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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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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external image]](http://imgnews.naver.com/image/081/2007/04/11/117624961 5.767665_SSI_20070410172816_V.jpg)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린 부산진전투)

임진왜란

날짜

1592년 ~ 1598년

장소

한반도 전 지역

<:>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대명제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선조
광해군
이순신
권율
곽재우
고경명
조헌
김시민
이억기
김덕령
정운
정발
송상현
나대용
이정암
권준
양호
이여송
유정
진린
기타 등등

__도요토미 히데요시**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카
우키타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토라
모리 테루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간베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타치바나 무네시게
호소카와 타다오키
소 요시토시
안코쿠지 에케이
**기타 등등

결과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조명연합군의 승리.

영향

조선은 대부분의 국토가 유린됨 전후복구에 집중
도요토미 가 몰락.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 성립
명나라의 쇠락과 함께 후금의 흥기

Contents

  1. 개요
  2. 전쟁의 배경

2.1. 일본의 상황

2.2. 조선의 대응

2.3. 일본의 내부 사정

2.4. 일본군 병력 구성

  1. 전쟁의 경과

3.1. 전쟁의 시작

3.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3.3. 반격의 시작

3.4. 명의 참전과 역할

3.5.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3.6. 교착 상황과 강화회담

3.7.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1. 임진왜란의 이해
  2. 전후
  3. 일본에서의 평가
  4. 조선, , 일본의 전후 상황

7.1. 조선의 전후

7.2. 명과 일본

  1. 이것저것

8.1. 임진왜란? 임진전쟁?

  1. 관련 작품

9.1. 드라마

9.2. 영화

9.3. 소설

9.4. 게임

9.5. 만화

9.6. 기타 서적

  1. 위키에 등록된 임진왜란 링크

10.1. 조선측 주요인물

10.1.1. 조정

10.1.2. 정규군 지휘관

10.1.3. 의병장

10.2. 명측 주요인물

10.3. 일본측 주요인물

10.4. 전투 전개과정

10.5. 기타 전투

10.6. 기타

한자 : 壬辰倭亂
영어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1598)
프랑스어 : Guerre Imjin
독일어 : Imjin-Krieg
러시아어 : Имдинская война
중국어 : 萬曆朝鮮之役 , 万历朝鲜之役 (만력조선지역)
일본어 : (1910년 이전) 豊太閤の朝鮮征伐 (토요타이코의 조선정벌)[1], (1910년 이후) 文禄・慶長の役 (분로쿠・케이쵸의 역) [2]

壬辰倭亂, 丁酉再亂

임진왜란, 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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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명나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국제 전쟁.

일단 조선은 승전국이지만, 승리하고도 피해는 매우컸다. 흔히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경계로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사에 중대한 분수령이며, 일본의 정권교체와 장기적으론 중국대륙의 왕조교체까지 동북아 삼국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전쟁이다.

조선 건국이 1392년이므로, 딱 조선 건국 200년 만인 1592년(조선 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일본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첫 번째 전쟁을 임진년에 일어난 난리라고 하여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이후 한동안 전쟁이 잠잠해지자 명-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으나 1597년에 협상이 결렬되어 일본군은 다시 재침을 시작.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크게 보면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일부로 볼 수 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유재란까지 같이 다룬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는 연호를 따서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ぶんろくのえき), 정유재란은 **케이초의 역(慶長の役,けいちょうのえき)**이라고 불렀고 이후에는 조선정벌 혹은 조선출병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명을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였으므로 닛뽄반자이틱하게는 대명정벌(大明征伐)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오버스러워 보인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은 분로쿠, 케이초 텐노 시절에 일어났다'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로쿠, 케이초는 둘 다 코요제이 텐노(後陽成天皇) 시절의 연호다. 일본에서 '한 임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건 메이지 이후이다.

