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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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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고려 현종(顯宗) 왕순(王詢)
  2. 조선 현종(顯宗) 이연(李棩)

2.1. 다사다난한 치세 속에

2.2. 아버지아들에게 묻힌 개성

2.3. 일화

2.4. 개수실록

2.5. 가족과 후일담

2.6. 현종의 능

2.7. 드라마 마의의 현종

  1. 동진 현종(顯宗) 사마연(司馬衍)
  2.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3. 일본의 23대 겐조 덴노

양현종과는 상관없다 카더라, 강현종과도

시법에서 은 '행견중외(行見中外)'라 하여 행실이 나라 안팎에 드러났다는 뜻이다. 顯宗이라는 묘호를 받은 아래의 임금들은 대체로 시법에 걸맞게 나라를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무난한 만큼 존재감이 살짝 부족한 것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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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현종(顯宗) 왕순(王詢) ¶

현종(고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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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 현종(顯宗) 이연(李棩) ¶

조선의 역대 국왕

17대 효종 이호

18대 현종 이연

19대 숙종 이순

묘호 현종(顯宗)

시호 조선

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
(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장각(莊恪)

연(棩)

경직(景直)

출생 청나라 선양(瀋陽) 봉림대군 관저

사망장소 한성 창덕궁 양심합[1]

배우자 명성왕후(明聖王后)

아버지 이호(李淏)

어머니 인선왕후(仁宣王后)

생몰기간 음력

1641년 2월 4일 ~ 1674년 8월 18일

양력

재위기간 음력

1659년 5월 9일 ~ 1674년 8월 18일

양력

![1263947987_126346466324419.jpg](//rv.wkcdn.net/http://rigvedawiki.net/r1/pds /1263947987_126346466324419.jpg)

[JPG image (67.01 KB)]

현종의 어필.

조선의 제18대 임금.

효종의 아들로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심양에 인질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귀국자녀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이기도 하다. 이후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왕세손이 되었고, 효종이 즉위한 뒤에는 세자로 책봉되었다. 사실 단종과 함께 세손, 세자, 왕 테크를 정상적으로 밟은 얼마 안 되는 인물이다. 가장 평범한 왕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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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사다난한 치세 속에 ¶

효종이 죽은 뒤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이라는 키배에 휘말리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이 예송논쟁은 국사에 언급될 정도로 당시에는 중요한 정국의 이슈가 되었지만, 다행히 알려진 것만큼이나 현종과 당시 조정 신료들이 재위기간 내내 예송에만 매달린 건 아니었다.

상당히 안습의 시절로 향하던 때로 전 세계적인 이상저온 현상으로 인해 곡물생산이 뚝 떨어져 기근이 일어나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 자세한 건 경신대기근 참조.

그래도 현종은 나름대로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현종의 시대에 대동법이 호남지역까지 확대 시행되었는데 호남이 곡창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민생고 해결에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을 듯 하다.

백성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오가작통 사목을 제정했고 수리시설과 양전사업에 힘썼으며, 나라 재정을 수습하고 동활자 10만개를 주조하는 등의 치적도 남겼다. 군사적으로는 북벌정책은 계승하지 않았으나 부왕의 군사력 강화정책을 계승하여 화포를 개량하여 대량 생산하는 등 군비증대를 하였고, 온천 행 때마다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을 정도로 군사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큰아버지 소현세자처럼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혼천의의 개량이나 자명종 제작에도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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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버지

아들에게 묻힌 개성 ¶

그러나 북벌이라는 대표적 키워드가 있는 아버지 효종과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이의 썸씽으로 잘 알려진 아들 숙종에 가려서 상당히 관심도나 존재감이 떨어지는 임금이다(…). 심지어는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무능하거나 심약한 듣보잡 군주로 기억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사극에서도 장희빈을 다룬 사극에서 ** '사망'하는 장면으로만 등장**하거나 그냥 선왕으로 이름만 언급된다. 안습.[2] 그러나 2012년 가을부터 방영된 MBC 사극 마의에서 드디어 현종의 재위 기간을 다룬다. 현종 역을 맡을 배우는 한상진. 쥐어패면서 예를 가르쳐 주더니만 이번엔 예 때문에 이리저리 치이는 왕으로 환생

그런 흉흉한 배경 속에 귀신 소동이 궁궐에서 일어났는지, 현종이 직접 대화 중 귀신 소동에 대해 언급한 장면이 실록에 나온다.

