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태조 고제 유방
→
2대 혜제 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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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중
석문잔도풍경구(石門棧道風景區)에 있는 유방의 석상. 왼편으로 소하, 오른편으로
한신이다.장자방
피꺼솟장자방도 있지만 신선술을 익혔기 때문에 안보이는것일 뿐이다.
朕若逢高皇,當北面而事之,與韓彭競鞭而爭先耳。
"짐이 만약 고황(高皇 : 유방)을 만났다면 응당 북면하여 그를 기쁘게 섬겼을 것이고, 공을 세우기 위해 한신(韓信), 팽월(彭越)과 채찍질을 경쟁하며 선두를 다투었을 것이오."
-석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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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고황제
(高皇帝)
이름
유방(劉邦)[1]
자 계(季)
영문표기 한고조(Emperor Gaozu of Han) 유방(Liu Bang)
생몰기간 음력
B.C. 247년? ~ B.C. 195년 (52세?)
재위기간 음력
B.C. 202년 ~ B.C. 195년 (7년)[2]
- 개요
- 출생과 외모
- 생애
3.1. 패현의 허풍쟁이
3.2. 거병
3.3. 반(反) 진 전쟁
3.3.1. 풍읍의 배반
3.3.2. 항량의 부장으로
3.3.3. 함양으로의 진격
3.3.4. 홍문연(鴻門宴)
3.4. 초한대전
3.4.1. 권토중래
3.4.2. 삼진평정과 팽성대전
3.4.3. 형양 함락과 성고 함락
3.4.4. 광무 대치
3.4.5. 해하의 결전
3.5. 제국의 황제
3.5.1. 나는 세 사람 보다 못하지만, 세 사람을 부릴 줄은 안다
3.5.2. 내가 이제야 황제 귀한 줄 알겠다
3.5.3. 백등산포위전과 토사구팽
3.5.4. 대풍가(大風歌)
3.5.5. 그 다음은 당신이 알 것 없소
- 평가
4.1. 군사적 능력
4.2. 정치적 능력
4.3. 인간적인 면모
4.4. 총평
- 기타
- 대중문화 속의 한 고조 유방
6.1. 초한전기
6.1.1. 행적
6.1.2. 능력 및 인품표현
6.1.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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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이 피지배층에서 벼락출세하여 지배층으로 떠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진(秦) 말기의 대혼란에서 세력을 일으켜, 초한대전에서 최대의 호적수이자 압도적인 항우(項羽)을 몰락시키고 승리를 거두어 중국 천하를 손아귀에 넣었다.
이후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성왕(異姓王)들을 숙청하여 대제국 한나라의 기틀을 닦은 인물. 한나라, 특히 전한 왕조가 여러 국가들이 난립해있는 시대를 넘어 '하나의 중국' 으로서 중국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이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파격적인 행동이 많고 질기게 살아남고 버틴 타입이라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꽤 극단적으로 갈리는 탓에 이를 배경으로 하는 초한지 소설 등에서는 라이벌인 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아주 높은편은 아니지만, 최후의승리자로서 가지는 역사적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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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豊邑)[4]
중양리(中陽里) 출신이었다. 부친은
태공(太公)이었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다. 그러나 태공이나 온은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았다고 사기집해나 사기색은 등의 주석서에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유태공과 유온을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그저 유씨 아저씨, 유씨네 아줌마 정도의 의미로 유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조차도 사서에 보이지 않는 셈이다.
사실 이는 부모뿐만 아니라 유방 본인도 마찬가지인데, 사기나 한서(漢書)에서는 아예 유방(劉邦)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성이 유씨이고 자(字)가 계(季)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것은 순열(荀悅)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인데,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설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유방이 어렸을 당시에는 유계라는 호칭으로 통하다가, 즉위한 후 유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 이름이 형제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형들로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것을 보면 '유계' 라는 호칭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고, 그저 "유씨네 막내" 정도로 통용될 수 있는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 유중은 유희(劉喜)라는 휘가 알려져 있고, 동생 유교(劉交)는 아예 자인 유(游)로는 거의 기록되지 않아 모든 사람의 휘가 불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백중숙계가 대충 지은 이름 같아 보이지만 그게 정식 자나 이름인 예가 꽤 있어 그 유계라는 이름이 개별적인 이름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더욱이 유교가 유학자로, 특히 시경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 사람들 중에 이름이 아예 없는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방의 어머니인 유온이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신(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뇌성벽력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 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었다.
물론 창업군주의 출생에 대해 온갖 전설이 따라 붙는건 고금을 막론하는 이야기지만, 간혹 어떤 사람들인 이 이야기에서 교룡의 존재가 강간범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별 근거는 없다. 그보다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 되는 편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것이 좋을 듯 싶다.
유방의 외모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대로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아주 그럴듯 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넒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반점의 숫자야 '비범한 인물' 에 대한 묘사에서 자주 나오는 특징 중에 하나고, 용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사람 얼굴을 보고 연상시키는 동물이야 모두 다른 법이니 일단 알 수 있는 사실은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고 수염이 꽤 멋있었다는 정도다.