중국에서는 정식으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이라 하고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항왜원조란 조선을 도와 일본에 대항한다라는 뜻으로, 한국전쟁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조선[3]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는 뜻. 신종 만력제 당시 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았던 대원정인 만력3정의 하나로 꼽는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 게임인 임진록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하나 Imjin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간혹 있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wiki /%EC%98%A4%EC%8A%A4%ED%8A%B8%EB%A6%AC%EC%95%84%20%EC%99%95%EC%9C%84%20%EA%B3%8 4%EC%8A%B9%20%EC%A0%84%EC%9F%81)과 관련된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서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임진-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일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명나라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참전한 전쟁이기에 동아시아 대전이란 표현을 써야 더 적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위키피디아 기준으로는 위의 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이란 표현과 우리나라의 임진왜란에서 따온 '임진전쟁' 두 개가 이 전쟁을 나타내는 표제어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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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쟁의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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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일본의 상황 ¶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견의 여지가 많다. 사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바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진출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와 일가친척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더울텐데?일본보단 추움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추울텐데?**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런 대륙진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노부나가가 여러번 언급을 했다고. 하지만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넘쳐나는 직업군인 등 내부에 축적된 에너지를 외부로 돌릴 필요성은 있었을 것이며, 도요토미의 개인적인 야욕만이 아닌 일본의 통일 직후라는 내부 상황이 작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3백년 전에 있었던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도 구도는 반대였지만 이 역시 전란의 시대를 거치며 쌓이고 쌓인 전력을 소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사실상 당시 일본의 정치경제 질서의 기반이 되는 '토지'는 한정돼 있고 토지가 부족한 무사나 낭인들은 많은 상황에서, 외부 정복이란 선택지는 어떤 의미에선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했다. 이게 싫다면 에도 막부처럼 무사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한편 불만을 품은 낭인들의 반란을 그때그때 진압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 통일 후 과다한 자신감에 사로잡힌 히데요시는 내부적 해결 대신 외부 침공을 선택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도주 소 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또한 불응할 경우에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인 선조 20년, 이 일본의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

타치바나 야스히로는 실록이나 조선측 기록에서 귤강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당시 반백이 넘은 나이로 사신을 빙자해 조선에 많은 어그로를 끈 인물이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지리를 정탐했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유명한 예로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구나 라고 비웃었다거나,연회 도중 소매에서 후추를 던지자 악공과 기생, 노비들이 앞다투어 정신없이 후추를 줍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너희들 기강이 엄청 해이하니 국운이 망할 징조.' 라고 깔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만하던 야스히로도 임무 실패와 사신으로 머물면서 조선측에 유리한 정보를 은근슬쩍 언급한 것에 대해 귀국 직후 히데요시의 화를 사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

그 이전인 1587년에는 정규군이 탑승한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를 습격한 정해왜변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손죽도에 주둔하던 조선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정여립이 이끄는 대동계원에 의해 격퇴되었다.

어찌되었든,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1588년 10월과 1589년(선조 22)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요시토시는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하여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 만남에서 쓰시마 도주는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한 뒤, 바닷길을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조선과 도요토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였다. 종전 후 조일 외교관계를 완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소가 천사표라서(…) 그런 건 아니고, 쓰시마의 이익을 위해서란 점이 더 크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쓰시마 입장에선 양국이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을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는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했다.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원정에 나아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월7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던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조선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합하(閤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이런 것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회견장에서 자신의 아들 도요토미 쓰루마쓰를 안고 데리고 오는 무례를 범했다(...) 아래 영상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기가 오줌도 지렸다고 한다. 차우셰스쿠아 시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좀 과장해서 현대와 비교하자면 한일 회담에서 일본 총리가 자기 자식을 끌어안고서 한국 외교사절들과 만난 셈이다(...)

이 장면을 일본 사극 NHK대하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 24화의 한 장면으로 봐보자.

[4]

일본측 인물들의 표정이 더 심각해진다(...) 참고로 동영상에서 보면 통신사중 한 명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관백전하의 존안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황윤길로 추정된다. 대표로써 통신사로 가장 안쪽에 앉아있고 예를 표했기 때문. 가운데 앉은 사람은 사신 일행중 부사를 맡은 김성일로 추정.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올때 츠루마츠를 대동하고 오니 심히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실제로 애시당초 일본에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한 동인으로써의 특성도 나오고 서열상 두번째였기 때문이다. 파란옷은 서장관을 맡은 허성. 반대쪽 자리에 앉은 일본 사람들 중 왼쪽은 이시다 미츠나리, 중간에 두건을 쓴 사람이 바로 히데요시의 명참모였던 구로다간베에다. 조선 사신들이 물러간 뒤 히데요시에게 너무 경솔하게 처신하셨다고 직언을 하지만... 오른쪽은 히데요시 누나 닛슈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츠구](/ wiki/%EB%8F%84%EC%9A%94%ED%86%A0%EB%AF%B8%20%ED%9E%88%EB%8D%B0%EC%B8%A0%EA%B5% AC). 훗날 할복으로 사망한다. 조선 측 역관이 통역하는 게 아니라 일본 쪽에서 역관을 붙여 주었다? 어쩌면 조-일 외교를 담당했던 대마도 측 인사일지도 "아 관백님 제발 좀;;"

저 영상의 오줌 운운은 과장이 아닌 것이, 실록에도 기록이 나온다.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 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有頃 秀吉入內 在席者不動 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 小兒遺溺衣上 秀吉笑呼侍者 一女倭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使臣辭出 不復再見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 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세 번째 기사[5]

실록에 나오는 도요토미의 답서도 직접 살펴 보자.

