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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피사로.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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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Pizarro y González
(1476? ~ 1541.6.26)

에스파냐콩키스타도르.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다. 공교롭게도 또 다른 유명한 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 (/wiki/%EC%97%90%EB%A5%B4%EB%82%9C%20%EC%BD%94%EB%A5%B4%ED%85%8C%EC%8A%A4)와는 7촌 친척 사이.[1]``[2]

신대륙 정복 활동에 참여,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그의 동료 디에고 데 알마그로를 처형한 탓[3]에 알마그로의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암살당한다.

Contents

  1. 잉카 원정 이전까지의 생애
  2. 잉카 원정

2.1. 명예로운 13인

2.2. 국왕의 허가

2.3. 푸냐의 전투

2.4.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 황제 생포와 살해

2.4.1. 황제 아타우알파와 마주치다.

2.4.2.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 1, Captura de Atahualpa 아타우알파의 체포

2.4.3.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 2, 아타우알파 살해

2.5. 쿠스코에 입성하고, 망코 잉카가 새 황제가 되다

2.6. 곤잘로의 초초대형 병크와 망코 잉카의 탈출

2.7. 잉카, 스페인에 맞서 싸우다

2.7.1. 쿠스코 포위전 Sitio del Cuzco

2.7.1.1. 삭사이와만 공략전

2.7.1.2. 키소 유판키Quizu Yupanqui의 활약

2.7.1.3. 오얀타이탐보 전투 Batalla de Ollantaytambo

2.7.1.4. 리마 포위전Cerco de Lima

2.7.2. 알마그로의 귀환

  1. 잉카 봉기군의 해산
  2. 계속되는 막장, 라스 살리나스의 전투(Batalla de las Salinas)
  3. 피사로의 죽음, 망코잉카의 죽음
  4. 여담
  5. 평가

7.1. 대중적인 평가

7.2. 피사로를 위한 변명 혹은 반론

  1. 대중문화 및 서브컬쳐에 대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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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잉카 원정 이전까지의 생애 ¶

곤살로 피사로 로드리게즈 데 아귈라(Gonzalo Pizarro Rodríguez de Aguilar)라는 인물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일은 불명으로, 1471년 혹은 1476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죽을 때까지 문맹이었기 때문에 직접 남긴 잉카 원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의 아버지는 신사(hidalgo)계급이었고,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해서 약간의 명성을 남긴 용병이었지만 집안 살림은 영 좋지 못했다고 한다.

피사로의 고향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은 예나 지금이나 스페인에서 가장 못 사는 동네(..)였기 때문에, 고향에서 땅이나 파서 먹고 살기 싫었던 피사로는 스무살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나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중 신대륙 개척에 합류하여 한몫 잡을 생각으로 1502년 신대륙으로 향한다.

이후 1513년에 **바스코 누녜즈 데 발보아**의 원정대에 합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목격한 유럽인 중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1519년 파나마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자 총독의 지시로 직접 발보아를 체포하였으며 발보아는 처형크리(...).

어쨌든 이 과정에서 공도 세우고 줄도 잘 선 피사로는 파나마의 행정장관이 되었다. 문맹에 가난뱅이였지만 어쨌거나 신사 가문 출신이었고, 본인 또한 야망과 능력, 인망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 파나마 시티는 같은 해인 1519년에 세워졌고, 당시에는 사실상 정글이나 마찬가지였던 상황. 즉, 겉으로는 그럴듯했지만 내실은 썩 좋은 게 아니었다는 것.이 자리가 좋은 자리라면 피사로가 굳이 머나먼 잉카까지 떠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1521에 먼 친척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겨우 1000 명 가량의 군사로 아즈텍제국을 정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여기에 더하여 먼 남쪽 어딘가 황금의 나라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여기에 자극받은 피사로는 동료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 등과 함께 개척회사를 설립, 남쪽 지역을 조사하고 원정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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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잉카 원정 ¶

아래 내용이 작성되기 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항목이 아닌 동생 곤살로피사로 항목에 잉카 정복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하의 내용은 곤살로 항목에 기재된 내용과 더불어서 읽기를 추천.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4%84%EB%9E%80%EC%8B%9C%EC%8A%A 4%EC%BD%94%20%ED%94%BC%EC%82%AC%EB%A1%9C?action=edit&section=3)]

2.1. 명예로운 13인 ¶

당시 남아메리카 지역은 그야말로 미지의 땅으로 가장 가까운 스페인 지역이라 해봤자 2000km 이상 떨어진 파나마였다. 1524년에 이뤄진 최초의 원정은 정보 부족, 식량 부족, 적대적인 원주민 등의 이유로 거지꼴로 콜롬비아 해변가를 헤매다가 대실패. 심지어 동료 알마그로는 이때 한쪽 눈을 잃고 애꾸눈이 되었다.

이 결과로 파나마 총독은 피사로의 원정을 반대하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때는 파나마가 탄생한지 5년 밖에 안 된 상황. 단 한 명의 일손도 모자라는 판에 허황된 얘기로 젊은애들을 꼬셔 데려가는 것이 좋았을 리가(...)

이후 1526년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자 허가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피사로는 2차 원정에 나선다. 하지만 2차 원정의 초반 역시 1차 원정과 마찬가지 상황으로 개고생 개삽질의 연속. 급기야 사망자까지 발생하자 열이 뻗친 신임 총독은 연락대를 보내 피사로의 귀환을 종용하게 된다.

그러나 피사로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땅에 선을 긋고, "나와 함께할 사람은 이 선 안에 남으셈!"이라고 선언, 13명이 남는다. 그리고 이들은 Trece de la Fama 명예로운 13인이라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이 13인은 귀환을 거부하고 근처의 섬에 남아 거지꼴로 7개월을 버틴다. 그러자 파나마에서도 어쩔 수 없이 원정이 계속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지원군이 도착한다.

그리고 탐험이 계속되어, 1528년에 마침내 현재 페루 북서부 툼베스에서 우호적이고 부유한 부족과 접촉하게 된다. 피사로는 이들에게 환대받고 재물까지 받았고, 내륙에 존재하는 거대 제국정부에 대한 정보까지 얻게 되었다. 여기에 훗날 통역으로 맹활약(?)할 원주민 두세 명까지 얻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대성공.

