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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일본도

日本刀

일본어 발음으로는 니혼토(にほんとう) 혹은 닛폰토(にっぽんとう).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전통적인 일본도 제작방식

3.1. 칼날의 제작과정

3.2. 칼집, 손잡이 제작과정

3.3. 조립과 의장 그리고 수집

  1. 일본도의 착용법
  2. 역사상의 평가

5.1. 중국의 도입

5.2. 조선의 도입

5.3. 전통 일본도의 성능

5.4. 현대식 일본도의 성능

  1. 창작물에서

6.1. 모조일본도

6.2. 일본도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

  1. 일본도의 종류
  2. 유명한 일본도

8.1. 가공의 일본도

  1. 참고자료,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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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일본에서 일본 고유의 방식으로 생산된 타치(太刀)나 우치카타나 등의 도검을 일컫는 말이다. 시대에 따라 초기의 직도 형태부터 후기형인 카타나까지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당연히 일본에서 자기네가 만든 칼을 굳이 일본도라고 부를 일은 없고(...), 카타나(刀) 혹은 타치(太刀)라고 불렀다.[1] 츠루기(つるぎ, 劍)는 양날검을 특별히 일컫는 호칭. 다른 나라에서는 왜도(倭刀), 왜검(倭劍)으로 부르기도 했다.

일본도를 닮은 검이면 생산지나 고유의 특징인 하몬, 접쇠 등에 상관없이 일본도라고 통칭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도를 만드는 사람을 '게츠'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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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

중국과 직접 교역하며 견수사, 견당사를 파견하면서 주력 도검이 당나라의 양식을 도입한다. 이러한 것들을 당대도(唐大刀)라고 불렀다.

이때까지는 장교용, 병사용 가릴 것 없이 모두 한 손으로 사용하는 직도의 형태를 가졌으며 날 길이도 70cm가 채 못 되는 짧은 도검들이었다. 쇼토쿠 태자의 칠성검이나 일반 병사용으로 사용된 흑작대도(黑作大刀) 등이 이 시대의 군용 일본도이다.[2]

이후 견당사의 파견이 중지되면서 일본도는 독자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 과정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 게누키가타타치(毛拔形太刀)라는 것인데 휘어진 칼날과 둥근 칼코등이(쓰바. 정확히는 아오이가타) 등 일본도의 형상을 갖추었지만 장식은 기존 당대도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때는 도호쿠 지방 국경선 너머로 준동하는 원주민인 에미시들과 조정간의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로 이때 에미시들은 을 타고 을 쏘며 기동력을 갖춰 전쟁을 했고 이것을 일본의 무사들이 도입했으며 마상전투에 걸맞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초기형 타치(太刀)에 해당된다. 헤이안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제가 붕괴하고 평민으로 구성된 군단제가 포기되고 지방관아의 자제로 구성된 건아(健兒)제도로 병역제도가 변경되며 자연히 소수정예의 형태로 군사제도가 변화되면서 도검의 형태도 무사들이 사용하는 휘어진 형태로 정착되어간다. 헤이안 말기-겐페이 시대에 이르면 일본도는 18~23cm의 짧은 손잡이를 금속 박판으로 위아래를 덮고 옆에는 어피를 붙이고 80cm이상의 긴 칼날을 가진 마상용 도검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이르면 산야를 자유자재로 기동하면서 습격이나 매복,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투법이 활용되며 기존의 기마궁시 전법은 입지가 줄어든다. 몽골과의 전쟁이나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부 수립에 관여한 악당(惡黨)의 전법 등 과거에 비해 도보 지상전의 비율이 늘어났다. 또 고다이고 신정부의 붕괴와 무로마치막부의 등장으로 초래된 남북조 시대 60여 년간의 내전기간 동안 도보전의 확대와 더불어 갑옷이 도보전에 걸맞는 도오마루(胴丸), 하라마키(腹卷)로 대세가 변했고 또 팔이나 다리 부분에 대한 방어가 더욱 철저해졌기 때문에 실전용 타치는 자루에 끈을 감아 땀의 흡수나 파지감의 강화를 꾀했다. 우리가 아는 일본도의 모습은 거의 이때 정립된다. 또 갑옷의 중장화에 따라 금쇄봉 같은 타격 무기의 활용도가 늘어나는 한편 나가마키, 노다치와 같은 커다란 도검들의 사용도 일반화되며 일본도가 전체적으로 중후장대화되는 것이 또한 이 시기이기도 하다.

견해에 따라서는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도를 이후의 전국시대보다 더 우월하게 보고, 일본도의 절정기를 무로마치 시대로 파악하기도 한다. 전국시대에는 오히려 조총 등의 등장으로 일본도의 전술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질적으로도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무로마치 말기에 들어 오닌의 난과 같은 내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점차 기존의 기마무사의 공급이 줄어들고 소모가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도보로 나서는 하급무사, 뒤이어 아시가루들이 전쟁의 주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 이들이 사용한 것이 바로 카타나라는 일본도로써 주요 특징은 타치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의 도검으로써 패용 장치가 없이 허리춤에 끼우고 다녔고 칼날도 2척 1촌(63cm) 정도로 짧으며 한 손으로 쓰기 적당한 칼이었다. 정확한 것은 우치카타나 항목 참조. 이러한 카타나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건설하여 천하인임을 표명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도보전이 일반화된 전쟁 환경을 감안하여 기존의 타치를 대체하여 사용되게 되고 전체적인 스펙도 타치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 즈음에는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장식을 통일해서 한 셋트로 차고 다니는 것도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다이소 코시라에, 또는 니혼자시로 부른다. 또 기존의 타치를 패용장치를 제거하고 카타나의 쿠리카타를 붙여서 허리에 끼워서 차고 다니는 한다치(半太刀) 양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식성에서 워낙 우월했기 때문에 카타나라도 한다치의 양식을 모방해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지나치게 긴 칼을 금지하고 날길이의 기준을 정했다. 일단 하바키를 제외한 날 길이 기준으로 1척(30.3cm) 이하는 단도, 1척 이상~2척 미만은 와키자시, 2척 이상은 카타나로 규정했다. 또 카타나의 날 길이는 2척 5촌(75cm)를 넘기지 않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기존의 타치를 갈아내서 날길이를 맞춰 패용하고 다닌 경우도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신분의 상징으로 무사가 항시 패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 실전이 없어지고 일본도에 대한 관념이 의식화되고 장식적인 것이 호평을 받으면서 일본도의 여러 부품에 화려한 투각이나 문양이 새겨지거나 다양한 디자인들이 선보이게 된다. 현대 일본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카타나에 실전용 외장과 보관용 시라사야를 따로 만든다거나 정비할 때 도침(칼배게)를 이용해서 뉘어놓는 등의 문화가 죄다 이 에도시대에 정립된 것이다. 물론 히고나 사츠마 코시라에처럼 실전적이고 투박한 것도 있었지만 대세는 보다 가볍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었다.

