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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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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지식이나 경험이 깊은 경지
  2. 조위의 2대 황제 조예

2.1. 생애

2.2. 통치

2.3. 사치

2.4. 정치적 실책

2.5. 어머니와 관련된 개인사

2.6. 가족과 후계

2.7. 여담

2.8. 창작물에서

  1. 후한 말의 원소 수하의 무장

3.1.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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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식이나 경험이 깊은 경지 ¶

造詣

어떤 분야의 지식이나 경험이 깊은 경지에 이르는 것. 주로 "그 사람은 ~에 조예가 깊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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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위의 2대 황제 조예 ¶

조위의 역대 황제

1대 세조 문황제 조비

2대 열조 명황제 조예

3대 애황제 조방

묘호 열조(烈祖)

시호 명황제(明皇帝)

연호 태화(太和, 227년 ~ 233년 1월)
청룡(靑龍, 233년 2월 ~ 237년 2월)
경초(景初, 237년 3월 ~ 239년)

조(曹)

예(叡)

원중(元仲)

생몰기간 206년 ~ 239년 1월 22일

재위기간 226년 ~ 239년 1월 22일

曹叡
(205 ~ 239)

자(字)는 원중(元仲).

삼국시대 위(魏)의 2대 황제.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명제(明帝). 나라를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祖)자의 묘호를 최초로 받은 황제이기도 하다. 말년에 실정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즉위 기간 내내 촉한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국의 우위를 끝내 지켜냈으니 종이 아닌 조가 붙은 듯 하다. 실제로 일반적으로 묘호는 종보다 조가 훨씬 격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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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생애 ¶

조비의 장남, 아버지인 조비보다 할아버지인 조조를 더 닮았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들었다. 조예가 태어나자 조조는 조예를 매우 사랑했으며 항상 자신의 곁에 있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연회 때도 항상 데리고 나와 손자바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하자 제공이 되었으며, 황제가 되자 평원왕에 봉해졌다.

조예가 조비가 아닌 문소황후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원희의 자식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김운회 등은 "삼국지 해제"에서 이 **"원가의 복수설"**을 정설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사삼국지에 따르면 조예가 205년생인데 조조가 업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 204년 2월이다. 따라서 설령 조예가 205년 1월생이라고 하더라도 204년 4월경에 잉태되었어야 하는데 그 때 이미 업은 조조군에게 포위당해 있었고 원희는 유주 자사로 다른 지방에 있었다. 따라서 조예가 원희의 친아들이려면 유주 자사로 나가 있던 원희가 조조군의 포위망을 몰래 다 뚫고 들어와 견희를 임신시켰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조예는 원희의 아들이 아니라 조비가 진씨를 얻고 나서(204년 8월) 얼마 안 되어 잉태시킨 자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며, 학계에서는 아무도 조예가 조비의 친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당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정도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세설신어에 의하면 긴 머리의 미소년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위나라에서는 긴 머리가 유행했다고 한다.[1] 패션에도 독특한 것을 추구했는지 꽃을 꽂은 모자와 소매가 짧은 비단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엽이 막 즉위한 조예와 대화를 나누어보고 '진시황한무제와 비슷하지만 자질은 미치지 못한다'라는 평가를 내렸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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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통치 ¶

전반적으로는 명군의 면모를 많이 보여주었으며 상당히 자질이 있는 군주였다. 역법과 형률에 관심이 많아 즉위 초부터 개정과 개혁을 시작해서 성과를 올렸고 큰 재판이 있을 때마다 직접 방청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인사 면에서는 인맥과 친목질만 믿고 관리 자리를 얻어보려는 엽관 활동을 막아서며[2] 경전을 읽고 박사시험으로 능력있는 관리를 선발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국가적 위기였던 제갈량의 북벌에 정말 훌륭하게 대처하였다. 특히 촉과 오의 동시 북벌이었던 234년에 그 역량이 빛을 발했는데 사마의에게 최대한의 병력지원과 정치적 지원을 모두 해주고 촉과 발을 맞춘 동오의 합비공격에 대해서는 직접 합비로 출정하여 손권이 제풀에 움츠러들어 물러나게 만들었다. 제갈량이 사망한 후에는 적극적인 대외정벌에 나서서 가비능을 암살하고 선비족을 축출하며, 서쪽으로는 다시 삭방군을 설치하고 동쪽으로는 사마의의 공손씨 정벌로 요동까지 직접적인 통치하에 두게 된다. 이러한 조위의 성공적인 팽창은 엄연히 조예의 뛰어난 전략적 식견과 내치에 힘입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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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치 ¶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정신줄을 천국에 고이 모셔놓고 지름신심시티만 남아.[3] 사치를 좋아하는 결점이 두드러졌는데 궁전을 크게 짓고 후궁들을 많이 거느렸다.