몸이 병약하여 평생 동안 고생했는데 특히 피부병과 그로 인한 부스럼이 심해 고름이 한 되나 나올 정도의 종기가 얼굴에 붙은 적도 있었을 정도. 그래서인지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자주 애용한 군주로 가히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고의 온천 마니아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왕이다.[3]

존재감과 개성이 그렇게 뚜렷한 임금은 아니지만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중심으로 빠진 붕당정국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고, 이에만 메달리지 않아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는 등 치적을 제법 많이 남겼다. 더군다나 2차예송 당시에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아버지(=효종)의 위상을 장자(長子)로 확정하고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서인들의 기세가 대폭 꺾일 정도였고, 김수흥 같은 거물들도 군소리 못하는 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러고 나서 한 달여 만에 훙서해서 문제였지만...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조선 역대 국왕 중 과소평가되고 있는 군주 중 한 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째 뚱뚱한 체형으로 묘사되었다. 세종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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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일화 ¶

효종의 부마였던 정재륜이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야사 공사견문록을 보면 현종의 소소한 일화들도 적혀 있다.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저자 정재륜이 효종의 부마였고 그 시대의 사람으로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책이므로 신뢰도는 낮지 않을 것이다. 정재륜(1648~1723)은 효종의 4녀인 숙정공주의 남편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정태화이다.[4]

  • 당시 궁궐에는 광해군의 후궁인 허씨를 모셨던 조씨 성의 상궁이 있었는데 그녀는 현종의 할아버지인 인조인조반정으로 집권한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듯하다. 어쨌든 현종이 탄생한 후 그녀가 현종의 보모가 되었는데, 어느날 어린 현종이 불장난을 하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불로서 나라를 얻은 것을 배우려는가"**라고 중얼거렸다. '불로서 나라를 얻은 것'은 인조반정 때 궁궐이 불에 탔던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건 그야말로 인조의 집권을 비야냥대는 말이다. 현종은 이를 마음 속에 담아 두었다가 뒷날 왕위에 오른 후 조상궁을 불러서 그 일을 거론하며 "내가 그거 그냥 부왕께 일러바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대가 나를 양육한 공이 있었기에 차마 중한 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만 있었다"라고 타이른 후 일단 그녀를 궁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현종은 더 이상 죄를 주지 않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가 먹을 식량을 계속 대 주었다고 한다.

  • 청나라 사신을 서교(西郊)에서 전송하면서 섬돌 위에 나섰는데 청나라 사신이 떠난 후 한 병사가 빨리 걷다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현종과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주위에서 이 병사를 처벌할 것을 건의했으나 현종은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다스릴 것이 있겠는가"라며 곤장 대여섯대를 치는 것으로 끝냈다고 한다.

  • 세자 시절에는 효종에게 새끼 을 바친 사람이 있어서 이 곰을 궁에서 길렀는데 1년 후 곰이 크게 성장해서 사람 말을 안 듣자 내시가 오래 되면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니 죽일 것을 청해서 효종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현종은 "곰이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지만 아직은 그 해를 받은 이가 없는데 지금 만일 앞날의 일을 염려하여 미리 죽인다면 어진 마음이 아닙니다."라며 곰을 산에 놓아줄 것을 청했다. 효종은 현종을 "네가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이라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종 치세에는 예송논쟁의 대립이 격화되긴 했어도 현종의 중재와 교통 정리 덕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가장 큰 형벌을 받은 이가 유배를 간 윤선도. 본격 조선판 테디 베어 근데 이 사람 아들인 숙종은 송시열, 윤휴, 허적 같은 거물들을 죽여버렸다.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닮아서일지도?