에도시대 말기에 이르러 쿠로후네사건과 같은 서양 세력의 침공과 교전이 자주 벌어지면서 막부측은 강무소(講武所) 등을 세워 신식 전술을 교육시키는데 서양인들이 총기에 의지하여 백병전에 무지할 거라 생각하고는 창술이나 검술을 정립해서 가르쳤다. 또 이때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서 당시 횡행하던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하던 이른바 유신지사들이 테러나 암살을 반복했으므로 이에 대항한 신센구미와 같은 조직들이 창설, 일본도로 시가지에서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이때에는 서양도검과 서양전술의 영향을 받아 그에 걸맞게 개량된 돗페이(突兵)코시라에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유럽식의 행어패용방식을 따라 서양식으로 패용하기도 했다. 칼자루가 뒤로 가게 하거나 등에 지고 다니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무진전쟁 때에는 주로 총포를 이용한 전쟁이 벌어졌지만 간혹 도검을 이용해 돌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검 사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4~5kg에 달하는 당시의 소총으로 총검술을 하는 것을 일본인들이 상당한 부담을 느껴서라고 한다. 서남전쟁에서는 화력이 딸리고 총탄이 부족한 사츠마 군대가 일본도를 이용해 발도돌격을 수행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평민 장정으로 구성된 당시 일본군이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서남전쟁은 구시대의 산물로 무시된 일본도가 다시 실전력을 증명한 전쟁으로써 이후 일본은 검도를 제정하고 실전군도를 제정하는 등 백병전에 대한 고려를 다시 하게 된다.

청일전쟁러일전쟁 때에는 16식 해군장교도, 19식 육군장교도(둘 다 세이버)의 양식을 유지한 채로 일본도 칼날을 끼우고 양손으로 쥐는 손잡이를 장착한 양손세이버가 실전군도로써 사용되었다. 1934년에는 파시즘 열풍에 의해 일본도 타치 양식을 갖춘 신군도가 등장한다. 1945년 패망 이후로 일본도들은 죄다 회수되어 폐기될 위기에 처했으나 전통 공예품으로써의 측면을 강조하여 겨우 살아남게 된다. 비무장국가로써 15cm 이상의 날길이를 지닌 날붙이를 무기로 규정하여 소지가 금지되는 일본에서 일본도가 자유롭게 소지와 거래가 가능한 것은 전통 공예품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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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통적인 일본도 제작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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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칼날의 제작과정 ¶

  1. 사철을 제련하여 덩어리 형태[3]로 만든다(현재는 작가에 따라 직접 만들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에서 공급받는다).
  2. 만들어진 철 덩어리를 넓게 펴서 조각을 낸다.
  3. 쇠의 성질에 따라 연한 쇠와 강한 쇠로 나눈다.
  4. 쇠를 모아 와시(和紙)[4]에 싸서 가마에 집어넣는다.
  5. 쇠를 접어가면서 불순물을 제거한다.[5] 접을 때마다 짚과 재를 이용하여 철 내부의 탄소량을 조절한다.
  6. 강한 쇠를 u자 형태로 만들고 그 사이에 연한 쇠를 집어넣는다(이는 '甲伏(こうぶせ、코부세)' 라는 강한 쇠와 연한 쇠를 조합시키는 방식의 경우이다. 강한 쇠와 연한 쇠를 조합시키는 방법은 맨 아래의 그림과 같이 다양하다. 참고).
  7. 망치로 두들겨가면서 칼의 형태로 모양을 잡는다.
  8. 특수한 진흙을 바른다. 칼등 부분은 비교적 느리게 냉각되도록, 칼날 부분은 빠르게 냉각되도록 진흙을 바른다. 부위별로 다른 진흙을 사용하는 것과 진흙을 바르는 모양에 따라서 일본도의 무늬인 하몬의 형태가 달라진다.
  9. 다시 가마에 넣고 충분한 온도가 될 때까지 두었다가[6] 물에 넣어 담금질한다. 이때 날 부분은 급격하게 냉각되어서 마르텐사이트라는 견고한 조직이, 다른 부분은 느리게 냉각되어 연한 조직(펄라이트)이 생성된다. 마르텐사이트가 생성될 때 부피가 4.4% 정도 증가하기 때문에 일본도가 뒤로 휘어지게 된다. 급격한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하몬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무늬이다.
  10. 적절한 온도에서 뜨임을 해주어 인성을 좋게 한다. 이때 경화된 조직이 연화되어 담금질로 생긴 하몬이 사라지지 않게 주의한다.
  11. 간단하게 초벌연마를 한다. 칼의 배 부분에 조각을 하고 히(혈조)를 새기기도 한다.
  12. 손잡이 안에 들어가는 부분(슴베)의 연마를 하고 작가의 이름, 사는 곳 등을 새긴다. 이 부분은 작가에 따른 특징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바꿀 수 없다.
  13. 전문 연마사에게 넘긴다. 연마사는 여러 숫돌과 연마재를 사용하여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를 잘 나타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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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칼집, 손잡이 제작과정 ¶

칼집의 경우는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1. 나무를 고르고[7] 나무를 칼집 모양으로 자른다.
  2. 반으로 가른다. 그 다음 속을 칼과 끌등을 이용해 파낸 뒤에 찹쌀을 이용하여 접착한다.
  3. 칼집을 원하는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입구 부분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물소 뿔을 덧대어준다.
  4. 옻칠을 칠해 마무리한다. 장식성을 더하기 위해 금속장식을 덧붙이거나 가오리가죽 등을 위에 덧붙이기도 한다.

손잡이의 경우 깎아내는 과정까지는 칼집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 뒤에 손잡이에 우둘투둘한 상어가죽이나 가오리가죽을 덧붙여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다.

