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멤버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아내 오노 요코와 함께.
이름
John Winston Ono Lennon[1]
사망 1980년 12월 8일
키 180cm
- 개요
- 경력
2.1. I was the Walr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2.2. But Now, I'm John : 비틀즈가 흩어진 뒤 솔로 활동
2.2.1. 오노 요코와의 만남
2.2.2. 비틀즈가 무너지다
2.2.3. 솔로 활동
2.3.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
2.4.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
- 트리비아
3.1. 음반 목록
3.2. 존 레논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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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non Legend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가수 중 일인
20세기를 풍미한 불멸의 싱어송라이터
평화와 반전, 사랑을 노래하고 꿈꾼 음악인
비틀즈 출신의 가수로,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존 레넌'이다.
사실 국내에서는 비틀즈 시절의 곡들보다 Imagine과 같은 솔로 곡들이 더 알려진 편이다. 물론 "AllYou Need Is Love"가 국내에서 유명하지만 대부분 러브액츄얼리 OST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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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I was the Walr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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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시절의 존 레논. 국내에서는 안경 쓴 이미지가 많이 굳어졌지만, 이 시기의 존 레논은
얘 못지않은
상당히 미남이다.
그는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원이었던 아버지 프레디 레논[2]
은 집을 나갔고, 어머니 줄리아 레논 역시 다른 남자와 동거하게
되었다. 결국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메어리 부부 밑에서 자랐다. 6살때 아버지가 돌아와 몇 주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어머니와는
청소년기에 관계를 회복했다. 존은 근처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에서 자주 놀았으며, 이 때
Walrus(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15살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듣고 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밴조를 배워 음악에 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6살 때 보호자인 미미 이모를 졸라
17파운드짜리 기타를 구입하고,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밴드 "쿼리멘(The Querrymen)"을 결성하여 활동한다.[3]
친구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만나게 되고 폴이
밴드에 합류한다.[4]
얼마 후, 밴드에 공석이 생기자. 폴의 소개로 조지해리슨을 만났고, 밴드에 합류한다.
그러다 존 레논이 17살 때, 어머니 줄리아 레논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존 레논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시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폴과의 우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폴에게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고(존은 당시 어머니에게 배운
밴조코드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곡을 자주
썼으며, 첫째 아들 이름도 줄리안 레논으로 지었다. 1960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합류하고 밴드 명을 "실버 비틀즈"로 변경하고 활동하다가
후에 피트 베스트가 들어오자 밴드명을 "비틀즈"로 결정한다. 이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밴드에서 개인적인 사정[5]
으로 탈퇴하게 되고,
피트 베스트는 나머지 멤버의 불만 때문에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 링고스타로 교체되게 된다. Please PleaseMe 녹음 때까지만 해도 링고 스타의 자리는 불안 불안했으나, 결국 링고 스타로 확정된
채 본격적으로 비틀즈가 출범한다.
![http://www.photographersgallery.com/i/full/mccartney_lennon.jpg](http://www. photographersgallery.com/i/full/mccartney_lennon.jpg)
(왼쪽이 폴 매카트니, 오른쪽이 존 레논)
비틀즈 활동 초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이 둘의 협력은 레논-매카트니라고
칭해진다.[6]
그러나 'Rubber Soul'에서부터 존 레논의 자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In My Life'[7]
, 'Nowhere Man' 등이 바로 그런 곡.
사실 'Rubber Soul' 녹음 전부터 존 레논은 비틀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존레논은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popular)"라고 발언했는데, 이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비틀즈 상품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등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8]
이러한 해프닝과 밥딜런과의 접촉 등 다양한 사건들은 그들로 하여금 기존 음악성을 탈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비틀즈가 아이돌 그룹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밴드 중 하나로 변모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음악적 전환과 함께 비틀즈의 활동 스타일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체 콘서트를 중단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인 'Rooftop Concert'의 영상은 남겨졌지만.
