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드라마 Sharpe's Waterloo
전투장면의 보병들을 참고할 것. 숀 빈이 연기한 샤프 대령이 입은 녹색 제복과 그와
비슷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전열보병이 아니라 경보병인
라이플맨들이다.
영화 패트리어트[1]
"게이츠는 빌어먹을 멍청이야. 영국군에 너무 오래 있었어. 레드코트와 야지에서 전면전이라니, 미쳤지.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진거야."[2]
(4:10) 영화 군주의 하인(Sovereign's Servant) 中
![http://imageshack.com/a/img34/5333/0eh3.jpg](http://imageshack.com/a/img34/5 333/0eh3.jpg)
戰列步兵
Line infantry(英)
Infanterie de ligne(佛)
- 정의
- 역사적 배경
- 전열보병은 왜 이렇게 싸웠는가?
3.1. 근본적인 원인: 머스킷
3.2. 부수적인 원인- 병사들의 낮은 사기?
3.3. 전열보병의 싸움은 단순한 소모전이었나?
- 훈련
- 쇠퇴
- 이 시대 각국의 군복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1)]
본격적으로 머스킷이 전장의 주역이 되면서 그에 따른 전법으로 열을 짜서 싸운 보병을 가리키는 말. 영어로는 line Infantry라고 한다. 17세기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7년 전쟁에서 그 위력을 과시하였다.
참고로 전열보병이 사용하는 진형인 선형진(line formation)이나 전술인 선형전술(linear tactics)을 보고
인터넷에서는 라인배틀이란 용어를 쓰는데, 틀린
것이다. 그리고 라인 오브 배틀(line of battle)이란 용어가 있으나 이것은 해상전술 용어다. [3]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2)]
화승총이 전장에 등장했지만 초기의 총은 상당히 조악한 무기였다. 장전 속도도 느렸으며 명중률도 썩 좋지 않았고,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무기였다. 하지만 상대방 장갑을 일격에 꿰뚫는 위력과, 활처럼 오랜 훈련이 없이도 숙련될 수 있는 총은 매력적이었기에 서서히 보급된다. 초기 총은 명중률이 낮았기 때문에 위력을 보려면 집단으로 운용해야 했고, 그러면서 자연히 보병들이 밀집한 형태의 진형을 갖추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당대의 총병은 근접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상대방 기병이 들이닥치면 꼼짝 없이 사냥 당할 운명이었다. 그 때문에 장창병이 밀집하여 적 기병의 돌격을 막는 동안, 총병이 총을 쏴 공격했다. 이 간단한 아이디어의 선구자인 에스파냐 테르시오는 이후 약 60년에 걸쳐 무적으로 유럽에 군림하며 그 전과에 주목한 각국도 비슷한 전술을 모방하게 된다.
전장환경의 변화로 기존의 강력한 기병의
랜스돌격이 전장에서 거의 사라진 후(물론
프랑스에서는 폴란드창기병 같은 창기병 운용을 선호해서 대기병전, 대포병전, 대보병전 할거없이 가리지 않고
썼지만, 과거의 그 무거운 랜스의 활용은 사라졌다), 장창병 역시 필요성이 줄어들어 점차 줄어나갔으며, 또한 잔존한 기병들도
보병화력의 증대로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전장의 주역이 보병으로
옮겨간 후 총의 비율은 계속해서 높아져가 16세기 말에는 50%를 넘기기 시작하였고, 테르시오가 로크루아에서 불패 행진을 끝냄과 동시에
사라짐으로서 마우리츠가 제창한 선형진[4]
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마우리츠식 선형방진의 전면적 보급을 확고히 한 것은 플러그식 총검이 등장이었다. 이것으로
기존의 창이 가지던 임무는 자연스럽게 머스킷에 적용될 수 있었고 점점 줄어들던 파이크는 완전히 사라졌다..
[5]
때문에 창과 총을 겸하는 당대 "최고의 무기"인 총으로 "최선의 전투방법"을 찾다보니 어느새 전열을 갖추고 사격을 주고받게 된
것이었다. 산개가 원칙인 현대 보병에 대한 선입견 떄문에 이해가 힘들다면 총을 창의 대체라고 이해하면 저런 방식의 선형진을 이해하기가 쉽다.
