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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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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중국소수민족

1.1. 고대부터 17세기까지

1.2.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 (18세기 후반~19세기)

1.3. 20세기 전반

1.4. 현황

1.5. 이모저모

  1. 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의 등장인물
  2. 북두의 권의 등장인물 위글 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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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소수민족

경고. 이곳은 철수권고 국가·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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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어: ئۇيغۇر مىللىتى (우이구르 밀리티), ئۇيغۇرلار (우이구를라르)
터키어: Uygur milleti(Uygur Türkleri), Uygurlar
영어 : Uyghur
중국어 : 한문(维吾尔) 병음(Wéiwú'ěr,웨이우얼)

중앙아시아, 동시에 중국의 서북부에 있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동투르키스탄)의 튀르크 계통의 유목민으로서 본래 몽골 초원에서 활동하였으나 서쪽으로 이주한 뒤 다양한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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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대부터 17세기까지 ¶

위구르는 중국 기록상 철륵 부족의 일원으로서 약 6세기경 분화되었고 이후 꾸준한 돌궐제국의 적국으로 상대하였으나 번번히 패퇴하였고 713년경에는 돌궐제국의 토벌에 못이겨 일시적으로 당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기도 했다.

위구르는 당(唐)시대에는 꽤나 강성한 국가였다. 대표적인 것이 741년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세웠다가 848년 키르기즈인의 침공으로 멸망한 위구르제국(위구르 칸국). 안록산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를 지원해주면서 수도 장안을 털어먹고, 심지어 당나라 황족인 옹왕이 보는 앞에서 당나라 사신더러 춤을 춰보라고 협박하고, 사신이 거부하자 칸이 직접 매질을 해 죽여버릴 정도로 당나라를 업신여기고 무시했다.[1] 위구르에 바치는 조공 때문에 당나라 사람들의 허리 펼 날이 없었다고 할 정도.

위구르인은 불교를 믿다가 다른 튀르크계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11세기 경부터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 이르면 현재의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이슬람화하게 된다. 한자로는 회흘이나 회골, 회홀 등으로 쓰는데, 한국에서 회교처럼 이슬람에 관한 것들에 회(回)자를 붙이게 된 것은 몽골제국 시대에 이슬람화한 위구르인들이 고려에서 많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중세, 근세의 위구르는 차가타이 칸국과 티무르제국의 지배와 그 외의 여러 중소국가들의 난립이 이어졌다. 그러다 17세기에 이슬람계 종교 귀족인 백산당(ئاق تاغ)의 아파크 호자(ئاپاق خوجا‎)와 그의 후손들이 이 지역-동투르키스탄을 장악했고, 이것이 현대의 위구르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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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청나라 치하의 위구르족 (18세기

후반~19세기) ¶

아팍 호자의 후손들의 통치가 계속되던 중, 1759년, 만주족의 중국 정복 왕조인 청나라건륭제는 서역침략을 계속하였고, 이 지역을 신강(新疆, 신장)이라고 이름 붙이고, 지역의 부족장을 벡(伯克, بەگ)으로 임명하여 이슬람 주민을 통제하였다.

