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 영국 동인도 회사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 프랑스 동인도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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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East India Company
네덜란드어 :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프랑스어 : La 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rientales
한자 : 東印度會社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만들었던 아시아 무역 회사. 이름은 무역 회사지만 회사의 수장이 식민지 총독을 겸하였으므로 현대의 무역 회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무역을 완전 독점하고, 회사 영토 내에서의 사법 및 치안권은 물론, 제한적인 외교권 및 군사행동권(현지 용병을 고용 등)까지 갖고 있는 사실상의 총독부였다.
한국인들에게 게임이나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진 것은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이고, 규모면에서는 2년 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훨씬 컸다. 이후에 포르투갈, 프랑스, 스웨덴도 비슷한 이름과 성격을 가진 동인도 회사를 세웠다.
일본에서도 이들을 본따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부산에 세웠는데, 나중에 조선총독부에 흡수된다.
엘더스크롤 시리즈엔 이것의 패러디로 보이는 동제국회사가 등장한다. 다만 하는 일은 실제 동인도 회사보단 현대의 무역 회사와 비슷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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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 회사의 깃발
이게 미국이여 호주여
영국이여
실제로 미국 성조기의 13줄 적백 줄무늬는 동인도회사 깃발에서 온 것이다.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British East India Company. 영국 근대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회사로, 영국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준 회사다. 가장 교역이 활발하던 시절에는 오로지 차茶에 대한 세금만으로 영국 재정의 10%를 납세했다. 반면 엄청난 골칫거리를 안겨주기도했다. 1600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가 동남아시아 교역을 하던 상인들에게 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부여하여 설립되었다. 무역 독점권을 준 이유는 자국 상인들끼리의 출혈경쟁으로 외국 상인들에게 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것이 회사에는 엄청난 특권을 안겨준 꼴이 되었다.
처음에는 현재의 자바 섬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시아의 후추 무역에 진출했다. 당시 동인도(East India)는 인도 대륙 동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동남아시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발 늦게 출발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훨씬 빠르게 성장하여 후추 무역이 파산 직전에 이르자 인도로 눈길을 돌렸다.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목화와 비단 장사로 재미를 봤다. 유럽에는 목화가 상당히 늦게 소개되어,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면직 의류는 고급 수입품에 속했다. 동인도 회사가 인도의 주요 해안도시에 차례차례 확장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해 본국에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1670년대에는 의회에 로비를 통해 점령지역의 사법권, 전쟁 선포권, 화폐 주조권을 얻는 등 사실상 국가권력에 준하는 권력을 얻게 된다. 한편 인도 대륙 북부의 기존 지배자였던 무굴제국에도 압력을 가해 수출입 관세를 완전 면제받게 된다.
1711년에는 청나라에 진출하여 차(茶) 무역에 뛰어들었고 역시 동인도 회사의 최대 수익상품이었던 설탕의 유행과 겹쳐 설탕을 넣은 홍차가 본국에서 대유행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홍차를 국민음료라 부르는 영국인들의 홍차 취향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소량만 수입했던 차가 엄청난 인기를 끌자 수입대금을 은화로는 다 댈 수 없게 된 동인도 회사와 본국 정부는 은화 대신 인도산 아편으로 대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대량의 마약이 유입되는 것을 좋게 여길 리가 없는 청나라 정부는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편을 대금으로 받아들일 것을 청나라에 강요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회사가 몰락한 이후 본국 정부와 청나라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본부에 해당하는 인도에서 동인도 회사는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영토를 늘려, 기존 인도 대륙의 지배자였던 무굴제국은 물론 최대의 경쟁자인 프랑스 식민지를 압도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프랑스는 1757년 무굴 제국의 제후국이었던 벵갈과 연합하여 동인도 회사와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하였고, 벵갈 지역은 동인도 회사의 영토에 완전 합병된다.
그러나 점점 영토가 커짐에 따라 광대한 영토를 모두 관리할 수 없게 되고, 잦은 군사행동으로 군비의 압박이 커져 재정적으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아시아 무역 독점권의 법적 유효기간이 끝나감에 따라 이를 연장하는 대가로 본국 정부에 1백만 파운드를 대출해 주었는데 이 또한 회사의 재정상황을 악화시켰다.
또한 점령지인 인도에서는 직원들을 값싼 월급으로 부려먹고, 50%에 달하는 토지세를 징수했으며, 주민들이 작물을 키워 먹고살아야 할 경작지를 수출품인 아편과 쪽 재배지 등으로 갈아엎는 만행으로 악명이 높았다. 또한 점령지의 곡물 거래를 독점하고 곡물의 사재기를 금지하였는데, 수확기 곡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농번기에 파는 농업국가의 지극히 당연한 순환구조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아 1770년 벵갈 대기근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대기근으로 벵갈 주민의 3분의 1이 굶어죽는 참사가 일어났고, 본국의 여론도 크게 악화되었다.