장식부품의 제작과정은 전문적인 금속공예 분야이기 때문에 간단히 다루기는 어려우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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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조립과 의장 그리고 수집 ¶

일본도의 장점 중 하나라면 비교적 간단하게 분해, 조립이 가능하여 관리 수리가 용이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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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피를 감은 손잡이를 칼몸의 슴베에 끼워서 메쿠기를 박을 구멍을 뚫는다.
  2. 다시 칼몸을 손잡이에서 빼고 손잡이에 가죽끈이나 면끈 등을 감아준다. 이 과정에서 손잡이의 적당한 위치에 메누키를 얹고 그 위로 손잡이끈을 감아 고정시킨다.
  3. 하바키를 칼몸에 끼운 뒤에 그림과 같이 셋파와 코등이(츠바;tsuba)를 끼운다.
  4. 후찌를 손잡이에 끼우고 손잡이에 칼몸을 끼워넣는다.
  5. 대나무나 뿔 재질의 못(메쿠기)을 박아 칼몸과 손잡이를 고정시킨다.

따라서 일본도에 있어서 도 그 자체인 것은 칼몸이며, 다른 부분은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국과 중국에서는 실용성을 위해 각 부품들을 금속 못 등으로 견고하게 고정시켜 일체화한 점과는 다른 점이다.

이는 취향에 따라 부품을 바꾸어 검을 치장하는 덕질을 가능하게 했으며, 정교하며 다양한 조각이 이루어진 코등이(츠바;tsuba)를 필두로 일본도의 의장을 강화시켰고, 일본도가 미술품 취급을 받으며 수집되는데 일조하였다. 현대에도 이와 같은 부품들을 모으고 거래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는 부분은 코등이로, 이만 다루는 전문적인 서적이나 전시 컬렉션이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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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도의 착용법 ¶

일본도에는 흔히 알려진 타치카타나의 착용법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존재한다.

  • 타치의 패용법

    • 의식(儀式)용 메기 - 관청의 의식에서 패용하는 의장용의 시키다치(式太刀) 등을 패용할 때 쓰는 방법. 관복의 허리띠인 관대(官帶)에 패용 끈을 끼워서 패용한다.

    • 허리에 둘러메기 - 타치의 가장 기본적인 패용법. 타치의 칼집에는 패용을 위한 가죽이 연결되는 아시(足)라는 패용 부품이 2개 붙어있다. 여기에 붙은 가죽에 2~3m 정도의 끈인 타치오가 연결되어 이것을 풀어서 길게 늘인 다음 와키자시에 걸고 X자로 매듭을 지은 다음 허리에 두세 바퀴 감아서 단단히 묶는다. 단순히 허리에 두르기보다는 단도나 와키자시에 함께 걸리는 방식이다.

    • 타치다이(太刀帶)에 끼우기 - 전국시대 후반이 되면 점차 패용장치(足)을 사용하여 타치오로 허리에 둘러 고정하는 방식은 잘 사용되지 않게 된다. 그대신 간편한 타치다이가 등장하는데 허리에 두르는 끈과 타치를 고정하는 끈이 따로 있어 허리에 타치다이를 두른 다음 타치를 끼우는 끈 매듭에 끼워주기만 하면 간편하게 고정되는 장점이 있었다.

    • 끈매듭으로 고정하기 - 2~3m의 끈을 준비하고 반으로 접어 칼집에 X자로 묶어 허리에 둘러서 남은 부분을 배꼽 부근에서 매듭을 지어 벨트처럼 착용한다. 칼집이 단단하게 고정되는 효과가 있다. 반면 칼집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 반대로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했다. 타치 뿐만 아니라 카타나까지 이 방식으로 패용할 수 있으며 달리 패용 장치가 없는 한다치(半太刀)나 우치카타나(打刀)를 갑옷 위에 패용할 때에는 이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

  • 카타나의 패용법

    • 허리띠에 끼우기 -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방법. 허리띠에 끼우면 칼집 옆에 튀어나온 쿠리카타(栗形)에 걸려 밑으로 빠지지 않게 된다. 평복 뿐만 아니라 갑옷 착용시에도 가능했는데 갑옷 착용시에는 갑옷 위가 아니라 안의 평복 허리띠에 끼웠다. 그래서 갑옷을 착용하고 카타나를 허리띠에 끼우면 칼집 일부 쿠사즈리(草接)에 가려져 있고 자루는 쿠사즈리 사이에서 튀어나와 있는 식. 갑옷 위에 패용할 때에는 끈매듭으로 고정하기로 고정하였다.

    • 등에 둘러메기 - 닌자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흔히 알려진 닌자도라는 것 자체가 할리우드의 창작물이나 다름없어 근거가 없다. 일단 닌자도는 80년대의 가짜 닌자의 대표격인 아시다 킴이라는 미국인이 자신의 책에서 등장시킨 것을 시초로 본다. 역사적으로는 노다치를 등에 둘러메어 운반하는데 쓴 사례가 있고 평범한 카타나를 등에 둘러메고 다닌 것은 메이지 유신 당시의 무진전쟁 때의 사무라이들. 무진전쟁에서는 칼이 아니라 총과 대포가 전쟁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칼을 쓸 일이 별로 없어서 발도의 불리함 대신 총기 취급의 용이함을 택해서 이런 방식으로 많이들 차고 다녔다. 별다른 장치나 방식이 있는 건 아니며 넓은 천을 이용해 묶어서 대충 둘러메는 방식.

    • 허리 옆에 세워서 패용하기 - 마찬가지로 메이지 유신의 무진전쟁에서 사용되던 방식. 넓은 천을 이용해 묶고 핸드백처럼 어깨에 걸어서 메고 다녔는데 이럴 경우 보통 왼쪽 허리에서 수직으로 섰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총기 사용에 편하다는 점 때문. 보통 무사들은 천을 이용해서 패용했지만 높은 직급의 간부들은 유럽에서 수입한 가죽제 Frog를 사용하기도 했다. 행군하거나 총격전을 벌일 때에는 칼자루를 뒤로 가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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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상의 평가 ¶

일본도에 대한 평가는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11세기의 고려시대부터 일본과 물물교환을 통해 도검을 수입한 기록이 발견된다. 이후 중국 해안지역에의 연이은 왜구 약탈이나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난전에서 일본도의 유용성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깊게 각인되었고, 징비록이나 명나라의 기록에서도 일본도의 유용함을 논하는 대목은 빠지지 않는다.