당대 귀족들의 살롱문학이라 할 수 있는 세설신어에서는 조예의 사치와 관련된 일화들을 꽤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때문에 신하들이 절약하라는 상소문을 많이 올렸는데, 그걸 일일이 다 읽으면서 약간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설사 따르지는 않더라도 좋은 충고를 잘 들었다고 제대로 답장을 했다고 한다. 면전에서 심한 간언을 해도 참아넘기고[4] 오히려 따르기까지 했으며 한 달에 수천 개의 상소를 읽기도 했다고 한다. 확실히 조비보다는 조조를 많이 닮은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실천하지는 않으니 아무 효용이 없었다. 게다가 이 사람 신하들 직언에는 너그러웠지만 궁실 공사기간 지연되는것에는 자비가 없어서 공기가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담당자를 불러다 변명할 틈도 안주고 베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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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정치적 실책 ¶

사치보다 더욱 심한 문제는 황권과 호족세력의 세력균형이 조예대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본래 조위 정권은 조조라는 군벌이 무력을 바탕으로 영천, 여남을 필두로 한 지방 호족세력을 포섭해 일으킨 정권이었다. 이들 호족세력은 후한말 청류를 자처하며 환관, 외척으로 이뤄진 탁류의 대립한 이들이었다. 당연히 이들을 영입해 정권을 굳힌 조씨는 통치과정에서 환관과 외척을 배제했다. 문제는 환관과 외척은 그 폐단이 크킨 했지만 어디까지나 황실과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통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집단이기에[5] 권력은 탐할지언정 제위를 가로챌 생각은 않는데 반해 호족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나마 원소 산하의 군벌에서 시작해서 실력으로 호족들을 아우르며 위왕(魏王)이 된 조조는 창업군주로서 가지는 군사적 실적 덕분에 호족들을 누를 권위가 있었으나 은수저 물고 태어난 도련님에다 호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찬탈에 성공한 조비는 그 정도의 권위가 없었다. 물론 조비가 능력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조비 자신의 능력보다는 장남으로서의 '정통성'이 중시되어 조조의 지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장남이라는 유교적 명분으로 호족들의 지지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했다.

때문에 호족들에게 상당부분 양보를 해야했고 이거 말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구품관인법같은 호족들을 위한 정책이 조비 대에 시행된다. 게다가 조비는 뛰어난 형제들을 경계한다는 이유로 조씨 황족들까지 통치구도에서 축출해버리면서 유사시 조씨 사직을 지킬 방패는 더욱 얇아졌다. 조비의 형제인 조조 직계 친족은 빈객들과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금지되고, 수도에 상경하는 것도 금지되어 철저하게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 정책은 조예 시대에도 답습되었다.

조비라고 이 문제점을 모르진 않았던터라 최소한의 안전장치들을 설치했다. 하나는 군권만은 조씨[6]가 철저히 장악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제를 보좌하고 정책 입안과 결정을 맡은 내조를 장악하는 것이었다.[7] 그래서 조비 시기 군부 일인자는 대사마 조인이었고 조인 사후에는 조휴와 조진이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 동서전선을 담당했다. 내조의 경우 호족출신이지만 유주와 병주라는 변방 출신이라 황제라는 끈이 없으며 출세하기 힘들었을 유방손자에게 맡겨 황실보위에만 충실하게 했다.[8]

그러나 조예는 유능하다는 이유 하나로 대호족인 사마씨에게 군권을 넘겨줌은 물론 그 동생인 사마부는 재정부 장관격인 도지상서에 제수해 사마 형제에게 군사와 재정을 몽땅 넘겨주었다. 이미 구품관인법 덕에 호족들이 관직 독점과 유력 호족을 중심으로 하는 '관맥 형성'이 시작된 상황에서 실질적인 권력까지 넘겨줘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예는 혈통문제로 정통성이 약한 조방을 후계자로 삼아놓고도 주색을 즐기며 본인 건강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죽기전엔 유방과 손자의 이간에 넘어가 숙부 조우와 황실 친인척들을 차기 조정의 실세로 삼으려는 계획을 파기하고 조상과 사마의의 연립정권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조방 대에 이르면 힘으로 역성을 이뤄낸지 겨우 십수년 된 시점+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황제+부실한 친황세력+실권을 거머 쥔 호족이라는 조위에겐 최악의 조합이 완성된다. 촉오에 맞서 위를 지켜낸 것도 조예지만 멸망의 트리거를 당긴것도 조예인 것이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1%B0%EC%98%88?action=edit&sect ion=7)]