하지만, 파나마 총독은 그새 또 다른 인물로 바뀌었으며, 신임총독 역시 피사로의 원정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결국 피사로는 파나마 총독보다 더 좋은 끗발을 찾아 근 20년만에 고국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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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국왕의 허가 ¶

공교롭게도 이때 에르난 코르테스 역시 아즈텍 정복에 대한 보고와 사후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와 카를로스1세의 궁전에 머무르고 있던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피사로가 아즈텍만큼이나 부유한 남쪽제국가 존재한다고 보고하고, 그 증거로 각종 재물과 원주민 통역까지 선보이니 카를로스 1세로선 그야말로 입이 절로 찢어지는 상황. 카를로스 1세는 바로 피사로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고, 총사령관, 미래의 신 카스티야 총독 지위를 약속한다. 여기에 더하여 250명의 군인을 모을 권한까지 부여한다.

국왕의 허가를 받은 피사로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차피 땅이나 파먹고 살 신세였던 동생들, 에르난도 피사로, 후안피사로, 곤살로피사로를 꼬셔 함께 신대륙으로 떠난다. 이 동생들 중 에르난도는 30대의 나이로 큰형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카나리아제도에서 뻑뻑 구른 경험이 있어 어느정도 세상 물정을 아는 상태였으나, 나머지 동생 두 명은 후안이 스무 살, 곤살로가 열아홉 살로 어린 나이였으며 고향을 벗어나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이는 영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들은 잉카 원정의 막장화에 크나큰 공(..)을 세우게 된다. 둘째인 에르난도는 큰 형을 제외하면 가족 중에 유일하게 군대 경험이 있었던 탓인지, 원정 도중 동료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오만하게 굴었다. 스페인들이 남긴 거의 모든 기록에 "에르난도 오만한 시키, 짱 시름"이라고 적혀있었을 정도. 이는 결국 동료들과 불화를 낳게 되었고(...)이하 생략, 그리고 막내인 곤살로는 너무 좋고 싫고가 분명한 성격인데다가 어린 탓인지 참을성이 없고 분별력이 부족했다. 결국 곤살로는 잉카 반란에 결정적인원인이 되어 버린다.

한편,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처우도 훗날 문제의 불씨를 낳게 되었다. 사실 원정대에서 선봉은 피사로가 거의 도맡다시피 했고, 알마그로는 대체로 후방 지원 및 후발대 지휘를 맡았기 때문에, 피사로 입장에선 "내가 사장이고, 알마그로는 부사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때 국왕에게 허가 받는 과정에서 알마그로에게 약속된 몫은 피사로에 비해 현저하게 적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원정대는 내분에 쌓이게 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4%84%EB%9E%80%EC%8B%9C%EC%8A%A 4%EC%BD%94%20%ED%94%BC%EC%82%AC%EB%A1%9C?action=edit&section=5)]

2.3. 푸냐의 전투 ¶

1530년 연말에 피사로의 선발대가 파나마를 출발해 1531년 초 툼베스에 도착한다.

그런데 지난번과 달리 툼베스의 분위기는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알고보니 피사로가 스페인으로 떠났던 사이, 잉카 제국 내에 내전이 발생했던 것. 툼베스 역시 내전에 엮였던 탓에 제 코가 석자라 이방인들을 환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결국 눈칫밥을 먹던 피사로는 가까운 푸냐섬으로 옮기기로 결정, 이를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이게 병크였다.

처음에 피사로 선발대는 평화롭게 푸냐섬을 접수하고 원주민들과 교류했다고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이 높아져갔다.
당시 푸냐섬 원주민들은 잉카 제국에 대한 소속감이 적은데다가 호전적이었고, 인근 툼베스 사람들과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피사로 원정대의 통역은 툼베스 인이었던 것.

결국 긴장감이 높아져 가는 상황에서 툼베스 출신 통역이 "스페인님들, 지금 퓨냐족이 님들 치려고 계획 중임!"이라고 꼬바르자 정보를 전하자, 그렇잖아도 자기들 인원이 200명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적어 겁에 질려있던 피사로 선발대는 선빵(...)을 날려 푸냐족 지도자 몇 명을 체포, 고문하고 툼베스로 보내버린다. 그러자 툼베스인들은 기다렸다는듯 이들을 죽여버렸다고(...).

이런 병크가 발생하자 푸냐족이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 결국 1531년 4월 경에 전투가 벌어진다.

그런데 수천명의 푸냐족을 180명의 스페인인들이 개발라 버린다.[4] 하지만 전투 결과와 상관없이, 선발대는 푸냐죡으로 가득찬 섬 한복판에 갇혀버린 셈이 되었고, 이후로도 피사로 원정대는 게릴라에 의해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지휘관 중 한 사람인 에르난도 데 소토[5]가 이끄는 후발대가 도착하자 피사로는 다시 툼베스로 귀환한다.

다만, 이 사건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스페인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푸냐 섬에 진입할 때 당한 공격으로 스페인 측에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족장과 원로들을 생포한 뒤, 이들을 바베큐로 만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전투라고 할만한 충돌이나, 그에 따른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몇몇 후세 사가들은, 이 푸냐의 전투(?)가 바로 다음에 일어날 아타우알파 체포 사건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인들에게 비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사실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인들과 처음으로 접촉했을 때 보인 부정적인 태도는, 다른 경우들에 비춰 봤을 때 예외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경우, 케찰코아틀의 화신으로 대접받았으며, 아타우알파 다음 황제인 망코 잉카 역시 피사로 원정대를 비라코차의 화신으로 대접한 사례가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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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 황제 생포와 살해 ¶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4%84%EB%9E%80%EC%8B%9C%EC%8A%A 4%EC%BD%94%20%ED%94%BC%EC%82%AC%EB%A1%9C?action=edit&section=7)]

2.4.1. 황제 아타우알파와 마주치다. ¶

1532년 5월 툼베스로 돌아온 피사로는 이곳에서 몇 개월 보낸 뒤, 잉카 제국의 중심부까지 들어가 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두 달 정도의 여정을 통해 안데스산맥을 넘어 카하마르카 부근에 다다른 피사로는, 바로 근처에 잉카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도달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놀하게 된다.

