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悠仁(ひさひ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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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7일, 국립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부속 소학교 입학식 날.

Contents

  1. 개요
  2. 탄생과 그 여파
  3. 이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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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일본의 황손.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비의 아들. 형제로는 15살 위의 큰누나 마코공주와, 12살 위의 작은누나 카코공주가 있다.

아키히토 덴노의 하나뿐인 손자로, 현재 그의 일본 황위 계승 순위는 3위. 황실로부터 받은 문양은 금송(金松). 언론에선 주로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秋篠宮悠仁) 친왕(親王)으로 불린다[1].

후미히토가 태어난 지 40년 만에 태어난 남성 황족이기 때문에, 태어난 직후부터 황태손 예우를 받고 있다. 일본황실 최초로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전치태반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주팔자를 맞추기 위함이라는 소문도 있다. 또한 이 출산은 **일본 황실 사상 최고령 출산**이기도 하다(히사히토 친왕의 어머니인 키코비는 1966년생). 키코비에게는 여러 모로 힘들었던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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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기 얼마 전, 키코비히사히토 친왕을 임신하고 있을 때의 아키시노노미야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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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7일자로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부속 초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 유치원에 이어 진학한 것으로, 또 다시 가쿠슈인이 외면 받게 된 일이 화제가 되고 있다.[2]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비는 아들의 진학에 대해 **"또래 아이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위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키코 비가 오차노미즈 여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던 인연도 있고.

그의 탄생은 일본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2001년 마사코 황태자비가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임신에 성공하여 일본 전체가 흥분에 빠졌지만, 아들이 아니라 딸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태어났다. 마사코 황태자비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더 이상 아이를 낳는 건 힘들고, 당시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비 부부에게도 2명만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는 2006년 9월 6일까지 일본황실은 말 그대로 패닉에 빠져서 대책을 논의했다.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방계 궁가에서도 단 1명의 적장자도 나오지 않자,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가 된 이후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해진 것이다.[3]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을 제외한 다른 황위 계승권자들[4]은 대부분 나루히토 황태자가 재위할 시기에 사망하거나 살아남아도 다카히토 친왕처럼 90세가 넘는 노령일 것이 뻔했기 때문에 2006년까지 일본 정부는 미래 황위 세습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대책을 찾는 과정에서 2012년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여계 황족의 덴노 계승문제와 구 황족의 복귀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6년 초에 키코 비의 셋째 임신이 알려지고, 다음해 9월 40년 만의 남자 황손이 탄생한다.[5]

히사히토는 아버지 후미히토가 태어난 지 40년 만에 태어난 남성 황족이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히사히토에게 몹시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며, 심지어 두 누나 마코공주카코공주는 찬밥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후미히토의 지지파가 히사히토가 태어나고 더 늘었을 상황이고, 히사히토는 죽기 전에 반드시 덴노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운 좋게 태어난 거지일본 열도에 엄청난 관심이 쏠려 있다. 그만큼 히사히토 탄생의 여파가 크고 영향력이 세질 수밖에 없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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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탄생과 그 여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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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히토 친왕의 어머니 키코 비.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으로, 당시 심각하게 논의하던 구 황족 복귀나 황실전범의 개정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특히 2000년대 초반부터 구 황족들의 모임인 국영친목회(菊榮親睦會)[6]는 당시 일어나던 여계 황위 계승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은근히 황족 복귀의 희망을 바랐는데,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으로 묻혀버렸다. 특히 가장 활발하던 구 다케다 궁가는 노골적으로 "현 덴노가가 끊어지면 구 황족들은 사명을 다해야 한다."라는 주장까지 했다. 그러나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이 모든 논란을 잠재우는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황실 내부의 권력구도도 크게 달라졌는데,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전까지만 해도 차남이라 존재감이 미미하던 후미히토 친왕이 아들을 등에 업고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특히 2008년 이후 아키히토 덴노의 건강 악화로 황실 안이 혼란스러워 지자, 히사히토 친왕의 아버지이자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후미히토 친왕의 입장은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붙이기에 충분했다. 마사코 황태자비아이코 공주를 낳은 뒤부터 덴노 부부에게 노골적으로 천대받기 시작, 다시 임신해서 이번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까닭으로 유폐생활을 겪었고, 이로 인한 우울증으로 9년간 대부분의 공무에서 배제된 적이 있다. 이 일로 황태자 부부와 덴노 부부의 사이는 꽤 멀어졌지만, 차남 부부는 황태자 부부보다 책임이 작아서 인지 예전부터 덴노 부부와 친했다. 여기에 차남 부부가 아들을 낳아 후계자 문제를 풀었으므로, 당연히 차남 부부에 대한 총애가 더 심해졌다.