여기서 정확히 해야하는 것은 신장 위구르자치구는 위구르인이 주로 살았던 타림분지(서부)와 준가르인들이 주로 살고 있던 우무루치를 중심으로 한 지역(동부)을 모두 합한 지역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청나라가 준가리아의 준가르인들을 모조리 학살(제노사이드)한 이후, 청나라는 타림분지에 있던 위구르인과 중원에 있던 한족들, 그리고 칼미크인들을 모두 이 공백지로 불러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즉,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한 신강 동부는 원래 준가르인들의 영역이었고, 준가르인들이 제노사이드를 당한 이후에 청나라가 한족과 위구르족을 이쪽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으므로, 동투르키스탄 전체는 위구르족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민족, 사회, 종교적으로 한족과 너무달라 적어도 중국이 이곳을 영토로 삼을 만한 근거가 없다. 거기다 원 주민(준가르인들)이 없기 때문에 저런식으로 귀속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어쨌든 이슬람교도들은 비이슬람교도들인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했고, 이곳에서는 위구르족 말고도, 회족들(한족계 이슬람교들)은 감숙성에서 자주 봉기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종족성 다양성에서 보듯이 단결이 안되었고, 이런 종족간 증오심 외에도 이슬람교의 교파간 문제때문에 서로를 공격하는 팀킬도 자주 벌어졌다. 예를 들어 둥간족(회족)과 위구르족은 종교는 같았지만 자주 살육극을 벌였다. 그리하여 이런 반란들은 모두 청나라에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아팍 호자의 증손자이자 '호자 형제'라는 별명을 가진 부르한 웃딘 호자와 칸 호자 형제는 위구르군을 이끌고 청군에 맞서 싸우지만 패배하여 서쪽의 카슈가르와 옐켄까지 밀린다. 1759년 여름, 마지막 근거지인 카슈가르에서 도주한 호자 형제는 인도로 도망가기 위해 무리 4,000명을 이끌고 파미르 산중으로 도망갔다가 청군에 잡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청의 지배동안 이곳에서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무려 42차례의 봉기가 일어난다. 1820년에는 '호자 형제' 부르한 웃딘 호자의 손자인 자한기르 호자(جهانگیر خوجا‎)가 파미르를 넘어 진격하였다. 1826년, 자항기르는 그를 따르는 백산당의 무리를 이끌고 카슈가르를 함락하고 옐켄, 호탄 등의 도시를 정복했지만, 청나라의 진압군에 패배하고 파미르 산중에서 붙잡혀 처형당하고 말았다(1827년). 19세기 중반, 청이 혼란에 빠지면서 위구르인들을 포함한 이곳의 회교도들은 일제히 일어나 저항했으며, 카슈가르로 넘어간 자한기르 호자의 일족은 청을 상대로 한 성전을 부르짖었다. 1864년 신강을 비롯하여 중국 본토인 감숙-섬서성 각지에서는 대대적인 무슬림의 반란이 일어났고 청은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이 반란은 단일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여러 세력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팀킬이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서쪽 중앙아시아의 코칸드 칸국에서 넘어 온 야쿱 벡 (ياقۇب بەگ, Yaqub Beg)[2]이 아팍 호자의 후예를 군주로 세워 카슈가르를 근거지로 다른 세력들을 평정하고 위구르인 뿐만이 아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를 믿는 여러 민족을 모아 일곱 도시의 나라라는 뜻의 예티샤르(카슈가리아 왕국)를 세운다. 예티샤르는 카슈가르, 옐켄, 호탄, 아커쑤, 쿠차, 쿠얼러, 투르판 등을 아우르는 이슬람 세력의 통일국가였다. 1872년에는 러시아제국[3], 1873년에는 오스만제국[4], 1874년에는 영국[5]에게 독립 국가임을 인정받았다.

이에 청은 흠차대신 좌종당에게 군사를 주어 신강을 합병하게 했다. 오스만, 러시아, 영국은 야쿱벡 왕국에 서양식 무기를 지원했으나, 좌종당은 태평천국과 염군의 난을 진압하면서 수많은 실전을 겪은 역전의 노장으로 야쿱벡이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여기에 야쿠브 벡은 야쿱벡은 샤리아를 엄격히 적용하는 탈레반식 정책을 밀어붙이는 등, 지나친 이슬람화 정책으로 위구르족 사이에서도 "호로자식"이라고 욕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현지에서 신망을 잃고 있었다. 원거리에서 원정온 청나라군은 둔전을 하면서 보급이 원할치 못할 경우를 대비했다. 1876년, 주둔지 정비를 마친 청나라군은 공세로 나왔고, 야쿱벡군은 변변한 공세도 해보지 못한채 청나라군의 화력에 패하고, 우루무치를 빼앗겼다.