그리고 좀 뒤의 이야기지만,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5]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6]
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 할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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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유방은 변변한 일도 하지 않고 지냈었다. 사기 고조본기에서는 유방에 대해 아예 대놓고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혔다 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통일 제국의 창업 군주에 대한 묘사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베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가진건 없더라도 한 턱 낼때는 화끈하게 내는 남자들의 행동과 비슷한듯. 훗날 유방이 황제가 되고 나서 아버지인 태공에게 **"저보고는 생업도 못 꾸리고 형처럼 노력도 안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면 어떻습니까?"**라고 농담하면서 부친의 장수를 기원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보면 당시의 유방은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같은 처지였다.
그 당시 유방은 가진건 쥐뿔도 없었지만 패기는 실로 남달라서, 왕온(王媼)과
무부(武負)라는 사람들의 집에서 매일매일 외상술을 퍼마시고 그러다 잠이 오면 아무데서나 널부러져 잠을 잤다.[7]
그런데 특별히 직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는 했던듯 하다. 아직 진나라가 천하를 모두 집어삼키기 전에 떵떵거리며 살던 장이(張耳)를 만난적도 있을 정도. 그러다 어느날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서 요역을 하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의 위풍당당한 행차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오호라! 대장부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
[8]
이렇게 일도 없는 백수였던 유방은 사수(泗水)의 정장(亭長)[9]
이라는 조그만 자리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소하(蕭何)가 자리를 추천하여 만들어주었다는 것인데, 유방이 이 자리를 얻게 된것은
소하와는 관련 없이 유방이 시험을 쳐서 획득한 자리다.[10]
직업을 얻었다고 해도 조그만 자리에 불과한 말단이었지만, 워낙 유방의
패기가 대단해서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아랫사람 처럼 같잖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유방은 따로 만나던 조(曹) 씨라는 여자가 있었다. 다만 둘은 정식으로 혼례를 치루거나 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조씨는 이 관계에서 훗날 제도혜왕(齊悼惠王)이 되는 유비(劉肥)를 낳았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끝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어느날 선보(單父)[11]
출신인 여공(呂公)이라는 인물이 패현으로 이주하는 일이 생겼다. 본래 살던 곳에서 원수가 있어 이를 피해서
도망친것인데, 이 여공이 패현의 현령과 안면이 있어 손님으로 와서 지내다가 아예 모든 가족을 이끌고 이주를 했던 참이었다. 현령이 돌봐주는
사람이니 패현의 여러 호걸들이나 관리들도 이 여공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만나서 축하를 하고
하례금을 바쳤는데, 이 사람들의 숫자가 꽤 돼서 소하가 나서서 사례금을 걷는 일을 맡게 되었다. 소하는 사례금의 액수가 천 전(錢) 이하인
사람들은 대청 아랫 자리에 않게 했다.
헌데 이 자리에 땡전 한 푼 없던 유방이 나타났다. 유방은 돈도 없었지만 당당하게 **하례금일만전**이라고 쓰고 들어왔다. 일만전이라는 숫자를 본 여공은 깜짝 놀라서 나와 유방을 직접 맞이했는데, 본래 관상을 즐겨 보던 여공이 한번 유방을 보자 꽤 그럴듯한 면모가 있었다. 여공은 유방을 극진히 대접해서 윗자리에 앉게 했는데, 소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빈정거렸다고 한다.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큰소리만 치지 일을 끝마치는것은 드뭅니다."
적당히 눈치나 보라는 이야기겠지만, 유방은 그런 이야기는 다 무시해버리고 계속 윗자리에 앉았다. 앉아있는것도 앉아있는 일인데,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사양하는 기색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슬쩍 유방을 자리에 남겨놓더니 자신의 딸인
훗날의 여후(呂后)를 주겠다고 권했다.[12]
이에 대해 여공의 부인이 "아니, 패현
현령이 딸을 주라고 할때도 안좋았는데 저런 거렁뱅이에게 딸을 주다니요?" 하고 노발대발했지만, 여공은 "아녀자가 무슨 일을 알아!" 하면서
무시하고 기어코 딸을 유방에게 주고 만다.
그렇게 여후와 결혼한 유방은 훗날의 혜제(惠帝)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 등의 자식을 얻었다. 유방과 조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당초에 둘이 제대로 살림을 차리고 산것도 아니라서 그리 문제는 없었거나 혹은 유방이 유력자인 여공과
관계를 맺기 위해 조씨와의 인연을 정리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13]``[14]
그러던 어느날, 여후가 아이들을 데리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 어떤 노인이 물을 좀 주라고 부탁했고 여후가 물을 주자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더니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되실 겁니다." 고 대답했다. 여후가 두 아이의 관상도 봐달라고 부탁을 하자, 노인은 혜제를 보고는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노원공주의 관상도 칭찬을 한 노인이 자리를 떠나자, 마침 사랑채에서 나온 유방에게 여후가 이 말을 전하자 유방은 노인을 찾아가 자신의 관상도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런 대답을 했다.