日本國關白 奉書朝鮮國王閤下 雁書薰讀 卷舒再三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吾國六十餘州 比年諸國分離 亂國綱 廢世禮 而不聽朝政 故予不勝感激 三四年之間 伐叛臣 討賊徒及異域遠島 悉歸掌握
우리 나라 60여 주는 근래 제국(諸國)이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고서 조정의 정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격을 견디지 못하여 3∼4년 사이에 반신(叛臣)과 적도(賊徒)를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竊諒余事蹟 鄙陋小臣也 雖然 余當托胎之時 慈母夢日輪入懷中 相士曰 日光所及 無不照臨 壯年必八表聞仁聲 四海蒙威名者 何其疑乎 依此奇異 作敵心 自然摧滅 戰必勝 攻必取 旣天下大治 撫育百姓 矜悶孤寡 故民富財足 土貢萬倍千古矣 本朝開闢以來 朝政盛事 洛陽壯麗 莫如此日也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慈母)가 해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를 인하여 나에게 적심(敵心)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토공(土貢)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조정(朝政)의 성대함과 수도(首都)의 장관(壯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人生一世 不滿百齡焉 鬱鬱久居此乎 不屑國家之遠 山河之隔 欲一超直入大明國 欲易吾朝風俗於四百餘州 施帝都政化於億萬斯年者 在方寸中 貴國先驅入朝 依有遠慮無近憂者乎 遠方小島在海中者 後進輩不可作容許也 予入大明之日 將士卒望軍營 則彌可修隣盟
사람의 한평생이 백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 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한다면 원려(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余願只願顯佳名於三國而已 方物如目錄領納 且至于管館 國政之輩 向日之輩皆改其人 當召分給 餘在別書 珍重保嗇 不宣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관장하는 무리는 전일의 사람들을 다 바꾸었으니 불러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나머지는 별지에 있습니다.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天正十八年庚寅仲冬日秀吉奉復書
천정(天正) 18년[6] 경인 중동(仲冬) 일(日) 수길(秀吉)은 받들어 답서함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네 번째 기사[7]

쉽게 말해, **일본을 통일한 나는 킹왕짱. 중국도 정복하려는데 너네가 협조 좀 해야겠음. 편지랑 주는 거 잘 받았음.**정도의 매우 거만한 답서였다는 얘기. 위의 번역도, 사실은 답신 내의 거만한 행간을 생각하면 아랫사람에게 반말투로 하대하는 쪽으로 읽는 게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합하' 같은 존칭어가 들어간 걸 보면 아랫사람이 적당히 경어조로 번역한 모양이다. 히데요시는 문맹이었으니까.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9E%84%EC%A7%84%EC%99%9C%EB%9E%8 0?action=edit&section=4)]

2.2. 조선의 대응 ¶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관리들은 일본이 전쟁을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당시 선조 통치하의 조선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중이었다. 그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결국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만약 옛날, 즉 최소 제6차 교육과정 이전 국사 시간에 역사 교사의 개인적 지식 또는 그 당시 학계의 다수설을 들었거나 국사를 수능 등의 이유로 대충 배웠다면 말이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ㅡ 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기사

이 대화가 후에 김성일과 류성룡의 실책을 덮어주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발언 때문에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수제자 자리를 다투던 거유인 김성일은 두고두고 당파싸움에만 집착하여 나라의 흥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병맛 찌질이로 까이고 이황의 제자 타이틀은 다른 애제자 류성룡에게 밀려 아는 사람도 없을 정도다. 수제자 문제는 훗날 후손들끼리 둘다 수제자라는 식으로 합의를 보았다나 뭐라나... 참고로 김성일이 선조 면전에서 "주상의 요즘 행동은 폭군 걸주와 같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 임금께 직언할 정도의 임금을 우습게 아는 대쪽같은 신하였고 절대 찌질이가 아니고 변론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임금 면전에서 큰소리 친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로 세도정권의 세도가들이 임금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고 해서 그들이 대쪽같은 신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오판에 책임을 지고 일선에 나가 병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는데, 그나마 이렇게 잘못을 씻으려는 노력을 성실히 했기 때문에 후세에 좀 덜 까인다. 물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김성일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쟁이 끝나고 참형을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병으로 죽었지만...