2.5. 어머니와 관련된 개인사 ¶

개인적으로 조예는 대단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조예의 어머니 문소황후는 조비가 새로 귀빈이 된 곽여왕을 총애하자 이를 원망하다가 조비의 명령으로 사사되었다. 문소황후가 죽을 때 조예의 나이는 이미 17세였으니 이 사정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를 죽게 만든 귀빈은 조비가 황제가 되자 황후로 책봉되어 문덕황후가 되었고 조비는 어머니의 원쑤 같은 여자를 어머니로 섬기게 되었으니 정신적인 고통이 상당했을 것이며, 그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이 무렵 조예는 자신의 신변에도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으며, 관련된 일화가 전해온다. 조비가 새끼를 밴 사슴을 죽이려 하자 조예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어머니인 문소황후가 죽은 것에 대해 빗대어 얘기하면서 죽이지 않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혹은 조비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어미사슴을 죽이고 새끼사슴을 죽이려 했는데 조예가 울면서 "어미까지 죽였는데 새끼까지 죽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조비가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활을 던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즉위하고 나서도 오랬동안 문덕황후에게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현재의 태후인 문덕황후를 죽이면 그 역시 불효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원한을 버리지 못했는지, 죽기 전에 갑자기 어머니 문소황후의 죽음에 재수사를 명령하여 문소황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계모 곽태후를 사사시키고 목을 벤 다음 효수하고 그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게 하였고 그 입에 엄청난 양의 쌀겨를 들이부은 다음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 방식은 문소황후가 죽을 때 받은 형벌로 조예는 똑같은 형벌로 원수를 처형한 것이다.

역사서인 한진춘추나 위략에서는 이귀인이 조예에게 문소황후의 죽음에 곽태후가 연관되어있다 하여 재수사를 하고 태후전으로 달려가 곽태후에게 죽으라고 종용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자치통감에는 조예가 늘상 어머니 문소황후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곽태후에게 물으니 곽태후가 걱정하고 상심하다가 죽었다고만 나온다.

그러나 피는 못 속인다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처를 버리고 곽씨를 귀비로 그리고 두번째 황후로 맞이했다. 이 모습은 어떻게 보면 가정폭력의 되물림과도 비슷하다. 어찌보면 연산군인수대비에게 한 행동과 비슷한데, 어머니가 죽은 직후 조예의 행동을 보면 7살때 어머니 폐비 윤씨를 잃은 연산군과 달리 조예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미 소상하게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1%B0%EC%98%88?action=edit&sect ion=8)]

2.6. 가족과 후계 ¶

조예에게는 친자식으로써 청하왕 조경(曹冏), 번양왕 조목(曹穆), 안평왕 조은(曹殷), 평원의공주 조숙(曹淑)[9], 제장공주까지 3남 2녀가 있었다. 그러나 세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으며 평원공주도 생후 3개월 만에 죽었다.[10] 제장공주는 이도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으며 이도가 죄를 지어 죽음을 당하자[11] 임개에게 재가했다.

그 외에 조예는 양자로 데리고 온 조방, 조순 형제도 있었다. 친아들들이 모두 죽어 후계자가 없었던 조예는 결국 근본도 알 수 없는[12] 조방, 조순 형제를 양자로 삼았다.

조예는 그 중 조방을 선택했고 후계자로 삼았지만 나이도 어리고 황가와 정확한 연고도 알려지지 않은 조방은 정통성이 부족했다. 결국 이런 아이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정한 것은 조위를 망하게 한 최악의 선택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아버지처럼 황족들을 구속하고 특히 조진, 조휴 등이 죽으면서 사마의의 권력은 급부상했다. 결국 고평릉사변으로 조상을 죽인 사마의가 어린 조방을 대신하여 권력을 손에 쥠으로써 조위는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1%B0%EC%98%88?action=edit&sect ion=9)]

2.7. 여담 ¶

성향이나 행적이 고려의 공민왕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다. 즉위 초에는 일을 좀 하다가 몇차례 반란과 노국공주의 죽음을 겪고 나선 지름신과 영전 건축사업만 남은 점, 출신이 의심스런 왕우를 후계자로 삼은 점 등 조예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북벌 때는 나름 잘 막아냈지만 제갈량 사후에는 다양한 건물을 짓고 노는 등의 사치와 향략에 빠져 국고를 탕진했다.[13] 장안에서 으로 된 동상을 가지고 오기도 했으며 동상이 들고 있던 승로반이라는 쟁반에 맺히는 이슬에 옥가루를 태워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데 이슬 받아 먹어봤자 남는건 체내 중금속일 뿐이었지 않은가... 어쨌거나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다가 요절해버린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1%B0%EC%98%88?action=edit&sect ion=10)]

