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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溫
(317 ~ 373)

동진의 장군. 정치가. 자는 자원(子元), 시호는 선무후(宣武侯).

북방에서 흘러온 무인 집안의 자손으로, 선성태수 환이(桓彝)의 아들이다. 태어난 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아 태원의 온교(溫嶠)가 그를 보고, 말하길 “이 아이는 기골이 범상치 않으니, 시험 삼아 울려보세.”라고 했다. 더불어 그 소리를 듣고는, 말하길 “참으로 영특한 인물이로다!”라 하였다.

환온의 아버지 환이(桓彛)는 소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소준의 부하인 한황에게 살해당했다. 환온은 이를 분하고 슬프게 여겨, 창을 베고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3년 뒤 환이를 살해한 일파 중 한 명인 강령 강파(江播)가 죽자, 자식들인 강표(江彪) 3형제가 상을 치르며, 지팡이 안에 칼을 숨겨, 환온을 대비했다. 환온이 조문객이라 속이며, 나아가, 집안에서 강표를 죽이곤, 아울러 두 동생을 쫓아가 죽여서, 당시 사람들이 칭찬했다.

환온은 호탕하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자태도 매우 훌륭했다. 젊은 시절 패국의 유담(劉惔)과 친했는데, 유담이 이전부터 일컫길 “환온의 눈은 자주빛 석릉(石棱) 같고, 수염은 고슴도치의 털이 빳빳하게 선 듯하니, 손중모(孫仲謀), 진선왕(晉宣王)에 버금간다.”라 하였다. 명제 사마소의 장녀 남강장공주[1]에게 장가들어 부마도위가 되어, 낭야태수로 임명됐다가, 점차 승진해 서주자사가 됐다.

환온은 유익(庾翼)과 사이가 좋았는데, 항상 서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할 일을 기약했다. 유익이 동진 성제에게 일찍이 환온을 천거하며 말하길 “환온은 어려서부터 웅략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를 대하거나, 평범한 사위로 그를 아끼지 마시고, 마땅히 방숙(方叔)과 소호(召虎)[2] 의 임무를 맡겨, 간난을 구제할 공적을 위탁하십시오.”라 하였다. 유익이 죽고 나서, 환온은 도독형양사주제군사, 안서장군, 형주자사, 영호남만교위, 가절로 임명되었다.

목제(穆帝) 사마담 영화 2년(347년), 안서장군이 된 환온은 성한이 내분으로 인해서 지리멸렬해지자, 서벌을 상주하였는데 조정에선 촉이 멀고 험하고, 환온의 병사도 너무 적었기에 적의 근거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매우 근심하였다. 어명을 받고 촉을 토벌하기 위해 행군했다. 환온은 우선 참군 주초(周楚), 손성(孫盛)에게 명해 치중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보병을 거느리고 바로 성도를 목표로 진군했다. 놀란 성한의 황제 이세가 그의 숙부 이복(李福)과 종형 이권(李權) 등에게 팽모를 공격, 중간에서 환온군을 영격하게 하나, 주초 등이 결사적으로 이를 막아 격퇴했다. 환온 또한 이권 등을 공격해, 세 번 싸워 적을 대파하여 성한군은 성도로 패주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이세가 친정하여 전군으로 환온과 작교(笮橋)에서 맞붙으니, 초기에는 환온이 불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군 공호(龔護)가 전사하고, 환온이 탄 말이 화살에 맞았다. 환온은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북 치는 병사가 이를 잘못 알아듣고 전진하는 북을 세차게 울렸다. 그러자 삼군이 일제히 앞으로 맹돌격을 했다. 환온의 공세가 이렇게 맹렬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이세는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가맹관(葭萌關)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나중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했다. 환온의 대군은 기세 당당하게 성도로 들어갔고, 이렇게 해서 성한 왕조는 멸망했다. 돌아오는 길에 왕서, 등정, 외문 등이 반란을 일으켜, 환온은 다시 이를 쳐 평정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환온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승격되었으며 임하군공(臨賀郡公)으로 책봉되었다. 그렇게 해서 환온의 이름은 조정과 민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환온은 군을 거느리고 북정하길 원해, 먼저 상소하여 조정에서 수륙의 적합함을 논하길 청했으나, 나이도 젊고 서부군단의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무창(武昌)을 중심으로 은거하며 사실상 형주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환온을 조정에서는 매우 경계하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회답이 없었다. 당시에 조정이 은호(殷浩)[3] 등에게 의지하여 자신을 견제하는 것을 알았기에, 환온은 몹시 성냈으나, 원래 은호를 알고 있어서, 그를 꺼리지는 않았다. 마침내 북벌을 선언하며, 표를 상주하고, 무창(武昌)에서 군을 일으켰는데 병력이 4, 5만에 이르렀다. 간문제(簡文帝)가 당시 무군장군이었는데, 환온에게 글을 써서 사직의 대계를 밝히며, 군을 일으킨 연유를 물었다. 이에 환온이 곧 회군하여 진에 돌아간 뒤, 상소하길