존 레논의 실험적인 작곡의 예로는 싱글 음반 'Paperback Writter/Rain'에서 처음 등장한
백마스킹[9]
을 생각해낸 것과,
Revolver에서
사이키델릭한 곡들을 작곡한 것 등이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Band'에서부터는 폴 매카트니가
밴드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레논-매카트니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큰 대립 구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당시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곡을 합쳐 만든 'A Day in the Life'[10]
는 비틀즈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명곡 중
하나이며, 폴 매카트니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YellowSubmarine'에서는 녹음 중간 존 레논이 장난으로 개 짖는 소리를 냈다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곡을 작곡한 'Hey Bulldog'이 수록되어 있다.
'Magical Mystery Tour'에서 존 레논은 'Strawberry
Fields Forever'[11]
, 'I am the Walrus'[12]
라는 곡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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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은 비틀즈 데뷔 이전부터 신시아[13]
라는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고 이 때문에 존 레논은 기획사로부터 신시아와의 결혼 사실을
숨기라는 요구를 받았다. (실제로 신시아의 존재는 무척 나중에야 밝혀졌다.), '화이트'앨범을 작업하던 도중 일본인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를 만나게 된다. 존은 신시아와의
관계가 비교적 소원해져 있던 당시 요코의 전시회를 방문하고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존은 요코에게 푹 빠졌다. 요코에 대한 존의
과도한 집착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이는 어린 시절 상실된 모성애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요코는 존보다
무려 7살 연상이었다.)
우리가 진짜로 만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눈이 서로에게 멈추었는데,
그녀도 그것을 느꼈고 나도 느꼈습니다.
결국 존 레논은 신시아와 이혼하고 오노 요코와 재혼한다. 그는 신시아와 이혼하기 전부터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줄리안 레논에게 무관심했고, 이혼 후에도 아들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존과 신시아의 사이가 하염없이 악화되는 도중 가장 큰 혼란을 겪었을 줄리안에게 폴 매트니가 힘내라고 써준 곡이, 다름아닌 'Hey Jude'. 후렴구의 반복과 폴 특유의 서정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인 후반기 명곡이다.
요코는 흔히 존의 배우자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 정도가 아니다. 오노 요코는 (물론 존의 유명세를 등에 업은 부분도
적잖다만) 앤디 워홀,
백남준 등의 현대예술가들과 폭넓은 교류를 이어갔으며,
아방가르드 예술가로도 높게 평가받았다.
위키백과의 'Yoko Ono' 문서 참고.#
영어잖아
요코가 존에게 끼친 영향? 말로 다 할 수 없다! 요코는 존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요코를 만난 뒤, 존은 리버풀 특유의
보수적인 가부장주의에서 벗어나[14]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전위예술을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존은 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난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 나와 예술적 상승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말이다. 요코는 바로 그런 여자였다.
일부 팬들은 요코를 '마녀', '일본 잡귀'(...)라며 맹렬히 비난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존의 아내로써 부적합하다는 팬들의 지나친 오지랖. 물론 요코 역시 비틀즈 해체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결국 음악적 이견과 개인적 불화이므로, 요코를 비틀즈 해체의 원흉으로 몰고가는 것은 그다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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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syracuse.com/kirst/photo/8954873-large.jpg](http://media.syracu se.com/kirst/photo/8954873-large.jpg)
비틀즈 해체 직전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둘은 마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오, 요즘 들어 이 철부지 꼬꼬마가
기어오르네 아니 얘는 무슨 마녀에 홀리더니 애가 변했어
폴은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만 치중하고 비틀즈를 뒷전시한다고 느꼈고, 존이 스튜디오(!)에까지 요코를 동반하자 이러한 내부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물론 충분히 빡친 폴 역시 자신의 아내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는 식으로 그와 경쟁(...)했다. 폴매카트니 항목 참고. 물론 이 갈등의 과정에서 존의 자의식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화이트 앨범에서, 그는 인도
여행('Dear Prudence', 'The Continuing Story of Bungalow Bill')[15]
에서 보고 느낀 것들과
극심했던 우울중('I'm So Tired') 등, 무척 개인적인 일들을 노래한다. 폴과 조지 역시 마찬가지... 비틀즈 해체의 기미는
이때부터 분명 존재했다. 각종 소음을 집대성한, 전위예술적이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Revolution 9' 역시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으며
존의 곡(?)이다.