2.8. 창작물에서 ¶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에서도 등장. 성우는 박영화/최상기(49화)[14 ] 원래 똑똑하고 어진 황제였지만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능 끝난고3처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 놀고먹자 황제가 되어 버렸다. 그 뒤 신하들과 게임을 하는데 하필이면 공공칠빵 하다가 빵!할때 죽는다.

연의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제갈량의 북벌정복을 방해했다가, 제갈량이 죽자 방탕하게 지내버린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장발이었다는 고증을 넣어 라우 르크루제로 패러디되었다.(...) 원전대로 후궁들을 모으는데 그 후궁들이 레이디X버틀러의 히로인들(...)

삼국(드라마)에서는 84화부터 등장. 한국어 더빙판 성우는 윤호. 일본어 더빙판 성우는 키시오 다이스케. 첫 등장에서 무능한숙부들인 조진, 조휴의 말을 따르며 그들을 중용하며 사마의에게 의심을 품게 된다. 한 때 제갈량에 대비해 모병한 사마의를 죽이려고 하지만 사마의의 변명을 듣고 파직으로 그치는 등 점차 총명한 면모를 보인다. 이후 조진, 조휴의 연패에 사마의를 기용하고 신용한다. 하지만 조씨 핏줄 아니랄 까봐 한편으론 그 재능을 높이 사면서 교묘히 경계해간다. 대놓고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지만 교묘하게 사마의가 헛점을 짚어 실책하도록 유도하려고 한다. 95화에서 사망하는데 조상이 사마의를 주살하도록 권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마의가 달려오자 조방을 부탁하고 죽는다.

joye1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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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0, 11

joye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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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코에이 삼국지시리즈에서는 무력 빼고 모든 능력치가 70대 이상이다. 군사적 재능을 보여준 것을 반영하여 보통 아버지보다 전투에서 굴리기엔 좋은 편인데 무력이 낮은건 밸런스 문제인 듯 하다. 가뜩이나 위는 사기인데 조예까지 능력치가 먼치킨이 되어버리면 촉과 오는 어떻게 살라고

삼국지 3에서는 아버지보다 모든 능력치가 골고루 좋은 데다가 지력이 작은아버지와 같은 스텟이라 군사가 가능하다. 숨겨진 능력치인 야망, 운, 냉정, 용맹도 할아버지보다는 못하지만 모든 면에서 아버지보다는 높다.

삼국지 4
무력 62 정치73 매력73 지력 80
지력으로 앞서지만 정치,매력이 아버지인 조비에 비해 상대가 안되고 특기가 단 2개이다.

삼국지 5에서의 능력치는 56/81/74/80으로 아버지보다 구리다. 통솔이 없어졌는데 무력에서 그만한 평가를 못받는 바람에.. 참고로 조비의 능력치는 75/72/77/85. 거기에 아버지도 물론 가지고 있는 조조군 종특에 가까운 추행진형도 없는지라 여러모로 안습. 물론 위는 조예가 굳이 친정을 나갈 필요가 없으니 큰 패널티까지는 아니지만...

삼국지 9에서는 80/50/85/89. 기사와 제사, 누선과 덫을 가지고 있다. 통솔이 나름 준수하니 내정하다가 가끔 수전이 일어나면 써보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5/48/84/82/90에 명사특기도 있고 총 특기개수가 11개인 준수한 무장이다. 조조, 조비가 군주이더라도 굴리기 좋으며, 본인이 군주일 경우는 의천검(무력+5), 옥새(매력 무조건100), 조황비전(퇴각성공100%), 전론(지력+2)등을 물려받아 75/53/86/82/100이 된다.

삼국지 11에서 특기는 급습이지만 무력이 54다. 즉, 급습은 무력이 공격력에 반영되기 때문에 부장으로 출전하는게 더 낫다.

