <여포전>, <무제기>, <선주전>에 그의 기록이 보이는데 후한말에 패망해 죽은 군벌의 수하치고는 기록이 꽤 남은 편이다. 남은 기록으로보면 그는 상명하복과 충성에 목숨을 거는 굉장히 모범적인 군인상이다.
<여포전>에 주석으로 달린 <영웅기> 기록에 의하면 고순은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7백
명의 군사를 이끌었는데 그 군기가 워낙 철저해서 보통 1천 명으로 일컬어졌는데, 갑옷과 무기는 항상 정련하고 번쩍번쩍한데다 매번 싸울 때마다
격파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대는 함진영(陷陣營)[1]
이라 불렸다.
196년 여포의 부하로 하내출신인 학맹이
원술의 사주를 받고 조성,
진궁과 모의해 반란을 일으켰다. 진궁까지 가담했던지라 반란군은 쉽게 여포가 있던 하비로
들이닥쳤고 창졸간에 당황한 여포는 처자를 거드리고 의관도 갖추지 못한채 고순의 군영으로 달아났다. 여포의 진술을 듣고 학맹이 범인임을 짐작한
고순은[2]
궁노수들을 내세워 학맹군을 패주시켰다. 일이 어렵게 되었다고 본건지 학맹과 함께 모의했던
조성이 다시 학맹에게 반기를 들어 서로 싸움을 벌였고, 고순은 그틈을 노려 학맹을
참수했다.
여포가 진규의 계책을 활용해 원술을 대파할 무렵 동해(東海)사람 소건(蕭建)이 낭야상(瑯邪相)이 되어, 거(莒-서주 낭야국 거현)에 치소를 세우고 여포와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이에 여포는 서신을 보내 소건을 끌어들이려 했고, 소건도 서신과 말을 바치며 이에 응했다. 그런데 얼마후 장패가 소건을 습격해 그의 군수물자를 약탈했다. 여포는 분개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장패를 치려했는데 고순은 이를 말리며 "장군께서 몸소 동탁을 주살하여 이적(夷狄)들에게 위세를 떨쳤으니 단좌고분(端坐顧盼-단정히 앉아 주위를 돌아봄)한다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자연 외복(畏服)할 것입니다. 가벼이 친히 출군해서는 안 됩니다. 혹 이기지 못한다면 명성을 손실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며 무턱대고 싸우지 말고 스스로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여포는 그말을 무시하고 장패와 싸웠고, 고순의 우려대로 이기지 못했다.
조조와 원술 사이에서 갈지자 행보를 보이던 여포는 198년 다시 원술과 손을 잡았고 고순을 시켜 소패에서 병력을 모으던 유비를 치게했다. 고순은 유비는 물론이고 조조가 유비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하후돈까지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줏대없고 의리없는 여포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던 사람으로 매사 생각없이 결정하고 변덕이 극심해 언행을 자주 번복하는 여포에게 항상 간언했다.
"무릇 집안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충신(忠臣)이나 밝고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쓰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 거동(擧動)하실 때 치밀히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잘못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영웅기-
여포는 고순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그 특유의 성정을 고치지는 못했고 나중에는 고순에 대하 신임조차 흔들려 고순의 군사를 모두 빼앗아 친척이었던 위속에게 주었다. 그리고 전투가 있을때만 위속의 군사를 고순에게 돌려 나가 싸우게했다. 대우는 안해주면서 필요할때만 이용해 먹겠다는 굉장히 몰염치한 행동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
여포의 유일한 브레인인 진궁과는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나빴다.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여포의 충신이었던 고순 입장에선 충성 없이 그저 조조를 치기위해 여포를 이용하려한 진궁이 곱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진궁은 여포가 잘 따르지 않자 학맹과 모의해 여포를 내치려고도 했다. 고순이 충직한 무인이자 여포군의 고참이었던 반면 진궁은 문인이었고 장막의 부하였다가 그의 죽음으로 오갈곳이 없어져 합류한 신입이었던 점을 보면 성격이나 정치적 입지면에서도 반대되는 부분이 많다. 여포의 처가 고순과 진궁의 불화를 언급하며 하비에서 나가 싸우려던 여포를 만류한 것을 보면 이둘의 불화는 알 사람은 다 알았던 모양.
여포가 멸망할 때 여포의 곁을 지켰고 사로잡힌 뒤에도 조조에게 묵묵무답으로 일관하다가 처형당한다. 정작 여포의 친척이자 고순의 병사를 뺏어서 넘겨줬던 위속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송헌, 후성과 함께 여포를 배신해 성문을 열었고 진궁을 붙잡아 조조에게 넘겼다.
그 행보나 최후를 보자면 그야말로 **상관을 잘못 만난 충신**. 능력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여포에겐 과분한 인재였다. 뛰어난 전적에 모자란 주인을 끝까지 섬기다 깨끗하게 죽었다는 점에서 장임과 비슷하다.
연의에서는 별 다른 비중이 없지만, 여포 세력 자체가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상당히 인기와 관심이 집중되는 편인 데다가 일단 정사에서의 모습이 간지였기 때문에 컬트적인 인기가 상당했다. 또 비록 연의에서 별다른 비중이 없어도 정사처럼 간지나게 죽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실제로 DCinside 삼국지 갤러리에는 갤러리 생성 초창기부터 고순을 찬양하는 꾸준글이 수 년 동안 올라왔었다. 재밌는 것은 여포군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이라 할 만한 인물임에도 연의에서 여포군의 핵심 장수들을 묶어놓은 팔건장에는 못들어갔다. 게다가 팔건장 면면을 살펴보면 역사에서 여포의 충신으로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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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순/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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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 자료에서는 함진영이 고순의 별명인 것처럼 나와 있으나, 함진영은 고순이 지휘하는 부대의 명칭이다.[2]
여포전 기록에 의하면 하내인의 말소리가 들렸다는 말에 바로 하내출신 학맹을 주동자임을 밝혀낸다. 물론 실제로는 사투리 하나로 찍었다기 보단 다른 정황증거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