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생애
2.1.1. 촉 귀순 이전
2.1.2. 촉으로 귀순
2.1.3. 촉 귀순 & 제갈량 시대 (228년 ~ 234년)
2.1.4. 장완 시대 (235년 ~ 246년)
2.1.5. 비의 시대 (246년 ~ 253년)
2.1.6. 진지 & 강유 시대 (253년 ~ 258년)
2.1.7. 유선 및 황호 시대(…) (258년 ~ 263년)
2.1.8. 촉의 멸망 및 직후 (263년 및 264년)
2.2. 강유가 촉에 남았던 이유
2.3. 강유에 대한 과거의 평가
2.4. 강유에 대한 현대의 평가
2.5. 기타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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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상반된 특성인 "굳셈"과 "부드러움"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상당히 문어적인 표현이라 일상 생활에서 들을 일은 거의 없는 단어이지만, 문학 작품에서는 꽤 괜찮은 의미의 말로 가끔 쓰인다. 외유내강/외강내유란 말을 생각해 보자.
예문: "강유를 겸비한 사람", "강유가 적절히 배합된 일 처리"
2000년대 중후반을 풍미한 두 예능MC과 유재석과 강호동의 성 또한 강과 유이다. 따라서 두 사람을 이야기 할때 유강 혹은 강유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재밌게도 두 사람의 진행 스타일이 강과 유로 대변된다. 강호동이 강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통해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가는 반면 유재석은 부드럽게 프로그램을 조율해 나가는 편이다. 물론 전반적인 스타일이 그렇다는 말이고 두사람 모두 톱 클래스의 MC이기 때문에 부드러움과 강함을 잘 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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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에 그려진 강유의 초상화
姜維
후한 말,
삼국시대
위, 촉의 장수. 촉한의 마지막
희망[1]
자는 백약(伯約). 생몰년도 202 ~ 264년. 천수군 기현 사람이다.
제갈량 사후
삼국지연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물.[2]
제갈량으로부터
"마량 이상의 재능의 소유자, 양주 최고의 인물"이라 절찬을 받았다. 위나라 출신의
항장 출신이나 촉의 대장군까지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30년 동안의 나홀로 북벌로도 유명하다. 이를 제갈량의 육출기산(六出祁山)과 대비하여 구벌중원(九伐中原)이라 하기도
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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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강인과의 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 강경은 강인의 침입 때 태수를 보호하려다 전사하였고, 덕택에 강유가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 받아 군에서 중랑으로 임명되었다. 강유의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시기 중(대략 206년 - 217년 무렵) 이 정도로 강인들이 침입했던 사건은 213년 마초가 강인들과 연합, 조조를 공격했을 때 외에는 기록된 사건이 없다. 만약 이 당시 강경이 기현 태수를 보호하려다 전사했다면, 마초 연합군에 의해 강유의 부친이 죽은 셈이다. 다만 이 외에도 다른 종류의 강인들의 기현 침입이 대대적으로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니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참고로 최훈의 삼국전투기 중 기 전투(2)가 이 설에 근거하여 그려졌다.
이 무렵의 강유에 대해 정사는 "維為人好立功名,陰養死士,不脩布衣之業"라 기록하고 있는데, 대강 해석을 해보면 "강유는 입신 양명에 관심이 있어, 은밀히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병사들을 키우고, 평범한 일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다. 강유가 나이는 어려도 나름대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 특히 무관계열에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다만 완전히 무관일만 한 것은 아닌 듯 한데, 주의 종사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상계연으로 일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종사는 주에 새로운 자사 등이 임명되었을 때, 각 군현의 인물들을 현지 정보 입수 차원에서 채용할 때 주어지는 자리였으며, 상계연은 중앙 정부에 해당 지역의 인구 및 특산물의 통계를 내어 중앙 정부에 보고하는 직책이다. 이 일은 문관 계통이니 중랑, 즉 무관 계통이었던 강유가 문관 계통으로 일을 바뀌었거나 능력이 뛰어나 양 쪽을 겸업했을 수도 있다.
여담으로 이 무렵 옹주자사대리는 곽회로, 강유가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때 그는 곽회의 부하였다. 이후 강유의 북벌 당시 강유와 곽회가 지겹도록 서로를 적으로 대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둘의 운명도 꽤나 얄궂은 듯. 더불어 촉의 제갈량의 위나라 1차 침입 당시 곽회는 기현에서 상규로의 후퇴를 감행하여 강유가 촉에 투항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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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1차 북벌당시 촉에 귀순하였다.
귀순 과정이 삼국지 정사(이하 정사)와 삼국지연의(이하 연의) 사이에 상이하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의 계책을 두 번이나 간파한 강유에게 감탄하여 계략으로써 강유를 갈 곳 없게 만든 후에 항복시켰다고 나온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제갈량이 계책을 써서 안정군 태수인 최량을 죽인 이후 같은 방법으로 천수군 태수인 마준을 죽이려 했는데, 이 때 강유가 그 계책을 꿰뚫어봐서 마준이 말려들지 않게 했고 이를 역이용하여 조운을 끌어들인 뒤 물리쳤다. 이후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계책을 펼쳤지만 강유가 직접 조운과 일기토를 벌인 뒤 쫓아버렸다. 이에 조운도 그의 창 솜씨에 감탄하는 한편 제갈량 역시 "군사란 많다고 좋은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김홍신 평역판)."란 말을 하며 군사를 물렸다.
이후 강유가 효심이 깊다는 것을 이용, 기현을 공격하여 강유를 그 안에 묶어놓았고 다른 곳들 역시 그렇게 고립시켰다. 한편 붙잡았던 하후무를 풀어주되 그가 가는 길에 난민으로 위장한 촉군과 마주치게 하여 강유가 촉에 항복했다는 소문을 뿌렸다. 또한 하후무가 들어간 기성을 공격하되 강유와 비슷한 사람을 앞세워서 진짜 강유가 항복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한편 갇혀 있는 터라 군량이 부족해진 강유에게 일부러 허술하게 무장한 군량 수송대를 보여줘서 강유를 성 밖으로 끌어내고 성을 점령한 뒤 다른 곳으로 도망가게 했다. 하지만 마준은 물론 양건도 강유가 항복했다고 여기고 쫓아냈다. 이에 강유가 홀로 장안을 향해 달리자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포위한 뒤, "그 정도까지 위나라에 수고를 보였으니 이제 항복해도 수치스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결국 제갈량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제갈량은 항복한 강유에게 "이제서야 나의 지식을 물려줄 사람을 찾았다"라고 말한다.