"조금 전의 부인과 아이들이 모두 당신의 상을 닮았습니다. 당신의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이에 유방은 감사하면서 "혹시 그 말대로 된다면,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대답했다. 하지만 유방이 어느정도 세력자가 되고 난 후에는
노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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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진나라의 여산(驪山)에서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고통스럽게 노역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정장이었던 유방은 패현의 죄수들을 호송해서 여산으로 끌고 가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16]
하지만 현시창의 상황이었던 여산에 끌려가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죄수들은 하나, 둘씩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여산에 도착할 즈음이면 모두 도망치고 한명도 남지 않을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책임자인 유방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유방은 아예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속 편하고 술을 진탕 마시고는, 밤이 되자 "가고 싶은 대로 가라. 나도 도망칠 테니까." 라고 말하면서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무리 중 열명 정도가 유방을 따르기를 원했다.
유방은 그들과 술을 더 마신 후, 한밤중에 이동을 하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 앞 길을 살펴보게 했다. 앞서가던 사람은 이내 돌아오더니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니 되돌아가는게 좋다." 고 권했다. 그러자 유방은 술김에 "장사가 길을 가는데 그깟 뱀이 뭐라고!" 라며 소리치고 앞으로 가더니 칼로 뱀을 베어서 죽여버렸다. 그런 다음 몇 리를 더 가다가 기어코 술에 취해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유방을 따르던 사람들이 이를 쫒아서 와보자, 뱀이 죽은 자리에서 한명의 노파가 통곡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노파는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여서 그렇다." 고 대답했고, 자신의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 있다가 방금 적제(赤帝)에게 참살 당했다고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노인네가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두들겨 패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으려고 할때, 노파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술에서 깬 유방은 그 이야기를 듣자 비범한 이야기라고 여겨 내심 좋아하게 되었고, 따르던 사람들도 유방이 뭔가 특이한 인물이라고 여겨서 더욱
그를 경외하게 되었다.[17]
그 무렵 진시황제는 "동남쪽에 천자의 기운이 있는것 같다." 고 여기며 동쪽으로 순행해 그 기운을 억누르려 했는데, 여러가지 묘한 일도 있고
해서 스스로 특이한 사람이 아닐까 여긴 유방은 "혹시 나 잡으려고 그런게 아니야?" 라고 생각해서 망(芒) 산과 탕(碭) 산[18]
의
연못가 근처 암석 사이에 은둔하면서 몸을 피했다.
그런데 혹시 여후가 유방을 만날 일이 있을때, 여후는 유방이 어딘가에 숨어있어도 항상 귀신같이 그를 찾아내었다.아내를 만나는데 왜
숨어 이에 유방이 신기해서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어보자, 여후는 "당신이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서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패현의 많은 자제들은 더욱 유방을 대단하게 여겨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19]
유방이 숨어 다닐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 ·오광의 난이 발발 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패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신은 진나라 관리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 같으니, 마침 숨어 지내던 유방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면 적절하다고 여겨 번쾌(樊噲)를 불러 유방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구고 유방이 들어오는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曹參)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 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 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을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반응이 일어나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 유방은 짐짓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소하나 조참이나 여기서 유방을 거슬려서 좋을 것도 없고, 또 만약 주모자로 모반을 저질렀다가 일이 실패하면 자기 친척들이 모조리 도륙 당할까봐 두려웠던 그들은 유방에게 모든 일을 양보했다. 유방은 이렇게 추대되었고, 이후부터 패공(沛公)으로 불리게 된다.
추대된 유방은 패현의 관청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짐승을 죽여 피를 북에 바르고 깃발을 모두 붉은색으로
했다.[20]
이에 소하와 조참, 번쾌 등과 젊은 관리들이 패현의 젊은이 이삼천 명을 모았고, 호릉(胡陵)[21]
과
방여(方輿)[22]
을 공격하고 다시 돌아와 풍읍(豊邑)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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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방이 거병을 한 BC 208년, 천하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장초군의 장수 주장(周章)[23]
은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 수도 함양에서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위치까지 진군했으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인 장한(章邯)이 대반격을 가하자
여지없이 분쇄되었다. 또한 장초의 장수들은 각각 연(燕), 조(趙),
위(魏) 등을 세워 독립하였고 또한 제(齊) 역시 전(田) 씨 형제들이
거병하여 나라를 세웠다. 또한 오나라 땅에서는 항량(項梁)이 봉기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진나라의 진나라의 사수군감(泗水郡監)[24]
평(平)이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유방은 이틀 후 출진하여 그들을 쳐부셨다. 이제 수비가 아니라 공세에 나서기로 결정한 유방은 옹치(雍齒)에게 풍읍의 수비를 맡기고는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설현으로 진군, 사수군을 지키는 장(壯)을 격파했다. 장은 도망쳤지만 유방군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은 이를 추격하여 장을 잡아 죽였다. 이후 유방은 군대를 돌려 항보(亢父)를 거쳐 방여(方輿)에 이르기까지 진군했다.
그런데 이 무렵 장초의 진승은 수하의 장수 주불(周巿)을 시켜 위나라 땅을 공격하게 하려고
했는데, 주불은 이에 풍읍에 사자를 보내 "풍읍은 본래 위나라가 천도한 곳이었으니[25]
항복해라. 항복하면 후로 삼아 맡기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모두 도륙할 것이다." 라고 협박을 했다.