  • 실록의 현종행장에 의하면 할아버지 인조가 살아있을 때 표범 가죽을 인조에게 바친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표범 가죽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도로 퇴짜를 놓으려고 했는데, 당시 세손이었던 현종이 "(더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인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표범 가죽을 받았다고 한다.

공사견문록에 기록된 일화들을 보면 무인 기질이 강했던 아버지나 마누라를 닮아서 괴팍했던 아들과는 달리 온화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특히 조상궁과의 일화는 거의 대인배 인증. 조상궁의 발언은 인조의 집권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도 볼 수 있으니 아무리 그녀가 보모였다고는 해도 역모죄로 처형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특히 정통성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던 부왕 효종에게 알려졌다면 바로 목이 달아나고도 남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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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개수실록 ¶

현종실록은 유일하게 실록이 개수된 케이스다. # 수정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의 차이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민점(閔點) 등의 남인인사 주도로 숙종의 독촉하에서 1677년(숙종 3년) 완성된 것이 현종 실록이라면, 1680년 경신대출척(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 顯宗改修實錄》을 내었다. 이 개수실록은 부실하게 지어진 현종실록을 대체한다는 의미를 가진 만큼 처음부터 갈아엎었고, 기록도 현종실록보다 훨씬 길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8%84%EC%A2%85?action=edit&sect ion=7)]

2.5. 가족과 후일담 ¶

1의 현종과는 반대로 후궁 없이 중전 명성왕후(명성황후민씨와는 다르다!) 김씨에게만 충실했는데, 금슬 자체는 그럭저럭 좋았다고 하나 그렇게 사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왕후가 워낙 성깔이 있기로 유명해서 이 때문에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도 한다. 화를 낼 때는 단호했지만 아버지나 아내, 아들과는 정반대로 현종은 기본적으로는 매우 온화한 성품이었다고. 정종처럼 애처가와 공처가의 일면을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명성왕후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두 공주(명선공주, 명혜공주)는 혼례 직전에 급사[5]했고, 왕세자와 막내 명안공주 두 자식만이 혼인[6]을 하고 성인이 되었다. 그나마도 명안공주는 숙종 13년에 2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 참고로 이 때부터 조선 왕조는 점점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했는데 결국 어렵게 왕통을 이어가다가 헌종 때 단절되었고 철종이 간신히 이었으나, 그마저도 단절되면서 왕위를 이을 가까운 왕손이 없다는, 명종 사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까지 가게 된다.[7] 이것은 후기에 들면서 초기와 달리 자손이 귀해진 것도 있고 역모에 거론된 왕족들이 자꾸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또 현종의 치세부터는 공주들의 수난 시대인데 이때부터 공주들은 시집가서 아들이든, 이든 일체 자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식이 아예 없는 경종순종은 일단 빼고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의 딸들은 자식을 낳지 못했고 헌종, 철종, 고종의 딸들은 요절했기 때문이다.[8]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8%84%EC%A2%85?action=edit&sect ion=8)]

2.6. 현종의 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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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경기도 구리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崇陵). 명성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혔다. 숭릉은 다른 점과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정자각이 팔작지붕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능봉상 앞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 전경사진을 올렸나 보다 2011년 현재 이 능은 비공개 능역이었는데 동구릉 관리소 직원에 의하면 숭릉 남쪽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서식하는 희귀 조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색딱따구리나 해오라기, 딱새, 직박구리 등의 희귀한 조류들이 생태군을 이루고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능의 정자각 등에 파손된 부분이 있어 복원 정비 중이며, 동구릉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안전상의 이유로 비공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1월 1일부터 전면 개방. 이제는 찾아가서 볼 수 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8%84%EC%A2%85?action=edit&sect ion=9)]

