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緯
- 北魏
2.1. 개요
2.2. 역사
2.2.1. 건국
2.2.2. 태무제의 화북통일
2.2.3. 효문제의 한화 정책
2.2.4. 육진의 난
2.2.5. 기타
2.2.6. 추존 황제
2.3.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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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latitude. 적도(0도)를 기준으로 북쪽90도까지의 위도이며 범위가 북반구와 같다. 예컨데 삼팔선은 북위 38도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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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시대 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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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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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G external image]](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f/Sout hern_and_Northern_Dynasties_440_CE.png)
존속 기간
386년~534년
수도
성락→평성→낙양
지배 범위
화북 전체, 화남의 북쪽 일부, 서역의 일부, 내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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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세사의 한 흐름을 만들며 오호십육국시대 호한체제[1]
침투왕조의 표본을 보여준 국가. 오호십육국 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화북을 통일,
남북조시대를 형성했고, 그리하여 뒤의
수,
당 제국의 바탕을 이루었다.[2]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대의 국호는 그냥 '위' 혹은 '대(大)위'였고, 북위라는 표현은 이전 시기 전국시대의 위나 삼국시대의 위와 같은 여타
'위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표기방식이다. 즉 당대를 바탕으로 한 소설, 사극에서 '북위'로 자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병크라는 이야기다. 너 말이야 너
또는 황실의 씨성을 국호 앞에 붙여 '탁발위(拓跋魏)' 또는 '원위(元魏)'라 부르거나[3]
시기적으로 나중에 등장한 점을 감안하여
'후위(後魏)'라 부르기도 하는데, 막판에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북위 표기가 통용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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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의 일원인 탁발선비(拓跋鮮卑)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나라로,[4]
386년 서진 정권에게 하사받았던 기존의 국호인
'대(代)'[5]
를 탁발규가 '위'로 바꾸고 칭제건원했다.
후연의 황제 모용수는
이러한 탁발선비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공격을 감행했지만 395년 참합피의 전투에서 후연군은 대패했고 북위는 이를 계기로 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함락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화북에 진출하게 된다. 이 공격으로 후연은 상당한 내분을 겪게 되는데, 이러한 내분에다가 모용수-모용보
시대의 대 고구려 어그로의 부채를 하필이면 탁발규에게 얻어맞고 난 시기에
광개토대왕에게 제대로 얻어처맞으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요서의 북연과 산동의 남연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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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태무제의 화북통일 ¶
3대 태무제 시기에 이르러 북연과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때 한족계 관료로서 북위 조정에 몸담고 있던 최호의 '국사 필화(筆禍) 사건'이 터져 최씨 일가 및 그와 관련된 귀족 세력을이 대거 처형 및 숙청됨으로써 남조와는 달리 황제 권력이 귀족과 대등하거나 좀 더 우위에 있게 되는 경향이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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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효문제의 한화 정책 ¶
5세기 말 효문제[6]
시기에 적극적인 한(漢)화 정책을 추진했는데,
그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낙양(洛陽) 천도
2. 호한(胡漢)간 결혼 장려
3.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개변[7]
4. 호속(胡俗), 호어(胡語) 금지
5. 성족분정(姓族分定)
6. 서교제천 금지
7. 관제개혁
효문제 이래 실시된 한화정책으로 인해 권력에서 소외된 비한화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523년에 북위 멸망의 원인인 6진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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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육진의 난 ¶
6진이란 북방의 유연(柔然)을 방어하기 위해 낙양 천도 이전의 원래 수도인 평성(平成, 지금의 대동) 부근에 설치된 군사도시를 말한다.
본디 낙양 천도 이전의 6진은 최중요 지점이었던 만큼 귀족 중에서도 최상급의 귀족 및 엘리트 병들이 복무를 했으며, 이에 대한 보수도
두둑했다. 허나 낙양 천도 이후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화 선비족에게는 중앙 권력과
문벌귀족최상층으로의 진입 등 온갖 혜택이 다 베풀어졌지만
한화가 매우 늦었던 군대[8]
,특히 이들 6진에게는 대우가 형편없어진 것에 대한 불만이 터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제압한 것이 선비족의
이주영(爾朱 榮)이다. 허나 이주영은 이 후 궁중 암투로 인해 암살당하고
그 휘하의 이들에 의해 북위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주영 휘하의 중요한 인물로는 고환(高歡), 우문태(宇文泰), 후경(侯景)이 있다.
