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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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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興大院君

1530~1559

Contents

  1. 소개
  2. 대략적 생애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8D%95%ED%9D%A5%EB%8C%80%EC%9B%9 0%EA%B5%B0?action=edit&section=1)]

1. 소개 ¶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중종의 7남. 선조의 아버지로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다.

아마 대원군 중 흥선대원군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부터 후덜덜한 4代가[1] 이어진다.

이름은 초(岧).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B%8D%95%ED%9D%A5%EB%8C%80%EC%9B%9 0%EA%B5%B0?action=edit&section=2)]

2. 대략적 생애 ¶

1530년 중종창빈안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덕흥군에 봉해졌으며, 13살 때 정인지의 증손녀와 가례를 올렸고 그 사이에서 선조를 포함한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첩 사이에서 딸 하나를 더 얻었다. 어릴 때부터 주색에 빠져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선조 즉위 후 1569년에 대원군으로 추존된다.

그의 성품은 다음의 기록들로 볼 때 그리 좋은 인물은 아니었던 듯 하다.

명종 13권, 7년(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3일(을해) 2번째기사
사헌부에서 덕흥군 이초를 파직시킬 것을 건의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는 성품이 교만하고 패려하여 재상을 능욕하고 사류(士類)를 구타하며 창기(娼妓)와의 사랑에 빠져 변복(變服)으로 나돌아다니고 있으니, 지금 다스리지 않으면 불의(不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파직시켜 마음과 행동을 고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답하기를,
“이초(李岧)가 연소하여 사체를 몰라서 망령된 행동을 하는 것인데, 파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교계(敎戒)를 가하여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형인데 그런말을[2]
다음은 그의 노비들이 장인 정세호의 노비들과 분쟁이 벌어졌을 때의 사관의 논평

명종 16권, 9년(1554 갑인 / 명 가정(嘉靖) 33년) 3월 30일(경오)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덕흥군과 정세호를 노비가 투탁한 죄로 추고할 것을 아뢰다

"덕흥군은 종실(宗室)의 무식한 사람이니 논할 것도 못 된다."

출처는 [각각](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 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D%B4%EC%B4%88&keyword=%EC%9D%B4%EC%B4%8 8) [여기](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 &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D%B4%EC%B4%88&keyword=%EC%9D%B4%EC%B4%88 )

일찍 죽은 결과 자신의 3남 하성군이 왕이 되는 로또를 맞았다. 주색에 빠져 일찌감치 인생 퇴갤이 된 상황에다가 자신의 부인도 죽으면서 완장차고 설칠만한 사람이 없어지면서 하성군이 최적의 왕위계승자 감이 된 것이었다. 덕흥군은 창빈 안씨 가문도 듣보잡인데다가 하성군의 생부 생모가 빨리 죽어서 명종시절 문정왕후 외척들에 시달린 신하들한테 매우 매력적인 양자 감이 었다.

손자인 정원군보다는 덜하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은 막장**이다. 그러나 3남 선조가 왕이 돼서 그런지 이러한 행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록은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할수도 수정할 수도 없었기에[3] 위에 언급된 명종실록에 기록된 덕흥대원군의 몹쓸 행각은 지워지지 못하고 전해내려오는 것이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왕까지 높이려고도 하지 않았고 봉사손을 1품으로 세습 시키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었다. 추존의 예는 왕이라도 함부로 하는게 아니었다.[#조선왕조 실록 선조 2년 11월 2일](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 &clsName=&searchType=a&keyword=%EB%8D%95%ED%9D%A5%EA%B5%B0)[#조선왕조 실록 선조 39년 9월 2일](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 Name=&searchType=a&keyword=%EB%8D%95%ED%9D%A5%EA%B5%B0) 하지만 그의 증손자 인조는 얄짤없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결국 추존하는데 성공했다.

생각해 보면 조선 중기의 국가 막장테크를 가져온 만악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아들은 선조, 손자는 정원군(원종), 증손자는 인조. 가계도가 심히 후덜덜하다. 이게 꼭 우스개소리만은 아닌 게 선조, 인조 말고도 이후의 조선 임금들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이 사람 후손이다. 조선 중기 이후 왕실의 뿌리라고 할 만한 인물. 혈통에서의 중요도로 보아 늦게나마 묘호도 던져주고 추존시켰을 법도 한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막장으로 살았음에도 죽어서 결국 임금들의 조상이 되었으니 행운아라면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명나라F4와 비슷한 상황인데, 다행히(?) 조선은 이때 망하지는 않았다. 대신 비슷한 시기 옆동네 명나라나라가 무너지고 북경이 황폐화되고...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수락산에 묘가 있다. 덕릉(德陵)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대원군의 무덤은 능(陵)이 아니라 묘로 일컫는다.[4]``[5]

비록 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했으나 덕흥대원군의 후손들은 도정궁(都正宮)이라는 궁호를 받고 선조의 부모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의 제사를 대대로 받들었다. 도정궁 종사손은 조선시대 내내 한일합방 전 까지 정3품 대우를 받을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자리했던 도정궁은 일제강점기까지 존속했다가 1913년에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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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초 - 이연 - 이부 - 이종
  • [2] 하지만 당시 명종은 적자 출신 왕이고 덕흥군은 서자출신 일개 왕자였다. 나이 이전에 군신관계가 우선인 관계.
  • [3] 선조, 현종, 숙종 경종의 경우는 개수실록 또는 수정실록이라는 이름으로 본 실록 외에 다시 만든 실록이 있다. 이것은 조선의 당파 정치상 새로운 당이 집권하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다시 만들었으므로 곡필이라고 할 수 있다.
  • [4] 여기서 카더라성 일화 하나. 선조가 나무 도매상에게 나무꾼이 덕릉에서 왔다고 하면 후한 값을 주라고 하였고 덕흥대원군에서 왔다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카더라. 이 일화가 반쯤 진실일 가능성이 높은게 당고개역 인근의 덕흥대원군묘 근처를 지나가는 고개 이름은 덕릉고개다.
  • [5] 더군다나 덕릉(德陵)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의 능이다. 지 아비 띄워주려고 조상님 능은 알로 보는 패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