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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聖大妃
1642~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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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모친. 명재상 김육의 손녀이며,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의 딸이다.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 민씨보다 200년 전의 인물이니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따라서 보통은 명성왕후 김씨, 혹은 명성대비로 더 많이 불린다.[1]``[2]
현종을 공처가로 만든 인물이자
**숙종,
영조, 정조**에게
쓰리런 다혈질 종특을 물려주었다고 의심되는 인물. 심지어 유약하다는 편견이 강한
경종마저 다혈질 종특을 숨기고 있다가 제대로
표출한 적이 여러 번 있었으니 후덜덜하다. 거기에 정조의 아들 순조조차도 가족 문제만 나왔다간 영조, 정조 급으로 난폭해졌으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래도 덕흥대원군의
암군 종특보다는 낫다. 실제로 조선 왕비들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다혈질인 왕비였다고 한다. 이와 맞먹는 왕비는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정도? 머리가 좋았으나 그 성깔 때문에 현종은
조선 왕조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못한 왕이
되었다...[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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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 숙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에 오르면서 조정의 일에 자주 간섭하여 남인들의 비난을 샀으며[6]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이 숙종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모함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675년에 일어난 '홍수(紅袖)[7]
의 변'이다. 이 때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전까지 와서 통곡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 때 총대를 매고 삼복(복평군 형제들)을 탄핵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복과 반대 당파에게 무고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서 이랬던 것. 신하들 역시 '이건 뭐
문정왕후가 또 나타났나요?'라고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
결국 무고죄로 몰린 아버지 김우명은 화병으로 죽는다.[8]``[9]
그 뒤에 궁녀 출신으로 숙종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장희빈을 성품이 극악하며 숙종이 꾀임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궁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10]
그런데 명성왕후가 그녀를 내쫓은 진짜 이유는 그녀의 집안 쪽에서 장희빈의 당숙
장현을 유배로 몰았기 때문인 탓도 있었다.[11]
반대로 시조모인 자의대비(장렬왕후)는 장희빈의 편을 들었다고...
명성대비의 죽음은 진짜 어이없었는데, 숙종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평소 무속 신앙을 신봉했던 그녀는 숙종의 무사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는데 무당이 왕의 쾌유를 위해서는 왕의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벌을 서야 한다고 계시를 내리자 명성왕후는 무당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아들여 혹독한 겨울 날씨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지독한 독감을 얻어 1683년 음력 12월에 죽었다. 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여서 그런지 신하들은 숙종에게 문제의 무당을 처형해야한다고 했으나 숙종은 귀양을 보내는 처벌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명성대비가 이렇게 어이없게 죽는 바람에 장희빈은 명성왕후의 3년상이 끝난 1686년에 자의대비와 숙종에 의해 재입궁 할 수 있었으며 곧 숙원으로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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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릉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현종과 합장되어 있는 숭릉(崇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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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극에서 ¶
대중에게는 명성황후에 밀려서 인지도는 시망이지만 숙종시대의 사극에 명성대비로 가끔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여성이었지만, 현종시대 사극인 마의에서는 젊은 배우를 써서 여기서는 말투도 조근조근하고 가끔 숙휘공주도 두둔하는 등 전형적인 현숙한 중전 이미지를 가진 자로 나온다. 아무리 봐도 둘째며느리와 뒤바뀐 거 같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wik i/%EC%9E%A5%EC%98%A5%EC%A0%95%2C%20%EC%82%AC%EB%9E%91%EC%97%90%20%EC%82%B4%EB% 8B%A4)에서는 장희빈을 괴롭히는 포지션을 맡아서인지 다혈질 성격과 서인 편을 든다는 식의 고증은 제대로 되었다. 심지어 물벼락 벌로 골골대기 까지 하는 것도. 근데 이 아줌마(?)가 뭔가를 꾸미면 결국 다 장옥정에게 좋은 일로 돌아온다. 인현에게 이 어미만 믿으세요 라면서 뭔갈 시도하면 다 시망하고 역관광당한다(...)
\----
[1]
명성황후 민씨는 생전에 대비가 되지 않았다. 다만 명성대비란 호칭은 실제로는 옳지 않으며 정식 왕대비 존호는 현렬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줄여서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다. 엔하위키에서 이전에는 현렬대비(顯烈大妃)라고 했는데 현렬대비라는 표현도 알고보면 잘못된 표현. 실록에서도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로 나오지 현렬대비(顯烈大妃)로는 쓰이지 않았다.[2]
다만, 명성대비가 틀린 표현이란 것도 좀 애매한 게 아들인 숙종이 인현왕후가 죽은 직후에 쓴 행록에 버젓이 명성대비(明聖大妃)라는 표현을 떡하니 써버렸다. 출처는 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1월 23일(병오) 2번째기사.[3]
공식적으로는 경종이나 순종도 후궁이 없다. 하지만 경종과 순종은 정상적인 치세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후궁이 없는 왕은 현종이 유일하다. 참고로 추존왕인 덕종이나 원종, 장조, 그리고 어린 나이에 폐위된 단종조차도 후궁이 있었다.[4]
덕분에 효종의 직계가 단절되는데 나름 공헌(?)을 했다. 후궁을 못두니 숙종이 외아들이 되는 바람에...과연 아들을 못 낳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5]
사실 현종도 몹시 후궁을 두고 싶어했고, 후궁 간택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명성왕후의 지시를 받은 한 신하의 반대로 실패했고, 현종이 그 신하를 한참동안 째려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6]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은 서인이였다.[7]
붉은 소매라는 뜻. 궁녀의 소매 끝동이 붉은색이었기 때문에 궁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였다.[8]
아이러니 하게도 삼복(복평군 형제들)은 경신환국 때 결국 역모죄로 숙청된다. 삼복에게는 형인 복녕군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형제들의 숙청에는 휩쓸리지 않았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의 실제 혈통은 복녕군의 후손이다.[9]
삼복의 형인 복녕군의 딸은 명성왕후의 올케였다. 명성왕후의 남동생 김석달의 처가 복녕군의 딸. 그리고, 명성황후의 고종사촌언니(창원군부인 황씨)는 복창군의 처였다. 명성왕후의 고모가 황도명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10]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복귀를 청했던 인현왕후에게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말을 하는것)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11]
실제로 장희빈은 이후 명성왕후의 당파인 서인과 대립하는 남인과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