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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이오시프스탈린
→
조지 마셜 →
1944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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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제임스 번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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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마셜 →
1948 - 해리 S.트루먼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en/e/ed/Nobel_Prize.png?width=220](htt p://upload.wikimedia.org/wikipedia/en/e/ed/Nobel_Prize.png)
1952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조지 C. 마셜 →
1954 -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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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은 조지 캐틀렛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1880년 12월 31일 ~ 1959년 10월 31일)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최종 계급은 원수.결국 성씨대로 원수가
되었다!!!
** "True architect of Victory" ** - 윈스턴 처칠
인류 역사상 최대의 대국적 전략가 중 한 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조차
데꿀멍해야할 정도의 먼치킨. 조용한 인물이었던 오마브래들리,
아이젠하워조차 마셜에 비한다면 연예인 정도의 진성 히든캐릭터인 인물. 이는
미해군도 마찬가지인데 해군참모총장으로서 해군을 총지휘했던 어니스트킹도 체스터니미츠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와 같은 휘하 일선 지휘관들에 묻혀버렸다. 애초에 이렇게 후방지원에서 활약한 인물들은 전면에 나타난
인물들에게 가리기 쉽다. 소하도 그랬듯이. 물론 전략의 규모와 상대를 생각하면
소하는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마셜 플랜(1947년~1961년)을 수립, 실행하여 유럽 부흥에 큰 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마셜 제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 제도는 영국 탐험가 존 마셜의 이름을 딴 케이스.
- 생애
1.1. 초기 이력
1.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3. 제2차 세계대전
1.4. 군인으로서 업적
1.5. 정치가
1.6. 개인사 및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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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이니아주 유니온
타운시에서 태어났다. 1901년에 버지니아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임관했으며
필리핀을 거쳐서 1917년에는
소령이 되었고,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보병사단의 작전 및 교련 담당 참모로서 프랑스에 파견되어
1918년에는 유럽 파견군 최고사령부에 근무하며 작전계획 담당 참모로 활약했고, 이후
1919년에는 대령으로 승진, 유럽 파견군
총사령관 존 퍼싱 대장[2]
의
부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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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소령으로 복귀했다.[3]
전간기[4]
에는 육군성에서 근무했으며, 주로 교련 프로그램의 입안에
종사했다.[5]
또한 국방대학의 교관으로 복무할 때는 3년동안 국민당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1차
국공내전을 직접체험하기도 했다.[6]
1923년에는 중령,
1933년에는 대령이 되었고 참모총장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라이벌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wik
i/%EB%8D%94%EA%B8%80%EB%9F%AC%EC%8A%A4%20%EB%A7%A5%EC%95%84%EB%8D%94)의 후잡질 때문에
좌천당했다. 이후 1935년 맥아더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1936년에 준장으로 승진하면서 30여 년 만에
별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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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에는 소장이 되었고, 곧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15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됐다.
참모총장으로 취임함에 따라 순식간에 대장으로 승진, 유럽 침공계획을 입안, 지도했고,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연합군이 전쟁에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7]
1943년에는,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에도 선정되어 명성의 절정을
달렸으며, 1944년 12월 드디어 원수가
되었다. 2차대전 시기 육군 원수 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닌 인물은 마셜이 유일하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남서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인 더글러스맥아더
원수나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체스터니미츠 원수와는 달리,
소련이 일본을 치게 해야한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소련군을 대일 전선에 끌어들였다. **1945년 8월9일**부로
말이다.[8]
전쟁이 끝난 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나며 원수 계급만 유지한 채 군문을 나왔다.
1945년 12월에는 해리 S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중국 전권특사로 임명되어 국공내전에 개입하던 미국의 외교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장제스는 글러먹은 놈이니까 괜히 마오쩌둥 어그로 끌면서 우리 물자 소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버리시죠."**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리고 4년 후, 마셜의 예언은 사실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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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2차대전 발발때 미군은 17만 5000명의 조악한 숫자에
소총이 없어 모형총으로 훈련 중이던 군기 바닥의 군대를 단 6년 만에 830만이라는 잘
훈련된 군대와 12만 9천여 대의 항공기, 4천여척의 함정, 2천5백만 여대의 차량, 1억 2천만여의 소총,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핵무기 2발을 보유. 전세계 6만 마일에 걸쳐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 밎 보급 시스템을 구축한 희대의 먼치킨. 이 결과가 미 의회의 엄청난 반대를 이겨가며 그가 만들어낸 결과들이다.
스피치 100 오오.