이 당쟁조차 발전적인 토론이 아닌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표면 상의 언쟁이었을 뿐, 사실 동인이나 서인이나 앞으로에 대한 대책은 제대로 세우지도 않았다고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결과로는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 이후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하고서 일반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다. 다만 이것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다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이는 왜란(전쟁)이 아닌 대규모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수준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 조선 정부는 이미 일본의 침략 준비를 알고 있었고, 그 이전부터 급박하게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당장에 두번째로 함락된 성인 동래성 부사 송상현은 부임하자 재빨리 만반의 준비를 위해 동래성 주변의 숲에 매복할 작전을 준비하든 등 일본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인해전술로 인해 머리좋게 작전을 짜도 소용이 없었지만(...).

선조에 의한 이순신의 10계급 특진 사건도 이 사건 이전이다(1590년~91년 2월). 물론 이순신의 경력을 보면 오를 수 없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부임을 하기도 전에 윗자리로 승진하는 식으로 몇달만에 10품이나 올랐다. 해자를 파고 성을 쌓고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했는데 너무 가혹하게 전쟁준비를 한다고 각지에서 상소가 빗발치는 등 사실 민심이 흉흉했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 터진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등으로 인해 당시 조선은 여러모로 민심이 악화된 상황이였다. 실제로 통신사의 일원인 허성도 귀국 직후 정여립의 도당으로 연루되어 압송되는 참사도 벌어졌다.

더욱이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은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적잖이 확충해 백성들의 불만을 크게 샀다. 김수는 아예 '전쟁광' 소리까지 들으며 탄핵받았다. 놀랍게도 선조 또한 방군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다만 확신을 가진 전면적 체계적 대책 마련까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예언가 남사고가 곧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을 해서 뭔가 오긴 온다는 건 예상했다. 이긍익의《연려실기술》을 보면 당시 분위기는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몇몇 명문가의 자제들이 술판을 벌여놓고 해괴한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췄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또한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능)에서 곡소리가 들려왔다는 기록도 있다.

문제는 그게 일반적인 노략질 수준에 그칠 거라고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침략 대비를 했다하더라도 그 규모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제까지의 일본의 공격은 몇백, 몇천 정도의 소규모 왜구들이 해안 지방을 노략질한 것 뿐이었는데 한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나라vs.나라 규모로 조선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할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이전 일본의 중앙정부는 전군을 끌어모아 타국을 칠 정도의 중앙집권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임란 이전의 일본의 침략은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점령전이 아닌 지방영주 등이 후원하는 소규모 침탈전 뿐이었다. 규모가 많다 하더라도 최대 2만.

하지만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전면적인 침략전이 가능했다. 실제 임란에서 히데요시는 2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한다. 하지만 봉건제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원력도 한계선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완전히 전국을 통일하기도 전에 조선 출병을 감행하였기 때문에 상당수의 병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국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남겨둬야 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일본의 전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거나, 국내 치안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병력도 포함했다면 그 규모가 20만을 족히 넘길 수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실제로 유성룡의 동년친구였던 이로라는 사람은 조정의 전쟁 대비로 성을 보강하는 데 민폐가 심하다고 했다. 실제 성을 보강한다는 것은 건축 기술이 떨어지는 그 당시에는 큰 민폐였다. 왜냐면 성을 보강한다고 농사도 못짓는데다 보강에 동원된 농민들과 소가 지쳐 죽거나 사고로 죽는 것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니 성의 보강이 백성들 입장에선 보통 민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올 수 있겠나?"**며 유성룡에게 서신으로 성을 쌓는 게 좋은 방도는 아니라고 서신으로 보냈다. 이를 두고 유성룡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침략을 해왔는데, 고작 개천 가지고 안심하다니 어리석은 생각이다."**라고 징비록에 써놓았다.