다만 위의 내용은 정사엔 없다. 즉, 연의 버프로 아마도 제갈량 사후 촉을 책임질 핵심 인물이기에 제갈량의 지략과 조운의 무력을 겸비한 인물로 포장된 듯 하다. 정사에서는 천수 주변 고을들이 촉군에게 호응한다는 소식을 접한 천수태수 마준이 강유를 의심하고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한 탓에 강유는 갈 곳이 없어 항복했다고 적고 있다.
강유가 귀순한 이후 위에 있던 강유의 부모형제는 위 조정으로부터 강유를 다시 귀순시키라는 압력을 받은 듯하다. 위나라 법은 투항자의 가족에게 매우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다. 강유의 어머니는 당귀를 강유에게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당귀는 한약의 약재로서 當歸(마땅할 당에 돌아올 귀자)이다. 이에 숨겨진 말뜻은 '조국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느냐, 얘야.'라는 정도. 즉, 강유에게 위나라로 오라고 하는 메세지.
답신으로 강유는 "100경의 밭에 1무도 없는데 당귀는 없고 원지만 무성하다."라 적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좀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내용의 시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良田百頃 /양전백경 /liáng tián bǎi qǐng / 좋은 밭이 백경이 있으나
不在一畝 /부재일무 /bú zài yì mǔ/ 일 무도 남은 바 없으니
但有遠志 /단유원지 /dàn yǒu yuǎnzhì / 원지는 있으되
不在當歸 /부재당귀 /bú zài dāngguī / 당귀는 없나이다.
(손성의 잡기, 정사 강유전에 주석으로 재수록)
저 글 중 원지는 당귀와 마찬가지로 한약의 약재이다. 글자는 遠志, 멀 원 자에 뜻 지 자를 쓴다. 숨겨진 뜻은 원대한 뜻. 강유가 그 뜻이 무엇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자신의 원대한 뜻(遠志)은 촉에 있지 위에 있지 않으며 그렇기에 당연히 돌아가는 일은(當歸)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인 것이다. 덕택에 강유의 위나라 가족들은 강유가 죽기 전까지 사면받을 수 없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A%B0%95%EC%9C%A0?action=edit§ ion=6)]
촉으로 귀순한 강유는 봉의장군 당양후 창조연에 임명된다. 봉의장군에서 봉의(奉義)는 옳은 것을 받들었다는 뜻으로서 한 때 이엄이 맡았던 자리이다. 당양후에서의 당양은 장판파가 있는 당양. 유선이 살아난 그 당양 맞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창조연이라는 관직은 태부 소속의 관직으로 창조연이 양곡 창고 관리인 점을 고려한다면, 북벌군의 군량 보급 쪽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촉에 귀순한 직후 강유는 문관 쪽에서도 일한 듯.
이 부분에 대하여 제갈량이 군량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은 유명하니 강유가 제갈량으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강유가
위나라에서 하던 일인 상계연 역시 중앙 정부에 인구 및 특산물을 통계하여 보고하는 자리이다. 즉, 창조연이나 상계연이나 군량 보급 못지 않게
통계처리가 필요한 직책이니 창조연은 촉에 적응해야 하는 강유에게는 비교적 익숙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촉에 새로온 강유에게
제갈량이 예전에 하던 일과 비슷한 역할을 주었다라는 쪽이 보다 타당한 해석일지도. 물론 촉이 익주 하나라고는 하나 국가이고 양주는 한 주이니
수행하는 업무는 같다고 해도 품계로만 따지면 촉의 창조연이 위의 양주 상계연 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4]
촉 귀순 후 한동안 문관일을 하던 강유는 23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무관임무를 맡게 된다. 230년, 이 해에 촉 장군직의 대대적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강유는 정서장군으로 임명된다. 이무렵 위연이 정서대장군에 임명된다. 제갈량 사후 정서장군이 대위 전선을 맡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무렵부터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정서대장군인 위연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직속 부대를 이끌고 단독 작전에 임했다기보다는 다른 장수들의 보조 역할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혹은 정서대장군이자 한중독이었던 위연이 양주로 원정을 나갔을 동안 정서장군 강유가 한중의 수비를 맡았을 수도 있다.
강유의 이름이 단독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무렵으로 사마의의 건벽거수에 대하여 제갈량과 문답한 내용이 정사 제갈량전에 남아있다. 또한 제갈량 사후 위연이 후퇴를 거부하자 제갈량의 유지에 따라 양의와 더불어 전군 후퇴를 지휘한 기록이 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A%B0%95%EC%9C%A0?action=edit§ ion=7)]
234년, 제갈량 사후 장완이 촉의 대장군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235년부터 238년 무렵까지 대사마직을 겸하면서 한중에 머문다. 이 때 강유가 감군 겸 사마가 되어 장완을 수행하며 장완과 235년 - 237년까지 한중에 머문 듯 하다.
그리고 강유는 238년 이후부터, 양주 서쪽을 침입,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다만 247년 이후, 강유와 강족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나름 협력관계였던 듯. 이 무렵 위나라 옹주 자사 곽회 역시 강족과의 회유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정사 곽회전), 강유의 작업은 촉 편을 드는 강족의 숫자를 늘리는 동시에 위나라 쪽 강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무튼 238년 무렵부터 강유는 본격적으로 사령관 역할을 맡는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장완은 한중이 아닌 부현으로 이동, 북벌을 준비한다. 이른바 그 유명한 상용급습작전.
장완전에는 상용급습작전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설명되어있지만 내용을 요약하자면 양주에 있던 강유가 선봉으로서 한중을 거친 뒤 형주의 상용을 급습한다 & 강유가 상용을 점령한 뒤 이 지역을 방어하는 동안 장완이 부현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용을 최종 점령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전 자체는 장완의 병으로 인해 흐지부지된다. 더불어 이 와중에 강유는 양주 자사로 임명된다. 이후 243년, 위의 조상이 10만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침입했을 때 왕평이 흥세산에서 조상을 발라버리는 동안 장완 대신 비의가 총사령관에 임명, 본대를 이끌고 조상을 전멸시킨다(정사 왕평전). 강유전이나 기타 다른 사람들의 열전에는 강유의 참전 여부에는 침묵하고 있는데, 강유의 위치로 보나(부현 혹은 답중), 강유의 지위로 보나(양주자사), 강유 역시 이 전쟁에는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246년, 장완이 사망하고 비의가 장완의 대장군 지위를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녹상서사이자 익주자사로서 재상의 위치에 오른다. 비의가 상대적으로 장완보다 북벌(위나라 침공)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장완이 계획한 상용급습작전은 거의 흐지부지가 되었고, 더불어 북벌은 사실상 강유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되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A%B0%95%EC%9C%A0?action=edit§ ion=8)]
장완이 사망한 이후 강유는 위장군으로 승진한다. 동시에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에 오른다. 시중수상서령이었던 비의의 자리는 동윤이 차례로
맡았으나 1년 뒤 사망, 진지가 물려받는다. 정확히는 비의는 대장군으로서 한중에 주둔하며 성도를 오갔고, 성도에는 진지가 머물게 된다.