기록과 이후 행적으로 볼 때, 피사로의 원래 계획은 잉카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뒤 최대한 충돌 없이 순조롭게 잉카 제국을 접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에르난 코르테스의 케이스에서 교훈을 얻어, 좋은 부분(황제 신병 인수 뒤 이용)만 취하고 나쁜 부분(슬픔의밤)은 버릴 심산이었다는 것. 그런데, 뜬금없이 황제 본인이 대군을 이끌고 접근 중이라니 놀랄 수 밖에(...)

사실 이때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인들에게 온 것이 그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6] 당시 아타우알파는 형제인 우아스카르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로, 포로가 된 우아스카르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쿠스코를 향해 승리의 행군을 하던 참. 포로가 된 우아스카르는 라마 오줌을 받아 마시며(..) 자기 두 발로 직접 걸어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던 중이었기 때문에,[7] 우아스카르의 속도에 맞췄던 까닭에 아타우알파의 행군 속도 역시 매우 느리고 느긋했다 한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에 온 첫 번째 목적은 온천욕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어쨌거나 마침 푸냐에서 발생한 불쾌한 사건[8]을 들은 아타우알파는, 이 사건의 주범인 기묘한 이방인들이 근방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직접 보기 위해 스페인인들에게 다다렀다는 것. 여기 근처에 신기한 게 있다고? 보고 가자!

이렇게 되어 1532년 11월 5일, 에르난도 데 소토가 사자로 파견되어 스페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접견한다. 이때 아타우알파는 쿨하고 시크한 태도를 보였지만, 속으로는 난생 처음 을 본 탓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소토가 허세를 부리기 위해 황제 쪽으로 말을 돌진시킨 뒤 급정지를 하는 기마술을 선보이자, 아타우알파의 친위대원들이 순간적으로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타우알파는 소토는 떠난 뒤 쿨하지 못했던 친위대 전원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문제는 이런 인상 깊은 사건까지 일어났는데도, 아타우알파가 심각한 판단미스를 저질러 버렸다는 것. 스페인인들을 깔보고 특별한 호위 병력도 없이 다음날 직접 찾아가보기로 한 것이다.

한편, 예상치도 못하게 황제의 대군과 마주친 데다가 그가 직접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피사로 원정대는 겁에 질려 뜬눈으로 밤을 센다. 그도 그럴 것이, 잉카 군대는 수만 명은 되어 보이는데[9], 자기들은 겨우 168명[10]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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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 1, Captura de Atahualpa 아타우알파의 체포 ¶

결국 이런 우연이 역사를 바꾸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스페인인들의 심리 상태는 겁에 질린 나머지 손대면 톡 터질 것만 같은 봉선화 같은 상태.

아타우알파가 가마를 타고 찾아오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일행에 속해 있던 도미니크회의 발베르데 수사. 기록에 따르면 발베르데는, 레케리미엔토(Requerimiento)를 읽어주었다고 한다. '요구', '통고'라는 뜻의 레케리미엔토는 스페인 국왕의 조서인데 1513년부터 원주민과 접촉 시 의무적으로 읽어주도록 되어 있었다. 이 조서의 내용은 대충 "[교황님이 스페인왕에게 이 땅의 지배권을 부여하셨음!](/ wiki/%ED%86%A0%EB%A5%B4%EB%8D%B0%EC%8B%9C%EC%95%BC%EC%8A%A4%20%EC%A1%B0%EC%95% BD) 그러니까 너님들은 스페인 왕에게 복종하고 기독교 믿어야 함! 안 그러면 너네 전부 노예! 반항하다 죽으면 니들 책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엄청난 수행원들을 이끌고 찾아온 잉카 황제 코앞에서 절대 읽어서는 안 될 그런 내용이지만(...) 당시 정복자, 개척자들은 의무적으로 이걸 읽어줘야만 했다.[11] 장담하는데, 벌벌 떨면서 읽었을 것이다. 현대의 몇몇 역사가들은, 당시 통역이 워낙 허접해서 아타우알파가 이걸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거라고 보고 있다. 뭐라는거야 후비적후비적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통역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협박이 씨알이 안 먹혔는지 "스페인 왕의 권리"나 "싸우자" 같은 내용에는 별 관심을 안보였다고 한다. 오히려 이 조서를 읽은 뒤 수사가 "하느님 말씀이 들어있다"며 읽어 주던 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왜냐면 아타우알파는 책이나 문자를 태어나서 처음 보았기 때문.

이후 벌어진 일은(...)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성경을 빼앗아 귀를 대본 아타우알파가, "이 안에는 '신의 말씀'이 담겨있다고 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네?!!"하며 땅바닥에 던져버렸다는 것. 이 이야기는 베르너 헤어초크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원주민의 선교 이야기로 써먹은 탓에 꽤 유명해졌다. 따라서 짤방으로 보고 싶다면 아귀레 항목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왜곡되었다.

다음으로는, 발베르데가 유일신을 강조하며 황제, 사파-잉카의 신성성을 인정하지 않아 화가 난 아타우알파가 책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어떤 견해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정말 아무런 의도도 없이 책을 던진 것이라고도 한다. 왜냐면 잉카의 황제는 원래 신성하기 때문. 애초에 황제가 먹다 남긴 뼈다귀조차 아랫사람들이 공손하게 집어 황금 단지에 고이 모아둘 정도였다. 따라서 이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황제는 고의로 자신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이방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책을 땅에 던졌으며,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곧 아랫사람 누군가가 와서 책을 집어 공손하게 다뤘을 것이라는 것.

하지만 기록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다음과 같다.