{{|신이 근래에 친히 군을 거느린 것은, 북으로 가 조(後趙), 위(冉魏)를 멸망시키길 원했기 때문에, 군을 무창에 머무르게 했는데, 무군대장군,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의 글을 받아 보니, 세상이 어지럽고 떠들썩하여, 망령되이 의혹이 생겨났고, 그 말과 뜻이 위급하여, 근심이 사직에까지 이르렀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살피니 깜짝 놀랐으나, 연유도 이해할 수 없는데도,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돌아보며, 죽어도 의탁할 땅이 없었습니다. 신이 미미하고 드러나지 않는데도, 황송하게도 중임을 짊어졌기에, 비록 재주가 그에 걸맞는 사람은 아니지만, 직분은 난을 평정함에 있습니다. 원수가 불멸하여, 국치를 아직 씻지 못했으나, 다행히 개태(開泰)의 때로 인해, 우연히 틈탈 기회를 만나게 됐으니, 필부도 뜻이 있어, 오히려 분개함을 품는데, 신 또한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앉아서 폐단을 바라만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을 메고 말을 몰아, 편안히 머무를 여유도 없이, 전후로 표진(表陳)한 것이, 지금까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성심으로 태연하며, 공사로 깨끗하였는데, 무슨 사소한 것이 있었기에, 이러한 혐기(嫌忌)를 용납하셨습니까? 어찌 올바름을 꺼리는 무리들이 속으로 두려움을 품고, 조롱하며 헛된 말을 한 것에, 혹해 조정에서 받아들이신 겁니까?
과거 악의가 정성을 다했으나, 눈물을 흘리며 달아났고, 곽광이 충성을 다했으나, 상관(上官)은 변을 고했습니다. 참언이 행적을 병들게 하고, 간사한 이가 덕을 어지럽힘이, 역대에 항상 있던 근심거리로, 존망(存亡)의 연유입니다. 지금 주상께선 양추(陽秋)가 많으시고, 폐하께선 성스럽고 깨끗함으로 조정에 임하시니, 삼가 위임하시며, 군하(群下)에 책임을 지우시고, 바야흐로 재능있는 이들에게 회통(會通)함을 맡겨, 덕과 믿음을 먼 변방까지 베푸셨습니다. 때마침 신이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어, 3대를 복종하며 섬겼으니, 신분은 타관살이하는 손님이 아니고, 행적은 한신팽월의 허물도 없었으나, 반간(反間)이 흉심(胸心)에서 일어나, 함께 어지럽힘이 4국을 지나게 됐으니, 이가 옛 현인이 이전에 탄식한 까닭이며, 신 또한 올해에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구적(寇賊)이 쇠하여, 대사가 거의 정해졌고, 이 잃어버린 백성들이 고니가 선 듯이 남쪽을 바라며, 의로움에 힘쓰는 이들도 분개하고 한탄함이 곧 드러났기에, 원흉의 명운이 누각에 동떨어져 있는데도, 엉뚱한 의논이 망령되이 생겨나, 이로 인해 작은 허물을 큰 죄로 만들며, 거의 망해가던 도적이 다시 숨통이 트이게 했으니, 기세를 끊은 것에 상심하여, 슬퍼하고 개탄함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이 설사 공공을 위함을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나, 밖의 근심이 아직 그치지 않고, 안의 폐단이 서로 흥하더라도, 신의 본심은 힘을 바치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황제가 위로하며 태위(太尉)를 겸직하게 하였으나, 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당시 은호가 낙양(洛陽)에 이르러 원릉(園陵)[4]을 수복하며, 여러 일을 겪은 지 수 년이었는데, 잠시 전국새를 찾고[5] 하남을 수복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하남 지역의 군벌들과 교착 상태에 빠지다가, 결국 북벌에 나섰던 은호의 북부군은 선봉으로 나선 강족의 수장인 요양(姚襄)이 배신을 함으로써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물자와 병장기가 바닥나고, 조야가 모두 그를 원망하자 환온이 조야의 원망에 의거해 은호를 폐할 것을 아뢰니, 견제할 세력이 사라진 환온은 이로부터 내외의 대권을 모두 쥐게 되었다.