덕택에 강유 역시 녹상서사였지만 자연스레 내정에서 멀어진다. 더불어 이 시기는 황제 유선이
친정을 선언한 시기이기도 했으니, 제갈량과 장완 시대보다는 재상의 역할이 약해지기도 했다.유선의 능력이 좆망급이기는 해도
강유가 위장군이 된 직후 247년부터 약 249년까지 양주와 옹주 지역에서 강인들의 발호가 심해지고 옹주 자사였던 곽회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병한다. 강유 역시 이 무렵부터 위나라 군을 타겟으로 하여 양주와 옹주 지방으로 출병하지만 곽회, 하후패, 진태 등애등 에게 막힌다.
정사에 의하면 당시 강유는 본인의 재능과 무력, 풍속의 익숙함, 주변 호족과의 친분관계 등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대의를 가지고 항상
대병력을 이끌고 출병하려고 하였으나, 대장군인 비의는 "승상도 하지못한 일을 우리가 어찌
하겠는가, 내정을 튼튼하게 하고 승상급의 인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정사 강유전)라며 강유가 대병력을 이끌고 출진하는 것을
저지하고 만 명 안팎의 병력만을 내주었다고 한다.[5]
결국 위장군 강유는 대장군 비의의 명령에 따랐으니 그의 총 병력은 최대로 잡아야 1만 명 정도이다. 결국 강인 부족들은 곽회에게 죽거나 곽회의 수중으로 넘어가고(곽회전) 서평 쪽에서 활약했던 치무대의 1만호 정도가 강유에 의해 촉으로 귀순했다(후주전).
강유 입장에서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곽회는 옹주 지역의 행정력 확장에 적극적이었다. 즉, 건벽거수로 일관하던 사마의와는 달리 곽회는 적극적으로 위나라의 행정력 확장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토벌한다. 위나라에 있어서 촉도 토벌 대상이니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249년, 강유는 구안에게 명하여 국산성 부근에 성을 쌓으라 명하였으나 곽회, 진태 등에 의하여 토벌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마의 식의 건벽 거수를 위나라에서 정책으로 삼았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
즉, 이 시기 강유가 적극적으로 북벌을 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강유로서는 강인들과 연합하여 북벌을 하려고 했으나 비의의 만류로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곽회의 적극적 공세에 수성하기에도 바빴던 시절이었다. 양주 서부를 두고 위나라의 행정력을 양주 서부까지 넓히려던 옹주자사 곽회와, 역시 한중으로부터 양주 서부로 북벌 전진기지를 옮기려던 강유가 국지전을 벌이던 시절이라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렇듯 위와 촉이 티격태격하던 시절, 253년, 곽순에 의해 대장군 비의가 암살당한다. 비의의 죽음으로 인해 촉은 다시 한번 정치, 군사적 변화를 겪는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A%B0%95%EC%9C%A0?action=edit§ ion=9)]
대장군 비의가 죽었으나 내정 파트 진지와 군사 파트 강유 중 그 누구도 비의의 자리를 물려받지 못한다. 녹상서사는 강유도 비의가 죽기 전
비의와 함께 맡고 있었으나 강유 자체가 원정 중이었으니 달리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또한 비의의 자리였던 대장군과 익주자사는 그대로
공석이 되었다. 덕택에 내정의 진지와 군정의 강유라는 이원체제로 촉이 운영된다. 문제는 진지가 황호와 친했다는 것(...). 황호가
황제의 뜻을 받드는 동시에 세치혀로 아부하는 내시&천하의 개쌍놈임을 감안한다면 신하의 권력과 황제의
권력이 융합했다고 보아도 좋을텐데, 문제는 유선 자체가 내정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듯 하다. 딱히 문제를 일으킨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치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시기 이후 대사면이 증가하는데(사실상 비의 시절부터 느슨해지긴 했지만) 이 점으로 보아 제갈량 시대의
엄격했던 법치주의가 약해졌을 것이라 추측된다.
문제는 강유가 이 시기에 내정이고 군정이고 신경 쓸 여력이 있었을 지가 의심스러울 상황이었다는 점. 비의가 정월에 사망한 직후 오의
제갈각이 신성으로 출병한다. 비의가 죽기 직전 유선의 명령을 받아 한중에
대장군부를 개설한 후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갔다는 기록을 본다면(비의전), 오와 촉의 연합 공격을 상상할 수 있는 부분. 강유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강유는 오의 출병을 외면할 수 없었던 듯 하다. 해서 강유 역시 출병하여 남안을 포위한다. 그러나 곽회에 이어
옹주자사가 된 진태를 상대하다 오가 신성에서 위나라에게 막히면서 곧바로 퇴각한다.[6]
강유가 북벌 전문으로서 확실하게 전과를 올리기 시작한 때는 254년 출병부터이다. 이 시기의 강유는 적도로 출병하여 대승을 거둔다. 적도현의 장 이간의 밀서를 받은 후 군사를 움직여 양무를 포위하고 이에 대응해 나온 대촉 전담군인 기병대, 정촉호군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의 목을 참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적도현, 하관현, 임조현의 세 현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이 무렵 옹주자사에서 정서장군이 된 진태가 도착하기 전 퇴각하며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이 전투로 인해 촉군의 선봉이었던 탕구장군 장억이 서질과의 교전 중 전사한다.
정촉호군을 전멸시킨 강유는 255년, 다시 한 번 적도로 출병한다. 이 시기 출병에 앞서 강유는 북벌에 대한 반대 여론에 부딪힌다.
반대자들의 대표 주자는 장익인 듯 한데, 장익전에 따르면 강유는 이들과 아가리 배틀을 벌여 발라버렸다. 더불어 반대했던 장익은 강유의 북벌에
종군하게 되었다. 오오 아가리파이터 강유
어쨌든 255년, 강유는 장익까지 끌고 다시 한 번 적도로 갔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야전을 통해 옹주자사 왕경을 격파하여 적군 수만 명을 죽여 사람 잡은 수로만(…) 계산을 하자면 제갈량의 북벌 이상 가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위나라의 패배는 정사 등애전에 따르면 **"옹주 전체가 함락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며 등애는 아예 적도에서 철수하고 기회를 봐서 다시 싸우자고 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진태가 강유군이 보급이 없고 공성 장비도 없어서 공성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진군을 감행하여 강유군의 적도 포위를 풀어버리는 데 성공한다.