이때 발베르데 수사는 성경이 아니라 기도서, 혹은 성무일과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타우알파 입장에선, 허옇고 수염난 상거지 같은(...) 외국인이, 네모 낳고 이상한 것을 사르륵 펼쳐가며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지껄여대자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아타우알파는 책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보았으며, 얇고 하얀 종이를 넘긴다는 행위 자체도 신기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적힌 문자를 소리내어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보는 신기한 행위. 이에 아타우알파는 냉큼 책을 집어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을 펼쳐보는 것 자체가 난생 처음 하는 일. 따라서 페이지를 넘기는 법을 몰라 쩔쩔맸고 책을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쓰다듬다가 흔들었다가.. 뭐 그런 식으로 다뤘다고 한다.[12] 그러자 발베르데가 도와주기 위해 페이지를 펼쳐 넘겨주려 했다는데(...)
문제는, 아타우알파는 지고지엄한 황제이자 태양신의 대리인이라는 것.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황제가 낯선 이방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열폭했다. 자존심의 상처 + 신경질이 난 아타우알파는 발베르데의 팔을 때리고, 혼자서 책장을 넘겼지만, 아무리 봐도 알 리가(...) 어쨌든 황제는 이내 표정관리를 하더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책을 자기 발 앞에 던졌다.

그리고 발베르데가 연설을 끝내자, 아타우알파는 거만한 태도로 선언했다. "난 너희들이 여기 오는 동안 저지른 병크를 알고 있음. 잡아간 족장과 재물을 내놔라. 안 그러면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겠음!"
그런 뒤 황제는 가마 위에 우똑 서서 휘하 전사들에게 전쟁을 시작한다고 소리쳤다.나는 관대하다

그러니까, 책을 던진 일은 분명히 일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게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기보다, 황제가 보인 부정적인 태도가 문제였다는 것. 사실 잉카 쪽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아타우알파가 "전쟁 시작"을 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스페인인들이 아타우알파한테 책임을 돌리려고 기록에 껴놓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하게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던 콩키스타도르들에게 제대로 된 친위 병력도 없이 제발로 찾아간 아타우알파는, 그들 앞에서 책을 집어 던졌고, 이어서 그들 눈에 협박으로 보이는 행동(앞에서 언급한 소리지르기(...)라던지)을 했다는 것.

이는 그야말로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특히 황제 바로 앞에 서서 극도의 긴장 상태로 상황을 지켜보던 발베르데의 정신줄이 끊어져 버렸다. 기록에 따르면 매우 흥분하고 겁이 난 발베르데가 스페인 진영으로 도망치며 "저놈들을 공격해라! 하느님을 거부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자기네들이 봐도 병맛돋는 리케리미엔토를 원주민 황제 코앞에서 읽어줘야 했고 그나마 도와주려고 했던 행동들조차 저지당했으며 황제가 막 책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치니 인간적으로 공포감을 이길 수 없었던 것. 이에 어쩔줄 모르던 피사로가 반대편에 숨어있던 포병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리고 곧바로 WAAAGH!! 몰려나와 몸싸움을 벌이고, 황제를 생포하고, 잉카인들을 향해 냅다 대포를 쏘아버리고, 기병이 돌진하여 잉카인들의 모가지를 댕강댕강!Esto es España!

이런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예상치 못한 잉카인들은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한 채 겁에 질려 도망치다가 대규모로 학살당했다. 즉 이 사건은 본격적인 전투가 아니라, 극도의 흥분 상태였던 스페인인들이 돌발적인 상황으로 폭발,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잉카인들을 도륙한 것.

이 사건으로 결국 아타우알파는 어처구니 없이 피사로 원정대에게 생포되었으며, 2천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잉카인들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스페인 측의 피해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0명(..)에서 최대 다섯 명 정도.
("잉카 제국의 최후"를 쓴 저널리스트 킴 매쿼리에 따르면 다친 사람은 1명! 그것도 바로 피사로 였다고 한다. 그런데.. 피사로가 다친 것도 잉카인의 공격때문이라기 보다 같은 에스파냐인 때문이라고 함.. 싸우느라 정신없던 에스파냐 보병 중 한명이 아타우알파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는 것을 피사로가 제지하려다 손에 큰 상처를 입었다.."이런 ㅄ.. 제일 중요한 인질님을...!!")
이때 수많은 잉카 고위 귀족들이 한순간에 갈려나갔다고 한다. 황제의 가마를 메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고 고귀한 일이었기 때문에, 고위 귀족인 가마꾼들은 팔이 잘려나가더라도 가마를 붙잡고 있었고, 가마꾼들이 죽으면 다른 귀족들이 달려와 가마를 멨다고 한다. 물론 전부다 끔살(...) 또, 사망자 중 많은 수는 도망치려다가 넘어져 깔려 죽었다고 한다.

책 좀 집어던졌다고 광란의 대학살이 벌어졌고, 잘나가던 잉카 제국이 멸망의 첫걸음을 떼게 된(...) 이 사건이 바로 아타우알파의 체포(Captura de Atahualpa) 혹은, **카하마르카 전투(Batalla de Cajamarca)**라고 후세에 알려진 그 유명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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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 2, 아타우알파 살해 ¶

아타우알파는 그야말로 인생의 절정에서 순식간에 나락에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상황이 정리되자 피사로는 황제를 안심시킨다. 휴우 살았다 아 맞다 우리 황제 잡았지 첫째, 전쟁에 지고 포로로 잡혔다고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말 것.(너 안 죽일 거고 어느 정도 대우해주겠다) 둘째, 툼베스를 비롯 저멀리 아즈텍이나 파나마에서 우리에게 복종하고 충성한 사람들은 다 자유롭게 풀려났다.(너도 내 말만 잘 들으면 된다). 셋째, 우리는 평화적으로 만나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집어던지며 거부했다.(싸움이 일어난 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네 잘못!) 어찌보면 사실이잖아 아타우알파는 이번엔 용케(...)속뜻을 전부 알아듣고,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은 휘하 장군들이 잘못된 간언을 했기 때문인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좀 전에 전부 죽었다고(...) 대답했으며, 살아남은 잉카인들에게 명을 내려 더 이상 도망치거나 당황하지 말고 계속 황제를 따르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서 피사로는 한숨 돌리게 된 셈이었다. 피사로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식민지 건설 및 자기가 그곳의 총독이 되는 것. 피사로로선 잉카의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를 최대한 옆에 끼고 있어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식민지 건설이 가능했기 때문에 황제를 죽인다거나 잉카에 대해 정복전쟁을 벌인다거나 할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피사로가 미친놈이 아닌 이상 200명으로 제국을 정복할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코르테스는 그나마 휘하 병력이 천 단위인데다 틀락스칼라라는 든든한 동맹 원주민 세력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피사로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달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차근차근 공을 들여 잉카의 통치체제를 스페인에 흡수하는 일 뿐일 리가 있나(...). 곧바로 아타우알파는 이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이방인들의 약점을 알아차렸다. 바로 에 대한 끝없는 탐욕. 그리고 피사로 원정대에게 그 유명한 제안을 한다.바로 자기가 잡혀있던 방의 부피만큼 금과 은을 줄 테니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타우알파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으나, 이 제안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게 된다. 어차피 피사로는 재물과 상관없이 황제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꿈도 희망도 잃은 것은 아타우알파 본인. 어쨌든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 버려 아타우알파는 살해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스페인인들의 탐욕이 너무 커서 더 많은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 아타우알파를 죽였다거나, 욕심을 채워 쓸모가 없어져 죽인 것은 아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살아있는 ATM을 죽일 리가 없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복잡한 내막이 있었다.