무기가 결국 사용자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임을 고려해보면 약 백여년 간의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인들이 비교적 평화로웠던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 단병접전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한들 당대 일본인들과 맞서 싸운 주요한 인물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본도를 위협적인 무기로 인식하였음은 사실이다.

일본도가 제대로 무장을 갖춘 병사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도검류 자체가 동서고금 막론하고 대갑주전투에서는 별 효용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일본도만의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질이 떨어진다는 것도 현대기준에서의 얘기이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꽤 쓸만한 물건이었다.[8]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D%BC%EB%B3%B8%EB%8F%84?action= edit&section=9)]

5.1. 중국의 도입 ¶

송나라 시절에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타치(太刀)가 수입되긴 했지만 이때는 실전무기가 아니라 독특한 양식의 외국 칼, 수집품 취급을 받았다. 일본도가 실전무기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명나라 시대에 왜구가 준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명나라는 이른바 해금정책으로 대외무역을 크게 제한하였는데 무역으로 큰 돈을 벌던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이에 저항하여 용병을 고용하고 밀무역을 하면서 사실상의 해적집단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에 많은 중국인, 일본인 용병들이 한 몫을 잡기 위해 뛰어들면서 명나라 해안에 대한 노략질이 극심해졌다. 특히 저장성 지방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때 절강성에 부임한 군사령관 척계광은 낭선, 등패를 비롯한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왜구의 주특기인 일본도 검술과 돌격을 저지하는 원앙진을 고안하고 기동력 있는 경량 화포(호준포 등)을 채용하고 화승총도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도의 절삭력, 긴 길이에서 나오는 사거리를 보고 일본도의 영향을 받아 쌍수도라는, 화승총병이 백병전시 사용할 무기를 만들었다. 또 일본 검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투항 왜구에게 검술을 배우는 동시에 1561년에는 일본에서 카게류(陰流) 검술[9]도 수입하여 모쿠로쿠(目錄)[10]까지 입수하였다(신유년에 입수하여 신유도법(辛西刀法)이라고도 부름). 이후로 명나라에서도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 연구가 이루어져서 왜도로 창을 이기는 방법을 담은 정종유(程宗猷)의 단도법선(單刀法選)이 출판되었으며 1621년 모원외가 1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2천여 종의 병법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병법서 《무비지》에도 '일본음류도법' 과 '왜구도법' 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일본도의 양식을 그대로 베껴서 생산했다. 이순신 장군에게 명황제가 하사한 명조팔사품 중에 대도의 쓰바(鍔)는 일본의 기쿠 양식을 그대로 복제한 것. 하지만 나중에는 명나라식으로 중국 양식의 물건으로 대체된다. 명나라 멸망 때까지 이 중국식 일본도들은 상당히 많이 쓰였지만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기효신서, 무비지와 같은 병법서가 금서로 지정되고 일본도 형식의 도검들이 폐지되면서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다.

다만 중국의 소수민족인 묘족에게서는 이 명나라식 일본도와 왜도술, 단도법선(單刀法選)의 기술들이 그대로 전수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묘족 특유의 무기로 여겨지며 묘도, 묘도술로 불리고 있지만 그 시작은 명나라의 절강병법에 있는 것.

중국 배경인 무협소설에서도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보통 중국 배경의 무협물에서는 는 두껍고 은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도는 검처럼 가느다란 도로 찌르기에도 큰 문제가 없어 검과 도의 장점을 고루 가진 무기로 평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D%BC%EB%B3%B8%EB%8F%84?action= edit&section=10)]

5.2. 조선의 도입 ¶

조선에서는 왜검(倭劍)이나 왜도(倭刀)라고 불렀다.

본래 임진왜란 이전에는 조선은 일본의 왜검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물론 이전부터 왜검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골동품 겸 병장기로 수입하는 경우도 자주 있기는 했지만 대대적으로 도입되지는 않았다. 삼포왜란 등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으킨 폭동에서 조선군은 활과 대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제압했기 때문에 도검이라는 무기 자체에 대해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이 조총으로 조선군의 대열을 흐트려놓은 다음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격해왔는데 이러한 백병전 상황에서 일본도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이후엔 조선과 명의 장수들도 일본도를 모으는데 혈안이 되었을 정도라 할 정도로 당시로선 백병전에서 강력한 무기였다. 항왜들의 총포술과 함께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도 높게 평가되어 조선군에 채용된 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란 기록이 있다.

임란 이후 조선은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 일본도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였으며 검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무관 김체건은 일본에서 왜검술을 배워오기도 했고 조선 정조 시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의 한 장에 왜검(일본도)을 사용하는 검법에 대한 설명 또한 전해진다.

예술품으로서의 기능도 있어 삼전도 굴욕 이후 청나라 사신들에게 임진년 때 노획한 왜검을 하나둘씩 진상품으로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곧 왜검(일본도)를 사용한 전술이나 검법은 명과 조선 모두에서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종전에 써오던 무기와 다르다는 문제점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은 전통적으로 활과 같은 원거리 무기를 중시하고 칼은 일종의 호신용 개념으로 짧은 것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길고 활을 쏠 때 걸리적거리는 칼은(지휘용 칼이 아닌 이상)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같은 도 계열로서 리치도 길고 파괴력도 더 강한 월도가 있었기 때문.