이렇듯 식자층 다수가 군비 확장에 극렬 반대했다. 아마 조선이 대비를 안하다 털렸다는 설은 조선은 무조건 무능하다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도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무 대비를 안한 것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름 대비를 하고도 결과적으로 초반에 털렸으니 어쩌면 더 무능하고 한심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실록에는 단 1 줄로, 나중에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개수한 실록에 "이이가 십만을 양병하자고 했으나 류성룡이 반대하였다." 이거 달랑 한 줄이다. 게다가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후대의 이이의 제자들이 제기한 설이었다. 더욱이 병농일치제였던 조선은 편제상 10만 이상의 군대를 전시에 징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1년 후 조선이 정규군만 16만 이상을 동원한 걸보면 10만 양병설은 어째 이상하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이런 주장을 회의적으로 본다. 오히려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민덕기 교수는 이이의 발언 시점(1580년대)을 주목하며 이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보다 북방의 니탕개를 위시한 여진족의 위협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십만양병설이 임진왜란을 겨낭하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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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일본의 내부 사정 ¶

한편, 히데요시의 막료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들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는 하나 그 가능성에 의문을 표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도 회의적으로 보았다. 히데요시는 늙은 모친에게 유광점퍼하나 준비하셔야죠올해 가을은 명의황궁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북경의 겨울 추위를 히데요시의 어머니가 알았다면 파워 귀싸대기가 날아갔을 텐데 라고 말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면이 있다.

실제로 조선에 파병된 군대는 히데요시파 군대가 중심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대표적인 히데요시에게 적대할 가능성이 높은 무장은 아예 병력을 보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진왜란에서 입은 타격은 나중에 히데요시파가 도쿠가와파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억지로 참전시키려 했다면 일본 내부에서 내전이 일어났을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애초에 실패와 패전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 성공하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만약 성공했다면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예 일본 본토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말이다.

하다못해 조선만이라도 정복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건 그 고지를 눈앞에 두고 방심에 의하여 실패해버렸다는 것. 만약 일본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승전한 후에, 짧은 정비를 마치고 그대로 북상하여 제해권을 확보해두기라도 했었다면 아무리 이순신이라 한들 이길 방법은 전혀 없었을 것이고[8],그러니까 선조는 등신 조선은 그대로 GG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즉, 메이저리그의 명언인 **끝날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가 실현된 샘.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발표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진압[9]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조선 침략을 획책했던것.

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두 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짚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10]

아래 편제를 보면 서일본 내의 주요 무장들은 거진 다 참가 했으나 동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하지만 개중에도 참전했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서일본에서 주요무장은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다 히데이에, 큐슈 섬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초소카베 모토치카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그러나 동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에 등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다만,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케카츠[11], 난부 노부나오[12] 등은 이후에 참전한 것으로 나와있다. 모가미 요시아키[13]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14]는 병 때문에 빠졌고 왜란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일본의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가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15]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16]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 신분 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가등청정이라는 한자이름으로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명성이 조선에서는 더 높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처조카이다. 카토 기요마사와는 이미 출발부터 다르다. 실제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나이도 더 많고 힘도 쎄서 시종 시절부터 두목급이였다. 시즈카다케 전투로 처음 다이묘로 임명될 때부터 후쿠시마만 영지 5천석이 주어지고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나머지는 죄다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후쿠시마가 이들 시종출신의 리더로 활약한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었고, 임진왜란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이다. 즉 1,2,3,5군 대장은 일본내에서는 네임드 무장이라고 할수 없는 무명의 젊은 장수들이다. 심지어 우키다 히데이에는 가문빨은 상당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 버프로 십대중반의 어린 나이로 8군 대장이자 총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턱이 없는 조선에서는 가토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 가 일본을 대표하는 장군 정도로 착각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종의 외교사절인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너가 히데요시를 죽이고 왕을 하라!"**라고 설득하게 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천황은 만세일계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하자 사명대사가 **"히데요시가 왕이 아닌감? 천황은 또 뭐요?"**라고 하는 촌극이 일어났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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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일본군 병력 구성 ¶

후속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있었다.

일본의 지역을 보면 서쪽부터 큐슈, 시코쿠, 주코쿠, 간사이, 주부,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 지역등 8분할 된다. 그런데 위의 1군9군의 지역을 보면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만 참전했다. 동부지역의 다이묘들은 10군16군등으로 예비대로 편성되었고 뒤이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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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의 경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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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전쟁의 시작 ¶

결국 일본은 침공했다. 그동안 조선이 비변사를 세우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대비책이 없진 않았으나 전쟁을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만큼 대비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봐도 꽤나 큰 규모의 병력이 지상이 아닌 해상 수송을 통해 올거라고는 아무도 예측 못했을것이다. 그리고 조선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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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선비가 한양 과거 보러 가듯이
중부내륙고속도로[23]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700척 18,700명(경상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일본군의 침공을 미리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동래부산진에서의 전투는 나름대로 치열했고, 송상현의 경우 그의 죽음에 일본군이 예의를 갖출 정도였다.[24]