삼국지 12에서는 일러스트가 전신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커짐에 따라 조예는 장발인 일러스트로 나오게 되었다. 또 전법은 전공성강화 지력도 높아서 공성병기 중에서 하나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삼국지 11, 삼국지 12 모두 상소를 올리지만 조예에게 무시당한 양부와 혐오무장이 아닌데 이는 양부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고증무시가 아니라 혐오무장으로 하면 죽이거나 추방을 하기 떄문이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는 생각외로 자주 출연한다. 다만 클론무장인데다 황제나 되는 사람이 사마의의 부하장수처럼 아무데나 대충 배치되어 있으니... 진삼국무쌍7에도 합비신성 전투에 중간에 끼어있는 클론무장으로 나오는데 그나마 여기서는 아버지인 조비의 부하로 나오니 체면치레는 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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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한 말의 원소 수하의 무장 ¶

趙叡
(?~200)

후한 말의 무장으로 원소의 장수이다.

200년에 관도대전이 일어날 때 독장으로 순우경, 수원진, 한거자, 여위황 등과 함께 오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기습을 받아 패하면서 수원진, 한거자, 여위황과 함께 참수되었으며 순우경은 붙잡혀 코가 잘렸다가 참수되었다. 오소를 함께 지키던 사졸 1천여명도 죽임을 당해 코가 잘리거나 식량으로 사용하던 소와 말도 입술과 혀가 잘렸으며 이것을 원소군에 보내자 장병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수원진과 함께 군량을 조달하다가 군량을 쌓은 곳에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급히 구원하러 달려왔다가 오소를 공격하던 조조군이 군사를 되돌려 싸우자 수원진과 함께 전사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1%B0%EC%98%88?action=edit&sect ion=12)]

3.1. 창작물에서 ¶

삼국전투기에서는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wiki/%EA%B8%B0%EB%8F%99%EC%A0%84%EC%82%AC%20%EA%B1%B4%EB%8B%B4%20%EC%8B%9C%EB %A6%AC%EC%A6%88)의 마라사이로 나와 순우경의 교위 시절부터 심복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관도대전에서 순우경에게 적의 야습을 알리지만 바로 서황에게 죽어 소개 페이지를 합쳐도 4컷만 등장한다.

진유동 삼국지에서는 조조군의 포로가 된 순우경의 말에 속아 하후돈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3에 등장한다.

\----

  • [1]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위나라 사람들은 긴 머리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대의 유행이었던 듯 하다.
  • [2] 여기서 걸린게 필궤, 하안, 이승, 정밀, 환범 등등의 인사들. 이들은 조예가 죽은 후에야 조상의 도움으로 출세하는데,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사마의에 의해 제거된다.
  • [3] 일화 하나를 들자면 도교에 심취해 이슬을 받아 먹겠다고 구리로 된 크고 아름다운 신선 모양의 동상이 떠받친 승로반을 뜯어다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다가 이게 자빠지는 바람에 부역하던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한다. 결국 부숴가며 옮긴 뒤에 동인을 두 개나 만들었다고 한다.
  • [4]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 사후 조예를 묘사할 때 양부를 포함한 신하들이 조예의 사치를 말리려고 하다가 파면당하거나 목이 달아나는 묘사가 나오는데, 정사에서 이 사람들은 딱히 처벌을 당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처벌하자고 했으나 조예가 말리기까지 했다.
  • [5] 그래서 이들의 권력이 커질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황권강화 수단으로 이들을 이용했으니까.
  • [6] 단, 조비의 형제들처럼 제위에 도전할 수 있는 조조 직계가 아닌 위나라 개국공신인 조조의 사촌형제들의 후손인 방계
  • [7] 내조의 강화는 전한 한무제 시절부터 황제권 강화를 위한 꾸준히 추진되었다. 후한의 경우 광무제 시기 상서가 외조로 떨어져 나가면서 중서가 내조의 핵심이 되었다. 즉, 후한과 위는 상서령보다 중서령이 실세였다.
  • [8] 거기다 이들은 말년에는 자기 보신만 하다 사마의에 붙어서 조위 멸망의 방아쇠를 당긴다.
  • [9] 의(懿)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역사상 공주 신분으로서 시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 [10] 이 때 문소황후 진씨의 일족인 진황(甄黃)도 죽었는데 둘을 합장하고 명혼식을 했다.
  • [11] 다행히 세 아들은 살아남았다.
  • [12] <위씨춘추>와 <세설신어>에서는 조창의 아들인 임성왕 조해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근거는 없다.
  • [13] 물론 눈에 띌 정도의 재정적 붕괴나, 세금이나 통화체계의 혼란은 없었지만, 당시 위나라 사람들은 조조 이래로 3대에 걸쳐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서진 및 동진 시대까지 께에속...
  • [14] 말투가 국어책 읽기다.아마 의도적인 국어책 읽기로 보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