Let It Be와 Abbey Road는 이미 멤버들이 해체를 체념한 상태에서 작업한 앨범들이다. 따라서 불화가 곡들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존에게는 여러모로 폴매카트니와의 음악적 이견차를 실감한 시간이었다. 존은 훗날 비틀즈 후반부에 두드러진 폴의 약진과 성과를 부정했고, 폴이 주도한 애비로드 메들리와 Let It Be 등 대부분의 McCartney 주도작들을 폄훼했다. 초기 레논-매카트니 체제의 득세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결국 비틀즈 해체 직후, 이들은 서로를 디스해대며 싸워댔고, 그 결과물들은 존의 Imagine 앨범과 폴의
Ram 앨범에 잘 나타나있다. 물론 존과 폴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싸워댄 것은 아니었고, 대인배링고스타의 중재로 그만두긴 했다. 또 비틀즈를 둘러싼
법정공방이 끝나고, 존이 아들 션을 얻게 되면서 가정주부 생활을 하게 될 무렵에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미
1974년 경에는 스튜디오에서 믹재거, 스티비원더 등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으며[16]
가끔씩 안부 전화도 하고, 폴이 지나가다가 존의 집에 들러 같이 연주도 했었다. 물론 과거의 영혼의 콤비였던 시절만큼은
아니고 다소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적어도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를 향해 증오에 가득찬 디스를 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진
관계였다.[17]
오히려 존과 말년에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자서전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진 조지해리슨 쪽이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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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그렇게 60년대 후반쯤부터 존 레논은 전위 예술가인 오노요코의 영향을 받아 갖가지 기행을 한다. 오노 요코와 함께 며칠동안 알몸으로 침대 안에 틀어박혀 있는다든가(일명 베드인 사건. 반전 시위의 일환이었다.), 솔로 음반 자켓에 알몸으로 사진을 찍는다든가(앞뒤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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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external image]](http://i.dailymail.co.uk/i/pix/2010/12/05/article-1335943 -0B600850000005DC-640_233x393.jpg)
솔로 시절의 존 레논. 비틀즈 때 시작된 '안경 쓴 더벅머리 아저씨'의 이미지가 이 무렵 확고해져갔다.[19]
비틀즈 해체 직후 폴 매카트니가 왕성한 활동을 보인 것과 달리 존 레논은 우울증에 빠져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어렸을 때의 애정결핍과 여러가지 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직면하면서 그의 내면 세계는 부쩍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만든
앨범이 바로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 덧붙이자면 이 시점
이후로 자신이 만들고 키워온 비틀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된다. 앨범의 수록곡인 'God'의 가사에서도 "I don't belive
in Beatles..."라 외친다. 그 외에도 히틀러,
케니디, 예수,
만트라, 성서,
마술... 기타 등등을 믿지 않는다며 절규한다
이외에도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 레논은 아내 오노 요코와 함께 베트남전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이 시기의 존 레논은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원제 The US vs John Lennon)에서 자세히 묘사했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 레논은 'Plastic Ono Band', 'Imagine' 등의 음반을 냈다. 이 때 그의 사상은 한 단어로 된 세 곡('God', 'Love', 'Imagine')으로 대표되는데, 대체적으로 반전 평화주의자(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 Imagine 중), 무신론자(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 God 중), 아나키스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전에 반대해 MBE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실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해 오노 요코와 함께 만우절인 1973년 4월 1일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유토피아)'에서 본 따 'Nutopia(뉴토피아)'라는 가상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참고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203&docId=150827693&qb=7K G0IOugiOuFvCDsmKTrhbgg7JqU7L2UIOq1reqwgA==&enc=utf8§ion=kin&rank=1&search_ sort=0&spq=0&pid=SLEJ3loRR0VssbJFjzlsssssss0-223396&sid=%2BR60weXQrBwZLm5F65jn tQ%3D%3D).
그러다 베트남전이 종결된 1975년부터 존 레논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주부로 생활한다. 이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가정환경에서의
경험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아들에 대한 사랑보단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보인다. 상술했듯 존레논의 첫번째
부인과의 아들이자 헤이쥬드의 주인공은 폴 메카트니랑 더 친하다고 한다. 참고로 첫째 아들의 이름은 줄리안 레논, 그도
뮤지션이다. 아버지랑 비교되서 활동을 잘 못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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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0/John_Lennon_portrait.jpg? width=300](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0/John_Lennon_port rait.jpg)
[[JPG external image]](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0/John _Lennon_portrait.jpg)
중년기의 존레논. 중년포스가 남다르다. 그러나 그의 중년은 너무나도 짧았다.