이렇게 입김이 세 지자 후미히토 친왕은 2011년 말부터 아버지를 위해서라며 '덴노 정년제' 주장을 한다거나, 형님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붙이는 발언을 자주 꺼낸다[7]. 덕분에 현 아키히토 덴노 사망 뒤 일본판 왕자의난이 일어나나 하는 주장도 조금씩 일어난다. 이대로 나루히토 황태자가 적장자를 낳지 못하면,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로 즉위한 뒤에는 후미히토 친왕이 계승 1순위(황태제)가 되기 때문이다.

끝내 2013년 3월, 황실을 위해서 [나루히토 황태자가 퇴위하라](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 newsview?newsid=20130325101912692)는 주장이 나왔다. 명목상 개인의 의견이라지만 일본에서 황실과 관련해 어떤 분위기인지 알면 이게 절대로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의 53세 생일 기념 공식사진 촬영 때 마사코 황태자비아이코 공주가 함께 사진을 못 찍는 초유의 사태까지 났다. 그래서 황태자 일가의 입지가 위태로운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지만, 정당한 계승자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 당한다는 것은 전제왕조 시대에도 없던 일이고, 단순히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한다는 건 일본 내에서의 국민감정이나 외국의 시선을 악화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에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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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후미히토 친왕, 어머니 키코비, 작은누나 카코공주와 함께 이세신궁을 참배하는 히사히토 친왕.

2013년 3월 25일 이세신궁에 참배하는 등, 사실상 왕세손으로 책봉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듯하다. 또한 어머니 키코비는 늦둥이 아들의 교육에 무척 신경 쓰고 있으며, 장차 도쿄대학에 보내려 한다고 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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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지메 ¶

2014년 4월경에 히사히토가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한국에서는 보도된 적이 없지만 다음유럽의 왕실이라는 카페에서[9] '히사히토'를 치면 나오는 기사 중 3개가 이지메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내용인 즉 히사히토의 어머니인 키코 비가 2013년 2학기 말(히사히토가 1학년 때) 학부모 회의에서 "이 교실에 이지메라든가, 따돌림 당하는 어린이가 있는 듯합니다 만,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는 요지의 발언을 해 학부모들이 동요했고 그 다음에는 담임을 따로 만나 "히사히토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만, 제대로 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항의까지 했다는 것. 또 그 학부모 회의가 있은 후 PTA 활동으로 학교에 온 키코비가 다시 담임을 만나 험악한 표정으로 "제대로 대응해 주십시오."라고 몇 번이나 항의를 했다고 한다. 같이 있던 학부모들이 다 놀랐다고.

기사에 나온 설명을 보면 이지메의 형태는 사촌누나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당한 경우처럼 폭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울리지 못하는, 이른바 **은따**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에서는 히사히토 친왕의 담임교사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린 상태이다. 아래는 그 번역본.

기자: 히사히토가 이지메를 당하는 것 같습니다만?
담임교사: ('히사히토'라는 낱말을 듣는 도중에 표정을 흐리며) "그런 얘기는 학교 쪽에서 하지 않도록 단단히 얘기를 들어서… 미안합니다."
기자: 키코 비가 학부모회 등에서 선생님한테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만?
담임교사: …

질문에 부정하는 일은 없었다. 학교 측에 취재를 신청했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파악해 두지 않았고, 개개 아동의 일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용서해 주십시오."(오차노미즈 여자대학 홍보팀)

현재까지 궁내청에서 히사히토의 이지메 문제에 대해 아이코공주의 때처럼 공개적으로 대책마련을 촉구한 적은 없다. 그래서 현재는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히사히토가 제 아무리 황위계승서열 3위의 귀한 아들이라 해도 일반 학부모들 입장에서는 깊게 관계하고 싶지 않은 존재인 것은 맞다 는 것. 특히 또래의 을 둔 부모 입장에서는… 드라마와 현실은 다른 법.