다만 적도를 지키던 옹주 자사 왕경이 열흘만 더 늦었다면 옹주가 강유에게 넘어갈 뻔했다니(진태전) 위나라의 피해가 정말 막대했던 듯. 이 해의 전공으로 강유는 위나라 영토의 좀 더 깊숙한 곳, 종제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며 더불어 비의 사후 공석이었던 대장군으로까지 승진한다.
256년 대장군으로 승진한 강유는 당시 보리 수확기였던 여름에 재차 원정에 나서며 한중도독 호제에게 상규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출병한다.
당시 위나라는 강유가 재침하리라 생각을 못했고, 적도에서 강유의 포위망을 푼 진태마저
강유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니 강유의 공격을 절호의 기습이 될 수도 있었으나, 하필 강유의 공격을 예측한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등애였다. 드디어 라이벌전 시작
당시 등애는 안서장군 대리로 임명되어 적도, 농서, 남안 및 기산에 병력을 배치하고
강유와 대치했다.[7]
등애는 앞서말한 네 곳에 군사를 나누어 지키고 종제에 주둔하던 강유는 등애가 기산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남안 쪽으로 진군한다. 남안에 이르기 전 강유는 무성산에서 등애와 접전을 벌이다 무성산을 우회, 위수를 건너 상규로 향한다. 적도, 농서, 무성산, 기산에서 군사를 나누어 방어 중이던 등애는 군사를 거두어 강유를 쫓는데, 강유를 상규로 몰아넣는다 정도가 보다 정확한 표현일 듯.
다만 강유 역시 상규 일대에서 등애와 회전을 시도한 듯 하다. 왜냐하면 호제와의 사전 약속에 의하여 만나기로 한 곳이 상규이기 때문이다.(강유전, 등애전) 256년 전투에서 강유가 택한 루트를 따라가면 상규를 중심으로 강유는 서쪽에서 상규로 접근하고, 호제는 한중을 거쳐 기산 또는 목문도를 따라 상규로 오게 되므로 남에서 북진하여 상규로 진격하게 된다. 강유는 이를 통해 그때까지의 전투 중에 상실한 전력을 보충하고 한중군이라는 적지 않은 규모의 증원군의 힘을 합처 상규로 추격해오는 등애를 격파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호제는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고 결국 강유는 후퇴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로 인해 촉장 20명이 전사하였고 많은 병사들이 강유를 원망하였으며, 강유 본인도 스스로 대장군에서 후장군으로 관직을 낮췄다고 한다.
호제와의 연합 작전이 실패한 이유로는 여러 추측이 있다. 호제가 연공 서열상 위인 강유에게 삐졌다, 호제가 위군에 의해 사전 저지되었다, 호제가 진군해야 하는 루트인 기산-한중이 300km가 넘으며 설사 호제가 강유와의 연합 작전을 위해 전진 배치되어있다 하더라도 대략 촉 경계선부터 기산까지 100km이니 거리 문제도 상당했을 것이고, 더불어 강유가 위치했던 종제와 호제가 위치했던 한중 부근은 무려 600km가 넘어가니 양자간 연락 문제도 연계 작전에 실이 될 지언정 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유의 옹호론자들은 강유는 곧바로 다음해에 장성을 습격한다는 걸 고려하여 강유군의 피해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나, 위에 언급했듯이 촉장 20명이 전사하고 많은 병사들이 강유를 원망했다는 기록을 보아 피해가 적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제갈량전에 따르면 북벌 당시 촉군은 일정 수가 중앙군과 교체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강유는 중앙군과의 로테이션을 통한 병력 보충을 통하여 단곡에서의 상실된 병력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듬해, 위나라의 제갈탄 반란에 맞추어 서둘러 축소된 병력 규모를 감수하고서라도 강유가 이듬해에 북벌에 나섰던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즉, 이듬해에 있었던 강유의 장성 습격이 단곡에서 강유의 피해가 적었다는 주장의 확실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256년, 강유와 등애 두 사람은 상규라는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이 곳에서 어떤 이유로 한중독 호제의 지원을 받지 못한 강유 쪽이 등애에 의해 단곡까지 밀려 대패한 것으로 보인다.
촉의 군사 규모와 강유군의 규모 및 장수의 손실 정도로 보았을 때 강유의 단곡 전투의 패배로 인한 군사적 손실은 결코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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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곡 전투의 결과로 등애는 양주 서쪽 지역의 방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갖출 수 있게 된다. 등애의 방어 시스템은 이후 진나라에서 이용, 강인들을 막는 데 사용할 정도였다.(등애전) 이는 단곡 전투 이후 강유가 등애의 방어 체계 구축을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서 지역에서 강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단곡 전투의 결과 농서 지역에 소동이 있었다는 정사 기록으로 볼 때, 255년까지 강유가 구축했던 이 지역에 대한 안정 확보 및 주민들과의 연계가 상당 부분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262년의 북벌이 의도는 적도 출병이었으나,(요화전) 결과는 등애에서 후화에서 막힌 점(강유전)을 보았을 때 짐작할 수 있다.
257년에 강유는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수만 명을 이끌고 장성을 습격했지만 사마망과 등애는 방어만하고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해, 초주가 진지의 협조 하에 <구국론>을 짓는다. 내용인 즉슨 위나라가 비교적 안정적이니 변란이 생길 때까지 촉나라가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 이것이 강유 북진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다소 애매하지만, 아무튼 강유는 북진했다.(...)
그러나 258년 제갈탄의 패배 소식을 듣고 강유는 병사를 물린다. 그리고 성도로 돌아와 다시 대장군에 오른다. 강유의 대장군 복귀에 대해 대장군으로부터 후장군으로의 강등 자체가 강유 스스로가 자신에게 책임을 물은 형식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257년 장성 습격 당시 자신을 비판하는 양희를 강유가 반론하지 못했던것으로 보아 완전히 형식적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참고로 정사 양희전엔 강유가 당시 대장군이라 적혀있는데 후장군이다. 정사 서술자 진수가 착각한 듯.
문제는 258년, 강유가 대장군에 복귀할 무렵 진지와 거기장군 하후패가 같이 죽는다.[8]
문제는 강유가 대장군에 복귀하기 전에
직책으로만 본다면 진지가 내정 1인자, 하후패가 군정 1인자인라 내정과 군정에 모두 공백이 생긴 셈으로 강유가 맡는 것이 합당하나...