하지만 이 때문에 후기의 조선검에는 중기에 대대적으로 도입되었던 왜검의 영향이 다소 남아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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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전통 일본도의 성능 ¶

일본도가 엄청난 내구성과 절삭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으나 일본도의 실제 내구성은 상당히 좋지 않다. 실제로는 다다미나 대나무를 베다가 실수해도 쉽게 휘어지는 경우가 많고 2차대전 당시 일본군도도 전통 칼날을 쓴 경우는 예외 없이 휘어지고 망가지는 경우가 많이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는 일본도 칼날에 조각을 하는 호리모노는 열처리가 다 끝난 다음에 작업을 하는데 도검의 강도가 최상에 다다른 열처리 직후에 정으로 쪼아서 조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본도가 얼마나 무른 칼인가를 방증한다.[11]

하지만 이런 것을 가지고 일본도를 쓰레기라고 비하할 수는 없다. 일본도는 전통적인 강재와 제조법을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해서 제조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수백년 전 이상의 오래된 공업능력 수준의 품질 그대로이다. 이것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전통문화유산으로 보며 무기금지법에 의해 현대강재를 이용한 생산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12] 즉 일본도는 전통 칼에 속하는데 전통 제법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은 모두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심각할 만큼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은 서양도검도 큰 차이가 없다. 중세시대의 유물을 가지고 경도계로 여러 군데를 찍어보면 그 경도가 천차만별이다. 이는 당시의 기술이 탄소를 고르게 분포해서 제철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해서 하나의 강괴라도 탄소량이 몰린 부분과 별로 없는 부분이 혼재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경도를 충분히 올리는 열처리를 할 경우 탄소량이 몰린 부분은 지나치게 경도가 올라가고 탄소량이 적은 부분은 매우 무른 경도가 나온다. 문제는 경도가 올라간 부분이 매우 쉽게 깨지고 갈라지며 곧 부러지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균 경도를 락웰경도 40 이하로 잡으며 이 때문에 날카로움 유지능력과 절삭력은 평균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그대신 탄성을 많이 줘서 어지간하면 부러지지 않도록 한 것이 서양검의 제법이다.

일본 국내에서 생산 가능한 철은 모래와 섞여 불순물이 굉장한 사철이었으며 10kg를 타다라로 제련할 경우 1kg의 강괴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생산효율이 나빴다. 이조차도 불순물을 다량 함유하여 접쇠 공정을 통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강재의 순수성을 높여야만 했는데 접쇠 공정은 내구성이 나쁘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는 공정이며 잘해봐야 평균 수준이다.[13]

재질과 제법의 한계는 여러모로 일본도, 특히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일본도의 성능과 내구성에 많은 제약을 가하는 부분이다.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일본도는 강도는 낮지만 부드럽고 유연성이 높은 연철 소재의 심인 '신가네(心鉄, 心鐵)'[14]를 유연성은 낮지만 딱딱하고 단단하며 강도가 높은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인 '하가네(刃鉄, 刃鐵, 刃金)'[15]로 감싸는 구조를 채용함으로서 어느 정도의 충격흡수력과 경도를 겸비하는 칼날을 지닐 수 있도록 꾀하고 있으나[16], 여기서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순전히 장인의 감에만 의지해서 주먹구구식의 구시대적이고 전근대적인 생산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전통 일본도의 경우에는 그냥 감으로 두들겨 만들어진 탓에 이러한 특징으로부터 낳아지는 특성들을 실제로는 그다지 유용하게 활용하기 어려운 편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전통 일본도 중에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특징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 과정에서의 품질관리의 미흡함으로 인한 중대한 결함을 지닌 경우도 많은데, 연철 소재의 심인 신가네가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인 하가네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어 칼날 전체의 성능과 내구성을 저하시키는 등 여러모로 품질이 엉망인 칼날들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오히려 공업적인 생산방식을 나름대로 도입하고자 했던 만철도 등의 일부 일본군도가 이런 면에서는 전통 일본도보다 사정이 다소 나았을 지경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군도 중 전통 일본도의 칼날을 전용해 만들어진 칼들이 실전에서는 성능이나 내구성 등에 있어 영 좋지못한 모습을 많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전통 일본도의 제약과 결함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전통 방식은 모두 장인의 감에 의지한다는 것이 크나큰 한계이다. 일본도는 탄소량이 높은 강재는 칼날에 배치하고 낮은 강재는 칼등에 배치하는 구조를 지니며 세간에는 이것이 우월한 위력의 비결처럼 알려졌으나,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일본도의 경우에는 사철을 망치로 깨봐서 뭉그러지는 것은 '신가네(心鐵)'로 분류하고 깨지는 것은 '하가네(刃鐵)'로 분류하는 매우 주먹구구스러운 방식으로 생산된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구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실제로는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중대한 한계를 지닌다.[17] 강재를 차등배치할 때도 단조작업 중 신가네가 노출되어 취약 부분이 발생한 제품도 있는데 이것은 작업 과정에선 결코 알 수 없다. 또 열처리를 할 때 현대 공정에서는 온도계를 비롯한 측정도구를 통해 최대한 동일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지만 전통 방식에서는 장인이 쇠의 달구어진 색깔을 보고 감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부분열처리를 위해 바르는 진흙의 두께도 매번 미세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칼의 성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들이 매우 부정확한 감으로 이루어지고 그 환경도 매번 달라지므로 품질의 균일화를 애초에 만족시킬 수가 없다.

실제로 고도 계열의 도검일수록 잘 휘지 않고 빳빳하다고 하나 이런 도검들은 서양검과 동일한 이유로 쉽게 부러질 수 있었으며 사철이라는 강재 태생적인 한계점이 더해졌다.

환상을 가중시키는 것은 가십거리에 혈안이 된 매스미디어들의 탓도 크다. 《디스커버리 채널》에 의하면 '베는 것' 에 한정해서 모든 인병기 중 가장 고성능을 발휘하는 무기로 묘사되며 사람과 같은 밀도를 가진 젤라틴을 베는 실험에서 오직 일본도만이 일도양단에 성공했다고 나왔으나 사실 그 정도의 절단 성능은 일본도 외의 타 문화의 검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정규군이면 최소한의 갑주는 갖추어입는다.[18]``[19] 디스커버리 채널 등에서 무술이나 병장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동양의 무술/무기에 대한 판타지를 그대로 보여주며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20]
또한 판타지 소설이나 판타지 부류의 만화가들에게 입문서인 "무기와 방어구"시리즈 중국편에서는 일본도가 중국의 전통 도검인 [박도](/wiki /%EB%B0%95%EB%8F%84)(항일대도), 오구(유엽도,우미도)같은 중국 전통곡도보다 우월하게 표시하였으나 이 책을 쓴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나면 일본도에 대한 과장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더구나 일본 만화나 영화에서는 중국 전통도검이 일본도에 어이없이 절단되거나 부서지는 과장한 면을 보여주는데 실제로는 실험한 결과 오히려 부서지거나 절단되는 것은 일본도였다.[21] [22]
사실 딱봐도 중국 박도류가 일본도보다 훨씬 두껍고 날이 넓으며 무게도 많이 나가는것들이 많은데, 이런 구조차이로는 동일 재질로 만들었을때 일본도가 박도와 있는힘껏 날 대 날로 부딛치는 단두대매치를 벌여서 이길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 박도와 일본도의 체급차이라면 사실 박도쪽이 좀더 무른 재질로 만들어도 일본도와 맞먹거나 이길수 있을 지경이다.[23] 일본도는 장인의 신비로운 힘 같은게 불어넣여져 만들어진 초자연적인 존재가 당연히 아니므로(...) 구조적으로 박도를 이기기 힘든게 당연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일본도가 완성된 시기는 몽골의 일본원정시기로 그 이전에도 일본무사들은 곡도를 쓰는 경우도 많았으나 이 곡도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일본도와는 좀 거리가 있다. 몽고의 침입때 소규모나마 일본군과 몽고군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일본기마군이 몽고 보병에게 전멸되는 사태도 있었다. 이때 일본기마군을 상대로한 몽고군 무기가 중국전통도검이 오구 즉 유엽도와 몽고 전통곡도인 만도로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무사들은 이 유엽도와 만도를 참고로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일본도 탄생된것이다.