처음에 아타우알파의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포된 이후에도 잉카인들 앞에선 냉정하고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시종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고 하며, 매일같이 만찬을 열어 스페인인들과 함께 식사했다고 한다. 참고로 잉카는 아즈텍과 달리 인육에 환장할 필요는 없었다. 라마고기가 있었기 때문.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 앞에선 황제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매우 활기차고 다정하게 굴었다고 하는데, 특히 에르난도 데 소토와 피사로 가문의 둘째 에르난도 피사로와 친해져, 체스를 두는 법을 배워 몇 시간씩 같이 두었다고 한다. 스페인인들의 기록 또한 호의적이어서 황제는 매우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책 던지고 잔뜩 쫄아있는 포병대 앞에서 소리질러서 문제지

문제는 막대한 양의 재화를 수집하고 분배하다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거의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아타우알파 입장에선, 쿠스코 입성을 앞두고 인질로 잡혀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 못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좀이 쑤실 수밖에 없었다. 또, 피사로 입장에선 운 좋게 황제를 생포하긴 했으나 선발대 인원이 너무 적어 쿠스코에 입성하기엔 불안한 상황. 그렇다고 툼베스까지 황제를 끌고 갈 수도 없었던 게, 그렇게 되면 황금을 수집해서 운반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된다는 것.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에 피사로의 헬프 요청 + 황제 생포라는 희소식을 들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서둘러 후발대를 이끌고 도착했는데, 이는 아타우알파의 사망을 낳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버렸다. 왜냐면 후발대는 아타우알파 체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산 분배에서 제외되었기 때문. 알마그로 일행 250명의 입장에선 바로 코앞에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가 존재하는데 늦게 왔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갖다 대지 못하게 되었으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스페인인들 사이에 질투와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알마그로 일행은 피사로의 의견에 일단 이의 있음부터 외치게 되었고 피사로의 ATM기였던 아타우알파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는 사이 잉카의 재물이 다 모였다. 그리고 피사로 원정대가 이것들을 처리한 방식은 오늘날까지 악명 높다. 전부 용광로에 넣고 녹여버렸다.그리고 학자들과 페루 문화재청은 오늘날까지 이를 갈고 있다. 사실 피사로가 다른 문명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야만인이라서, 혹은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휘하 장병들에게 재물을 정확하게 분배하기 위해서였던 것. 기록에 따르면 기병 1인당 은 82kg와 금 41kg, 보병들에겐 그 절반이 분배되었다. 이를 2014년 기준 시세로 계산하면, 기병 1인당 18억, 보병 1인당 9억원 정도 받은 셈. 물론 16세기 시세로는(...)ㄷㄷㄷ. 그냥 전원 다 로또 1등 당첨된 셈이나 마찬가지. 피사로의 경우 기병의 일곱 배를 받았으며, 아타우알파에게서 보너스로 80kg짜리 황금 가마까지 선물 받았다고 한다. 서른살 넘을 때까지 무명이었던 야구선수가 1년 반짝 활약해서 역대 최고액 FA 대박에 보너스로 람보르기니까지 받은 셈. 한편, 카를로스1세는 도장 한번 잘 찍어준 덕분에 금 1톤(..)과 은 2톤을 받았다. 오늘날 페루, 칠레, 에콰도르, 볼리비아에 달하는 무지막지하게 방대한 영토도 얻게 된 사실은 일단 제쳐두자. 그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니.

그런데 아타우알파는 절망한다. 금을 다 모았는데도 풀려날 낌새는커녕 새로운 스페인인들이 도착한데다가, 이들은 자기들이 재물분배에서 제외되었다며 흉흉한 표정으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상태. 게다가 이 무렵 아타우알파는 대화를 통해 피사로의 진짜 속셈까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피사로가 어느 잉카 귀족에게 무심결에 **"족장 한 사람에 스페인 병사 한 명씩 붙여서 제국을 통치할 계획"**이라고 털어놓은 것.

게다가 하필이면 피사로 집안의 둘째인 에르난도 피사로가 스페인으로 떠난다. 국왕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보고하고 후속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피사로와 알마그로 간에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것. 스페인인들 중 가장 친했던 에르난도가 떠난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아타우알파는 울음을 터뜨렸으며 에르난도가 떠났으니 알마그로 무리가 자신을 죽일거라고 외쳤다고 한다. 에르난도 본인 또한 몇 년 뒤 국왕에게 "신변의 위험을 느낀 아타우알파가 차라리 스페인으로 함께 데려가달라"고 사정했다고 보고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런 의심을 주변 잉카인들이나 스페인인들에게 숨기지 않고 전했다. 이로 인해 급기야 아타우알파가 비밀리에 휘하 장군들에게 전갈을 보냈으며, 이들이 카하마르카를 향해 행군 중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게 되었다.

당연히 피사로 원정대는 또다시 심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에르난도 데 소토가 기병 몇 명을 이끌고 정찰을 위해 떠나는데(...) 소토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아 니카라과에서 데려온 원주민이 달려와 도시 주변에서 잉카군을 목격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멘붕 상태가 된 피사로 원정대는 긴급 회의를 열었으며, 격론 끝에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이때, 피사로는 황제를 살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처형에 반대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강력하게 처형을 주장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동의. 자신이 처형된다는 것을 알게 된 아타우알파는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엉엉 울면서 스페인들의 뒤통수를 친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으며 금과 은을 두 배로 주겠다고 제의하지만, 이미 스페인인들은 의심암귀에 들린 상태.