파산의 위기를 느낀 동인도 회사는 본국 의회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본국 의회는 동인도 회사의 신대륙에서의 차 교역에 물리던 세금을 완전 면제해주는데, 안그래도 식민지라는 이유로 본국에 비해 높은 세금을 물면서 차 교역을 하던 신대륙 상인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반발이 폭동으로 이어진 것이 1773년 일어난 보스턴 차사건으로, 이후 미국의 독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동인도 회사가 본국에 가져다주는 수입보다 골칫거리가 점점 커지자 본국 의회는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 해에 동인도 회사 규제법을 통과시키는데, 내용은 주로 본국에서 직접 임명한 총독이 회사의 이사회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이후 영국 정부는 이사회에 주었던 독립 외교권 및 군사행동권, 그리고 인도의 독점 무역권을 차례차례 박탈하고, 회사의 영토였던 인도 대륙을 영국에서 직접 병합하는 수순을 밟아, 1833년에는 회사가 갖고 있던 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회수하고 실질적으로 영국 정부가 회사의 모든 활동을 지시하게 되었고, 이후 1874년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현재 홍차를 생산, 판매하고 있는 동인도 회사는 1978년 영국 문장원에서 문장사용 허가를 받아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회사의 설립시기를 1978년이 아니라 위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된 1600년으로 보고 그 연혁을 계승하고는 있으나, 영업 분야가 홍차의 생산 및 판매에 한정되고 있는 만큼 사실상 다른 회사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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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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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규모의 위엄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줄여서 VOC.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설립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2년 후인 1602년에 설립하였다. 세계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의 회사였다.
당시 무역항로중에서 최대이익을 내는 항로는 인도, 중국, 동남아 항로였다. 후추는 유럽에서 고가에 팔리었고 중국의 차와 도자기도 역시
값비싸게 팔려서 네덜란드의 한 무역회사가 포르투갈의
독점상품이었던 동남아시아 향료 무역에 진출한 것은 1595년으로, 이 해의 첫 항해는 투자자들에게 무려 4배의 수익을 안겨줄 정도였다.
이 모습을 본 유럽 각국의 다른 회사들이 동남아시아 무역에 앞다투어 뛰어들어 출혈경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는데, 1600년 영국 상인들이
연합하여 영국 동인도 회사를 결성하고 동남아시아 무역에 뛰어드는 것을 본 네덜란드 정부는 이에 대항도 하고,
스페인과의 관계를 파탄내면서 독립을 한 대가로 대 스페인 무역이 중단돼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입어 돈벌 기회가 널려있는곳에 더 투자도 할
생각으로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네덜란드 왕실은 대규모 무역선단을 꾸리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재정만으로는 조금 무리가 있어서 고민하던차에
네덜란드의 부자들과 국민들에게 한푼두푼 투자받아서 대규모 선단에서 나오는 이익을 나누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됐다.
그런데 돈을 받기 전에 문제가 생겼다. 투자를 받을때, 이익을 나눌때 표시를 어떻게 하냐는 것인데 수천명 투자자의 몫만큼 배에 일일히 선을 그어놓을 수 도없고... 그렇게 고민하던 네덜란드는 투자받은 돈을 한곳에 모아놓고 그 자금에 대한 소유권을 나타내는 종이 권리증서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증서에는 동인도 회사 주식이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주식의 시작이었다. 이를 따라서 다른 유럽열강들도 상인들과 왕실이 연합해서 주식회사들을 만들게 되었다. 여기서 주주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이익을 배당한다는 주식회사의 개념이 생겼다. 즉,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다!! 회사의 지분을 판매하는 주식이라는 개념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이며, 역사상 최초의 증권거래소도 네덜란드에서 바로 이 동인도회사 주식을 거래하기 위해 생겼다. 즉, 근대 금융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큰 기여를 한 셈.
회사를 처음 설립할때 1602년 투자금 650만 길더였다. 현재가치로 300만 유로 2013년 12월 3일 자의 원화로 약 43억 7백만원. 정부도 권한을 2만 5천길더로 환산을 해서 투자한 주주로서 참여해 네덜란드 국민들의 신뢰를 높였다. 그 외에 영국과 마찬가지로 출혈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독점권을 부여했으며 또 일개회사 주제에 조약체결 및 협상권, 전쟁발동권을 가진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처음 10년간은 투자자들이 조선,건축,아시아의 무역왕국 건립등 장기적인 사업에 투자하길 원해서 전혀 수익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번에서 이미 설명한 은화 부족 현상을 훨씬 일찍 알아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산업혁명 이전의 유럽이 천연자원도 모자라고 기술도 부족하여 아시아에 내다 팔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팔 물건이 없다보니 당시의 국제 결제 수단인 은화를 주고 비단과 후추를 비롯한 사치품들을 구입해야 했고, 이것은 본국의 대규모 무역적자로 이어졌다. 경쟁사였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 사치품들을 다시 유럽의 다른 나라에 내다 팔아서 무역적자를 해소했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 즉 아시아에서의 중계무역을 생각해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후추 무역으로 얻은 자산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말라카, 스리랑카, 일본 나가사키, 타이완 섬, 중국 광저우는 물론 페르시아에까지 상관을 설립하여 아시아의 기존 상인들을 빠르게 제치고 아시아 국제무역을 장악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은과 구리가 많이 나서 네덜란드의 무역적자를 상당부분 해소해주었다. 이 무렵 동인도 회사가 보급항으로 건설한 아프리카 남단의 상관이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다.