이 때는 이미 황호 세상이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죽이라 건의까지 했으나 유선이 거절하면서 성도에도 있기 어렵게 된다(강유전). 즉, 대장군이자 녹상서사, 위나라로 치자면 사마소/사마사 형제와 같은 지위였던 강유였지만 사실상 황호 때문에 정치 참여를 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파성넷에 번역된 강유전의 주석을 보면 황호를 살해할 것을 유선에게 주창하자 오히려 유선이 '황호는 소인배일 뿐이데 뭘 걱정하냐. 동윤이 황호를 견제하는 게 참 보기 그렇더라'는 식으로 옹호하자 돌아올 보복을 우려해 답중에서 보리농사(둔전)를 하겠다면서 몸을 피했다는 말이 있다. 연의는 여기에 약간 살을 붙여서 묘사한다.
그리고 이 무렵 강유는 후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일을 하게 되는데... 바로 한중의 방어 시스템을 바꾼 것이다. 원래의 시스템은 유비가 과거 한중을 조조에게서 뺏은 후 위연에게 맡기었고 이후 왕평이 받았던 것인데 이 제도에 강유가 손을 댄 셈이다. 위연,왕평이 오랜 시간 구축하고 유지해온 한중 방어라인은 위군에게 큰 피해는 주기 힘드나 매우 견고해 방어가 쉬우며 들어가기조차 힘들어 위군이 함부러 침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랜기간 동안 위나라로부터의 침입이 거의 없었다. 물론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온 적이 있으나 병력 차이가 굉장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왕평의 방어시스템에 막혀 전혀 전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도에서의 원군이 오자 역공을 당해 대패를 하여 위나라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가져온 낙곡대전이 대표적이다. 허나 강유 자신의 설명은 과거의 시스템으로는 한중에 들어온 위군을 포위 섬멸할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을 바꾸어 한중으로 들어온 위군의 포위 섬멸을 노리겠다는 거다. 일단 정사 강유전에 나온 강유 자신의 설명을 보자면
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9]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적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이에 대해 <<한진춘추>>의 예를 들어 관서지방이 텅텅 비었으므로 이전의 방어 시스템이 작동했기에, 강유가 별 문제 없는 방어 시스템을 바꾼 거라 강유를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상의 대대적인침입으로 유비의 방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했던 243년, 당시 한중에는 주둔 병력이 3만 내외였기에 대부분의 장수들은 한중 기존 방어 시스템을 포기하고 낙곡까지 후퇴하여 적을 맞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왕평이 분연히 야전을 주장하며 한중 내부 요새들의 방어 병력 및 자신 직속의 3,000명으로 유격전을 벌여 발라버리고 비의와 함께 개발살 낸 것다. 그런데 강유 시대애 왕평은 당연히 없다. 더불어 한중 지키는 사람은 예전에 단곡 전투에서 작전 말아드신 호제.
게다가 한진춘추의 내용과는 달리 관서 지방은 텅텅 비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 옹주 자사로서 정촉군의 선봉에 섰던 곽회가 낌새채고는 흥세산 전투 개시 전에 위나라로 튀어버렸다. 덕택에 옹주군 약 3만 명 정도는 흥세산 전투 이후에도 이상없이 보존되었다. 즉, 텅텅 비었다는 옹주의 군부는 전투 후에도 쌩쌩 돌아가고 있었으니 적을 전멸시키지 못했다는 강유의 말이 사실에 근접하다.
사실 이 방어책이 무너진 가장 큰 원인은 황호의 커뮤니케이션 방해로 인한 수비시기를 놓친
것. 정확히 말하면 황제
유선이 종회 + 등애의
촉 연합 공격 당시 음평을 봉쇄하고 낙곡 등 각 진영의 병력을 추가해야 한다는 강유의 진언에 즐쳐드셈하면서 촉의 대응이 늦었던 탓에 방어막이
뚫렸으니 까려면 황호+유선 세트를 까세요?
아무튼 바뀐 방어 시스템의 개념과 이전 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해보면...
지도를 보면 왕평 시대에 작동되었던 방어선(정군산 부근이다.)보다 강유의 변경된 방어선(한중 남쪽이다.)이 남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촉 당시 각군의 배치 및 맡았던 임무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왕평이 독한중을 맡고 있을때 일어났던 낙곡전투 당시 한중군은 외곽 방어선 유지 및 후방 교란을, 비의가 이끌고 올라온 중앙군은 위군의 포위 섬멸이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강유의 변경된 방어선에서 한중군은 주요 거점의 수비를, 중앙군은 측면 엄호 및 기동로 확보의 임무를 수행했고 위군의 포위 섬멸을 맡은 것은 강유가 직접 이끄는 답중의 직속부대였다.
이는 전선 위치의 이동으로 인한 한중지역의 전력 감소가 고려된 방어선 재배치로 보인다. 왕평 시절까지만 해도 한중은 최전방 사령부에 가까웠지만 강유 시절에는 한중에서 서쪽으로 음평을 지나야 있는 답중이 최전방 사령부이며 북벌부대 본진의 성격을 띄었다. 한정된 촉군의 규모(9~12만)를 생각하면 답중으로 전력이 집중될수록 한중지역 전력은 감소할 수밖엔 없기 때문이다. 이점을 감안한다면 왕평 시대의 한중 수비 시스템과 강유 시대의 수비 시스템 사이에는 큰 개념적 차이는 없으나, 위를 맞을 전선의 위치 및 한중군, 중앙군, 답중군의 역할 변화라는 차이는 있다.
문제는 그 사실은 좀 컸다. 답중군과 한중군간의 역할 변화가 일어난 만큼 수비로 인해 답중군의 부담이 가중된 상황이니. 더불어 기존의 방어 시스템에 따르면 한중에서 적을 저지해야 할 임물은 다름아닌 호제인데, 호제는 앞서 말했듯 단곡에서의 실수(?)로 인해 작전 하나를 화끈하게 말아먹은 인물(...)이니 강유 입장에서는 그를 신뢰하기도 좀...
시스템 변경 덕택에 답중 강유군의 부담이 엄청 늘어났다. 당연히 위나라에서는 강유만 막으면 된다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고(진서 문제기) 실제로 그러했다. 정촉 당시 등애가 강유를 막은 틈에 종회는 한중까지 일사천리였으니.