드디어 내부의 견제 세력을 물리치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환온은 마침내 보기 4만을 이끌고 요양(姚襄)을 정벌하기 위해서 강릉에서 출발했다. 수군은 장강을 따라 북진하여 양양에서 균구(均口)로 들어가, 남향(南鄉)에 이르렀고, 보병은 석천(淅川)에서부터 관중(關中)을 정벌하며, 양주자사 사마훈(司馬勳)은 자오도에서 나오게 명했다.[6] 별동대가 상락(上洛)을 공격해, 부건(苻健)의 형주자사 곽경(郭敬)을 사로잡았고, 청니(青泥)로 진격해 적병을 격파했다. 부건 또한 아들 부생(苻生), 동생 부웅(苻雄)에게 수만으로 요류(嶢柳), 수사퇴(愁思槌)에서 환온을 막게 하여, 격전이 벌어졌는데 부생이 직접 진을 함락시키며 환온의 장수 응탄(應誕), 유홍(劉泓)을 죽이고, 수 천을 참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환온군이 전력을 다해 싸우자 대적하지 못하고 부생군은 곧 달아났다. 부웅 또한 장군 환충(桓沖)[7]과 백록원(白鹿原)에서 싸우나, 역시 환충에게 격파당했다. 부웅이 마침내 진군하여 사마훈을 공격하자, 사마훈은 물러나 여왜보(女媧堡)에 머물렀다. 환온 또한 나아가 패상(霸上)에 이르니, 부건은 물러나 5천으로 도랑을 깊이 파고 굳게 지킬 뿐이었다. 이에 거주민은 모두 편안히 지내며 다시 일에 종사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길에서 환온을 맞이하는 이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고, 노인들은 감격해서 울며 말하길 “오늘날 다시 관군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라 하였다.

이렇게 앞을 막는 군벌들을 하나씩 격파해가며 기세를 올리던 환온이지만,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고질적인, 그로부터 몇 대 전의 제갈량조차 해결하지 못한 보급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애초에 환온은 그가 진격할 때쯤 보리가 익을 거라 믿고 이를 거두어서 군량으로 삼을 생각이었으나 이를 간파한 부건이 모를 베고, 불을 질러서 들판을 비우는 청야 전술을 펼쳤기에 현지 조달이 어려워진 환온군은 군량이 부족해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군량은 부족해서 사기가 날로 떨어지는데, 적은 거세게 저항하니 결국 결단을 내린 환온은 관중의 백성 3천여 호를 이끌고 회군을 결정한다.[8]

환온은 배게를 어루만지며 황제가 될 야망을 꿈꿧다. 폐제 사마혁게이로 몰아 폐위시키고 나이 많은 간문제 사마욱을 옹립했다. 이미 어느 정도 명망이 있었기에 간문제로부터 선양을 받으려고 했으나, 간문제는 환온의 야심을 간파하고 불안해하다가 급사해 버렸다. 이에 환온은 뒤를 이은 효무제 사마요에게 구석을 요구하는 등 대놓고 찬탈을 꿈꿨지만 조정 중신들이 버티는 사이에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환온의 아들 형주자사 환현은 결국 효무제의 아들 안제 사마덕종에게 선양받아 초(礎)나라 황제가 되어 환온의 유지를 이었으나, 불과 3개월 만에 유유에게 반격받아 결국 피살되고 만다.

여담이지만 환온은 고평릉 사변사마의와 맞서다가 멸족당한 대사농 환범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환범 항목 참조.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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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름은 사마흥남이다.
  • [2] 주(周) 선왕(宣王) 때 현신(賢臣)들로 형만(荊蠻)을 평정함.
  • [3] 동진 진군(陳郡) 장평(長平) 사람. 일찍부터 명성이 있었으며, 양주자사, 건무장군 등을 역임하면서 강력한 북부군단을 배경으로 동진 조정의 실력자인 회계왕 사마욱(훗날의 간문제(簡文帝))과 손을 잡고 환온을 견제했다.
  • [4] 능원(陵園), 즉 황제의 묘소
  • [5] 염위의 이 포위된 기회를 틈타 업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상환 받은 것이다.
  • [6] 위연의 자오곡 계책과 유사하다!
  • [7] 환온의 동생으로, 그가 죽은 뒤 서부군단의 대권을 물려받는다.
  • [8] 참고로 이 때 환온은 훗날 전진의 부견을 보필하는 명재상 왕맹을 만났으나, 회군 때 왕맹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한 환온의 부탁을 왕맹이 거절하게 됨으로써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