헌데 당시 유방은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이 연략을 받은 사람은 옹치였다. 본래부터 유방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옹치는 이에 넘어가 훌라당 풍읍을 바쳐버렸고,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유방이 귀환해 풍읍을 공격했지만 함락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병이 난 유방은 일단 패현으로 물러났다.
옹치와 풍읍의 배반에 원통하고 분한 유방은 마침 동양(東陽)[26]
출신 사람인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라는 사람을
임시왕으로 삼아 유(留)[27]
에 있다는 사실을 듣자 경구를 만나 의탁하여 군사를 빌렸고 다시 풍읍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무렵이 장한이 진승의 세력을 완전히 격파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장한의 부장이었던
사마니(司馬夷)는 북쪽으로 초나라 땅을 평정하고 상현(相縣)[28]
을
도륙하고 탕(碭)[29]
에 이르렀다. 이에 유방은 영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소(蕭)[30]
로 진군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 유 땅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그 후 재차 공격을 감행, 3일간의 싸움 끝에 사마니에게 함락된 탕성을 재함락하고 탕성의
장정을 거두어 대략 오천명 가량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방은 이 부대를 가지고 하읍(下邑)[31]
을 함락시키고 풍읍 부근에
주둔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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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유방의 지상과제는 물론 풍읍의 옹치를 박살내는 일이겠지만, 당시의 전력으로는 어려운 면이 많았다. 그런데 봉기군 중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항량이 설(薛) 땅에 주둔하자 기회라고 여긴 유방은 직접 백여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항량을 방문했다. 유방과 이야기를 나눈 항량은 오천여명의 병사와 오대부(五大夫)에 해당하는 장수 십여명을 빌려주었고 유방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풍읍을 공격했다. 하지만 풍읍은 여전히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한달 뒤, 양성(襄城)을 함락하고 대학살을 자행한 항우는 항량의 본군으로
귀환하였고, 이에 맞추어 항량이 각지를 공격하고 있는 장수들을 소집하였기에 유방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진승이 살해된 것이 확실해졌기에
항량은 이에 맞추어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새로운 초회왕으로
추대하고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다.[33]
그 무렵 진나라의 장한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공격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항량은 곧바로 동아로 진군하여 장한을 물리쳤다. 항량은
기세를 타고 장한을 추격했지만, 장한은 군세를 수습해서 다시 강력한 진영을 갖추었다. 이에 항량은 별동대를 조직하여 항우와 유방에게 이를
이끌게 하고 성양(城陽)을 공격하게 했다. 성양을 함락하고 성 내의 사람들을 학살한 별동대는[34]
이윽고 복양(濮陽)으로 진군하면서
진나라 군을 한번 격파하고, 다시 성에 공격을 가해 복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정도(定陶) 공략에 나섰지만 쉽지 않자 옹구(雍丘)로 진군하여
진군을 격파하고,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李由)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이후 별동대는 외황(外黃)을 향해 진군했다.
그런데 교만을 부리던 항량은 이후 장한의 반격에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항우와 유방의 별동대는 외항을 버리고 진류를 공략 중이었지만, 항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의 사기가 염려되어 여신(呂臣) 등과 함께 퇴각을 했다. 그 당시 초나라의 기둥이었던 항량을 참살한 장한은 이제 초나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조나라를 박살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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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과 항우의 진격로
장한은 한단(邯鄲)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부장
왕리(王離)[35]
를 파견해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이 몸을
피한 거록(巨鹿)을 공격 중이었다. 조나라 마저 무너지면 진나라의 세력이 다시 천하를 뒤덮을 것이 자명하였기에, 이를 구원하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초회왕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자가 그 지역의 왕이 되리라 라는 선언을 한 상태였다. 또한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켰야만 항량의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가길 원했지만, 회왕의 주변에 있는 노장들이 항우를 서쪽으로 보내는 일을 꺼려 이 일은 유방이 맡게 되었고, 항우는 송의(宋義)와 함께 북쪽으로 진군해 거록의 진나라군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유방은 독자적으로 군단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유방은 강리(杠里)[36]
의 진나라 군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나아가다,
창읍(昌邑)[37]
에 이르렀다. 바로 이때 팽월(彭越)을 만나 양 군대는 힘을 합쳐
창읍을 공략했으나, 창읍의 수비가 완강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잠시 율현(栗縣)으로 후퇴하였다가 강무후(剛武侯)[38]
의 군사
4천여명을 빼았아 위나라 장군 황흔(皇欣), 신도(申徒) 무포(武蒲) 등과 함께 창읍을 재차 공격했지만 여전히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 무렵 항우가 거록대전에서 놀랄만한 승리를 거둔 참이라, 유방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창읍을 내버려 두고 서쪽으로 진군하며 고양(高陽)을 지나갔다. 바로 이때 역이기(酈食其)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양다리를 떡 벌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무례한 행위였는데, 그 모습을 본 역이기는 절을 하지 않고 길게 읍만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족하께서는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십니까?"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역이기에게 욕을 퍼부었다.[39]
"이 비루한 유자 놈아! 지금 천하가 진나라의 폭정으로 고통을 받은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공격한다고 하느냐?"
그러나 역이기는 기가 꺾이지 않고 말하길.