결국 선비족 전통의 유지를 따라는 자들과 한화를 원하는 자들로 구분되었고 무엇보다 효무제가 고환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관중으로 튀는 바람에 534년 고환이 효정제를 옹립한 동위(東魏), 우문태가 망명해 온 효무제를 받아들인 서위(西魏)로 분열되어 사실상 멸망했다. 동위와 서위는 여전히 원씨들이 황제였으나, 둘다 고환과 우문태의 꼭두각시 내지 허수아비 황제들이었다. 결국 동위는 고환의 아들 고양이 효정제를 폐위되고 북제가 되고 서위는 우문태의 아들 효민제 우문각이 우문효에 의해 공제를 폐위하면서 북주가 되는데,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다. 북주와 남조의 진나라(陳)는 대립하다가 북주의 정제를 폐위한 양견이 수나라를 세우고 진나라를 병합하면서 서진 멸망 이래로 분열된 남북을 통일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1%EC%9C%84?action=edit§ ion=9)]
르네 그루쎄의『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는 북위가 카롤루스대제의 프랑크 왕국에 비견되는 '중국의 보호자'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는 게르만 족의 민족 이동과 오호의 중국 침입을 유사한 선상에 놓고, 그러한 분열 양상을 통합하여 안정시킨 국가였던 프랑크 왕국과 북위로부터 일정한 알레고리를 포착해낸 듯하다.
도무제 때 후연을 멸망시키고 그 지방에 있던 36만에 이르는 백성들을 수도 근방으로 이동시키고 땅을 주고 농경에 종사하게 했다. 이때 고구려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북위는 고구려의 동방지배를 허용해 고구려왕에게 거기장군이란 최고관직을 하사하기도 한다. 또한 고구려 사신을 남조 사신 다음으로 대하였으며 489년(장수왕 77년, 북위 효문제 19년)엔 남조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급으로 대해 남조 사신이 크게 항의한 바 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1%EC%9C%84?action=edit§ ion=10)]
역대 탁발부 지도자들과 대나라 군주들이다.
- 탁발모: 성황제
- 탁발대: 절황제
- 탁발관: 장황제
- 탁발루: 명황제
- 탁발월: 안황제
- 탁발추인: 선황제
- 탁발리: 경황제
- 탁발사(俟): 원황제
- 탁발사(肆): 화황제
- 탁발기: 정황제
- 탁발개: 희황제
- 탁발쾌: 위황제
- 탁발린: 헌황제
- 탁발힐분: 무성황제
- 탁발역미: 시조 신원황제
- 탁발사막한: 문황제
- 탁발실록: 장황제
- 탁발작: 평황제
- 탁발불: 사황제
- 탁발녹관: 소황제
- 탁발의이: 환황제
- 탁발의로: 목황제(대나라 시조)
- 탁발울률: 평문황제
- 탁발하록: 혜황제
- 탁발흘나: 양황제
- 탁발예궤: 열황제
- 탁발십익건: 소성황제(대나라 마지막 군주)
- 탁발식: 현명황제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1%EC%9C%84?action=edit§ ion=11)]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
헌명황제(獻明皇帝) [9]
탁발식(拓跋寔)
-
-
-
1대
태조(太祖)
열조(烈祖)
도무황제(道武皇帝)
선무황제(宣武皇帝)
탁발규(拓跋珪)
등국(登國) 386 ~ 396
황시(皇始) 396 ~ 398
천흥(天興) 398 ~ 404
천사(天賜) 404 ~ 409
386 ~ 409
성락금릉(盛樂金陵)
2대
태종(太宗)
명원황제(明元皇帝)
탁발사(拓跋嗣)
영흥(永興) 409 ~ 413
신서(神瑞) 414 ~ 416
태상(泰常) 416 ~ 423
409 ~ 423
운중금릉(雲中金陵)
3대
세조(世祖)
태무황제(太武皇帝)
탁발도(拓跋燾)
시광(始光) 424 ~ 428
신가(神䴥) 428 ~ 431
연화(延和) 432 ~ 435
태연(太延) 435 ~ 440
태평진군(太平眞君) 440 ~ 451
정평(正平) 451 ~ 452
423 ~ 452
운중금릉(雲中金陵)
4대
-
남안은왕(南安隱王)
탁발여(拓跋余)
승평(承平) 452
452
-
-
공종(恭宗) [10]
경목황제(景穆皇帝)
탁발황(拓跋晃)
-
-
-
5대
고종(高宗)
문성황제(文成皇帝)
탁발준(拓跋浚)
흥안(興安) 452 ~ 454
흥광(興光) 454 ~ 455
태안(太安) 455 ~ 459
화평(和平) 460 ~ 465
452 ~ 465
운중금릉(雲中金陵)
6대
현조(顯祖)
헌문황제(獻文皇帝)
탁발홍(拓跋弘)
천안(天安) 466 ~ 467
황흥(皇興) 467 ~ 471
465 ~ 471
운중금릉(雲中金陵)
7대
고조(高祖)
효문황제(孝文皇帝)
원굉(元宏)
연흥(延興) 471 ~ 476
승명(承明) 476
태화(太和) 477 ~ 499