아무튼 258년, 수비 시스템을 바꾼 강유는 262년지 나름 얌전하게 지낸다. 아니 얌전하게 지내진 못한다. 황호를 죽이셈하고 건의했다 즐때리는 유선 덕택에 성도로 가지 못한다.(강유전) 덕택에 답중에 있던 강유는 262년,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으나 등애에게 또 다시 대패한다. 강유의 주요 패배에 '단곡', '후화'가 함께 언급될 정도이니(종회전) 단곡의 패배 규모를 감안한다면 후화 전투에서의 강유군 패배 규모 역시 작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후화 전투는 이상할 만큼 기록이 미비할 뿐더러[10]
전장도 그때까지의 북벌과는 다르게 촉 국경 근방에 가까운 지역이다. 때문에
후화 전투가 대패라는 것은 과장된 기록이며 실제로는 국경 근처에서 소규모 접전을 벌여 패했거나 상황이 불리해서 큰 전투 없이 그냥 물러난
정도가 아니겠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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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년 무렵, 사마소는 본격적으로 촉을 치기로 결심한다.(종회전)
사마소는 선박을 건조하여 오를 치러가는 척
하며, 종회를 도독, 등애와 제갈서를 하여금 촉 정벌 군단을 편성한다. 종회는 이 시기부터
배를 만들어 오로 친다는 소문을 내고, 이 때 즈음에 강유가 후화 전투를 벌인다. 물론 오를 친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다.[11]``[12]
이 무렵 사마소의 정촉 계획을 파악한 강유는 유선에게 요화와 장익을 각각 음평과 양안 관구(양평관)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다. 특히 한중과 답중을 잇는 통로인 음평의 확보는 강유군의 기동로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요화는 음평에 제 때 도달하지 못한다. 이유에 대하여는 자치통감과 정사의 서술이 갈린다.
정사의 경우 강유의 요청을 유선이 계속 묵살한 끝에 등애와 제갈서가 답중으로 진격한 이후에야 유선은 요화와 장익, 동궐을 출발시킨다. 자치통감의 경우 유선이 강유의 요청을 계속 묵살하나 결국 요청에 따라 요화, 장익, 동궐을 출발시켰고 제갈서가 음평에 도착하기 이전에 먼저 선점하는데 성공하나, 한 달여를 대기하고 있었지만 제갈서가 나타나지 않자 둘은 부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이동하면서(한중방향 추정) 음평이 비어버리자 그 사이에 제갈서가 음평을 점거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의 기술대로라면 강유의 방어전략이 실패로 돌아간 건 전적으로 유선의 책임이지만, 자치통감의 기술대로라면 요화의 판단 미스도 존재하는 셈이다. 본래 삼국지 역사를 이해하는데 정사와 자치통감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서 이쪽만 보고 뭔 일인지 쉽사리 이해가 안 가면 저쪽도 참고하면 그럭저럭 이해가 가는 경우가 많기는 한데, 이렇게 두 사서간의 기록이 완전히 엇갈리는 경우는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263년, 사마소는 정촉(征蜀)을 개시한다. 강유는 등애를 상대하며 음평을 통해 한중으로 가려고 했으나 제갈서과 음평을 이미 점령한 사실을 알게 된다. 강유는 그 길로 공함곡, 즉 답중과 옹주가 연결된 곳으로 진군한다. 당시 옹주 자사였던 제갈서는 강유의 움직임에 당황, 음평에서 공함곡으로 향한다. 30리 쯤 진군하던 강유는 그대로 회군, 음평을 빠져나와 한중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미 종회의 10만 대군에 의해 양안관구가 돌파된 사실을 알고는 한중을 포기, 익주의 검각까지 후퇴한다. 검각에서 강유와 종회는 약 1개월에 걸쳐 지리한 공방을 벌이는데, 공방 끝에 불리해진 종회는 잠시 퇴각한다.
한편 등애는 검각을 죽 둘러 산을 넘어서 강유성과 면죽관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그 곳들을 공격한다면 강유가 검각에서 나와 파와 부현을 통해 성도로 나올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산악 돌파로 많은 손실이 있었지만 강유성의 수장인 마막이 싸움 하지도 않고 항복(!)하자 군을 재정비 할 시간을 얻은 등애는 단기결전에 나선 제갈첨을 격파하고 성도까지 진격한다. 그리고 곧 황제 유선이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바람에 촉은 멸망하고 만다.
실제로 지도를 그려보면 검각에서 나와 파로 향하는 강유는 먼저 종회의 13만 군을 제압한 다음 성도를 뜯고 있는 등애의 약 2만 군사를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도 성도의 유선 측이 효과적으로 등애를 잡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하지만 종회의 군대만 해도 13만으로 강유가 이끌던 7만의 군대를 능가하는 상황이고, 종회 본인의 기량이 형편없었으니 이걸 궤멸시키는 데 성공한다고 쳐도 사마소가 직접 군대를 몰아 내려올 수도 있는 데다 그게 아니라도 등애는 성도에서 농성하면서 황제 유선과 황족들을 인질로 잡고 강유를 협박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촉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우선 등애의 2만 군사가 위협적이라지만 성도 같은 거대한 성을 단기간에 공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13]
등애가 성도에 들이닥친 시점에서 이미 동오의 원군이 오고 있었으며,
곽익이 다스리던 건녕에서의 원군[14]
도 기대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때문에 유선이
버텼다면 촉한의 멸망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유선은 성도를 치고 있던 등애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등애에게 항복한 유선은 강유에게, 종회에게 항복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명령을 받은 강유는 파 지역으로 흩어져서 종회의 남진을 막던 각 진의 장수들에게 직접 다니면서 황제의 항복 명령을 전한다. 이 명령을 받은 촉장들은 모두 자신의 검을 들어 바위를 내리쳤다고 한다. 괜히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마지막 부분에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촉 멸망 이후 종회는 강유를 열렬히 환영하며 강유의 수레와 깃발 등을 돌려주고 항상 함께
다니며 강유에게 의견을 물었다.[15]
종회는 등애를 모함하여 함거에 싣고 낙양으로 보내고 그의 군대를 흡수하여 촉 땅에서 유일한 세력이 된다. 이후 강유는 종회를 따라 가 익주목이라고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종회에게 가담한다. 종회는 강유를 선봉으로 삼을려고 했으나, 위나라 군대가 분노하여 종회와 함께 살해된다. 이 때 강유의 처자도 주살되었다고 하는데 위나라에 남겨진 강유의 일가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 주석으로 인용된 세어에 의하면 강유의 몸을 갈랐더니 쓸개가 한 되 크기였다고 한다. 이 것 때문에 강유가 말년에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고전분투했다는 해석도 있다.
연의에서는 강유가 종회를 회유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였고, 끝내는 종회를 이용하여 촉한을 부흥시키려 한 것으로 묘사된다. 연의에는 당연히 있고 정사에도 있는데 번역이 안 된 부분. 이 때 촉의 양대 노장 중 하나인 장익도 휘말려 사망하며, 다른 노장인 요화는 낙양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 사망한다.