"무리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무도한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서는 장자(長子)를 거만한 태도로 맞이하심은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따지자, 유방은 그 즉시 발씻기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역이기를 윗자리에 모셔 조언을 구했다.[40]
유방은 역이기의
조언에 따라 진류(陳留)를 습격해 진나라가 비축한 양식을 얻어 군량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그 후
역상(酈商)[41]
을 장수로 삼고 개봉(開封)을 쳤지만 여기도 쉽게 함락이 되지 않자
그대로 서쪽으로 나아가 백마진(白馬津)[42]
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을 쳐부수고
이를 추격하여 곡우(曲遇)에서 대파하였다.
이후 유방은 남쪽으로 나아가 영양(穎陽)을 함락시켰고, 장량과 다시 재회하여 그 도움을
바탕으로 환원(轘轅)[43]
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卬) 관중으로 진입해 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수를 남하하여 함곡관(函谷關)으로 진입하려고 하자, 유방은
평음(平陰)[44]
을 공략하여 나룻터를 끊어버렸다.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낙양 동쪽에서 전투를 치루었으나 유리하지 못해 양성(陽城)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추스린 후, 남양현(南陽縣) 동쪽에서 남양 태수 여의(呂齮)를 무찔러 남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여의는 완성(宛城)으로 도망쳤고, 유방은 여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서쪽으로 진군할 요량이었지만 장량이 "후방에 적을
남기는건 좋지 않다." 고 충고하여 완성을 함락시켰다.[45]
완성을 함락시킨 유방의 세력은 이 무렵에는 무시못할 정도로 강력해져서
주위의 성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는데, 개중에는 왕릉(王陵)도 있었다. 유방은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별장 매현(梅鋗)과 함께 석현(析縣)과 역현(酈縣)을
함락시켰다. 이때는 장한이 은허에서 항우에게 항복을 했고, 유방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바로 그 악명이 자자한 조고가 유방에게 접촉을 시도한것. 조고는 당시 호해를 이미 살해한 후였는데, 관중을 쪼개서 서로 나눠 왕이 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유방은 이것이 속임수라고 여기고 그대로 진군했고, 무관(武關)을 돌파한 후 남전(藍田)에서 진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이어서 북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BC 206년 10월. 마침내 유방의 병사들은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천하의 그 어떤 제후들보다 가장 먼저 함양 근방에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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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홍문연(鴻門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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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함양은 황제를 살해하고 복마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괴물 조고를
자영(子嬰)이 살해한 후였다. 자영은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목에는 밧줄을 메고서,
황제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봉해 가지고 나와 지도(軹道)[46]
로 나와 유방에게 항복했다. 유방의 장수들 중에 자영을 죽여 분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방은 이를 거절했다.
"처음 회왕이 나를 관중으로 보낸 이유는 원래 내가 관대하고 남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이미 항복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또한 앞일이 상서롭지 않을 것이오."
이에 자영을 관리에게 맡기고, 본인은 함양에 입성하여 호화로운 진나라의 보물과 여자들을 취해서 신나게 노려고 하였다. 하지만 번쾌(樊噲)와 장량의 설득으로 결국 그만두고, 진나라의 보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군대를 패상에 주둔시켜 함양의 백성들이 민폐를 당하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현의 호걸들과 노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기 계시는 나이든 어른들께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이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멸족을 당해왔고, 서로 모여 말을 나눈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여 거리에 내던져졌습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제후들은 나와 ‘관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된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대로 나는 마땅히 이곳의 왕이 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여러분들과 ‘살인자는 죽인다, 남을 상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는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내용의 **법삼장(法三章)**을 약속합니다. 나머지 진나라의 모든 법은 폐지하겠습니다.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예전처럼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부로들을 위해 나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대로 당신들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내가 휘하의 군사들을 패상으로 물리쳐 주둔하는 이유는 제후들이 오기를 기다려 그들과 함께 규약을 제정하기 위함에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각 현(縣), 진(鎭), 향(鄕), 촌(村) 등에 이 소식을 전하니 진나라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소와 양을 잡고 술을 가져와 대접하려고 했지만, 유방은 "이미 우리는 먹을게 많다." 면서 모두 물렸다. 이에 모든 백성들은 기뻐하면서 오직 유방이 진나라 왕이 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이러한 제안을 했다. 지금 항우가 진격하고 있는데, 서둘러 함곡관을 막아 관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책에 솔깃해진 유방은 이대로 행했지만…… 이는 항우의 어그로만 잔뜩 끌게 하는 행위였다. 11월 무렵, 항우는 유방이 함곡관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분노해 경포(黥布) 등을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게 했다.
이렇게 되자, 유방의 부하였던 조무상은 '이럴 바에야 항우에게 항복해서 녹봉이나 받자.' 는 생각으로 "유방이 관중에서 왕 노릇 할 생각으로 금은보화를 챙기고 있습니다." 라고 고자질을 했고, 범증(范增) 역시 지금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권하자 항우는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다음 날 아침 유방을 박살내버릴 생각을 하였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은 유방은 십만 명의 군사를 이십만이라고 부풀린 형국이었고, 항우는 사십만의 병사를 백만이라고 부풀리는 상황이었다.