아이젠하워, 맥아더, 브래들리, 패튼, 몽고메리는 그가 보내주는 엄청난 양의 잘 훈련된 군대와 물자로 이기는 일 뿐[9]
그가 쌓아온
시스템은 현대의 미군에게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이젠하워, 브래들리를 발굴, 패튼이 사고쳐도 계속 돌격대장(?)질 할 수 있게 한 양반. 지휘 체계 일원화하는등 수없이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임에도 직접 전장에서 싸운 이력이 없어 정작 졸병대장이라 불린 브래들리한테도 밀리는 겸손함을 보였다. 비슷한 포지션으로 어니스트
J. 킹, 윌리엄 D. 리히가 있는데 마셜을 포함한 이 3인방은 루스벨트를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직접적인 작전 지휘를
담당했던[10]
킹 제독,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11]
으로 각 군대의 조율과 중재를 맡았던 리히 제독과 함께 병참, 군비 증강,
인사를 맡았다.
그의 업적을 찬찬히 뜯어보면 군비증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의회를 설득하여 기하급수적인 군비증강과 전시경제체제로의 전환, 총력전 체제로 순식간에 전환했다.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2년까지 총력전체제로 전환에 성공했는데 정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독일은 43년에서야 총력전체제로 전환했으니... 인사 부분을 보면 아이젠하워를 비롯하여 패튼, 브래들리, 공군원수에 오르는 헨리 아널드가 있고, 리히 제독을 최고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추천한 것 역시 그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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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국무장관으로 취임. 이 해 6월 5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나중에 「마셜 플랜」으로 알려지는 유럽 부흥계획을 발표했으며(11월 실행), 대 중국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나서 미국
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했으나 이듬해에는 트루먼의 요청으로 다시
국방장관이 되었다. 역대 국방장관 중 非문민 장관은 마셜이
유일하다. 다만 원수 계급이 종신직이라는 점과 당시 해군과 공군이 예산과 항공전력, 핵무기 등의 문제로 으르렁대던 시기[12]
라 이들을
통솔할 리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특례가 인정된 것이므로 한국처럼 전역 1시간만에 국방장관 되는 행태와는 비교를 불허. 참고로 이때 국무장관이
바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딘
애치슨이었다. 당연히 6.25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사방에서 뭇매를
맞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마셜 총재를 구원투수로 콜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해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장관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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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도 강직해서 다른 각료들에게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13]
오죽하면
"조지라고 불러도 되겠소?"라고 묻는 트루먼 대통령한테 "아닙니다, 각하. 마셜 장군으로 불러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올 정도...
사실 이 사람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진주만의참극**을 연출한 공로가 그것이다. 사실 마셜 장군만의 병크는 아니었지만...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4형제 중 홀로 살아남은(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미션을 최종 승인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나온다. 배우는 하브 프레스넬.
앨라배마주에 소재한 NASA의 조지 C. 마셜 우주센터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
[1]
트루먼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 소련 강경파.[2]
M26 중전차에 이름이 붙은 그 사람 맞다. 조지 S. 패튼 장군의 은사이기도 하다.[3]
전쟁 시기에는 전시 임관도 많았고 장교의 수도 부족했기에 승진이 빨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기에 군축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장교들을 예편시키거나 전쟁 이전의 계급으로 강등시켜서 수요를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계급 특진 참고.[4]
프랑스의 포슈 장군이 말한 20년간의 평화. 1차 세계대전 종전일부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날까지(1918년~1939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말로는 해군 휴일.[5]
이 때의 경험이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을 빠른 시간안에 재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6]
이때 국민당 정권의 부패상을 생생하게 목격한 마셜은 훗날 2차 국공내전을 맞이한 미국 정부에 국민당을 버리라고 주문하게 된다. 결국 미국은 국민당한테 등을 돌렸고, 장제스는 대만으로 도망가게 된다. 대체역사물 떡밥으로 자주 거론되는 "궁지에 몰린 공산 잔당의 만주를 먹지 말라"라고 조언한 것도 마셜.하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았다[7]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연합군 전반을 지휘하는 자리에 있었다.[8]
이때 일본군에서는 **"소련한테 전쟁 물자 좀 얻어봅시다. 이왕이면 내분도 일으켜보고. 안되면 소련한테 평화 회담을 주선해달라고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물론 외교 담당자들의 반응은 "나치하고 편먹었던 우리가 소련한테 물자를 받는다고요? 거기에다 미국하고 소련을 이간질 시키겠다고? 머리에 총 맞았소?"[9]
그는 직접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 하려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이 난 상황에서 이 모든 상황을 조율 할 수 있는 전략적 안목을 가진 장군은 마셜 밖에 없다며 지휘를 말리기도 했다. 오오[10]
여담으로 니미츠와 의견이 상당히 갈려서 많이 싸웠다.선독일 전략을 주장하던 마셜과도 많이 싸운 편.[11]
최고 사령부는 합참의 전신. 리히 제독은 지금으로치면 합참의장.[12]
해군 측의 인물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 초대 국방장관이 자살을 했고, 해군청장과 해군참모총장 휘하 수많은 제독들이 사표를 내거나 좌천, 불명예 제대를 각오하며 국방부에 항명하였다. 후세는 이를 제독들의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다.[13]
서양 문화권에서 상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사적인 친분을 의미한다. 일본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