여기에 투자자들중 갑자기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투자한 것에 대한 어느정도의 이익을 받고 주식권리를 포기하려고 했고, 또 어떤 다른 사람은
동인도 회사의 미래를 유망하게 보고 주식권리를 신규로 혹은 증액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이 둘의 주식거래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넓은
네덜란드에서 서로 이런 생각들을 의사표시하지 못하고 있어서 거래가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이를 해결하려고 1609년에 생긴 것이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이고 여기서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등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과부하를 막기위해 1609년에 은행을 만들어
다른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신용대출도 있었다고 한다. 은행의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정부가 은행에 간섭할 수 없도록 법을
제정했는데, 네덜란드 공화국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적대국에게도 합법적으로 돈을 빌려줬다. 독립적인 권한을 가진 동인도 '회사'에 대한
소개지지만 사실상 네덜란드라는 국가 자체와 뗄 수 없는 관계라 같이 서술한다. 비유 하자면 촉나라와 관우가 성주였던때의 형주와
비슷하려나
이렇게 은행,증권거래서,유한회사를 하나의 금융체계로 통합시켜 폭발적으로 돈을 끌어모았고 전성기인 1670년대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50척의 상선, 40척의 군함, 50,000명의 직원과 10,000명 규모의 군대를 거느린 거대 조직이 되었고, 회사의 주식은 배당금으로만 액면가의 40%를 배당하는 큰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주가가 워낙 많이 올라서 상대적으로 배당금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 못지않게 많은 해악을 점령지에 끼쳤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가 워낙 악명이 높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70년대 이후로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면서 중국무역이 대폭 감소하고, 일본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은 수입이 감소하자 회사의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기존의 향료 무역으로부터 커피, 차, 도자기, 면직물 등으로 상품의 종류를 늘리고 상관의 숫자를 늘려 대응했지만, 경쟁사인 영국 동인도 회사가 규모를 키우고, 1700년대 이후로는 신대륙에서도 향료, 설탕 등의 상품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에서의 수익이 줄어들게 되었다.
18세기 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러, 그 무렵 들어선 바타비아 공화국 정부에 의해 국유화되었고, 1798년 해산하였다. 이 나라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네덜란드 시민들이 세운 혁명정부...라는 것은 명목이고 실상은 프랑스 혁명정부가 네덜란드를 군사점령하고 세운 괴뢰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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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네덜란드에 이어 세번째로 설립된 유럽열강의 동인도회사. 워낙 넘사벽이었던 경쟁자들에 묻힌 감이 있지만 충분히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회사였다.
헨리 4세가 15년간의 대 인도 무역 독점권을 부여한 것이 시초이나 이때는 아직 회사가 아니었다. 정식으로 주식회사로 성립한 것은, 루이14세 시기인 1664년으로 총 1,500만 리브르의 자본금을 주식 형태로 모았으며 그중 300만 리브르는 루이 14세가 왕실 자금으로 충당했다. 왕이 이렇게 거금을 투자하니 귀족들도 눈치가 보여(…) 다들 출자했고 결과적으로 1,500만 리브르의 자본금은 쉽게 모여졌다.
회사는 인도양과 태평양, 그리고 마젤란 해협에서 희망봉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대해서 50년에 걸친 절대적인 무역독점권을 부여받았으며 동시에 식민지 운영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회사는 마다가스카르와 모리셔스 일대를 지배하며 인도양에서의 무역 기지를 확보하였고, 1719년에는 인도 남부를 중심으로 무역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시기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파산의 위기에 처했는데 정부의 개입으로 다른 회사를 흡수하고 운영권을 개편하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인도에 진출한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무굴제국이 쇠퇴하는 틈을 타 지역 토호국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때로는 무력도 사용하며 퐁디셰리를 중심으로 인도 남부에 광활한 세력권을 형성했고, 인도에서 프랑스의 절대적 우위를 확립하였다. 이대로 간다면 인도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겠지만…
7년 전쟁 과정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탈탈 털리고 퐁디셰리 등 항구 몇 개 남기고 다 영국에게 뺏긴다.(…) 말 그대로 망했어요. 더군다나 영국,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달리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말 그대로 인도에 올인한 상황이어서 이 타격은 도저히 회복 불가능했다. 결국 1769년, 왕실의 채무지급보증 선언과 함께 동인도 회사는 청산되었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왕실도 같이 맛가면서 채무 지급이 중단, 1790년까지 단 15%만의 채무만이 지급되었다.
한편, 이와 별개로 1785년 새로이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기존의 동인도 회사와 아무런 법적 관계도 없었으나 역시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