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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역사
- 장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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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간쑤성 둔황에 있는 대표적인 천불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기원전 전한 시대의 불교 유물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후기까지의 불교 유물이 시대별로 폭넓게 있다.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었고,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한국에서는 주로 막고굴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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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시의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1,600m에 걸쳐 조성된 막고굴과 서천불동, 안서유림굴, 수협구굴 등 600 여개의 동굴이 있고, 그 안에 2400 여개의 불상이 안치되고 있다. 벽 한 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총 면적은 45,000 ㎢이다. 둔황석굴, 둔황천불동이라고도 하며, 막고굴이라는 것이 광의의 의미에서는 전부를 포함하기 때문에 간단히 막고굴이라고 한다.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55년 또는 366년으로 추정되며, 승려 낙준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법양에서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굴은 5세기 전반에 여기를 지배한 북양의 것으로 그 이전의 것은 후세에 새롭게 굴을 파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막고굴의 북부는 장인의 주거지로서 이곳에는 불상과 벽화가 없다. 벽화의 양식으로서는 오호 십육국 시대 북양과 계속된 북위 때에는 서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제작된 불전, 천불 등이 그 영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북주와 수당에 이르면서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석가설법도 등도 이때 그려지게 된다. 통치 기간이 가장 긴 당나라 때의 석굴이 225개 굴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수나라가 97개를 차지한다. 북송 때 서하 지배하에 들면서, 둔황의 가치가 하락하여, 점차 그 수가 적어지고 서하 때의 것은 20개, 원나라 때 석굴이 7개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몽골의 침입과 이슬람의 침입을 거치면서, 둔황은 완전한 쇠퇴해진 도시가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막고굴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이 막고굴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것은, 1900년, 둔황의 문헌이 장경동에서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발견 이후에도 막고굴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그 가치가 인정되고, 보호가 시작된 것은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65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문화재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은밀한 보호지시로 추가로 파괴되는 봉변은 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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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돈황 석굴을 지키던 도사 왕위앤루(왕원록)[1]
이 제 16굴을 청소하다가
이상한 공명을 듣고 벽을 두드려본 결과 빈 공간이 발견되어 벽면을 헐어보자 밀실안에 엄청난
양의 고서와 불상들이 쏟아저 나왔다. 그 유명한 돈황 유물의 정수인 제 17굴 장경동의
발견이다.
이곳에 왜 밀실에 고서들을 보관했는지는 아직도 논란이나 크게 2가지 설이 있는데 바로 폐기설과 피난설이다. 즉 당시 기준에는 이미 쓸모없어저
버린 폐문서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불경과 고서들을 파기하거나 태워버릴 수는 없으니 한곳에 넣고
폐기해버렸다는 설과 또 하나는 당시 이슬람의 발흥으로 유물이 파손될까 두려워한 불교도들이 몰래 숨겨놓고 잊어버렸다는 피난설이다.
왠지 사해문서와 비슷하다
아무튼 최초 발견자인 왕원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청나라 정부는 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몇번이고 보존을 요청했으나 지역
관리들은 시큰둥한 반응만 보일 뿐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다. 한편 이곳에 유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의 오렐 스타인과
프랑스의 폴 펠리오[2]
는 여행을 한다는 핑계로 이곳에 와서 왕원록에게
사찰 보호에 써달라는 구실로 돈을 주고 유물 보호를 빙자한 사실상의 약탈을 감행하여 많은 수의 희귀한 고서들을 국외로 유출 시켰다. 물론
이것은 전화위복으로 둔황학이라는 학문의 탄생과 중앙 아시아사 연구,불경 연구 및 문화대혁명의 화를 피할 수 있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유출되었다.
나중에 일본의 불승이자 도굴범오타니 고즈이도 여기에 끼어들어 약 5000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유출 시켰다. 그 유명한 오타니컬렉션으로서 나중에
오타니는 이 유물 중 일부를 일본의 재벌인 구하라에게 팔았고 구하라는 다시
조선총독부에 기증하여 오늘날 막고굴의 유물
중 일부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남겨지게 되었다.
한편 중화민국 정부는 나중에서야 이 유물의 가치를 알고 화급히 일부를 베이징으로 옮겨 보관했으며 그나마도 중일전쟁의 혼란 속에 제대로 관리를 못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설립되어서야 어느정도 보존이 이루어젔다. 중국은 지금도 외국에 반출된 문화재의 반환 요청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무단으로 중국의 보물을 유출시켰던 왕원록을 천하의개쌍놈 취급을 하며 흑역사 취급하고 있으나 사실 이러한 유물들의 가치를 못알아보고 회수하지 않았던 청나라의 잘못이 더 크다.
물론 만악의 근원 문화대혁명때 큰 화를 입을 뻔 했으나 상술했던 것처럼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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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려가 아닌 일개 도사가 석굴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지역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많이 쇠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막고굴은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2]
언어의 귀재였다고 하며 머무르는 도시마다 현지인들 틈에 섞여 몇 일만에 해당 언어를 습득할 정도였다고 한다. 둔황에서 고문서가 나왔다는 소식에 둔황에서 머물며 중국어를 순식간에 익혀서 왕원록 주변을 계속 배회하며 그의 환심을 사서 푼돈을 주고 문서들을 구입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