결국 1533년 7월 25일, 아타우알파는 억지로 기독교로 개종하고[13] 교살된 뒤 시신은화장된다. 죄목은 근친상간[14], 일부다처제[15], 우상숭배였다.

기록에 따르면 피사로는 매우 안타까운 나머지 흐느꼈다고 한다. 누가 봐도 이 어이없는 상황의 전개를 보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그런데 아타우알파가 죽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온다는 잉카 대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원주민:"훼이크다 이 흰둥이들아" 게다가 에르난도 데 소토가 정찰을 마친 뒤 귀환하여 '잉카군은 없.다.'고 보고하며 확인사살. 피사로는 또 한 차례 흐느껴 울었으며, 황제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소토는 그야말로 격분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소토는 에르난도 피사로와 더불어 황제와 가장 친하게 지냈었기 때문. 이때 소토 역시 에르난도 피사로가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차라리 황제를 스페인으로 보내버리지 왜 죽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만 소토나 에르난도 피사로 둘 중 한 사람만 현장에 있었어도 아타우알파는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학살자에 식민주의자로 악명 높은 피사로지만(...) 그래도 눈곱만큼이라도 남아있는 피사로의 명예를 위해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당시 상황은 원정대에 참여했던 여러 스페인들의 기록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내용이다. 피사로가 황제의 처형을 반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1969년작 영화 "태양제국의 멸망"에서는, 한 가지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피사로는 하류층 출신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했으며, 신을 강요하는 성직자들에 대항해 아타우알파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것. 하지만,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가장 강력하게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주장한 사람은 성직자가 아닌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황실 회계사인 알론소 리켈메였으니 이는 약간 무리한 해석.[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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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쿠스코에 입성하고, 망코 잉카가 새 황제가 되다 ¶

자기 손으로 황금알 낳는 거위를 잡은 셈이 된 피사로는, 그의 형제인 투팍 우알파를 새로운 황제로 세운다. 하지만 투팍 우알파는 스트레스 탓인지 유럽인들에게 얻은 질병 탓인지 황위에 오른 지 겨우 두 달만에 사망.

안데스 산맥을 넘어 삼개월의 여정 끝에[17] 쿠스코에 다다른 피사로 원정대는, 쿠스코 인근에서 아타우알파의 동생인 17살짜리 망코잉카를 만나게 된다.한국인이라면 왠지달콤하게 느낄 이름이다. 일본인이라면 왠지얼버무릴 이름이기도 하다.

한편 망코 잉카 입장에서는 스페인인들이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원래 아타우알파는 잉카의 북부 키토를 기반으로 황제 자리를 찬탈한 까닭에 쿠스코 쪽 귀족들에게는 원수나 마찬가지였던 것. 이는 망코 잉카 역시 마찬가지로 아타우알파의 마수를 피해 숨어다니던 도망자 신세였으며, 아타우알파에게 체포되었다면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상태.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던 피사로와 망코 잉카는 손을 잡는다. 피사로가 구 아타우알파 세력을 쿠스코에서 몰아내어 점령하고, 망코 잉카는 새로운 잉카 제국의 황제가 되기로 한 것.

쿠스코에는 아타우알파의 장군이었던 키스키스(Quizquiz 혹은 Quisquis)가 남아있었고 쿠스코 외곽에서 전투가 발생하여 하루 정도 스페인군의 입성을 저지하긴 했으나, 평지에서 스페인군을 상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깨닫은 키스키스는 키토로 후퇴한다.

1533년 11월 중순, 마침내 피사로의 군대는 쿠스코에 입성했으며, 망코 잉카는 황제로 등극했다.

목숨이 달랑달랑했던 상황에서 황제가 된 망코 잉카는 그야말로 인생역전. 스페인인들을 케찰코아틀의 잉카 버전인 비라코챠로 대우했으며,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가 뿌린 것보다 더 많은 재물을 자진해서 스페인들에게 뿌렸다고 한다. 그동안 손가락만 빨던 알마그로 일행도 이번에는 제대로 챙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알마그로는 신이 났는지 아타우알파와 때와는 달리 망코 잉카와는 친구를 먹었다.

이후 1535년 중반까지 1년 반 동안 모두에게 바쁜 시간이 흘러갔다. 망코 잉카와 피사로는 제국의 통치체계를 정돈하고 아타우알파 세력을 진압했다. 몇 차례 원정 끝에 키스키스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1535년 사망했고 키토는 1536년 경 완전히 정복되었다. 망코 잉카는 제국의 행정체계를 복구했으며 알마그로의 힘을 빌려 반대세력이었던 이복형제 아톡 소파를 암살했다. 피사로 원정대 중 잉카에 남기로 한 사람들에겐 엥코미엔다(encomienda)[18]가 지급되었다.피사로는 쿠스코를 떠나 툼베스 해변에 신도시 리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19]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피사로 세력과 알마그로 세력 간의 불화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계속되었다는 것. 게다가 알마그로는 어느 샌가 망코 잉카에게 붙어먹었다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는 스페인에서 온 연락 때문. 에르난도 피사로를 통해 원정대의 불화를 전해들은 카를로스 1세가 잉카를 둘로 나눠서 피사로에게 북쪽, 알마그로에게 남쪽을 맡기기로 했다는 것. 이 결정으로 알마그로는 국왕에 의해 피사로로 동급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피사로의 동생들은 이에 크게 반발한다. 급기야는 쿠스코에서 스페인인들 사이에 가벼운 내전까지 발생했다!

결국 리마에서 이런 한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피사로가 직접 중재에 나선다. 일단 쿠스코 통치권은 제쳐두기로 하고 알마그로에게 아직 정복하지 않은 잉카 남쪽의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남방 원정대를 조직, 지원해주기로 한 것. 그리고 여기에 혹한 알마그로는 원정대를 이끌고 미지의 남쪽으로 떠난다. 그리고 이 무렵에 알마그로의 지지자로 돌아섰던 에르난도 데 소토는 아예 파나마로 돌아가 잉카에서 얻은 재물을 바탕으로 새로운 원정대를 조직하여 북아메리카로 떠나버린다.그리고 거지꼴로 미시시피 강에서 죽게 된다.