현종 ¶

조선왕조실록의 언급으로 종기를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종기에서 고름이 한 되 가량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중신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지키는 것을 바라며, 청렴하고 심지가 곧은 고주만을 총애해 수의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주상전하임에도 불구하고 작중 취급이 별로 좋지 않다. 의관 취재 시험 2차의 임상 환자 역할을 자청하여 윤태주와 백광현에게 진단을 받았는데, 고기 위주의 편식을 즐기는 영 좋지 않은 식단 때문에 몸에 병을 키우고 있었다. 백광현은 현종의 신체 상태가 여지껏 의서에 기록되지 않은 병이라고 진단했으나, 내의원에 의해 지엄하신 왕을 능멸했다는 죄로 혜민서 출교 조치가 내려지게 되었다.

때마침 예고에서 현종이 타이밍 좋게 쓰러지면서 백광현의 진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자, 시청자로부터 '현종 잘 쓰려졌다'라는 반응을 얻어냈다(...) 광현의 치료 이후에는 건강을 되찾은 이후에는, 고주만의 서은서 외과술을 허락하는 등의 면모를 보였으며, 고주만이 쓰러졌을 때 백광현에게 실패하면 목숨을 걸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고주만이 죽자, 광현을 사형시키려다 장인주와 딜을 한 이명환의 증언[9]으로 형을 감형, 유배를 보내버렸다.목숨도 살려준 은혜는 까먹었냐며 까이고 있다. 그 뒤 내키지는 않지만 정성조와 이명환이 주장한 혜민서 특별시료청 설립을 허가했다.

3년 뒤에도 광현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은 듯하며, 미복차림으로 잠행을 나갔다가 우연히 합석한 오자봉에게서 디스와 굴욕을 당하고 혜민서의 실상을 듣게 된다. 그리고 광현이 다시 나타나자, 청나라 사신의 설득과 광현의 말을 듣고 그를 용서하였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8%84%EC%A2%85?action=edit&sect ion=10)]

3. 동진 현종(顯宗) 사마연(司馬衍) ¶

동진의 제3대 황제 성제(成帝). 명제의 장남이다. 자는 세근으로 어머니는 명목황후 유씨(이름은 유문군)다.

325년 3월에 황태자가 책봉되었다가 8월에 불과 5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래서 9월부터 어머니 명목태후가 섭정하고 사도 왕도, 중서령 유량[10], 상서령 변호가 보좌했다. 원래 왕도는 관대하고 화합하는 정치를 해서 인심을 얻었지만 유량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해서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역양내사 소준은 동진의 창건에 공이 컸고 성망이 높았으며 정예군 1만을 이끌고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준은 자기의 힘이 강함에 자부심을 느껴 교만하고 오만해지고 유량이 자신을 대접해주지 않자 불만이 생겨 조정을 우습게 여겼다.

이에 유량은 소준을 대사농에 임명하고 병권을 박탈하려고 했지만 소준은 무시했고 328년 예주 자사 조약과 함께 유량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건강에 쳐들어가 사마연을 사로잡고 석두성으로 데려갔다. 조정이 맞서려고 했으나, 황제가 포로로 잡혀 어쩔 수가 없었고 어린 사마연은 눈물을 흘리며 가마에 올랐고 모든 사람들은 통곡했다. 석두성에서 사마연은 곳간에 감금되었는데 소준이 자주 와서 비웃으며 악담과 저주를 했지만 태연히 매일 효경과 논어를 읽었다. 한편, 유량은 심양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강주자사 온교, 서주자사 치감[11], 정서대장군 도간[12]과 함께 329년 2월에 마침내 소준을 제거하고 사마연을 구출했다. 소준의 머리는 효수되고 시체는 불태워졌으며 그 재는 모두가 마셨다. 사마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었고 자란 후에 정사에 온 힘을 기울여 법률을 간소화시켰으며 궁중 동사 내에 활터를 만들려다가 황금 40냥이 든다는 소리에 취소할 정도로 검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342년 6월, 22세의 나이로 죽고 7월에 흥평릉에 안장되었다. 장남 사마비가 겨우 2살이라서 동생 사마악이 즉위하니 그가 강제다. 사마비는 나중에 사마악과 그 아들 목제 사마담이 요절하자 황제가 되니 그가 애제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8%84%EC%A2%85?action=edit&sect ion=11)]

