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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시대의 독일 지도가 유난히 더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동유럽이 유난히 깨끗한 것도
특기할 만 하다[1]
중세시대, 가톨릭 교회의
교황이 다스리던 영지로 바티칸시국의 전신.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분포하고 있었다. 또한 아비뇽유수로 유명한 아비뇽도 교황령이었는데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아비뇽은 위에 지도에서 프랑스 쪽에 작은 점 부분이다.
많은 이들이 754년 피핀의 기증으로 비로소 교황령이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 서로마 멸망(476년) 이후 300년 동안 로마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확장된 영토가 있었다. 피핀이 교황에게 기증한 땅은 이 오리지널(?) 교황령을 위협하던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족을 정복한 뒤 준 것이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1011세기 노르만족과의 충돌로 축소되기도 했으며
13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때 최대의 면적을 확보하였다. 14세기 교황이 아비뇽유수(1309~1377)를 당하면서
위상이 크게 실추되기도 했으나 그 후 교황이 복귀함으로서 계속 유지되었다. 16세기 카를5세의 사코 디로마 사건으로 완전 초토화당하고
교황이 도시를 떠나 피난한 굴욕적 사태도 있지만(…).
그렇게 18세기 후반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1789년 프랑스혁명에 교황청이 맹렬히 반대한 대가로 나폴레옹에 의해 1799년 최초로 완전히 폐지당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몰락한뒤에 1815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빈에 모여 나폴레옹전쟁 종전후 처리를 회의를 한 빈 회의애서 교황령을 부활시켰지만 1848년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의 혁명운동으로 다시 폐지당했다가, 1861년 신생 이탈리아 정부가 통일전쟁을 통해 로마냐 지방을 강제로 편입한다.
그러나 로마를 중심으로 한 지방만은 나폴레옹3세(재위 18521871)가 보낸
프랑스 군대에 의해
보호를 받아 건드리지 못하다가, 187071년의
보불전쟁으로 다급해진 프랑스가 군대를 철수하자 1870년
잽싸게 이탈리아군이 진주해 점령하며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종결되고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 교황청은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비공식적으로 설치되고 1400여 년 만에, 754년 피핀의 기증 이후로는 1100여 년 만에 완전히 소멸하였다.
그 후 로마 교황들은 영토 없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사실상 갇혀 지냈지만 이탈리아 정부와 마찰을 벌이다가 1929년 교황 비오11세와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가 라테라노 협약을 체결하여 세계 최소의 미니국가인 바티칸 시국, 즉 현대의 교황령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교황령은 바티칸 시국과 동의어이며, 교황의 전제주권이 미치는 0.44㎢의 공간이 해당된다. 이 영토는 다른 주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타 국가의 간섭과 영향력이 배제되며, 제2차세계대전 때
나치 군대도 바티칸의 주권을 존중하여 이를 점령하지는 않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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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과 비교해 보면 정반대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현대 독일은 깔끔하게 하나의 나라로 정리된 상태지만(물론 같은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가 있긴 하다), 동유럽은 소련 붕괴와 민족주의 대두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버렸다.[2]
다만 이탈리아가 베니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 독일군이 바티칸을 무력으로 포위하여 바티칸 근위병(스위스 용병)과 교전 직전까지 간 적은 있었으며, 연합군으로 가장한 독일군 폭격기가 바티칸을 폭격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유리가 깨진 사건도 있었다. 또 비오 12세 때 특히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갈등 국면이 여러차례 빚어지면서 바티칸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