그 밖에 정사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파촉 지방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는 화양국지에는 강유가 유선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도 전해지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강유는 그 난장판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촉한의 부흥을 꾀하였다고 보여진다.
폐하께서는 며칠만 고생을 참아 주십시오.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세워서 어두워진 일월(日月)이 다시 빛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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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듯 강유는 위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촉에 남는다. 정사의 서서전이나 정욱전에서 보듯 당대에는 가족의 요청이라면 적국에 있던 자라도 넘어 오는 것이 상례였다. 그럼에도 강유는 거절하고 촉에 남는다. 아니 촉에 남는 정도가 아니라 원래의 소속 국가였던 위나라를 끊임없이 침공한다. 촉 입장에서는 충신이겠지만 위의 입장에서는 제 1 역적.
당대의 풍습과 어긋나게 강유가 왜 촉에 남았는지, 또한 촉에 충성을 다했는지는 미스테리이다. 왜냐하면 강유 자신이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기 위해 남긴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전후 상황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 강유가 자신을 위가 아닌 한의 신하로 생각했을 가능성
- 제갈량에게 충심을 발휘했다는 설
- 천수 귀환을 위해 북벌을 이용했다는 설
- 촉이 익주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강유 본인이 사적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북진이라는 임무를 수행할 수 밖에 없다는 설
어느 쪽도 대답이 완벽하지 않다.
- 유교적 백그라운드를 가진 강유가 위에 있을 당시에도 자신을 한의 신하로 생각했을 가능성인데, 천수 시절 마준에게 디스 당하기 전 마준을 어떻게든 따라가려 했던 흔적을 보면 자신을 한의 신하로 생각했을까가 의심스러운 면도 있다.
- 촉 귀순 당시 27세나 된 인간이 제갈량이라는 한 인간을 좋아해서 따라다녔을까가 의문이다. 하지만 연의와 달리 딱히 특별하지 않은 위나라 출신 항장 강유를 두고 관중 최고의 인재에 마량 등을 뛰어넘는 인재이며 황제를 만나게 해야 한다며 극찬해서 종예와 장완한테 계속 언플해 비의 등과 함께 중심 권력에 편입하게 한것도 제갈량이다. 사실 강유가 큰 뜻이 있었다는데 그 뜻을 이루도록 열렬히 서포트한게 제갈량이다. 즉, 제갈량 때문에 계속 북벌에 나선게 마냥 허황한 말이 아니라는 것. 게다가 제갈량도 비슷한 나이에 유비와 만나 그 뜻을 이어 북벌한 셈이니...
- 강유가 엄마한테 받았다는 당귀 받고 걍 위로 리턴하면 되는 일. 참고로 당시에는 비록 적국으로 아래 사람이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부모를 모시기 위해서라면 윗 사람이 용서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잘 모르겠으면 삼국지 정사의 <정욱전> 참조.
- 곽회가 강인들을 흡수해가며 서부쪽으로 행정력/군사력 넓히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역시 정확하게 사서에 언급된 부분은 없다.
강유 자신이 남긴 기록이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저 위의 썰들은 어디까지나 확증될 수 없는 설이다.(그나마 위의 설이나 관우 따라다니던 주창 마냥 제갈량을 따라다닌 민중의 이미지 등을 따져보면 2번이 그나마 가깝긴 하지만) 더불어 정사의 <강유전>이나 <자치통감> 등 관련 문헌 역시 이 점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으니 강유가 왜 그리 제갈량 사후 30여 년을 나홀로 북벌하느라 애썼는 지는 미스테리. 강유 본인이 남긴 문헌이 없는 한, 어떤 설을 대입하더라도 강유가 촉에 남아 북벌을 지속한 이유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은 어렵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A%B0%95%EC%9C%A0?action=edit§ ion=13)]
정사의 저자 진수는 강유에 대하여 항상 배우려 하고 근면하며 첩을 두지 않고,
검소하여 먹고 살 만할 정도로 족한 살림을 했으며, 재물을 탐하지 않고 매사에 솔선수범 했다고 평한다. 이렇듯 정사의 평은 좋은 편. 거기다
애초에 정사 자체가 진나라에 우호적인 시각을 주로 반영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강유에 대한 정사의 평가가 유난히 우호적일 이유는 없다. 오히려
깎였으면 깎였을테지.[16]
때문에 강유의 당대의 평가는 정사보다 높았다고 짐작은 할 수 있는데 당대의 다른 인물인 손성은 강유를 지극히
좋지 않게 평가하였다. 참고로 손성은 잡기의 저자로서, 강유의 당기-원지 일화의 출처가 잡기이다. 손성의 강유평은 다음과 같다.
극정의 말은 잘못되었다. 무릇 선비란 백 가지의 행동과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뛰어나더라도 충(忠), 효(孝), 의(義), 절(節)을 다하는 것을 최고의 행동으로 삼는다. 강유는 위를 채찍질한다는 명분으로 촉왕조를 바깥에서 분주하게 만들었으니 군주의 뜻을 어기고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했으니 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았으니 효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섬겼던 위나라를 해쳤으니 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패하고도 죽음을 피하려고 했으니 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덕정을 베풀지 않고 전쟁을 자주 하여 백성들을 피로하게 했으며, 어명에 따라서 임무를 맡았으나 적을 막지 못했으니 지혜와 용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강유는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사실 위에서 살 길을 찾아 도망친 신하에 불과했다. 이러한 망국의 혼란을 초래한 인물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된다고 했으니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든 말이 아닌가? 강유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이는 도둑이 훔친 재물을 나누어 주면서 의롭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손성의 평은 극정의 평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으니, 극정의 평을 보아야 할 차례이다. 극정은 강유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평하였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으로서의 중임을 맡았지만, 초라한 집에 살면서 불필요한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별당에 첩을 두어 난잡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의복과 음식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관에서 지급하지 않는 비용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마련했다. 이러한 행동은 남을 질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만족을 알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만 칭찬하고 실패한 사람은 비난한다. 또한 높은 사람에게 기대고 낮은 사람은 무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종회와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 의지하여 자신과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비난하고 그의 다른 측면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춘추》에서 그릇된 사람을 폄하하는 것과 전혀 다른 짓이다. 강유는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성실, 청렴, 소박, 검소를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으니 한 시대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요컨대 강유 당대마저도 평이 갈린다. 평이 극에서 극을 오가는 걸 보면 요즘 뿐 아니라 과거에도 어지간히 강유는 논란의 대상이었던 듯.