야쿱벡은 영국의 중재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강화하려 했으나, 이미 승기를 잡은 청나라군이 야쿱벡의 요구를 들을 필요가 없었고, 계속 밀어붙였다. 야쿱벡은 추격하는 청나라군을 피해 중앙아시아 깊숙히 가다가 홧병이었는지 급사했다. 이것으로 야쿱벡 왕국은 청군에게 멸망하고, 신강은 다시 청나라의 영역이 되었다(1876년). 청나라는 이곳에 신강성을 설치하고, 이는 중화민국때까지 내려오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생기자 이곳은 신장자치구가 된다. 야쿱벡의 미성년자 아들들은 청나라에 잡혀 거세되어[6] 환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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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세기 전반 ¶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조정 자체가 붕괴하면서 위구르는 1930년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임시정부(제1차)를 세우고 다시 독립을 선언했으나, 후에 국민당 소속의 한족 군벌인 성스차이가 이곳을 침략하고 이곳에 진주하였다. 그래서 다시 이곳은 중화민국의 영역이 된다.

성스차이는 엄청난 기회주의자로서 국민당 정부에 의해 신장성장에 임명되었으나, 신장국경을 맞댄 소련의 힘이 커지자 소련에게 접근했고, 중국인으로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근처인 산시썽에 본거지를 둔 중국공산당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마오쩌둥의 동생인 마오쩌민을 이곳에 연락담당으로 머무르게 하기도 했다. 이당시 성스차이는 국민당-소련 사이에서 반독립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이 벌어지고 소련이 대패하자, 갑자기 반공을 외치며 소련인 고문과 마오쩌민을 처형하고 일본에 접근했다. 그러다가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이후 부활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할 것 같자 다시 소련에 접근했다. 그래서 스탈린에게 "잘못했으니까 다시 꼬붕짓 할테니 한번만 봐주셈"이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성스차이의 배신행위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소련은 그 편지를 장제스에게 보냈고, 화가난 장제스는 성차이스이를 농업부장에 임명하는 형식으로 신장성장에서 해임했다. 그가 신장에서 얼마나 해먹었는지 50개의 트럭에 온갖 사치품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되자 곧이어 발발한 국공내전이 벌어지고, 이때 잠시 이곳의 위구르족은 다시 독립을 선언하지만, 공산군이 승리하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내부에서는 정치적 장래를 둘러싼 내분이 생긴다. 결국 1949년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부르한 샤히디(بۇرھان شەھىدى‎, Burhan Shahidi)는 중국 공산당과의 연합을 선언했고, 부주석이었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ئەيسا يۈسۈپ ئالپتېكىن‎, Isa Yusuf Alptekin)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에 반대해 터키로 망명했다. 이로서 동투르키스탄은 중국령이 되었고, 1955년부터 신장 위구르 자치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심 도시는 우루무치(위구르어로는 위륌치ئۈرۈمچ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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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현황 ¶

현재 중국의 지배가 흔들릴 경우, 가장 먼저 독립투쟁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민족으로 꼽히고 있으나 2000년 기준으로 신장의 인구 구성비는 위구르인 835만(45%), 한족 749만(41%), 카자흐인 125만(7%), 기타 8%의 비율이었으며[7], 중국 정부의 정책으로 한족들이 밀려오는 중이다.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머리수에서 밀리는 상황이라 전망은 그리 밝지는 않다. 출산율의 경우도 중국공식 통계에 따르면 2명정도로 많이 높은편은 아니다.

같은 투르크계 국가인 터키는 인구의 최소 10-15%를 차지하는 쿠르드족 탄압하느라 바쁘고 내부에 혼란까지 심해져 도울 형편이 안된다. 또한 주변 이슬람 국가중 최대인구를 자랑하는 파키스탄마저 친중정책의 일환으로 위구르독립단체를 테러단체로 명시하고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기 때문에 외국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어 보인다.