1980년 12월 8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시작하려던 찰나, 존 레논은 뉴욕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신병자에게 총을 맞았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오노 요코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38구경 리볼버에 벌집이 되었다고.
이 때 마크 채프먼은 존 레논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존 레논을 따라하는 데 미쳐있었고 마침내 "내가 존 레논이다"라는 생각에까지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존 레논이 둘일 순 없다'라는 생각에 존 레논을 죽였...다는 식의 말이 떠돌아다니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썰일 뿐이다. 사실 채프먼이 존 레논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요코와 동일시된) 그의 일본인 아내, 집에서 발견된 비틀즈 앨범, 그리고 출처가 불분명한 여러 루머들인데... 일단 채프먼의 아내는 전형적인 일본인 여성, 그러니까 현모양처 스타일의 순종적인 여성이었다. 전위예술가이자 자유분방한 현대여성의 표본이었던 요코와는 무척 대조된다. 그의 자택에서 발견된 비틀즈의 앨범 역시 그의 아내가 구입한 것으로, 채프먼이 비틀즈, 특히 레논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적당하지 않다. 결국 독자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
여튼 이 사건으로 마크 채프먼은 현재 30년 넘게 교도소에 갇혀있다. 2년마다 가석방 신청을 내고 있는데, 2014년 8월 22일 그의
8번째 가석방 신청이 거부되었다. 이유는 유가족과 고인을 사랑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이유. 사실 석방되도 채프먼 입장에선
불안한게 여전히 존 레논의 몇몇 팬들은 그의 출소일만을 기다리며 이를 갈고
있다카더라. 여담으로 마크 채프먼은 존 레논에게 총을 쏘기 직전, 유명한
호러 소설가 스티븐 킹에게도 끈질기게 사인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인을 거의 해주지 않는 스티븐 킹도 그 끈질김에 질려 결국 사인을 해줬다는데, 만일 킹이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세상에 스티븐 킹이 둘일 순 없다
존 레논이 마크 체프먼에게 싸인을 해주고 있다. 이 사진이 찍히고 5시간후 존 레논은 살해당한다.
존 레논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Are you John Lennon?"이라는 말에 "Yes..."라고 대답했고, 이것은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된다.(...)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라 칭송받던 사람의 최후치곤 먼가 안타깝고 허무한 죽음.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기도 하다. 예를 들어 FBI가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둥...그리고
30년 넘게 갇혀있지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레논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 놓고 있다. 사실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반전운동을 벌이다 영국의 보수언론에 쫓겨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와서도 반전운동을 벌이다
당시 미국 정부나 보수언론들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뉴욕 시보"라는 앨범을 낼 때 레논은 **닉슨=마오쩌둥**이라고 까기도
했다.그래도 좌우 가리지 않고 골고루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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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derfz.files.wordpress.com/2008/05/jlennon81219801.jpg?w=450](http:// ederfz.files.wordpress.com/2008/05/jlennon81219801.jpg)
타임지는 존 레논의 죽음을 "음악이 죽은 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비틀즈에서의 큰 비중, 독특하고 확고한 사상, 극적인 삶과 죽음 때문인지, 존 레논은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폴 매카트니와 함께 가장
유명하다.요즘 세대야 지금도 활동하는 오래 산 매카트니를 더 잘알겠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팬들에게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손꼽히는 신적인 존재. 그러나 막상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곡은 All You Need IsLove, Across The Universe 같은 것만 빼면 사실상 전부
폴 매카트니의 곡이다. 이는 딱히 우리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
대중적인 사랑노래 곡을 주로 작사작곡해 대중들에게 넓은 사랑을 받는 폴 매카트니와는 달리 비록 전성기 시절 히트곡의
인기는 폴 매카트니에게 밀렸지만 죽은 지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수많은 대중,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며 나날이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단, 여기서 명심할 것은 매카트니의 곡이 그 대중성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으나 음악적 스팩트럼을 폭넓게
지닌 훌륭한 곡이라는 사실이다. 레논의 곡이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으니 음악적인 곡/매카트니의 곡이 대중에게 사랑을 받으니 조야한 곡이라는
이분화된 편견은 버리자. 자세한건 폴매카트니 항목의 '음악적 성향' 참조.
