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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
- 설명
- 양반의 붕괴
- 현재
- 기타
-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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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완전히 정립된 일종의 귀족 같은 지배계층. 하지만 고려시대에도 개념은 있었다.
본래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북쪽에는 왕이 앉고, 동쪽에는 문관들이, 서쪽에는 무관들이, 남쪽에는 남반이라는 궁내 실무직들이 앉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중 남반은 조선시대에 사라졌고, 동반(문반)과 서반(무반)만 남아 양(兩)반이 된 것.
학문을 익힌 이들이 동반 또는 문반, 무술과 병법을 익힌 이들이 서반 또는 무반으로 불렸고 이들을 합쳐 양반이라 불렀다. 초기에는 관리들만이 양반이었지만 그 자손이 계속적으로 벼슬을 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조상 중에 관리가 있으면 양반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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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약 5% 미만의 집권세력으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지배계층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유학이라는 품계를 양반으로 잘못 기재한 통계적 오류이며, 실제 양반 비율은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그리고, 전라북도(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지금의 영주),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충청남북도와 경상북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조선시대 사회상에 대해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과거에는 조선을 삼국시대 수준의 극단적인 신분제 사회로 해석하여 상민은 글을 못 배우게 했다느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막았다느니 양반이 상민을 재미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고 글을 아는 상민은 역적이 될 놈이라고 처참하게 죽였다는 둥 황당한 묘사가 많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기 소유의 노비를 함부로 죽였을때는 관청의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게다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돈많은 천민에게 멸시를 당하는 몰락 양반들의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러한 몰락 양반들은 잔반이라 불리었는데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농사나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글공부 한걸 바탕으로 서당의 훈장이나 중인들이 주로 하는 송사의 소송서 써주기나 의약업 등을 하며 간신히 체면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악의 상황으로가면 족보를 팔거나 족보에 신분상승한 사람을 넣어주고 돈을 받는식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결국 돈과 관직 그리고 가문이 진정한 신분을 좌지우지 했다.
지금와서 과거에 진짜로 자기네 조상들이 양반임을 확신할수 있는 사람들은 몇몇 유명한 가문의
종가집 사람들 뿐일듯. 아님 유명 가문이지만 희귀한 성씨거나. 유림
같은 자칭 양반 단체는 족보 및 호주제까지도 전통이자 자랑이라고 하지만, 대중적으로 듣보잡으로 잊혀지는 상황이다.[1]
일제강점기 시대만 해도 양반 의식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유교적 가치가 멸시를 당하면서[2]
양반
의식은 그 뿌리를 잃고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인구이동과 전국민의 거지화가 일어나고 양반의 전통은 완전히 붕괴및 파괴했다.
무엇보다 양반 계층중 진짜라고 할 만한 지주들은 대부분 일신의 안녕과 재산을 위해 일제에 투신하거나 협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양반 의식이 멸시받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물론 평민 계층 중에서도 친일 매국세력은 넘쳐났으며 특히 문화 통치, 민족 말살 통치 시기의 매국노 상당수가 평민 출신이었지만 일반 평민과 사회지도층인 양반에 대한 평가가 똑같을 수는 없다. 반면에 이회영,이시영 일가나 김용환, 경주 최부자댁 등등 애국심이 투철한 양반 가문들도 전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나서면서 역설적으로 본인들의 가문은 몰락해버리는 결과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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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는 그저 남에 대한 존칭... 이지만 미묘한 감이 있다. 가령 자주 쓰이는 예문으로 '에라 이 양반아'가 있는데, 이는 존칭이기 보단 '놈'이라는 단어보단 그냥 듣기 덜 기분나쁘기에 부르는듯 하다. 자기 손아래 사람에게 '에라 이 양반아'라는 말과 '에라 이 놈아'라고 불러보자. 반응이 꽤 다를 것이다. 친한 사람끼리 장난삼아 서로 부를때는 그리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분위기에서는 이 말또한 시비조가 된다.
이외에도 점잖은 사람을 비유할때나 어떠한 상황보다 낫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 단어인데도 뜻이 완전히 정반대인 경우다. '차라리 양반'이라는 말을 쓰는데 못마땅할 때 그나마 낫다는 의미이지 완전한 칭찬은 아닐 수 있다.
의사양반의 경우 의사는 근대까지도 천시받던 직업이었고,
양반은 근대까지 존칭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역전되어서[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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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도 관련이 많다. 옛날 이야기에서는 아주 선하거나 아주 나쁘거나 하는 극단적인 캐릭터상을 보여주거나 하지만 대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한 주인공의 돈줄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양반은 특권 중 하나로서 제사[4]
를
지낼 수 있었다. 제사는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시절이었다.