일본도로 총알을 가르는 시험도 원래 서부시대부터 총을 쏘아 풍선 두 개를 터트리던 식의 유희, 즉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 권총탄은 납을 구리 외피로 감싼 것이며 열처리된 강철보다 훨씬 무르기 때문에 잘려나가는 것이 당연한데 굳이 일본도 뿐이 아니라 쇠를 갈아서 날을 세운 것이라면 그 무엇도 가능하다. 한국 환도는 물론 심지어 내구도가 한참 떨어지는 버터용 나이프로도 자르는게 가능하다.# 굳이 일본도 뿐이 아니라 쇠를 갈아서 날을 세운 것이라면 그 무엇도 가능한데 실제로 m2중기관총의 철갑탄을 상대로 한 실험에서는 심각한 날손상이 즉시 발생했으며 얼마 못 가 부러졌다.[24] 워터젯 커터 실험도 비슷한 트릭이며 날카롭게 세워진 칼날은 단면적이 현미경으로 봐야 할 만큼 좁으므로 이것을 중심으로 고압 수분이 2갈래로 갈라져 빠져나간 것이다.

더불어 기관총의 총신을 가르고 박혔다던지, 사람과 갑옷까지 절단한다던지 하는 헛소문들도 이런 환상에 크게 일조한 바 있다.

여러 중세시대 매니아들의 실험결과 칼로 숭숭 잘 베일 것만 같던 가죽 갑옷조차도 찌르기나 좀 통하지 베기에는 굉장한 내성을 지닌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하물며 금속으로 만든 갑옷은 칼 따위로 베어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같은 맥락으로 기관총의 총신을 가르는 것 또한 철갑옷을 절단하는 것 이상의 헛소리. 애초에 총신은 사격시의 열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가장 공들여서 견고하게 만들어지는 부위다.

풀 메탈 재킷 에서 하트먼상사로 등장했던 로널드 리 어메이가 이것에 대해서 실험을 해본 바 있다. 서양의 롱 소드와 일본도를 비교해보는 실험이었는데, 가죽갑옷은 잘 베어냈지만 역시 철 갑옷은 상대하기 무리였다. 절삭력에 있어서는 롱 소드보다는 나았지만, 찌르기의 위력은 거기서 거기인듯(...)

일단 허리에 차고 다니도록 만들어진 도검류 계통에서는 그래도 칼자루가 긴 편이기 때문에[25] 지랫대의 원리상 힘을 줘서 베어내리기도 좋고 운용도 편하다. 칼 쓸 때 야구방망이 잡듯이 손을 맡붙여 잡고 휘두르는 거랑 검도 하듯 잡고 휘두르는 건 칼끝의 변화 폭이 천지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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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현대식 일본도의 성능 ¶

물론 현대 공업기술로 만들면 얘기가 다르다.

일본 방송에서는 일본도의 구조를 아에 소재까지 현대식으로 바꿔서 더욱 업그레이드한 경우도 있는데, 날 부분을 강철이 아니라 초경도 합금으로 교체해본 사례가 있다. 칼몸은 마사무네. 후지오카 히로시가 시참한 결과 자동차 철판을 9cm나 베어냈다고.(일반 일본도는 몇cm정도) 이 방송에서는 참철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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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작물에서 ¶

양판소에서는 현대인천재론도검제일주의에 의거하여 이고깽들이 뚝딱뚝딱하면 만들어진다. 드워프라면 "쇠를 접어서 두들기고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줘"라고 하면 그냥 만들어준다.

일본쪽 창작물에서는 사무라이와 함께 단골로 자주 나오는 무기. 현대 능력자물이건 판타지건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거기다 신기하게도 광선검마냥 아무거나 쑥쑥 벤다. 사람 팔다리와 목은 물론이고 나무, 강철, 자기보다 무겁고 두터운 검이나 둔기, 갑옷 등도 두부 자르듯이 가볍게 자르거나 부수거나 튕겨내는 등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인다. 게다가 저렇게 무기를 휘둘러놓고는 날이 상하거나 휘어지는 것도 없이 멀쩡한 사기급 내구력은 기본 사양.
심지어는 검기를 내뿜어 저 멀리 있는 물체까지 한큐에 베어버리는 초능력을 구사하기도 한다. 물론 다 뻥. 아무리 단단한 검이라도 저런건 불가능하다. 검기 쓰니까 그러지.

서양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매체에서도 비교적 등장하는 경우가 꽤나 있는 편이다. 중세시대 배경이나 스타일리쉬한 배경이든 간에 일단 공통점으로는 레벨이 오를수록 가드나 검신에 화려한 무늬가 붙는 검 계열 무기와 달리 일본도는 레벨이 높은 무기여도 장식이 안 붙는 경우가 많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서 주로 취급은 제각각이지만 일단은 강한 무기에 속한다. 그 중에서 파이널 판타지7세피로스마사무네가 가장 대표적이다.

데빌 메이 크라이시리즈에서 버질염마도라는 카타나를 애용한다.

