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潟湖(lagoon)
1.1. 한국의 석호
1.2. 세계의 석호
- 石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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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로 바다와 격리된 호소(湖沼)로서, 지하에서 해수가 섞여들거나 수로로 바다와 이어서 염분농도가 높다. 담수호보다 플랑크톤이 풍부하고 부영양호가 많다.
해류 ·조류 ·하천 등의 작용으로 운반된 토사가 바다의 일부를 폐색함으로써 바다에서 호소가 떨어져 나오거나, 해안 가까이에서 바람이 모래를 운반하여 호소와 바다를 분리한다. 이들 호소는 수심이 얕고 바다와는 모래로만 나뉘었으니, 지하를 통해서 해수가 섞여드는 일이 많아 염분농도가 높다. 바다와 수로로 이은 것도 있으며, 기수호가 많다. 생물환경은 수생식물이 적고, 기수성 ·담수성의 부유성 플랑크톤이 있다. 흘러드는 토사가 바다로 나가기 힘드니 길게 보면 대개 자연적으로 매립을 겪는다.
유명한 석호로 강릉의 경포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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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 - 경포 송지호 영랑호 청초호 풍호(2번 항목) 화진포
- 강원(북) - 천아포 신광포 시중호(강동포) 소동정호
- 함남 - 상포 하포 광포 현금호
- 함북 - 서번포 동번포 만포(2번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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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해양왕 석홍
→
3대 태조 무황제 석호
→
4대 초왕 석세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건무(建武, 335년 ~ 348년)
태녕(太寧, 349년)
성 석(石)
휘 호(虎)
자 계룡(季龍)
생몰기간 295년 ~ 349년
재위기간 334년 ~ 349년
석호(295년 ~ 349년, 재위:334년 - 349년)는 오호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3대의 황제로 자는 계룡(季龍),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제(武帝)이다.
석호는 석륵의 조카로 아버지는 석구멱(石寇覓)[1]
이다. 석구멱이 일찍 죽자 석호의
할아버지 석주갈주(石周曷硃)가 석호를 아들로 삼았는데 그래서 석호와 석륵이 형제로 적기도 한다. 태안(太安) 연간(302년 ~ 303년)에
기근이 들어 갈족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석륵과 헤어져 석륵의 모친 왕씨와 함께 살았다. 311년, 병주의 유곤이 석륵의 모친과 석호를 찾아
석륵에게 송환하면서 서진(西晉)으로 망명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석륵은 석호와 모친을 거두고
망명 제의는 거절하였다.
석호는 천성이 잔인하고 무도하여 석륵의 군중에서도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석륵은 석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모친이 반대하여
그만두었다.어떻게든 석륵은 석호를 이 때 죽였어야 했다. 석호가 장성하여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석륵은 석호를
장군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석호는 석륵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319년에 석륵이 후조를 건국하자 중산공(中山公)에 올랐고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325년에 전조(前趙)의 군대가 낙양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러 출진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며 328년에는 전조의 병주 거점을 공략하였다. 329년에는 장안을 함락하고 진주를 공략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에 석륵이
황제에 즉위하자 중산왕(中山王)에 책봉받았으며 후조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있어 석륵과 신하들이 경계했지만 석륵은 끝내 별다른 조치를 안
했다.
333년에 석륵이 병에 걸려 몸져 눕자 석호는 궁궐을 장악하고 석륵의 병상을 통제하여 국권을 장악하였다. 7월에 석륵이 죽자, 석호는 석륵의 차남 석홍을 황제에 즉위시켜 꼭두각시 황제로 만들고 실권은 자신이 장악하였다. 또한 석륵의 자손들을 죽이거나 거세하여 숙청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왕에 책봉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석호의 전횡에 반발하여 남아있던 종실왕들(석륵의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석호가 모두 진압하였다. 334년, 겁이 난 석홍은 석호에게 선위할 뜻을 비추었고 처음에는 거절하였던 석호는 다시 중신들이 권하자 석홍을 폐위하며 자신은 섭정의 지위에서 다스릴 것을 천명하였다.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에 올라 후조를 통치한 석호는 양국과 업에 궁궐을 세우고 황하에 다리를 놓는 등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소모시켰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다. 끝내 석호는 석륵의 치세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불교를 깊게 믿어 널리 포교하였다. 하지만 폐위된 석홍을 죽임으로써 석륵의 자손들은 모두 죽어 없어졌고 석호의 치세에 불교가 널리 퍼졌다. 335년에는 수도를 업으로 옮겼고 337년에는 섭정을 그만두며 천왕(天王)에 즉위했다.