4.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

의 제6대 황제. 당현종 참고. 위의 군주들은 顯宗이지만 이 황제는 玄宗이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8%84%EC%A2%85?action=edit&sect ion=12)]

5. 일본의 23대 겐조 덴노 ¶

이 사람도 한자로 하면 顯宗天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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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록에는 현종의 승하 장소가 창덕궁 '재려(齋廬)'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보감에는 '여차(廬次)'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재려는 '제사를 지내는 곳', 여차는 '상주가 상중에 지내는 움막'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종이 죽기 2개월 전에 모후 인선왕후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양심합은 창덕궁 대조전 남쪽에 있는 별각으로 현종은 이 건물에서 주로 정무나 경연 등을 보거나 침이나 뜸도 맞곤 했다.
  • [2] 그러나 사극의 소재거리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큰 격변 없이 정국을 이끌어 갔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예송논쟁을 사극으로 만들기엔 현대인 입장에선 그다지 흥미있는 소재가 아니라는 것도 있다. 하지만 아직 경신대기근이 남아있다!
  • [3] 그 외 온천을 자주 애용한 왕으로는 세종, 세조, 숙종, 영조가 있다. 세종은 안질, 세조는 가려움증, 숙종은 어지러움, 영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온양온천이 유명해진 이유가 이 임금들이 모두 여기서 효험을 봤다고 했기 때문. 물론 현종도 온양온천을 자주 이용했다.
  • [4] 여담이지만 부마 재혼 금지 법제화의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숙종 대에 숙정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죽자 전례를 들어 재혼을 청했는데 거절당하고 부마 재혼 금지만 법제화되었다.
  • [5] 당시 둘 다 부마를 정해 놓고 봉작까지 내린 때였는데, 1673년에 두 공주가 4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떴다. 공주들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명선공주의 경우 사망 일주일 전 실록 기사에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공주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부마들의 작호를 유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행해졌다. 그 결과 길일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한 명혜공주의 부마는 작호를 환수하고, 혼례일이 잡힌 명선공주의 경우는 작호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이후 부마 재혼을 금하는 법례 때문에 명선공주의 부마가 평생 모태솔로로 늙을 판이 되자, 현종은 이를 불쌍히 여겨 이마저도 환수하도록 명을 내려 준다.
  • [6] 다만 현종은 명안공주가 시집가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명안공주는 숙종 6년 2월 18일 전 공조참판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와 혼례를 올렸다. 참고로 막내 여동생을 지극히 아꼈던 숙종이 이 날도 승지를 보내 술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오빠가 퀵으로 결혼선물 쏨
  • [7]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는 방계였지만 그래도 중종의 서손으로 명종의 조카이지만,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철종과 거의 남과 다를 바가 없는 사이였다. 그의 할아버지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였고, 은신군의 후손이란 이유로 왕위 계승 순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지만 사실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엄청 촌수가 먼 왕족이었다.
  • [8] 비록 덕혜옹주는 요절하진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대가 끊긴거나 다름없어서..... 항목 참조
  • [9] 외과술을 하다 보면 파상풍이 올 수도 있다.
  • [10] 명목황후의 형제로 사마연의 외삼촌이다.
  • [11] 고아가 된 조카들을 자기 자식들과 더불어 정말 어렵게 키운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 [12] 전원 시인 도연명의 증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