전력으로는 전혀 상대도 되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항백(項伯)은 친분이 있던 장량을 살리고
싶어 몰래 진영을 빠져나와 장량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47]
이에 장량은 "나 혼자 도망치면 의(義)가 아니다." 라면서, 유방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방은 경악했으며, "항우를 이길 자신이 있느냐." 는 장량의 물음에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라고 물었다. 이에 장량은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했고, 둘의 자식들이 혼인하도록 약속을 한뒤 항백을 돌려보냈다.
환대를 받고 돌아온 항백은 "아, 패공은 자네에게 개기려고 그런게 아니라, 도적들 막으려고 함곡관을 잠군 것 뿐이야. 개길 생각은 전혀
없던걸?" 이라고 변명을 해주었고, 유방은 항우를 만나 사죄했다. 그러나 범증은 이 자리에서 유방을 죽여버릴 심산이었으나,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방은 돌아오자마자 조무상을 죽였다.[48]
이후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대학살을 하고 모든것을 불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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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초한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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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권토중래 ¶
천하의 지배자가 된 서초패왕 항우는 각지의 제후왕을 분봉했는데, 가장 위협이 되는 유방은 파촉(巴蜀)의 벽지에 처박히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관중은 육국을 제외하고 통일 이전의 진나라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였기에, 파촉의 왕이 되는것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관중의왕'이라는 선언을 지키는 선에 들어가기는 했다.
유방의 본래 고향이었던 강소성 지역의 위치를 생각해보자면 돌아버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이는 유방 뿐만이 아니라
주발(周勃), 관영(灌嬰),
번쾌 등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유방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번 항우하고
싸워볼까?" 라는 생각까지 품었고 장수들도 동의했지만, 소하는 **"이까짓거 죽는것보다는 낫다."**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소하에게 화를
내던 유방이었지만, 결국 그 의견에 동의하고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49]
유방 입장에서 더 열받는 일은, 본래 유방의 군단은 10만에 육박했는데 항우는 그 중 3만명만 유방을 따를 수 있게
하였다(……).[50]
이래서 차라리 한 판 뜰까 했던 것.[51]
그 정도로 항우는 아직 유방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량은 잔도(棧道)를 불태우라고 충고해서 항우의 의심을 덜게 하였다.[52]
그러나 유방을 따라 한중 지역으로 들어가는 대다수의 병사와 장수들은 관동(關東)출신으로서 이내 이런 촌구석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까 두려워하며
그 길이 너무나도 험하여[53]
도망치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러제꼈다. 유방으로서는 괴로운 나날이었는데,
어느날 소하마저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방은 어이쿠, 이제 난망했구나!"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소하는 달아난게 아니었다.
그는 도주한 한신을 데려오기 위해 떠났던 것이다.
당시의 한신은 원래 항우군의 집극낭중으로 있었는데 낭중의 신분을 이용하여 항우에게 여러 차례 계책을 올렸지만 매번 무시당했으며 그의 출신이 미천하여 홀대하였기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한 한신은 초나라를 떠나 유방의 군대를 따라 갔었다. 그러나 유방의 진영에 들어가서도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급기야 동료와 함께 군령을 위반하는 일을 저질러 참수형이 내려졌는데 13명이 참수 당하고 한신의 차례가 되었는데 한신도 이제 곧 죽게 될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다가 우연히 하후영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때 하우영에게 큰소리로 "한왕께서는 천하를 얻고 싶지 않으신가? 어찌 장사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오?" 라고 매우 당당하게 외쳤다. 이를 장하면서도 신기하게 여긴 하후영은 한신의 처형을 잠시 미루고 대화를 나누고선 크게 기뻐한 하후영은 유방에게 죄를 사면하고 중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치속도위로 임명되었다. 치속도위를 맡긴 하였으나 본디 뜻이 컸던 한신은 행진 중 소하와 여러 차례 면담을 청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소하는 한신이 매우 뛰어난 인재임을 알게 되었으며 한신 또한 소하가 자신을 유방에게 추천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남정에 이으러 수일이 지났는데도 아무 기별이 없자 유방 또한 자신을 중용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무 말 없이 밤중에 도주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소하는 깜짝 놀라 유방에게 기별조차 하지 못한 채 황급히 한신의 뒤를 쫓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신을 겨우 설득하여 군영으로 돌아와 유방을 만났는데, 유방은 소하를 보자 기뻤지만 한편으론 화가 나서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도망갔던 것인가?"
소하가 답했다. "신은 감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도망친 자를 쫓았을 뿐입니다."
유방이 물었다. "그대가 뒤쫓아 갔던 사람이 누구인가?"
다시 소하가 답했다. "치속도위 한신을 쫓았습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꾸짖으며 말했다. "내가 관중에서 남정으로 오기까지 그렇게 많은 장졸들이 도망쳤는데 여지껏 한 명도 뒤쫓지 않다가 어찌하여 한신만을 뒤쫓아 갔다는 말인가? 한신을 쫓아갔다는 것은 거짓이로다."