471 ~ 499
장릉(長陵)
8대
세종(世宗)
선무황제(宣武皇帝)
원각(元恪)
경명(景明) 500 ~ 504
정시(正始) 504 ~ 508
영평(永平) 508 ~ 512
연창(延昌) 512 ~ 515
499 ~ 515
경릉(景陵)
9대
숙종(肅宗)
효명황제(孝明皇帝)
원후(元詡)
희평(熙平) 516 ~ 518
신귀(神龜) 518 ~ 520
정광(正光) 520 ~ 525
효창(孝昌) 525 ~ 528
무태(武泰) 528
515 ~ 528
정릉(定陵)
임시
-
여제(女帝)
원씨(元氏)
-
528
-
임시
-
소공황제(少恭皇帝)
원쇠(元釗)
-
528
-
-
숙조(肅祖)[11]
문목황제(文穆皇帝)
원협(元勰)
-
-
-
-
-
효선황제(孝宣皇帝)[12]
원소(元劭)
-
-
-
10대
경종(敬宗)
효장황제(孝莊皇帝)
무회황제(武懷皇帝)
원자유(元子攸)
건의(建義) 528
영안(永安) 528 ~ 530
528 ~ 530
정릉(靜陵)
11대
효종(孝宗)
혜애황제(惠哀皇帝)
장광왕(長廣王)
동해왕(東海王)
원엽(元曄)
건명(建明) 530 ~ 531
530 ~ 531
-
12대
열종(烈宗)
절민황제(節閔皇帝)
광릉왕(廣陵王)
원공(元恭)
보태(普泰) 531 ~ 532
531 ~ 532
-
13대
-
폐황제(廢皇帝)
안정순문왕(安定順文王)
원랑(元朗)
중흥(中興) 531 ~ 532
531 ~ 532
-
-
-
무목황제(武穆皇帝)[13]
원회(元懷)
-
-
-
14대
현종(顯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출황제(出皇帝)
원수(元脩)
태창(太昌) 532
영흥(永興) 532
영희(永熙) 532 ~ 534
531 ~ 534
운릉(雲陵)
\----
[1]
한국사학계에서 탄생시킨 이론 중에 거의 몇 안되게 세계사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이 바로 호한체제(胡漢體制, Sino-Barbarian Synthesis)이다. 이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인 박한제 교수가 1988년 발간한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에서 구체화되고 있으며, 중국중세사의 바이블로 여겨지고 호한체제에 관해서도 국내에 10여명의 박사-교수급 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2]
오호십육국 시대의 여러 이민족 왕조들은 그보다 후대의 이민족 왕조들인 거란의 요, 여진/만주의 금과 청, 몽골의 원와 같은 '정복왕조' 국가들이 여러 제도적 노력(고유문자의 제정이나 이원적 통치조직의 형성 등)을 통해 지배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과는 달리 중원 문화에 대해 적극적인 문화보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침투왕조'라는 표현은 후대의 '정복왕조'와는 구별되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체적인 양상을 반영하는 용어인 셈이다.[3]
이 경우 앞의 위나라는 조위曹魏가 된다.[4]
탁발선비는 종종 '타브가치(tabgachi)'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 둘은 물론 동일한 집단의 다른 표기이기는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타브가치와 탁발선비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즉 타브가치의 원 발상지는 대흥안령산맥 북쪽의 알선동이었는데, 이후 북중국과 인접한 내몽골 지역으로 집단이 이동하면서 서요하와 동몽골 지역에 본래 거주하던 선비족 집단과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 박한제 교수의『중국역사기행 3권 -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의 알선동 파트에서 이러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으니 참조해보자.[5]
대는 본래 춘추전국시대 산서성 북쪽 지역에 위치해 있던 국가였다.[6]
효문제는 엄청난 대인배였다. 권력욕이 커 어린 시절에 자신을 핍박, 학대하고 심지어 마구 때리기까지 했던 태후를 용서했을 정도였다.[7]
북위 황실도 성을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다.[8]
군대 내에서는 선비족이 다수고 문화도 거의 변하지 않다 보니 군으로 편입된 한족도 오히려 선비족화하였다.[9]
북위 도무제 추증[10]
문성제 추증[11]
북위 효장제 추증[12]
북위 효장제 추증[13]
북위 효무제 추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