물론 중국정부로서는 가장 골치 아픈 곳이다. 2009년 7월 5일부터 이곳에서 위구르족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해 진압한다고 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2008년 티베트사태의 재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사건으로, 중국은 2008년과 마찬가지로 강경진압으로 일관하였고, 위구르족의 대응은 점차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으로 격화되었다. 터키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인에 대한 폭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알카에다는 중국 정부를 규탄하며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애초에 위구르인들의 주 종교가 이슬람교이므로 이슬람 과격파인 알 카에다의 개입의 여지는 있어 왔다. 인도파키스탄의 갈등이 고조되는 카슈미르와 붙어 있는 점도. 결국 7월 19일 중국의 발표로만 사망자 197명, 부상자 1,721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망명 위구르인 조직인 '세계위구르회의'는 중국 당국과 한족의 공격으로 살해당한 위구르인은 최대 3,00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러시아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유라시아연합에 상당부분 영향을 끼칠 것이 확실시 되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만큼은 중국과 러시아가 미묘한 관계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도와 이들 지역에 매장된 수많은 자원들은 러시아가 서방 쪽으로 기우려는 동유럽보단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집중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8] 참고로 카자흐스탄은 우크라이나보다 경제규모가 큰 국가. 과거 소련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이들과의 경제통합은 경제블록간 주도권 다툼이 가열되는 국제 외교환경속에서 러시아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9] 2015년 1월 공식출범을 앞둔 유라시아경제연합은 그 출범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러시아는 2014년 4월 창설 준비위원국(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총리 회담을 마친 후 "모든 부분에 대해 사실상 합의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는 사실상 러시아가 EEU(유라시아경제연합)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회원국 간 통합과정을 진척시켜 EU와 비슷하게 단일통화를 쓰는 수준에까지 이르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중국 역시 구상하고, 또 야심차게 추진하는 신(新)실크로드 경제권과 경쟁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데,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은 신(新)실크로드 벨트와 유라시아 경제연합의 존재는 두 나라를 껄끄로운 관계에 놓이게 하고 있다고 보고있다.

2014년 3월 1일 중국 윈난성 쿤밍역에서 위구르족 무장단체에 의한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신장 분리주의 테러 단체에서 자행된 이 사건은 10명의 남성과 1명의 10대 여성이 1m의 위구르 전통 장칼을 휘두르면서 발생하였다. 당시 역을 지키던 경찰은 예상못한 터라 곤봉으로만 무장하고 있어서 경찰도 2명이 사망하였다. 10명의 테러리스트들은 결국 출동한 무장경찰들한테 사살되었고 1명의 10대 여성 테러리스트는 생포되었다. 이 사건에 따라 29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17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위구르 족 역대 테러 사상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중국 전체를 경악하게 만든 것은 안봐도 비디오.

2014년 7월 31일, 중국 당국은 저명한 위구르족 경제학자 일함 토티 중앙민족대학 교수를 '국가 분열죄'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토티 교수는 신장자치구의 독립을 요구하는 동투르크스탄 외부 세력과 신장의 독립운동을 고취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9월 18일, 이틀간의 공판이 마무리됐는데, 중국 당국은 공판이 열린 신장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시 법원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AP통신은 공판을 참관하려는 서방 외교관들이 공안에 막혀 법원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고 전했다. 유엔과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중국 정부의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제히 토티 전 교수의 석방을 촉구했다.

2014년 9월 23일, 결국 토티 교수가 '국가 분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AFP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은 이에 대해 즉각 반발하며 23일 낸 성명에서 "토티 전 교수와 같은 시민사회 지도자는 중국 내 민족 갈등의 근원을 해결하는 필수적 역할을 한다"며 "이들이 평화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이런 가혹한 선고는 중국 내 위구르족의 인권을 신장하려는 토티 전 교수의 평화로운 노력에 대한 응징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유럽연합도 성명을 내고 "이번 판결은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라며 토티 전 교수를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일함 토티교수가 위구르 온라인이라는 사이트를 설립한후, 지속적으로 이 사이트에서 위구르족들에게 반국가사상을 주입해 왔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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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모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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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테러모의혐의로 중국공안당국에 체포된 위구르족 운동가들.

위구르라는 이름은 원래 중앙아시아 민족을 총칭하는 의미였지만 현재 위구르족은 과거의 위구르와는 혈연적으로 많이 다르다. 위구르라는 이름도 후대에 붙인 이름. 현대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유대인과 비슷한 존재.