그러자 소하는 자신이 한신을 뒤쫓은 이유를 유방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다른 장수들이야 쉽게 얻을 수 있지만 한신과 같은 인물은 걸출해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왕께서 만약 한중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하시려면 한신을 쓸 바 없거니와, 만일 천하를 취하고자 하신다면 한신 말고는 그 일을 상의할 인물이 없습니다. 다만 왕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때 소하의 설명 중 '至如信者 國士無雙' (한신만은 국사로서 둘도 없는 사람입니다.)로 부터 나온 말이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즉, 한신이 없으면 우린 여기 박혀서 아무것도 못함.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소하의 추천으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은[54]
유방은 한신과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었고, 세력을 정비해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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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삼진평정과 팽성대전 ¶
마침내 BC 206년 8월, 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방은 한신의 제안에 따라 옛날의 길을 이용해 우회하여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다. 당시 한군은 파촉에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린 상황이었다. 잔도가 모두 불탔으니 한군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라고 생각했을 장한등에게 한방을 제대로 먹일 수 있는 것이다.
장한은 여러차례 한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한군은 장한을 연달아 격파했고, 곧 관중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장한은 폐구(廢丘)에서 포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고, 이후 한군은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한왕(韓王) 정창(鄭昌) 등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간단하게 제압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진군한 유방은 위왕(魏王) 위표, 은왕(殷王) 사마앙도 항복시키게 된다.
당시 항우는 제나라에서 전영(田榮)과 교전을 치룬 후 완전히 늪에 빠진것처럼 허우적대던 판이라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마음껏 세력을 키우고 제후들을 끌어들은 유방은 죽은 의제(義帝)를 위해 3일 장을 치룬 후, 제후군을 집결시켜 5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모아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으로 진격했다.
항우가 없는 팽성은 당연히 이런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유방은 손쉽게 성을 점령 할 수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단 3만명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밞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심지어 과장을 고려해 한군의 전력을 10분의 1로 줄여도 초나라군의 숫자 열세는 변함이 없다. 제후 연합군은 숫적으로 압도했지만 여러 제후들의 군대가 모여 통일된 체계가 아니었고, 그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모랄빵을 먹자 제대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명의 병사들이 때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 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55]
워낙 엄청난 패배라 유방 본인도 죽을 고비를 두번이나 겪었지만, 한번은 모래 폭풍 때문에 목숨을 구했고 다른 한번은 정공(丁公)을 설득해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패현(沛縣)에서 가족들을 챙기려고 했는데,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기 위해 패현에 사람을 보냈고 가족들도 난리를 피해 도망친 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달아나는데, 도중에 유방의 아들인 유영과 장녀인 노원공주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것을 보고 이들을 자기가 타고 있는 수레에 태웠다.
그런데 저 멀리서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하고 지친 유방은 수레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수레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때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夏侯嬰)은 그때마다 수레를 멈추고 아이들을 태운 후에야 다시
달렸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아이들을 목에 매달고 일부러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진정하고 난후에야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 짓을 3번 반복하자
어그로가 머리 끝까지 오른 유방은 10번이나 하후영을 찔러서 죽이려고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56]
하후영은 유방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비록 사태가 급박하다 하여 수레를 빨리 몰 수 없다고 하지만, 어찌 두 아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유방은 간신히 초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고, 두 아이들도 무사히 풍읍(豊邑)으로 올 수 있었다. 유방은 그 후에 하후영에게 기양(祁陽) 땅을 식읍으로 주고 공신으로 평생 우대했다. 참고로 여후와 유영은 이 일을 매우 고마워하여 유방이 죽은 후 혜제가 집권했을 때에도 태복으로 삼았으며 하후영에게 궁궐 북쪽에 제일 훌륭한 저택을 지어주는 특혜를 주면서 하후영에게“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하고, 그를 각별히 존중하여 여후가 죽을 때까지도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여후가 죽은 이후에는 주발,진평등과 함께 여씨 일당을 제거하는데 일조하고 효문황제까지 섬겼으니 이 일은 하후영 자신에게 있어선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그러나 유방과 두 자식과는 달리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과 마누라가 되는 여후(呂后)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라는 인물은 이 둘을 호위하면서 어떻게든 유방과 만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초군을 먼저 만나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고 초군은 태공과 여후를 항우에게 바쳤다.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두어서 데리고 다녔다.
이렇게 엄청난 패배를 겪었지만, 유방은 소하의 보급 등을 바탕으로 다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초군을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격파한 유방은 형양(滎陽)을 중심으로 항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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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성대전의 패배 이후 유방은 부하인 수하(隨何)를 통해서 경포를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한신을 시켜 도망친 위표를 물리치게 하고, 이후 하북으로 진군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하게 지시했다. 팽성대전 이후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셔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고 한군은 거의 1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게 되자 한계에 봉착했고 BC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때문에 심하게 우려스러워 하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범증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항우는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이 무렵, 유방은 진평(陳平)을 수하로 삼았다. 여러 장수들은 진평이
형수와 간통을 한 색마이며[57]
,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작자라고 욕을 퍼부었지만 진평과 면담을 해본 유방은 되려 진평에게 후한상을 내리고 호군중위의 벼슬에 임명했다.