2010년 이후 존 레논이라는 인물에 대해 재평가가 좀 안 좋은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특히 부각되는 부분은 레논의 여성 관계인데, 전처
신시아에 대한 무관심과 학대, 그리고 오노 요코에 대한 다소 광적인 집착 등이 새삼 다시 알려지면서 반전운동과 평화사상을 전파하던 그가
사생활은 개차반 상반된 면모를 보였다며 실생활은 의외로 실망스런 인간이었다는 악평이 나오기도 한다.[20]
특히 오노
요코가 밝히지 않아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 예를 들어 레논의 폭행과 살해 위협 등(레논은 오노가 자신을 떠날까봐 매우 두려워하며,
자신을 버릴 경우 살해하겠다고 종종 협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두운 부분이 많이 부각되고 있다. 바람둥이 기질도 있어서 신시아와 결혼 후
비틀즈가 유명해지자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피웠고 세간에 잉꼬부부로 여겨지는 오노 요코와 결혼 후에도 그 버릇은 지속되어서 레논의 '잃어버린
주말' 시절도 레논이 계속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에 화가 난 오노 요코가 집을 나간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이런 부분에 편승한 것인지 레논이 "지혜로운 구루(guru)[21]
행세를 하길 즐겼지만 사실은 골빈 무식쟁이였다"든지 "음악적으로
매카트니는 물론이고 조지 해리슨에게도 밀리는 무능력자였다"는 식으로 상당히 과장된 비판을 쏟아내는 이들도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게
말이다.
허나 존 레논 생전에는 이런 악평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또한 상당부분 과장이거나 왜곡일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사생활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음악적 부분에서 그는 롤링스톤즈지 독자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 1위". 이걸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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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은 살아생전 미 육군 제2보병사단 마크에 미 육군 Sergeant(병장) 계급장,
임진강 정찰대(Imjin Scout) 마크 등이 박음질된
OG-507[22]
상의를 입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명찰로 보아 Reinhardt(라인하르트)라는 독일계 미 육군 부사관이
주한미군 시절 입다 버린 것이 중고 의류상들의 손을 거쳐
레논의 의상 담당자에게 흘러들어와 유명세를 탄 듯하다. 오늘날 이 레논의 무대 의상대로 세팅된 OG-507 셔츠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국내에도 어째서인지 전투복 상의인데
야전상의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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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멤버였던 리암 갤러거가 존 레논의 유명한 빠다. 2000년대 초반에는 안경과 머리스타일을 존 레논과 판박이로 맞추는 '코스프레(...)'를 하기도. 사실 리암의 거친 행동도 존 레논과 상당히 닮았다.
고 하지만 그래도 얘에 비하면 존은 양반아들 이름도 레논으로 지었다.그럼 레논 갤러거네? ㅎㄷㄷ -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존 레논의 팬. 실제로 아이팟터치 1세대의 32기가 모델 발표였던 1월 이후 출시된 아이팟터치 제품군의 표지에는 존 레논의 Imagine이 재생되고 있으며 존 레논의 앨범아트가 붙어있다. 또한 "내 비즈니스 모델은 비틀즈다"는 등의 평소 발언과 그의 전기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팬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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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도 가수로 데뷔하여 뮤직비디오(샘 페킨파 감독)까지 찍었으나, 결국 자기 아버지보다는 못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 이후로 자기 아버지만한 가수도 없었다.정확히는 전처 신시아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과 오노 요코의 아들 션 레논이 있는데, 둘 다 가수로 데뷔했고, 둘 중에서는 션 레논의 음반이 더 평이 좋다. 하지만 첫 앨범 판매량은 플래티넘 따낸 줄리안 압승... 다만 션 레논은 사업도 잘 되고 있기에 앨범은 취미로 내는 수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던 줄리안이지만 의외로 이복 동생인 션하고는 2007년 션의 투어에도 게스트로 참여할 정도로 사이가 괜찮았다. 하지만 이후 줄리안이 오노 요코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자 션이 일방적으로 줄리안과의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줄리안과 션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제로, 무려 13살 터울이라고. 참고로 션의 대부는 엘튼 존이다. 후에 비디오 게임 GTA5를 통해서 수록된 줄리안 레논의 곡 "Too Late for Goodbyes"가 다시 주목받기도 하였다. -
존 레논은 숫자 9를 매우 좋아했으며 또한 특별하게 여겼는데, 실제로도 존 레논과 션 레논의 생일은 10월 9일, 비틀즈가 처음으로 공연한 날도 2월 9일인 등 그의 삶 중 중요한 날들은 9라는 숫자와 연관되어있다. 심지어 존 레논이 죽은 날인 12월 8일은 그의 고향 리버풀 시간으로 따지면 12월 9일이였다. 흠좀무.