그러나 동래부산진이 붕괴되고 난 뒤 경상좌수사 박홍이 전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군은 말 그대로 도미노 무너지듯이 패퇴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한양을 향해 레이스를 벌이기 시작했다. 선봉장인 고니시와 가토의 경쟁이 치열했으며, 이 라이벌 구도는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이어진다. 제장들은 고니시와 가토가 조선에서 자기들끼리 전투를 치를 것을 우려하여 그 둘이 같이 선봉을 서는 것을 반대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둘 중 1등한 한 명에게만 포상을 준다는 조건을 걸어 오히려 초고속 정복을 노리고 같이 선봉장을 세운 것이다.

침공지역을 방어하던 조선군은 완전히 초토화 되어 상부에 자세한 보고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침공이 시작된 후 나흘 뒤에나 소식이 서울에 알려졌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사시 비상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기상조건의 악화 때문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날씨가 흐린 날 봉화를 피우는 실험을 했는데, 기록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도 불을 지핀 건지 어쩐 건지 알 수가 없었다.[25]

조선초기에 조선군의 방위체제는 진관체제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는 제승방략체제로 전환된 상태였다. 진관체제는 각 지역을 분할해서 소규모 부대가 방위를 담당하는 체제로 빈틈없이 방어가 가능하고 여러 겹의 방어선이 구축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대규모 적에게는 각개격파당할 수 있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제승방략체제는 각지의 예비대가 전시에 하나의 전략거점으로 집결하고 이를 지휘할 사령관이 이 집결된 대군을 지휘하는 형태라서 전면전에 강하지만, 이 병력이 괴멸되거나 적이 예비대가 집결하기 전에 고속돌파를 시도하여 성공하면 후방이 바로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제승방략의 이 단점은 임진왜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실제로 초기에 대구에 수만의 방략군이 매뉴얼대로 집결했으나 경장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이 내습, 조선군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와해되었다. 이일 또한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보기도 전에 일본군과 맞닥드리게 된다. 이일이 자신이 지휘할 부대를 접수하기 위해 데리고 갔던 장기군관들 중 상당수가 탈영할 정도였다.

후에 명군의 도산전투의 과정을 관찰한 조선의 이시언이 후퇴하는 일본군을 향해 "조선군 도망치듯이 한다."라고 자조적으로 뇌까렸던 것처럼, 조선군은 훈련도도 사기도 형편 없이 낮아 전국시대를 거치며 경험치가 쌓일대로 쌓인 일본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만 조선을 무조건 폄하할수 없는게, 조선은 그야 말로 200년간 전쟁이 없었고 일본은 100년 동안 치고 박고 싸운 전국시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전란 종식의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조선을 더욱 폄하하는 요인이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기마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기병전술로 장창병과 궁병, 총병 위주의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26]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북로남왜의 변으로 왜구들과 지긋지긋하게 부대낀 경험을 바탕으로 척계광이 개발한 대보병전술인 절강전법을 채택하고 있었다.[27] 이후 조선은 대보병전술인 절강전법을 받아들이고 훈련하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가토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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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

상황이 그 상황인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왜란 같이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가토에 의해 패배하였고,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하는 상황이 되자 조정은 그제서야 사태의 시급함을 깨닫게 된다.

신립이 이끌었던 북 기병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이 부대는 창기병 편제가 거의 없는 궁기병 위주였다. 궁장 경기병으로 유명한 몽골군이 병력의 5분의 2는 항시 중기병으로 무장한 것을 생각하면, 조선군 기병의 충격력은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다. 조선의 편제상 창기병은 반드시 일정 비율을 갖추어야 했지만, 세조 대에 조선군의 인사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되면서 창검의 운용은 사실상 잊혀졌고, 창기병 역시 모조리 궁기병으로 대체됐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신립이 북방유목민(주로 여진족)과의 기병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린 것을 고려할 때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8]하지만 탄금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가 오면 조총을 잘 쏠 수 있는 것인가?[29]``[30]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기병 8천여명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천과 합한 1만 6천의 대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다, 기병은 급조해서 만들어지는 병종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만 조선전기 중앙군이란 것이 이 수준임을 생각하면 중앙군부터가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