그 진평은 이 위기상황에서 하나의 계책을 내놓았는데, 이간책을 사용해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사실 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유방은 항우의 사자가 한군의 진영에 오자, 일부러 으리으리하게 대접을 했는데, 정작 사자를 만나자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는(……)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준 것이다. 그런데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범증은 곧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어도 포위망은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이 더 거세어지고 식량이 부족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장군이었던
기신(紀信)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계책을 내놓았는데 유방과 닮은 자신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하여 거짓으로 항복한 후 초의 군사들이 몰려 포위가 느슨해지는 틈을 타 반대편 성문으로 빠져나가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진평이 2천여명의
여자들을 무장시켜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는 계책을 냈다.[58]
그리하여 밤중에
기신이 가짜 유방으로 위장한 채 2천여명의 무장한 여자들과 함께 형양성의 동문으로 나가
초군에게 항복했다. 초군은 진짜 유방이 항복한 줄 알고 기뻐하며 방심한 사이 진짜 유방은 수십 기와 함께 서문으로 탈출하였고 속임수에
당한것을 깨달은 항우는 분노하며 기신에게 유방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지만 기신은 항우에게 "우리 대왕은 진작에 달아나셨다. 이 멍청아" 라고
답했고 대노한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참고로 원래 욕을 잘하고 말이 거칠었던 기신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항우를 향해 욕을 했다.
그렇게 유방은 탈출하여 우선 관중으로 들어가 세력을 다시 추스린 후 항우와 재결전 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원생(袁生)이라는 인물은 유방에게 충고를 했다.
"한과 초 두 나라는 형양성을 사이에 두고 몇 해를 대치해 왔으나 한나라는 항상 수세에 몰렸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무관(武關)으로 나가시면 항우는 필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그럴 경우 대왕께서는 해자를 깊이파고 보루를 높이 올려 지키신다면 형양과 성고 일대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모두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한신 등에게 명하여 하북의 조(趙), 그리고 연(燕)과 제(齊)를 평정하도록 하게 하십시오. 그때 형양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초군은 우리의 양동 작전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며 그 전력은 분산되어 그 틈에 한나라 군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겨룬다면 틀림없이 초나라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방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형양에 대한 압박을 풀고, 그 사이에 한신은 북방을 평정하게 하자는것. 이에 따라 유방은 완성(宛城)과 섭(葉)에서 경포와 주둔하며 항우의 주의를 끌었다. 항우는 이에 유방과 결전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유방은 도전에 응하지 않았고, 그 사이 팽월은 뒤치기를 시전해 항성(項聲) 및 설공(薛公) 등의 장수를 격파해서 항우를 성가시게 했다. 항우의 주위가 팽월에 쏠리는 사이 유방은 성고에 입성했다.
그런데 항우는 순식간에 팽월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다시 형양으로 나아가 주가(周苛)와 종공을 모두 죽이고 한왕신은 사로잡았으며, 성고를 포위했다. 성고가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이자 유방은 하후영과 함께 둘만 간신히 도주했고, 의지할 수 있는 한신의 군단으로 도망쳤다.
이 당시 정형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한신은 장이와 함께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있었다. 유방이 한신의 군영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처음에 한나라의 사자라고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성벽으로 들어온 유방은, 곧바로 장군의 인수(印綏)와 부절(符節)을 손아귀에 넣고, 순식간에 인사배치를 끝내 그 병력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놓았다. 이때 한신은,
잠 자고 있었다.
유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의 지휘관을 강탈회수하는 동안, 한신은 장이와 함께 꿈나라 여행을 떠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느닷없이 유방이 있자 한신은 경악했고(……) 유방은 장이에게는 조나라를 지키게 하고, 한신은 조나라의 상국으로 삼아 즉시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보통 역사에서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고, 역으로 군주가 군사력이 전무하다면, 결국 그 장수의 파워에 휘둘리다가 비명횡사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보통은 이런 시나리오가 일반적인데, 이때 유방은 미역국 마시듯이 순식간에 한신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가져왔고, 잠 자고 있던 한신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털렸다.(……)
한신과 유방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인데, 이후로도 한신은 잠 자다가 창졸간에 군대를 빼앗긴 이때처럼, 이상할 정도로 유방에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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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광무 대치 ¶
이후 유방은 한신에게 지시하여 조참, 부관, 주설 등과 함께 제나라를 평정하게 했고, 본인은 새롭게 충원한 군단을 거느리고 항우와 교전하기 위해 나섰다. 낭중(郎中) 정충(鄭忠)은 "항우와 싸워봐야 이길수가 없으니, 보루를 높이하고, 참호를 깊이 파서 굳게 지키기만 하자." 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유방은 그 대신 노관과 유가(劉賈)에게 군사 2만을 주어 팽월과 협력하게 해서 항우를 괴롭히게 했다.
그런데 아직 한신의 군단이 제나라로 진입하기 이전, 역이기는 자신이 나서면 싸움 한번 없이 제나라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에 유방은 역이기를 제나라로 보냈는데, 과연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내어 제나라를 항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괴철(蒯徹)의 꼬드김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침공함으로서, 역이기는 삶겨서 죽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유방과 한신 사이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지만, 일단 전황 자체는 최악의 시기를 넘어 호전되고 있었다. 한신은 제나라를 괴멸시키고 이후 용저(龍且)의 대군마저도 격파하여, 초나라에 대한 북방에서의 세력 우위를 확실하게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