석호는 주변의 여러 국가들에게 무리한 원정을 실시하여 영토를 늘리기도 하였으나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338년에 선비족 단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곧바로 모용부의 전연(前燕)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339년에는 동진(東晉)을 공격하여 수춘을 비롯하여 장강 이북을 대부분 점령하였다. 340년에 다시 전연을 공격하러 징병과 물자 징발을 가혹하게 실시하여 백성들이 많이 피폐했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한 전쟁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342년에는 동진을 공격하러 다시 가혹한 징병과 징발을 실시하였으나 징조가 나쁘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346년부터 전량(前凉)을 공격하여 일부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한편 후조는 석호의 아들들이 벌인 후계자 분쟁으로 여러차례 잔혹한 숙청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337년에는 태자 석수(石邃)가 석호를 죽이고
황제를 하러 반란을 일으키려 하여 석수와 그의 자손 수십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였고[2]
348년에는 태자 석선(石宣)이 석호가 총애하는
아들 석도(石韜)를 살해하자 크게 분노하여 석선과 그의 자손 수십 명을 살해하고 수비군 10만 명을 양주(凉州)로 유배시켰다. 이 과정에서
석호가 총애하던 손자가 참혹하게 처형되었고(평소 귀여워하던 손자임에도 자그마치 갈아서 죽였다고 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석호는 병에 걸려
쇠약해졌다.
이때 양주로 유배된 동궁 수비군 10만 명이 반란을 일으켜 관중을 장악하였다. 반란군은 크게 위세를 떨쳐 한때 업까지 육박하였으나, 강족의
장군 요익중(姚弋仲)[3]
이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군의
기세에 위축된 석호는 더욱 쇠약해졌다. 석세(石世)가 태자로 책봉되고 석호는 후계자를 위해
여러 아들들을 요충지의 종실왕으로 삼고 요직에 임명하였다.
349년 정월에 석호는 드디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동안 석홍을 죽인 334년부터 15년 동안 천왕이라고 칭했지만 사실상 황제였다. 그러나 얼마 후 석호는 병으로 몸져 누웠으며, 이때를 틈타 석세의 일파인 장시(張豺) 등은 요직에 있는 석호의 자식들을 숙청하여 석세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 하였고 석호는 349년 4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뒤는 석세가 뒤를 이었다.
당나라 때 편찬 진서(晉書)에는 석호의 이름이 당나라
고조 이연의 부친 이호(李虎)와 같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 석호의 자로 표기했다. 따라서 진서에서 석호의 전기는 '석계룡재기'라고
부른다.[4]
위의 서술은 자세하게 풀어쓴 일대기이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궁궐 건축을 위해 폭풍우와 태풍이 부는 날에도 공사를 강행시켰고 후궁을 모집한다면서 사마염에 버금가는 혼인 금지령을 내려 백성들의 딸들을 뺏어갔으며 동진을 정벌한다면서 한 가구당 수레 하나와 소 한마리를 공출했다. 또 석호는 도굴광이었는데 옛날 무덤들을 도굴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다. 다만 진시황릉은 워낙 커서 구리기둥 몇만 뽑아왔고 전국시대 조간자의 무덤은 물에 잠겨 있었는데 특수 시설 때문에 아무리 물을 빼도 계속 잠겨서 포기했다.
막장 오브 막장이며 식인왕...으로 과장된, 그러나 분명히 성품이 잔인했고 또 공포정치를 편 폭군.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서 잘못 서술된 인물 중 하나.[5]
해당
책에서 사이코패스로 서술됐지만 그보다는
그냥 잔혹했다고 봐야 맞다. (이유는 아래에 후술)
그게 어느정도냐 하면 사람 풀어놓고 칼들고 때려잡는 놀이는 일상다반사며 미인인 궁녀가 있자 목을 잘라서 아름답다며 영구보존하고 몸은 잘 요리해서 먹어치웠을 정도. 주변 사람들이 잘못하면 석호에게 먹히겠다고 두려워했다. 기록에 의거하면 사람 죽이는 게 정말 재밌던 모양.(…)
사실 위의 미인 박제 행각은 석호의 짓이 아니라 그의 장남
석수(石邃)의 행각이다.(...) 오히려 이 녀석이 사이코패스이며 뒷날 반역을
일으키려하다가 식솔 수백 명과 함께 처형받았다.[6]
석호도 결백하지만은 않아서, 어지간한 일들은 태자인 석수에게 맡기면서도
사형 판결 및 집행만은 황공하옵게도 자신이 손수 관장했다. 다만
처형 자체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이었기에 생각보다 잔혹함은 덜했고(?) 그나마도
시범케이스로 처리해 횟수는 생각보다
적었다. 오히려 이러한 공포정치 때문에 당시 분위기에 절망해 자살(...)한 신하들이 더
많았다고...
