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庶(? ~ 234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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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삼국지의 등장 인물이기도 하다. 자는 원직(元直). 본명은 서복(徐福).
- 정사에서의 이야기
-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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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를 섬기다가 제갈량이 유비의 휘하로 들어온 뒤에,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고 번성에서 그의 어머니를 볼모로 잡히자 조조에게 갔다. 조조에게 투항한 뒤 그는 꽤 높은 벼슬에 올랐다. 이는 연의에서 그가 유비와 작별하며 조조를 위해서는 어떠한 계책도 주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과는 반대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그가 조조에게 어떠한 계책도 올리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조는 보통 자신에게 투항한 인재들을 후하게 대해주었는데, 대표적인 예인 장수나 장로들이다. 그들은 각자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로,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조조가 그들의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서 잘 해줄 필요가 있었던 것다. 이와는 반대로 비하여, 서서는 홀몸으로 투항하였다. 서서는 나름의 능력이 출중했던 사람으로써, 인재 욕심이 있던 조조는 그의 능력을 시험 및 평가한 뒤 서서의 재주에 맞는 벼슬을 주었고, 서서는 맡은 바를 충실하게 수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서는 연의를 통해 알려진 모습처럼 저명한 군략가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사실,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 미비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힘든 것 이다. 그러므로 그가 조조 밑에서 일하며 조조에게 적의 정세를 살피고 대적하기 위한 "계책"을 주었는지, 아니면 관리자로써의 역할을 맡아 그 공으로 벼슬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유비의 휘하에서 종군할때는 박망파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박망파 전투의 계획 입안자는 미축이었고 계획의 구체화는 유비가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유비에게 구체적인 계책을 제공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나, 그가 유비를 떠난 뒤 조조의 휘하에서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조조는 비협조적이었던 서서를 구슬리기 위하여 그에게 일부러 높은 벼슬을 준 것이었을 수도 있다.(이미 관우에게도 후하게 대했던 예가 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관우는 벼슬과 한수정후로써 그에게 지급 되었던 땅을 버리고 떠났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머니가 조조에게 억압되어 있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아챈 서서가 어째서 조조를 떠나지 않았는지가 궁금해진다. 본인에 의하면 그 이유는 의리가 없는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구호로 내걸었던 '충의'와 '성공'이라는 게 약간 엿가락과 같은 성질이 있었으니(연의 한정일 수도 있음), "어머니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변명하여도 괜찮다. 또한, 유비의 밑으로 간 항장들은 충신 소리를 듣지만(항장이라고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조조 밑으로 간 모든 항장이 반역자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었다.
서서는 이후 조위(曹魏)에서 팽성상-하비현에 치소가 있다.-을 거쳐 우중랑장 겸 어사중승- 어사중승은 삼공의 일원이자 최고 감찰관인 어사대부 바로 밑의 관직이다.-같은 주로 감찰관 직을 맡았다. 나중에 제갈량이 북벌할 때, 공명의 학우였던 서서, 맹건, 석도 등이 위나라에서 맡고 있던 직책을 알게되자 그가 말하기를, "위에는 얼마나 인재가 많길래 그들이 겨우 그 정도 지위 밖에 오르지 못했단 말인가!!!"하고 탄식하였다. 이를 감안하면, 서서는 제갈량도 인정할 정도로 출중한 인재였던 모양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서서의 직책이 그렇게 낮은 지위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명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으니 서서는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였을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의 출처가 위략인지라 실제로 공명이 이런 말을 했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다만, 제갈량은 부하 관리들을 훈계하며 말하기를, "당신들이 서서의 1/10 정도만 해줘도 내가 편하겠다."며 서서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공명의 서서에 대한 칭찬이 과장되어 위나라에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
진실로 서원직(서서)의 십분의 일과 동유재(동화)의 힘써 부지런함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라에 충성함은 물론이요, 나(제갈량)도 가히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촉서 동화전
서서에 대한 기록 중에 本單家子 즉 단가의 자식이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단가(單家)란 친척이 없는 단독가구를 의미하며, 친족간에 상부상조가 굳건하던 후한 말기에 비추어 보면 서서는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된다. 유비도 친척 유원기의 지원을 받아 비로소 학문을 배울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일가가 있다는 것이 당시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부분의 구절은 서서가 '單씨 집안'의 자식이고 그의 성이 單이라는 오해를 일으켰다. 單은 성으로 쓰면 선이라고 읽으므로, 그의 본래의 이름인 복을 붙인 선복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다만 단복 대신 선복이라고 읽는 것이 오히려 오역일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나관중의 오류로 본명을 선복이라고 잘못 쓴 걸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연의에서도 서서의 본명은 서서로 드러난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불우한 환경 탓인지 격검(검술)에 몰두하는 등 불량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친구의 원수를 갚아주고는 살인죄로 검거되어 사형수로써 죽을 뻔 했던 이후로 마음을 고쳐먹고 학문을 닦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 점이 반영된 것인지 최근에 들어서는 문관스타일의 일러스트가 머리를 풀어해친 무사스타일로 변했다. 그리고 서서가 정욱의 꾀에 속아 넘어가 조조의 신하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에서 식자우환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로 여기서 유래할 확률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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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꽤 인기있는 삼국지 인물인데 그 이미지의 대부분은 삼국지연의에서 기인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죠쇼(ジョショ)라고 읽는데 이게 죠죠(ジョジョ)와 발음이 비슷해서
조조가 아니라 서서가 등장하면 죠죠의 기묘한 모험 네타가 나온다.
일기토에서 화살 한 방에 K.O시키는 기묘한 전투 방식을 보여준다거나. 서서의 기묘한 일기토
DCinside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격검의 달인으로 유명하다. 코에이의 게임에서도 지력이 매우 높고 무력 수치도 낮지 않은 편. 지력은 대체로 90대 중반 정도이니 조조군 내에서도 일류급 모사에 속할 수 있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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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 청룡 2년(서기 234년)에 죽었다고 나와 있는데 위략이 좀 사료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적어도 위나라 기록은 어느 정도 맞다고 가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