엘더 스크롤 시리즈에서도 아카비르의 토착종족중 츠아에스치의 대표적인 무기라 하며 역시 강력한 편에 속한다. 다만 이름은 카타나가 아니라 블레이드 소드(Blades Sword)라 불린다. 이유는 엘더 스크롤 세계관(게임의 무대인 탐리엘 기준)에서 일본도를 사용하는 조직이 블레이드단뿐이기 때문. 혹은 아카비르 소드라고도 불린다.

서양 중세시대 갑옷 및 무기 고증이 비교적 꽤 높은 편이며 중세시대 분위기를 상당히 잘 재연한 데몬즈소울, 다크소울에서도 등장하며 기량특화 캐릭터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고 강력한 무기이다. 덕분에 중세 기사 갑옷 입고서 카타나 들고 돌아다니는 진풍경을 많이 보게 된다.(...)

다크 소울 2에서 등장하는 지역인 녹아내리는 철성은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여 번영했다는 설정이며 이곳에서 중세 갑옷을 입고는 무기로 일본도를 차고 돌아다니는 기묘한(...) 기사들을 상대해야한다. 칼을 검집에 넣거나 빼고, 휘두르는 모션도 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무라이의 그것.

서양 판타지에서 일본도가 등장하는 게임의 원조는 위저드리가 가장 많이 꼽히며 위저드리의 영향으로 많은 서양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RPG게임은 물론이요 RPG게임이 아니여도 작품이 판타지풍에서도 일본도가 많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 원조 위저드리 시리즈 제작자 중 한 명인 앤드류 그린버그(Andrew C. Greenberg)에 의하면 원래 위저드리 시리즈에 왜색적인 요소를 넣을 계획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또 다른 제작자인 로버트 우드헤드(Robert Woodhead)가 당시 워낙 사무라이, 닌자물에 열광하고 쟈포네스크 기질이 심한 편이여서 작중 사무라이, 닌자 클래스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 두 직업이 상당히 강력하며 무라마사가 끝내주게 강한 아이템이 되었다는 비화가 있다.

이 외에도 상당히 많은 판타지 작품들 중에 일본도가 많이 등장하는 편이니 잘 찾아보도록 하자.

현대에 와선 특유의 간지와 일본 만화의 영향으로 동양 판타지의 마스코트 격이 되었으며 아예 일본도는 사무라이, 닌자물에서만 등장하는 무기가 아닌 서양 판타지의 무구에서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동양과는 단 1g의 연관성도 없는 현대 서양 뱀파이어들이 일본도를 제식무기처럼 쓰는 경우도 있으며 미국에서 만들어진 메리 수 테스트를 보면 캐릭터가 메리 수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기준 중에 (일본인이 아니면서) 일본도를 사용하는지의 여부가 있다(...). 여러모로 와패니즈의 득을 단단히 본 칼이다.

일본도를 여성향으로 모에화한게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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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모조일본도 ¶

전통방식으로 일본 내에서 장인이 제조한 것만을 일본도로 인정하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현대강재, 현대 공법으로 만든 것 혹은 일본의 전통방식을 모방해서 만드는 모든 일본도형 도검들은 모조일본도 혹은 모조도로 분류한다. 진검, 가검 가리지 않는다.

일본도에 대한 수요는 세계적으로 막대하지만 이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일본도의 생산량은 너무 적고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그래서 많은 메이커들이 모조일본도 생산에 뛰어들었다.

모조일본도 생산의 최대 거점은 중국이다. 1045탄소강을 이용하고 아연합금 도장구를 탑재한 일본도 모양의 저질 칼이나 가검류, 1060이나 1095탄소강을 사용하여 상당한 내구성과 절삭력을 갖춘 물건은 물론 일본의 타마하가네를 사용하여 전통일본도의 하몬까지 자유자재로 재현하는 것까지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품목을 생산하며 폴첸, 다이너스티포지, 콜드 스틸, 친니즈 커틀러리 등 이쪽에서 제법 알려진 메이커들의 제품은 물론 이베이에서 장사하는 수많은 중국 군소 유통업체들까지 다 중국에서 만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중국 용천시가 지상 최대의 모조일본도 생산 거점. 용천시의 물건들은 미국은 물론 일본에도 가검으로 들어가고 있고 한국에도 생각보다 많이 풀렸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일본도형 도검도 물론 모조일본도에 속한다. 국내 칼의 특징은 베기장에서 주로 사용하고 전통 있는 일본의 도검문화가 들어오지 않은 탓에 주로 베기를 위해 칼날이 넓고 국적불명의 도장구를 탑재한 것들이 많이 팔린다. 그 대신 내구성은 평균적으로 매우 뛰어난 수준. 중국제 모조일본도들은 일본도의 양식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재현했기 때문에 국산 칼보다는 훨씬 원래 일본도에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조일본도의 내구성도 천차만별이라 1045탄소강이나 타마하가네를 사용한 물건들은 내구성이 전통일본도와 다를 바 없거나 더 약하기도 하다. 강재를 속이는 경우도 일부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1060이나 1095 탄소강을 사용하고 통열처리를 한 성능 위주의 제품들은 무시무시한 내구성을 자랑하며 절삭력도 상당히 좋은 편으로 미국 등지에서 소비되는 모조일본도들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부분열처리를 하는 제품들의 경우 아무래도 통열처리 제품보다는 내구성이 떨어진다.

인도 등지에서 수상쩍은 다마스커스 칼날 일본도를 판매하고 있으나 장식용 이상의 성능을 기대하기 어려운 물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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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일본도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 ¶

현대의 군충장 연구를 참고하면 전국시대의 전투에서 무기에 의한 사망율은 각각 활, 조총, 창, 투석, 일본도 순이다. 용감하게 일본도를 뽑아들고 돌격하는 일은 적어도 전국시대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일본도는 다른 무기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위의 연구 결과를 보고 무작정 일본도를 까는 사람도 적지 않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인터넷에서 일본도에 대해 엇나간 환상을 가진 사람이 꽤나 많아 충돌을 빚은 반면 군충장 연구결과가 인터넷상에도 퍼지기 시작한 근래(2010년도 내외)에 이르러서는[26] 일본도를 심하게 비하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 모두 옳은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검이 다른 무기의 보조무기로서 활약한 것은 동시대 유럽도 마찬가지고 단순히 주무장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일본도를 폄하하기엔 무리가 있다. 전국시대 이후로 눈을 돌려보면 난전에서 조선군과 명군이 일본군에게 크게 고전하였다는 기록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조총 다음으로 두려운 무기는 '일본도' 였으며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일본도를 바치고 귀화하는 왜인들을 받아주기도 하였다. 척계광의 기효신서나 박제가의 무예도보통지 등에도 일본도를 막을 수 있는 쌍수도에 관한 내용이나 아예 왜검이라 하여 일본도 기법을 실어놓기도 하였다. 일본도에 큰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나 일본도가 역사적으로도 위력적인 활약을 펼쳤던 도검 중 하나였음이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본도를 쓴 일본인들이 워낙에 치고받고 하는 일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일본도의 실전경험이 많이 쌓여갔던 것 뿐이지만(...).