그 뒤, 석수가 죽고 나서 다음 태자에 오른 차남 석선(石宣)이 자신을 제치고 총애받던 동생 석도(石韜)를 암살한 게 들통나 일족과 함께
처형당할 때 어처구니없는 모순이 난다. 당시 석호가 대노해서 석선 일족의 처형을 진두지휘하던 중, 처형을 기다리는 이들 중에 자신이 평소
귀여워하던 손자가 보였고 그제야 그 손자가 석선의 아들임을 뒤늦게 생각해냈다.이보쇼.... 석호는 황급히 손자의 처형을
멈추려고 했으나, 이번엔 평소에 저지른 공포정치가 발목을 잡았다. 석호의 잔인함을 두려워한 신하들은 처형을 중지하다 또 나중에 빌미를 잡힐까
두려워하여 석호의 명령을 씹고 그대로 그 손자까지 처형했으며(선술한 바와 같이 갈아서 죽여버렸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석호는 시름시름
앓다 이내 세상을 떠났다. 자업자득.
끝내 석호의 공포정치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체제를 지키던 후조는 구심점이던 석호가 죽자 얼마 못 가 홀라당 망해버렸다. 사실은 그의 아들들이 연달아 계승했지만 서로 죽이다가, 그의 양자 한족 염첨의 아들 염민이 마지막 석씨 황제였던 석지를 죽이고 위나라를 세워버렸다. 이 위나라는 곧 연, 즉 전연에게 멸망한다.
1년도 안되어 석세-석준-석감-석지 이렇게 그의 아들 4명이 줄줄이 황제를 했지만 모두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죽었다. 거기다 그의 자손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죽었고 남은 자손들은 염민이 모두 몰살시키며 나라도 멸망했는데, 이는 나라를 말아먹은 석호의 잘못이자 포악한 정치를 한 업보였다.
- 석세: 재위 33일만에 형 석준에게 폐위+살해
- 석준: 재위 83일만에 동생 석감에게 폐위+살해
- 석감: 재위 103일만에 석호의 양자 석민에게 폐위+살해
- 석지: 석민이 매수한 부하 유현에게 암살+나라 멸망
염민은 후조를 멸한 뒤에 수도 업성에서 갈족 소탕전에 나서 남은 석호의 자손들을 모두 죽이고 뒤이어 갈족 20만여명을 죽였는데,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아서 갈족이 아닌데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동안 석호의 공포 정치 때문에 사람들은 갈족들을 몰살했으나, 염민의 이민족 학살 정책은 반발을 일으켰다. 끝내 염민은 불과 3년 만에 나라가 망하며 자신도 목숨을 잃는다.
\----
[1]
석호가 황제에 올라 태종 효황제로 추존[2]
석수는 아들이고 그 자손들은 자신의 손자들이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로 아들과 손자들, 며느리 등 그 일가를 아주 잔인하게 죽였는데 나중에 똑같이 반란을 일으킨 석도도 도르레에 매달아 엄청난 고통을 준 다음 불태워 죽였다.[3]
나중에 후진을 세운 요장의 아버지로, 꽤나 대담하고 한 성깔했다. 한창 잔인함을 과시하던 시절의 석호에게도 면전에서 막말하였고, 나이먹어서는 아예 석호를 "너"라고 불렀던 용자왕...[4]
전조 황제 유연도 진서에 이연의 이름과 같아서 자로 유원해라고 표기되었다. 따라서 '유원해재기'. 진서는 서진과 동진을 정통으로 보고 두 진나라만 '본기'로, 나머지는 황제국이라도 제후국으로 보고 '재기'라고 칭했다.[5]
고 화백의 책은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 역사 기록과 맞지 않는 서술이 많아서 주의해야 한다.[6]
그런데 그 원인이 아버지한테 별 이유없이 두들겨 맞아서라니까... 집안 꼴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