이렇게 해서 상황이 대충 정리되었다. 아타우알파의 세력 및 내전을 틈타 불순한 태도를 보인 부족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망코 잉카는 황제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혔다. 스페인인들 사이의 갈등은 알마그로가 남쪽으로 떠나 대충 봉합되었다. 피사로는 더 이상 신경 쓸 일 없이 리마 건설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으며, 쿠스코의 망코 잉카 곁에는 피사로의 동생들인 후안 피사로와 곤살로피사로가 남는다.

여러가지 병크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해피 엔딩(...) ...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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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곤잘로의 초초대형 병크와 망코 잉카의 탈출 ¶

잉카 제국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아니라 곤살로 피사로가 멸망시켰다.
역사를 바꾼 네토라레 오줌도 한몫했다

피사로 가문의 막내였던 곤살로 피사로는 쿠스코에 남은 1535년 당시 만 25살이었다. 형제 중에선 가장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적었다. 그와 함께 쿠스코에 남은 후안 역시 곤살로보다 한 살 많을 뿐이기에 경험 없기는 마찬가지.

이런 애송이들에게 잉카 황제를 맡긴 것은 그야말로 대실수 중의 실수였다. 사실 원정대의 고참급 지휘관들은 북아메리카며 칠레며 리마며 뿔뿔이 흩어진 까닭에 피사로로선 자기 동생들 외엔 딱히 믿을 만한 사람도 없긴 했지만(...) 어차피 둘째동생인 에르난도[20]가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즉시 쿠스코로 보낼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이들을 믿고 맡기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안과 곤살로는 그새를 못 참고 일을 저질러버렸다.

알마그로, 소토 같은 고참급 인물들이 떠나고, 큰형은 머나먼 리마에 머물러 있는 탓에 이들을 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밤낮으로 망코잉카를 쥐어짜 재물을 뜯어낸 것은 그렇다치고, 여자란 여자는 다 건드리고 다니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21]

이 와중에도 망코 잉카는 여전히 이들을 비라코챠로 대우했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결국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한다. 곤살로가 황제의 여동생이자 황후인 **코야 오크요(Cura Ocllo)**를 탐내기 시작한 것.[22]``[23]

황후를 NTR당할 막장사태에 직면한 망코 잉카는, 곤살로에게 미녀를 있는데로 다 갖다 바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는 다른 여동생인 잉힐(Inghil)을 황후로 속여 바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처음에 속아넘어간 곤살로는 잉카인들이 보거나 말거나 잉힐을 주물럭거리며(...) 끌고가 쿵떡쿵떡을 했지만 신방을 차렸지만, 애초에 서로 다른 사람을 갖고 끝까지 속이는 것은 무리. 얼마 지나지 않아 곤살로에게 들켰으며, 열받은 곤살로는 강제로코야 오크요를 납치한다.(...) 이렇게 해서 은근슬쩍 자매덮밥이 이뤄졌다.

이 사건으로 망코 잉카는 스페인인들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 각지에 전갈을 보내 반군을 조직하고 쿠스코를 탈출

...하려다가 후안과 곤살로에게 들켜 끌려와 감금된다. 이때 곤살로는 또한차례 초대형 병크를 저지르는데, 망코 잉카를 족쇄와 사슬로 묶고 망코 잉카의 몸 위로 오줌을 갈겼다. 당연하지만, 코야 오크요를 비롯 망코 잉카의 모든 부인은 이 시점에서 후안과 곤살로에게 끌려가 몸으로 시중을들었고(...), 또한차례 막대한 재물을 뜯어냈다.

결국 망코 잉카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반란을 일으키기로 굳게 결심했으며, 소문을 들은 잉카 제국 전역에선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쿠스코 외곽에선 원주민들이 스페인인들 몇몇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인 1536년 2월, 스페인에서 돌아온 피사로 가문의 둘째 에르난도가 쿠스코에 도착했다. 에르난도는 도착 즉시 동생들이 저지른 초대형 병크의 수습에 나섰다. 망코 잉카는 즉시 풀려났고, 에르난도는 그에게 사과했으며, 다시 황제로서 대우 받았다. NTR 당했던 황제의 부인들도 풀려났다.

아타우알파를 대한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에르난도는 잉카 황제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에르난도 개인의 판단뿐 아니라 카를로스 1세 또한 비슷한 판단을 내린 상태였던 것. 카를로스1세는 제대로 된 개척과 안정을 위해 망코잉카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망코잉카를 주권국의 황제로 대우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망코잉카는 이미 결심을 내린 상태였다. 이미 황후는 NTR당해버렸고 곤살로는 황제에게 오줌을 갈겼다.

결국 망코 잉카는, 에르난도의 호의를 이용해서 신전에 기도를 올리겠다는 핑계로 쿠스코를 탈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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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잉카, 스페인에 맞서 싸우다 ¶

이렇게 해서 잉카 제국은 스페인에 맞서 최초이자 최후의 전면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전투는 스페인의 잉카 정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이다. 이 전투의 결과로 잉카는 사실상 멸망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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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쿠스코 포위전 Sitio del Cuzco ¶

결국 1537년 6월, 쿠스코 포위전 혹은 쿠스코 공성전(Sitio del Cuzco, Cerco del Cuzco)으로 알려진 전투가 일어나게 된다.

쿠스코를 빠져나온 망코 잉카는 잉카인들에게 "스페인인들을 비라코챠로 생각했으나 그건 내 실수였다."고 선언했으며, 마누라를 빼앗겼던것과 오줌 세례를받은 사건도 낱낱이 고한다. 당연히 잉카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기세가 되었으며, 추정치 약 10~20만 대군이 조직되어, 쿠스코를 포위한다.

이때 쿠스코에 남아있던 스페인인의 숫자는 기록에 따르면 정확하게 196명. 다만 흑인 노예와 중앙아메리카에서 데려온 하인들이 존재했으며, 3~5백명으로 추정되는 스페인인들을 지지하는 잉카 원주민들[24] 이 있었다. 다만, 하인이나 원주민 지지자들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스페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병참, 보급, 도로 건설, 구호 활동 같은 보조 임무를 맡았다. 이들에겐 갑옷과 무기가 없었을테니 당연한 일.[25]이 압도적인 병력차이에 스페인인들의 운명은 아 망했어요(...)