기사에 따르면 히사히토는 또래들보다 몸집이 작고[10] 침착한 성격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차 차기 덴노 즉위가 기정사실화되어 있고 황족인 만큼 아이코 공주 못지않은 억압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어마어마한 기대와 부담감이 한 몸에 집중되어 있는 히사히토이니 만큼, 키코비의 과민반응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다.[11]

그리고 사실 일본 황족이 학창시절에 이지메를 당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황실을 떠받드는 일본 사회의 특성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실제로 현 아키히토 덴노의 딸이자 히사히토 친왕의 고모구로다사야코도 그렇고, 사촌누나인 아이코 공주도 학교(가쿠슈인)에서 이지메를 당한 적이 있다. 또한 다른 황족들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로다사야코의 경우는 학우들로부터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라면서 폭언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다른 남성 황족도 비슷한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는 것도 그렇고, 히사히토 친왕도 이런 경우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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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이는 잘못된 것으로, 친왕가를 이을 아들에겐 若宮(와카미야)라는 칭호가 붙는다. 따라서 제대로 부르려면 秋篠若宮(아키시노노와카미야)가 된다.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寛仁親王)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미카사노미야라고 부른 것에 대해 항의를 한 적이 있어서, 일본 내에서 이 문제는 잘 알려진 편.
  • [2] 큰누나 마코 공주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자대학이 아닌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에 진학하는 등, 근래 몇 년 사이 전통을 깨고 다른 교육기관을 택하는 황족들이 나타나고 있다.
  • [3] 현재 황실에서 제위계승권이 있는 사람은 겨우 6명에 불과하다. 자세한 것은 헤이세이/가족관계 참조.
  • [4]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형제들과 숙부. 아키히토 덴노의 막내 숙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경우 이미 나이가 99세이다. 그의 장남 토모히토 친왕, 차남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3남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리고 아무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 [5] 사실 이 임신 자체가 궁내청과 덴노 내외의 거의 강요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한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이를 더 가지지 못한 채 40대를 넘겼고 몸이 아파 임신이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키코 비의 경우 아직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였다. 이 때문에 덴노 부부가 차남 부부에게 엄청난 강요를 했다고. 일설에 일본 황실에 아들이 태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이 조선에 했던 만행과 그로 인해 산 원한 탓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후미히토 내외가 몰래 방한해 한국에서 몇 번이나 제사를 지내고 갔다는 소문도 있다. 히사히토 친왕도 인공 수정으로 태어났다는 설이 있는데, 사주를 보면 실제로 그런 기미가 크게 나타난다고 한다. 심지어 사주 좀 볼 줄 아는 사람이 쓴 글에 의하면, "짜 맞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고.
  • [6] 쇼와 덴노가 1947년 신적강하 이후 신적 강하된 구 황족들을 위해 만들어준 단체. 직 황계와 11궁가의 당주 모임을 결성했고, 매년 각 궁가가 모여 신년이나 연말에 행사나 모임을 가지며, 2000년대 이후 구황실 관련 의견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 [7] 일본 황족은 가문이나 정치 관련으로 언론에 입 조심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니 이 말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후미히토 친왕의 궁내 권력이 얼마나 커졌나를 알 수 있다. 예전부터 후미히토 친왕은 효자라는 평을 받았고, 그의 발언 대부분이 부모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닌 편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극우주의자들과 가깝다는 등 부정적인 이야기도 있어서, 일본에서는 딱히 나루히토 황태자의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이 상황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
  • [8] 최근 도쿄대학에서 추천입학 전형을 도입하려 검토 중이라는데, 이게 장래 히사히토 친왕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 [9] 세계 각국의 왕실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보도된 기사뿐만 아니라 현지 기사를 직접 번역해 올려주고 출처와 주소까지 적어 주기 때문에 신빙성이 매우 높다.
  • [10] 이는 남자여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제 아비가 왕실에서 최장신이니 나중에는 키가 클 듯.
  • [11] 또한 키코 비는 어린 시절 중 6년여 가량을 외국에서 보낸 귀국자녀라는 것도 감안해볼 필요가 있다. 1살 때부터 약 6년여 간 외국 생활을 했으며, 학창시절 중간에도 외국 생활을 했다. 키코 비 항목 참고. 비록 마코 공주카코 공주는 학창 시절에 왕따 문제는 없었으나, 둘 다 성적이 참 그렇고(…), 대학 입학의 정당성에 해대서도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을 보면, 꼭 성적이 자식교육의 척도는 아니지만 키코 비의 자녀교육이 그렇게 좋다고 보기는 힘든 듯. 단적으로 비교해서 아이코 공주의 경우 등교거부를 하기 전까지 개별적으로 항의하는 경우도 없었고(물론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가 여러 사정으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며칠간 함께 등하교를 함께 하고 수업을 참관하며 해결했다. 훨씬 보기 좋은 해결책. 아이코 공주 왕따 사건의 배후로 키코 비가 지목됐던 건 둘째로 치자 더군다나 이런 저런 루머와 왕따에 시달리면서도 네티즌들을 입 다물게 만든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은 마사코 황태자비가 애쓴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