현재는 위구르의 대모(代母) 라비야 카디르(رابىيه قادىر)가 독립활동을 지휘하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반동분자로 찍혀서 국외로 추방당한 상태다.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만큼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사용언어는 위구르어이며 세로로 쓰는 위구르 문자가 있었지만, 중공 수립 후 1982년까지는 라틴 알파벳을 차용하다가 현재는 아랍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문법체계가 발음에 관한 문법을 빼고 한국어와 약 90% 정도가 흡사하다. 문장구조가 완벽하게 한국어와 같기 때문에 조사단어만 배우면 한국인은 쉽게 위구르어를 구사할 수 있다.

한국의 (恨)이라는 감정과 매우 흡사한 감정표현을 위구르도 가지고 있고, 명절에 그네타기와 한국의 씨름과 흡사한 위구르식 씨름놀이, 널뛰기를 한다고 한다. 그래도 환빠 드립은 금물이다

서울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위구르의 유물 컬렉션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승려이자 도굴꾼이었던 오타니 고즈이가 투루판과 둔황 등지에서 약탈한 문화재로 이 중 일부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흘러들어가서 현대까지 남아있는 것. 일제시대, 한국전쟁은 물론 (본의는 아니었으나) 문화대혁명 등 중국의 지속적인 문화파괴 정책을 피해 살아남은 훌륭한 유산. 이걸 중국에게 돌려줘야한다는 주장도 있고, 위구르족이 독립 한 후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도 있다.

참고하자면, 이 오타니 유물엔 오래 전 중국이 실크로드 교역할 때의 유물들이 많다. 그리고 위구르족은 18세기말 준가르부가 청나라군에 절멸된 다음에야 청나라의 정책으로 이곳으로 이주해 산 것이다. 그래서 아주 엄격히 보자면 위구르족이 이 유물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위구르어의 발성법과 일부 단어들은 터키 남동부지방의 터키어 사투리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 지방 출신들은 위구르어를 들으면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략 60% 정도는 알아듣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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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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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두의 권의 등장인물 위글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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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옹왕은 위구르를 극렬히 증오하여 나중에 황제가 됐을 때 그들과의 동맹 맺기를 거부하다가 신하의 간절한 조언으로 겨우 위구르와 동맹을 맺었다.
  • [2] 타지크인 혹은 우즈벡인으로 추측된다.
  • [3] 당시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거주지역 대부분을 석권, 위구르와 국경을 맞댄 주변국이었다.
  • [4] 당시 이슬람교 세계의 종주국과 같은 나라였다.
  • [5]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이 당시 영국령으로, 위구르와 국경을 맞댄 주변국이었다.
  • [6] 현재 기준으로는 잔인하지만 연루되지 않았다고 해서 인도적인(...) 견지에서 사형대신 거세형을 당한 것이다 사형보다는 고자가 인도적이다.
  • [7] 1950~60년대에는 위구르족이 절대 다수였으나, 한족들이 유입되어서 비율이 바뀌었다. 특히 우루무치는 한족이 무려 75%에 이른다고 한다.
  • [8] 특히, 세르비아는 2018년까지 EU가입 조건을 충족시키고 2020년까지 EU에 가입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와 더불어 나토가입의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그외의 동유럽과 중부유럽 국가들은 이미 서방 세력권으로 편입했거나(2002년 12월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발트3국, 키프로스, 몰타, 폴란드, 체코 등의 신규가입, 2007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가입, 2013년 7월 크로아티아의 신규가입) 편입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2009년 12월 몬테네그로와 EU간 비자면제 시행과 몬테네그로 정부의 EU와 나토가입 추진, 2010년 12월 알바니아와 EU간의 비자면제 시행과 2013년 9월 알바니아의 국정목표로 EU가입 추진, 보스니아의 EU가입 추진, 2014년 EU와 조지아-몰도바와 협력협정 체결 추진 등) 이러한 경향은 러시아와 유대관계가 높았던 우크라이나에서 조차도 일어나고 있는데, 비록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을 했지만 야누코비치 정권 시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무척 좋은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면 서부 지역의 친 EU정부 수립은 어쨌거나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 [9] 참고로 카자흐스탄에는 러시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와 여러 군사훈련 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키르키스스탄에도 러시아의 공군기지가 있다. 타지키스탄에는 7000명의 러시아 병력이 주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