..가 아니었다. 잉카인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고, 스페인인들에게 맞서 봉기한 것은 정당한 일이었으나, 군사적으로 따져봤을 때 이 포위전은 명백한 실수. 이걸 현대전으로 비유하면, 완전무장한 공성전차 1개 중대에게 창칼로 무장한 저글링 10만 마리가 한데모여 덤벼든 셈이었으니(...).

스페인인들은 당시 최신 무기인 로 된 무기와 갑옷, 투구로 무장했으며 대포, 화승총까지 갖춘 상태인 반면, 잉카인들은 천갑옷흑요석 무기로 무장한 알보병. 궁병이 있긴 했으나, 저 멀리 아마존 유역에서 불러모은 부족민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잉카인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투석[26]투창, 화공으로 대항했으나, 병기의 차이가 너무 컸다. 잉카의 병기는 스페인인들의 쇠로 된 갑옷과 투구로 뚫지 못했다. 손이나 목처럼 드러난 부위에 맞출 때도 있었지만, 일부러 맞추기엔 드러난 면적이 너무 작았고, 맞추더라도 붓거나 멍들지언정 죽이기엔 너무 힘들었다는 게 문제.

정황상 이 시점에서 잉카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 전술은, 게릴라전이어야 했다. 잉카 제국은 험한 산지로 가득찬 광대한 곳이다. 영토 곳곳을 요새화하고, 싸움을 걸기 위해 파견된 스페인부대는 이동 중에 험악한 산길을 이용해서 하나씩 잡아먹는다(...) ..그러나 이 전략이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망코 잉카는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알마그로와 함께 키토의 반군을 잡기 위해 나섰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군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결정, 어택땅 공격을 택한 것은 전략상의 대실수.

결국 190명의 스페인 정예 콩키스타도르들이 최소 10만, 최대 20만의 잉카 대군을 막아냈다. 잉카인들은 공성전차에 돌격하는 저글링처럼 녹아내렸으며, 스페인인들은 리얼 진삼국무쌍을 찍었다(...).

그렇다고 스페인인들에게 이 전투가 쉬웠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별의별 기록을 남긴 스페인인들답지 않게 사상자 수는 기록하지 않아 불분명하긴 하나, 스페인 측도 피해가 컸던 것은 분명하다. 사실 쿠스코는 무려 10개월 동안이나 포위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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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1. 삭사이와만 공략전 ¶

포위가 시작되자 쿠스코의 스페인인들은 쿠스코의 방위 요새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27]를 점령하기로 한다. 삭사이와만 요새는 쿠스코 공략 및 방어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

공략 첫날 피사로 가문의 셋째인 후안 피사로는 수비대의 투석에 턱을 맞는다. 턱이 너무 부은 탓에 투구를 쓸 수가 없었고 다음날 공략에 나섰을 땐 맨 얼굴로 나섰는데, 결국 머리에 투석을 맞아 두개골 골절을 당한다. 그리고 이 부상으로 후안은 3일 뒤 사망했다.[28]

이 공략전은 처절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후안 피사로 외에도 숱한 전사자가 발생했다. 한 스페인 병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이라는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는, 인질이나 몸값같은 게 전혀 필요 없는 상황인데다, 이 전투의 중요성은 스페인과 잉카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정사정없는 살육전이 이루어졌기 때문.

스페인의 기록에 따르면, 잉카인 3000명이 전사했으며 요새 주위는 시체로 가득했다고 한다. 잉카 쪽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남은 잉카인들 대다수가 투신자살을 택했으며, 이름이 전하지 않는 잉카의 지휘관은 화살을 두 대나 맞은 상태에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투신자살을 택했다고 한다.[29] 한편, 스페인 측의 피해는 후안을 포함해 전사자 스페인인 4명(...). 다만, 이 요새를 점령하기 전에 보급과 정찰에 나섰다가 사망한 스페인인이 30명 정도라고 한다.

어쨌든 최종적으로 스페인인들은 삭사이와만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방어에 필요한 전초기지를 얻었고, 이는 쿠스코 포위전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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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2. 키소 유판키Quizu Yupanqui의 활약 ¶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리마에서 발이 묶여 애만 태우고 있었다.

피사로는 처음에 쿠스코의 막장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리마를 건설하며 행복한 노후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쿠스코 포위전이 시작되기 이틀 전에 망코 잉카의 탈출과 대규모 반란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쿠스코와는 연락이 두절 상태.
망코 잉카의 봉기를 듣기 전까지, 피사로는 잉카 원정은 이미 끝났다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원 요청을 하는 편지에 본인이 직접 "노년에 이런 시련이 닥칠 줄은 몰랐다" "평생에 걸친 업적이 물거품이 될 위기다"라고 적었기 때문.

어쨌거나 피사로는 즉각 가장 가까운 스페인 식민지인 파나마에 헬프를 날렸지만, 당시 교통 사정으로 구원병이 도착하는 것은 수개월 뒤에나 가능한 상황. 때문에 피사로는 일단 리마 주둔병 중에서 구원부대를 편성하여 쿠스코와 인근 스페인 주둔지역으로 파견하는데(...)

하지만 이 구원부대는 모두 중간에서 갈려 나간다.

망코 잉카의 명령으로 키소 유판키(Quizu Yupanqui) 장군이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카 북부로 파견되었던 것. 특히 유판키는 철저히 기병의 약점을 파고들어 대성공을 거뒀다. 계곡 위에 매복하여 이동 중인 스페인 기병에게 바위를 굴려 죽인다는 것. 이 단순호쾌한 방식으로 스페인 구원부대 거의 전원이 몰살당했다.
사실 험한 지형으로 기병의 발을묶고 갈아버린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수도 없이 등장한 아주 기초적인 전술이지만, 이라는 것 자체를 경험해보지 못한 잉카인들이 이를 이용해먹었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 이렇게 인류의 전투력이 또 한 차례 입증되었다. 이렇게 삭제된 스페인군은 무려 200명. 당시 쿠스코와 리마, 그 인근의 주둔한 스페인 총 병력은 500명 수준이었으므로, 이 것이 스페인 측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