양반은 조선후기에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5]
양반은 4대이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임금의 허락이 있어야 했고
이를 불천위제사라고 불렀다. 불천위제사를 많이 모시는 가문일수록 명문가로 명망이 높았다. 참고로
조선의 왕족은 양반보다 한단계 더
뛰어나서 대에 상관없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중국의 황제들은 한단계 더 뛰어나서
하늘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6]
제사에는 봉사대수라는 것이 있는데 쉽게 말해 몇 대 조상까지 제사를 모실 수 있나였는데 원래는 신분에 따라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조상의 대수가 달랐으나 후기로 갈 수록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4대까지 지내게 되었다.[#](http://terms.naver.com/entry.nh n?docId=1010986&cid=50221&categoryId=50230)[#](http://www.nfm.go.kr/Data/cuTsa c.jsp)
상민 역시 1대까지는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때 구휼 정책 중에 돈이 없어서 제사를 못 지내는 양민들을 지원하기가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이러한 제사는 양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서양 귀족들이 자기들을 차별화할 때 고상한 언어와 깍듯한 에티켓, 복장 등으로 구분한 것과 같이 조선의 양반은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준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배푸는 것으로 자신을 차별화했던것. 그리고 그 정점에 제사가 있었다.
복잡한 제사 절차와 화려한 제삿상. 우리가 아는 제사는 바로 주자가례에 따른 제사이자 양반층의 제사로 제사는 양반만 지내라는 법은 없었지만 그 복잡한 절차를 완벽히 숙지하고, 온갖 화려한 음식을 상에 차리는 건 당시 평민들은 하기 힘들다. 따라서 당시 양반의 제사는 그저 고인을 추모하는 것 뿐만이 아닌 온 고을의 소문거리로 아예 기안이라고 해서 마을 내의 양반들의 제사를 모아 놓은 달력도 있을 정도.
양반들은 이 복잡하고 화려한 제사 행위를 지내는 걸 과시해서 자신의 지위를 각인시키고 동류에게 인정받았고, 평민들은 그 제사에서 음복이라는 명목으로 그 제삿상을 먹고 즐길 수 있었다. 제공되는 음식은 제사용이다 보니 정성이 들어가고 고기나 물고기, 과일, 적전, 한과 등 귀한 음식들이었고, 양반집에서 먹기에는 너무나 양이 많았으니 양반들은 민심을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인심 좋게 나눠준 경우도 많았던것.
이러면서 점점 과시를 위해 제사 음식은 더 많고 화려해지고 절차도 복잡화되어서 건전가정의례준칙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사란 명목으로 모여서 서로 그 제삿밥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제삿상을 차린 집은 일종의 카페 역할도 어느정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주막외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은것은 양반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해당항목 참조.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6%91%EB%B0%98?action=edit§ 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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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주제 철폐를 두고, 방송토론에 나와 "호주제가 사라지면 인구 절반이 쌍놈이다"라는 괴이한 논리를 들먹이던 유림 측의 노인도 나왔다. 그러나 방송토론에 나온 방청객 누구도 귀담아듣지않고 다들 웃으면서 "그래서요?" 이런 반응이었다. 비슷한 노인 방청객이 "지금이 조선시대인 줄 알고 시대를 모르고 사는 논리군요?" 라고 인터뷰하자 유림 노인이 홀로 흥분했을 뿐.[2]
심지어 친일 세력조차도 초기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매국노들을 빼면 재능 있는 상민 출신들이 거의 70% 대다수를 차지했다. 당장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거나 밀정 노릇을 한 자들의 상당수들은 가진 거 없이 태어나 친일을 해서라도 먹고 살려고 했던 일반 평민들이다. 물론 이는 문화 통치가 본격화하면서 일제가 독립 움직임을 막고 피지배층 사이의 싸움으로 만들려고 한국인에게도 기회를 준다는 핑계로 일부러 의도한 측면도 있다.[3]
역전된 이유는 의학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그만큼 많은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렇다 보니 의사는 과거와는 달리 아무나 할 수 없고 뛰어난 능력을 지녀야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 되었기 때문이다.[4]
제사에 관한 디테일한 내용은 주자가례참조[5]
조선초기에는 양반이어도 고위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면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6]
중국의 제후국인 조선은 하늘에 지내는 제사인 천제를 지낼 수 없었고, 신라도 비슷한 이유로 삼국사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불교/무속/도교적인 형식을 빌려 제석천을 모시는 절을 짓고 불교식 재를 올린다든지, 국가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국조 제사시 간접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식 천제를 지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