이건 좀 어거지 아닌가Revolution 9, One After 909, #9 Dream 등 노래에 9를 넣기도 하였다. 또 9번째로 만들어진, 일련번호 9가 새겨진 화이트 앨범을 특별히 자신이 소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리마스터된 비틀즈 앨범의 발매일도 2009년 9월 9일이였다. -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영화 <존 레논 비긴즈 : 노웨어 보이>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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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는 그의 탄생 70년을 기념해 특별히 로고를 만들었는데, 한글날과 겹치는 탓에 한국에서는 짧은 시간밖에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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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무대를 퍼포먼스와 함께 존 레논 생전에 녹화했던 Imagine 영상을 리마스터링해 장식했다. 영상. 개막식을 장식한게 폴 매카트니라면, 존 레논은 폐막식을 장식한 셈.
둘이서 잘도 해먹네영국은 셰익스피어와 비틀즈의 나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근데 국경선 없애자는 존이 영국 국적인 것을 자랑스러워할까 -
평소 자신의 얇은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남자답지 못하다며 싫어해서 비틀즈 시절에는 대부분의 곡에 더블트랙으로 보컬을 녹음했다.
하지만 비틀즈 시절 1집 마지막 곡에서의 조금 쉰 목소리는 그것대로 일품 -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는 그의 묘지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이 들어서있다. 이중 매우 특이한 곳에 있는 기념물이 있는데 바로 **쿠바 아바나**에 있는 레논 공원. 2000년에는 레논 사망 20주기를 맞아 등신대의 레논 동상도 세워졌는데, 제막식에는 한때 비틀즈를 '이기적인 소비주의의 상징'이라고 강하게 비난한 적이 있던 피델 카스트로도 참석했다.
츤데레?여담으로 이 동상의 안경을 누군가 훔쳐가는 일이 하도 잦아서 자원봉사자들이 안경을 보관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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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존 윈스턴 레논이였지만 오노 요코와 결혼한 뒤 개명했다. 윈스턴 처칠에서 따온 중간 이름인데, 존은 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개명하면서 이를 없애려 했으나 기각되어 결국 빼지 못했다.이름도 내 맘대로 못바꾸는 빌어먹을 세상[2]
천하의 개쌍놈. 존의 유년시절 그를 떠난 것도 모자라, 훗날 비틀즈의 인기에 힘입어 어느 소녀팬과 결혼(!)한다.[3]
대학밴드 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이름이 "쿼리 뱅크(Quarry Bank)"였기 때문에 이름을 쿼리+멘(Men)으로 지었다...는 건 둘째치고, 맨날 학교를 뒤집어놓았다.[4]
이 당시 존은 폴이 기타를 왼손잡이로 잡는 걸 보고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뭘 하겠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인상적이었고, 특히 폴이 자작곡을 만드는 것과 기타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5]
본래 미술학도였던 자신의 정체성과 독일인 애인과의 문제 등이 겹쳤다. 비틀즈 항목 참고.[6]
존 레논은 폴의 멜로디 매이킹 실력을 폴 매카트니는 존의 노랫말을 쓰는 실력을 높이샀다고 한다.[7]
In My Life의 경우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곡인데, 존의 생전 그의 곡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후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곡이라며 주장하고 나온 것. 비틀즈 시절 그들이 쓴 모든 곡들은(심지어 Yesterday처럼 온전히 개인의 창작물인 경우에도) Lennon-McCartney로 표기되어 진위 여부를 가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 작사가는 존이라는 것이 중론. 일부 팬들은 메인 보컬이 존이라는 것과 특유의 서정적인 스타일 등을 근거로 들며 존의 곡임을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폴이 괜히 거짓말까지 해가며 200곡들 중 한 곡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했겠냐며 반론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작곡가가 누구인지를 크게 신경쓰지 않기도 하고. http://cafe.naver.com/thebeatlemania/76433 같이 읽어보면 좋을 포스팅.[8]