유럽의 롱소드가 갑옷의 발달에 맞춰 그 형상이 적극적으로 변화한 것과 달리 일본도는 용도 자체는 바뀌었어도 부드러운 것을 가르는 데에 특화된 디자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현대 사극 등에서는 병사(아시가루)들도 삿갓(진가사)에 흉갑과 팔보호대를 걸치고 나름대로 중무장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일본의 모노가타리 에마키(두루마리 그림)의 삽화들을 보면 갑옷을 입었는데 7부바지에 쓰레빠를 끌고 싸우거나 훈도시만 차고 갑옷을 입고 평상복에 조총과 카타나만 차고 참전한 병사들의 모습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측 기록화인 동래부사순절도 등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체제가 갖추어지고 상당히 후기인 오사카 전투나 시마바라의 난을 그린 삽화에서는 사극에서 묘사되는 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그려져 있으나 긴 시대 동안 일본의 전쟁에서 갑주를 철저하게 갖춘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또 아시가루들에게 대여되는 갑옷들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도 유물로 많이 남아있다.[27] 이런 배경하에서 일본도는 베기에 특화된 디자인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도 크릭메서, 스위스 세이버처럼 일본도와 흡사한 양손 사용의 휘어진 외날 도는 존재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것은 전장환경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도는 얼른 보면 다 같아 보이지만 전술의 변화에 따라 디자인의 개선도 많이 있었다. 처음 등장한 시점에서의 타치는 순수한 기병도로써 길고 많이 휜 칼날, 18~21cm 정도로 짧은 손잡이를 가져 한손 사용에 적합했다. 가마쿠라 시대에서는 손잡이가 24cm 정도로 길어져 양손 사용도 감안한 스타일이 되었다가 중갑옷이 유행한 남북조 시대에는 타격력을 중시하여 전체적으로 도검이 거대화되고 노다치(野太刀)라는 장르까지 출현한다. 이후에는 다시 평범한 사이즈로 돌아간다. 카타나는 원래 무로마치 후기에 아시가루 보병집단들이 편하게 쓰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철저한 보조무기였으므로 2척(60.6cm) 정도의 짧은 칼날에 한 손으로 쓰는 손잡이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국 시대의 전쟁 속에서 기마무사가 급감하고 보병전술이 확립되자 점차 주력 도검이 되어 칼날과 자루가 길어지더니 기존의 주력 도검인 타치를 대체하게 된다.

다른 문화권의 도검들이 손잡이를 비롯한 부품까지 완전하게 조립된 것을 완전한 도검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일본도는 칼날만을 완전체로 보고 손잡이나 기타 부품, 즉 도장구(刀裝具)는 하나의 옷처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의 도검, 일본도의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 환도조차 손잡이를 분리할 수 없도록 슴베를 길게 빼서 망치질을 하여 리벳처럼 뭉개고 자루 옆에도 금속 파이프(유소)를 끼워 튼튼하고 분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면 일본도는 대나무 못(메쿠기)을 끼워 고정하기 때문에 필요시 쉽게 빼서 분리할 수 있게 만든다.

도장구를 옷 개념으로 보므로 칼 한 자루라도 여러 개의 도장구가 현존하는 경우도 있다. 또 약간의 가공만으로 자유롭게 도장구 부품을 교체할 수 있으므로 쯔바, 후치, 카시라, 츠카이토, 메누키 등의 다양한 부품을 각양각색으로 만들어 따로 판매하는 시장도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활성화되어 있으며, 주인이 한 가지 칼로 다양한 스타일로 개조하여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날만이 아니라 도장구도 골동품으로써 많은 수가 보존되어 있으며 일본 내외에서도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일본도가 세계적으로 인기가 유지되는 데에는 이러한 자유로운 커스텀 문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시대극에서 볼 수 있는 무사들이 일본도를 두 자루 차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니혼자시(二本差し)라고 부른다. 보통 사용하는 일본도를 혼자시라고 부르고 혼자시의 파손에 대비해서 휴대하는 작은 일본도를 와키자시라고 부른다. 여기서 혼은 本을 뜻하고 와키는 옆구리이다. 즉 이름부터 보조적인 무장이라는 것을 명확하게하고 있는 셈. 혹은 다이소(大小)라고도 칭했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것을 보다 공고히하여서 무사는 두 자루의 일본도를 차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무사이면서도 실전에 나갈 염려가 없는 은거자나 관직이 없는 로닌 등은 한 자루만을 찼다. 이렇게 도검 패용이 문화로 완전히 자리잡은 까닭에 메이지유신 이후 내려진 폐도령은 상당한 사회적인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으로 칼을 차는 것은 무사계급의 특권이나 무사계급이 아닌 경우에도 와키자시의 휴대는 허락되었기 때문에 호신이나 싸움을 목적으로 농민이나 박도 등이 와키자시를 휴대하였다가 무사계급과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극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후에는 아무래도 길이가 긴 칼이 싸움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퍼져 길이가 와키자시로써 규정된 최대 길이인 2척에 육박하는 소위 오오와키자시라는 물건이 등장하였으며 불량배나 박도가 와키자시를 휴대하는 풍습은 후세까지 이어져서 야쿠자가 휴대하는 도스 등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AVGN은 이걸로 닌자 거북이 3 비디오 테이프를 두 동강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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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본도의 종류 ¶

길이별로 나열하면 노다치, 나가마키(칼날 길이 90cm 이상(3척)급)-타치, 카타나(60cm(2척)~90cm급)-와키자시, 코다치(30(1척)~60cm급)-탄토(30cm 이하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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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명한 일본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