참고로 송대의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손성과 극정의 평을 종합한다:
신은 극정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강유가 모든 측면에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 시대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은 그가 학문을 좋아했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손성이 어머니를 저버렸다고 비난한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지나친 비난이므로 극정이 잘못 평가한 것보다도 못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강유가 군부에서 일하였음에도 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평가는 드물다. 즉 이에 첨부된 강유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강유의 성품 및 윤리적인 측면에 대한 평가들이니 저 평을 강유의 군사적(혹은 정치적) 능력에 대한 평이라 착각하지 말 것.
한편 조선의 문신 홍대용의 담헌서에서도 강유를 평한적이 있다. 다음은 해당 내용.
강유(姜維)는 무후(武侯)의 재주는 없으면서 무후의 사업을 하려고 했으니, 그 뜻은 충성스럽지만, 그가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여 결국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요화(廖化)가 이른바 ‘지모(智謀)도 적(敵)만 못하고, 병력(兵力)도 적보다 적으면서 용병(用兵)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니 어찌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은 참으로 알고 하는 말이다. 또한 모사(謀事)를 잘하는 자는 그 근본부터 먼저하고 끝은 나중에 하며, 안의 일부터 급히 하고 바깥일은 천천히 한다. 소인(小人)이 안에서 일을 주선하는데, 장수가 밖에서 성공(成功)한 자는 있지 않다. 그런데, 강유는 정권을 제 마음대로 하는 황호(黃皓)를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저 억센 적에게 뜻대로 하려고 했으니, 지혜롭다 할 수 없다.
강유(姜維)는 양안(陽安)과 음평(陰平)을 방비하고자 했으나 황호(黃皓)에게 저지(沮止) 당했다. 만약 강유의 계획대로 했다면 등애(鄧艾)가 음평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등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종회(鍾會)는 스스로 달아나게 되었을 것이니, 촉한(蜀漢)이 이같이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유(姜維)가 죽을 임시에 꾀한 것은 뜻만은 독(毒)하였으나 계획은 소루(踈漏)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漢)나라에 충성한 마음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고 무후(武侯)가 인정하던 것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또한 아름답다 하겠다.
한 마디로 '제갈량의 능력도 없이 북벌을 하려고 했던 것은 무모했다, 하지만 간신배 황호 같은 무리때문에 그 계책이 쓰이지 않았던 점도 있고,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그 충심은 끝까지 아름다웠다고 할 만하다'쯤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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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에 있어서 강유에 대한 평가 역시 극에서 극이다. 국력이 약한 촉을 말아먹은 전쟁광부터 촉나라 막바지의 마지막 희망까지.
강유까들은 주로, 내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제갈량 보다도 더 많이 나아간 무리한 북벌(9차례), 앞서 언급된 유비-위연-왕평으로 이어진 제법 튼실했던 한중 방어라인을 변경한 일 등으로 공세를 취한다.
강유의 실패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첫째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했다. 미약한 국력을 고려하지 않고 매년 출병한 탓에 촉은 급속히 피폐해졌다. 둘째 그는 한 나라의 수장이 되기에는 정치력이 부족했다. 강유는 환관 황호의 발호를 누르기는커녕 오히려 참소를 당해 곤경에 처했다. 셋째 강유는 전략적 식견이 부족했다. 애초에 유비는 한중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방어전략을 수립했었으나 작은 공에 눈이 먼 강유는 적군을 한중으로 유인해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 때문에 종회의 20만 대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한중에 입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촉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능력도 없으면서 호전성만 높았던 그로 인해 촉의 멸망이 재촉됐으니 강유는 망국의 충신이 아니라 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망국의 원흉이었다.
이처럼 강유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만약 강유가 오나라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불편한삼국지
참고)
반면, 강유빠들은 위나라 출신의 항장이었음에도(가족도 모두 위에 남아 있었다.) 제갈량의 유지와 촉한 건국의 이념에 따라 부족한 전력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외적으로 험한 조건에도 북벌의 의지를 꿋꿋이 이어간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한다.
뒤떨어지는 국력, 암군
유선과
환관 황호의 환상적인 태클, 뛰어난
정치가였으나 북벌에 관해선 의견이 달랐던 비의의 딴지 등을 짊어지고
장억, 요화등과 고전분투하며 늙어가는
모습에 수많은 촉빠들의 눈물과 지지를 받고 있는 편. 또한 제갈량이 인정한
자신의 후계자라는 점도 그의 인기상승에 한몫했다. 그래서인지 삼국지 관련 최대 까페인 네이버 삼국지 도원결의의 인기투표에서는
가후,
육손등의 쟁쟁한 인물들을 재치고
1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그리고 라이벌인 등애는 143위로 랭크돼서 아주
제대로 발라버렸다. 지못미 등애…….) 실제로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 (ex Koei의 삼국지시리즈 등)엔 언제나 젊은 얼굴로 매력이 쩔어주신다. 게다가 올라운드 플레이어니 인기투표가
수긍되는 대목이다.
본인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라이벌 등애와의 누가 낫냐는 논쟁 또한 삼국지의 대표적인 떡밥 가운데 하나이다.
일단 정사 기준으로 봤을 때 강유는 등애에게 패배하기만 한 걸로 나온다. 정사 강유전과 등애전 및 후주전에서 대패와 그 여파가 자세히 묘사된 단곡 전투를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등애는 강유의 앞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승자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연의 및 후세 매체에서의 라이벌 이미지 치고는 강유가 일방적으로 당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기에 강유의 북벌에서 승리의 가능성이 있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일관적으로 예스라 답하기는 어렵다. 물자, 병력, 병종(촉은 보병 위주인데 비해 위는 정촉(征蜀) 기병을 따로 편성하여 운용할 정도였다.), 원정 거리 등 물리적인 조건에서 어느 것 하나 위군보다 우세할 것 없는 촉군으로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면 기동력을 이용, 특정 시점에 특정 지점으로 군의 전력을 이동 & 공격을 집중시켜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강유가 수로를 이용, 촉군을 이동시켰기에 강유의 촉군이 기동력의 측면에서는 위군보다 뛰어난 전력을 보유했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진태, 등애 등의 방어를 볼 때 그가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전력을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보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다. 일례로 255년의 적도 전투의 경우, 진태의 거짓 소문에 속은 강유가 복병을 엉뚱한 곳에 배치하면서 진태의 적도 구원을 막지 못해 점령을 포기해야 했으며,(진태전) 256년의 경우 등애의 방어에 강유가 말렸다고 추측 할 수 있다.
결국 강유가 진태와 등애보다 불리한 객관적 요건을 뒤엎을 정도로 뛰어난 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