근데 어째 사과 내용도 예수쟁이들을 비꼬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예수 발언 참조.[9]
이 백마스킹에 근거해 "비틀즈 노래를 거꾸로 들으면 악마숭배적 메시지가 관측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백마스킹이 화제가 된 또다른 노래로는 Revolution #9가 있다.[10]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각자가 쓴 미완성 곡을 하나로 연결해서 만든 노래다. 이와 반대로 두 사람이 같은 앨범 안에서 같은 주제로 다른 두 곡을 쓴 경우로, 존의 Strawberry Fiels Forever와 폴의 Penny Lane이 있다.[11]
이 곡과 폴 매카트니의 'Penny Lane'은 사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보다도 먼저 발표된 싱글이다. 자세한 내용은 Magical Mystery Tour 참조[12]
이 곡 이후 존 레논은 'Walrus'라는 가사를 곡에 자주 사용하는데, 이유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경우도 잦다. 'Glass Onion'에서는 'The Walrus Was Paul'이라면서 폴을 까기도 했다. (해당 구절의 내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착한 등장인물로 나온다고 알고 있던 Walrus가 사실 악당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폴은 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악당이다'라는 의미. 곡 자체도 폴을 까기 위해 만든 곡이다. 폴이 평소에 자신의 노랫말을 짓는 실력을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존 레논이 "폴이 만든 가사는 '유리 양파'라는 단어처럼 뭔가 그냥 있어보이는 단어를 붙여놓았을뿐 사실 아무런 의미없는 가사일 뿐이다." 라면서 폴을 디스하는 내용) 음모론자들은 이를 폴이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들이밀기도 한다. 왜냐하면 저 가사를 직역하면 "(사실) 왈루스는 폴이었지"라는 뜻인데, 왈루스는 위에서 적은 존의 별명(해마)이기도 하지만, 그리스어로 시체라는 뜻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에 walrus 라는 단어는 없으므로 이는 루머로 추정된다. 일단 폴 매카트니 사망설 자체가 아무 근거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13]
2015년 4월, 암투병 중 사망. 향년 75세.[14]
신시아와 대학에서 사귀었을 때도 신시아가 다른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시아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15]
비틀즈 항목 참고. 사실 존의 인생사와 우여곡절 자체를 비틀즈와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16]
이 녹음을 담은 부틀렉이 존재한다. 제목은 "A Toot and a Snore in 74"로 위키피디아에도 항목이 개설되어 있다. 레코딩의 질 보다는 역사성으로 인해 높게 평가받는 부틀렉이다.[17]
이후에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폴의 음반이 나올때마다 꼭 찾아 들었다던가, 오노 요코가 폴에게 '존은 당신을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말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한참 싸우는 와중에도 폴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18]
결국 존 레논은 조지 해리슨과는 화해하지 못했고 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지 해리슨은 힌두교에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 말년의 조지 해리슨 인터뷰를 보면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은 듯 하다.[19]
사실 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심한 근시를 갖고 있었으며, 다만 안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966년 무렵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20]
1960-70년대만 해도 여성에 대한 폭력행사를 상당부분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영국, 미국 등지에서도 만연했기 때문에, 당시엔 별로 이슈화가 되지 않던것이 오늘날 재조명받고 있다.[21]
인도 말로 사상적 스승 등을 지칭[22]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부터 80년대 초까지 사용된, 미군이 채택한 마지막 민무늬 작업복. 이후 채택된 것이 그 유명한 위장무늬 전투복인 BDU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