진형을 이루고 창검을 맞붙이는 중세 백병전에서 냉병기를 그저 총으로 대신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에 대포의 정확도와 구경이 증가하면서 이전처럼 밀집 대형을 이루면 순식간에 몇십명이 몰살당하게 되는 부분도 있었고, 창과 달리 총은 최대한 많은 수가 동시에 발사할때 화력이 나오기 때문에 대형은 2~3열 정도로 얇아지면서 대신 횡대로 길게 늘어나게 되었다. 기술 발달로 매치락이 플린트락으로 대체되어 12열씩 늘어서지 않고도 3열 이내에서 순차적으로 장전-사격을 나눌 수 있게 된 점도 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3)]
요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전열보병들의 전투 방식은 코앞에 적을 두고 일렬로 마주서서 총을 쏘는, 어찌보면
매우 신사적이고 어찌보면 몹시 우스꽝스러운 방식의 전투이다. 실제로 퐁트누아 전투에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서로 먼저 쏘라고
선빵을 양보하는 웃지 못할 광경까지 연출되었다.[6]
오늘날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열 맞춰서 마주 서서 쏠 것 없이 흩어져서 엎드려 쏘면 우습게 이길 것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런 전투 형식이 고집되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4)]
흔한 편견과 달리 머스킷이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정확도가 떨어지는 무기는 아니다. 머스킷이 너무 안 맞아서 엄폐가 필요없다거나 목표물에 대고
쏴야 맞는다는 과장된 말은 오해거나 훈련 강도가 대체로 낮았던 당시 병사들의 투정에 불과하다. 만약 머스킷이 그 정도로 명중률이 나쁜
무기였다면 애당초 대량으로 보급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민간에서 사냥도구로써 활을 밀어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7]
물론 수십미터의 근거리를
벗어나면 탄도의 불안정이 심해져 명중률이 떨어지며 1747년에 발표된 벤자민 로빈스의 논문에 따라 발사체의 명중률을 올리기 위한
강선(라이플)과 유선형
탄환을 도입한 후대의 소총과 비교하면 민망하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숙련된 사수의 손에 들어가면 약 70~80미터 정도 거리의 사람 몸통
크기의 목표물을 조준사격으로 명중시킬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투브에서 머스킷 사격 영상들을 살펴보면 흔히 생각하는것보단 명중률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숙련된 사수'를 구하거나[8]
키우는 것[9]``[10]
은 몹시 어려웠고, 게다가
흑색화약의 매연은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병사들이
두 세번만 사격을 주고받아도 시계(視界)가 거의 0에 가까워, 조준사격을 하고 싶어도 적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전장 상황 때문에 사격의
효과를 확률적으로 극대화 할 수 있는 면 단위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11]
게다가 명중률과는 달리 훈련이나 기타 노력으로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머스킷의 장전 방식과 속도였다. 우선
전장식 머스킷은 길다란 관의 열린 끝에서 막힌 끝까지 화약과 총알을
쑤셔넣는 방식으로 장전을 한다. 따라서 선 채로 장전하면 중력이 장전을 도와주지만[12]
, 은엄폐를 위해 엎드리거나 누운 채로는 사실상
장전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무리 빨리 장전하더라도 머스킷의 발사 속도는 훈련상황과 같은 최적의 조건에서조차 1분에 3~4발이 한계였다. 이렇게 공격 속도가 느린 보병을 산개해서 배치하면 적의 기병이나 수백명씩 떼지어 착검돌격하는 적 보병에게 각개격파되어 전멸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퐁트누아 전투의 사례에서 서로 선빵을 양보한 것은 단지 겉멋든 신사들의 허영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 쏜 뒤에
장전하느라 한 자리에서 멈춰 서 있으면 그만큼 이쪽은 더 전진해서 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당연히 전열에서 뿜어내는 탄환의
밀집도도 올라가기 때문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항목 맨 위에 걸려 있는
패트리어트의 전투신에서도, 먼저 사격한
대륙군은 영국군에게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한 반면, 영국군이 피해를 감수하고 대륙군이 장전하는 동안 더 다가가서 사격하자 한번의
일제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전열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프렌치-인디언전쟁 중 퀘벡 전투에서도 영국군은 프랑스에게 선제공격을
받으면서도 적을 18미터 안까지 끌어들인 다음에 발포하여 프랑스군 중앙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13]
. '신사들의 허영'도
사실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전열보병과 동시대에도 산개대형으로 은엄폐한 채 조준사격을 하는 경보병은 존재했지만, 이들 역시 엄폐물이나 아군의 엄호 없이는 적병의 먹이감일 뿐이었다. 때문에 산개한 경보병 부대들은 정찰과 교란 용도로나 쓰이며, 회전 이전에 선두에 서서 본대인 전열보병의 움직임을 가리거나 보조하는 정도였다. 이들조차 필요할 때는 산개하는 대신 밀집전열을 짜고 교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강선과 미니에탄 등을 적용해 명중률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신형 라이플이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전열은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소총의 명중률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전장식 소총의 화력 한계가 더 본질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존 지휘관이나 군 규율의 경직성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에 어울리는 새로운 전술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점도 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5)]
전쟁사 서적 등에서, 전열보병들이 방진을 이루어 싸운 이유 중의 하나로 군인들의 낮은 사기를 드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
우선 맞는 부분은 확실히 전근대~근대 초기의 많은 국가에서 병사들의 충성심이나 사기가 영 믿을 만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과거 18세기 초
유럽 국가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이었다. 생존 이외에는 딱히 싸워야할 이유가 없었던 이들은 당연히 사기가 그다지 높지 않았고,
이들을 지형을 이용해 엄폐하도록 산개시켜둔다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라든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지휘관의 통제가 느슨해지면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부대가 와해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현대의 군대도 이 점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근대
민주주의 사상이 퍼진지 얼마 안 되어서 '피지배 계급'이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의식을(즉 '피지배 계급' 자신도 국가의 정당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던 이 시기와,[14]
대부분의 국민이 자기가 사는 나라를 "자신의 나라"라고 여기는 민주화된
현대의 국가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장교들이 귀족층이라는 것도 이런 생각을 크게 부채질했다. 신분 차별이 당연했던 시대인지라 귀족들은 전장에서 스스로 용감하게 싸우지만
하층민인 병사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쉽게 도망칠거라는 편견에 가득찬 시각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19세기만 해도 '영국 안에는 두 개의
나라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므로, 신분제에서 비롯되는 사관과 병사간의 불신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이 편견 문제는 절대로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리고 전쟁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전열보다는 산병전이 더 나은 상황이 곧잘 발생했지만 이 때에도 귀족
지휘관들은 계속 전열을 고집했고 그 결과 많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5]
하지만 이러한 사기의 문제를 전열보병의 전술이 지속될 수밖에 없던 근본 원인으로 보는 것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혁명 이후 프랑스 민족주의의 고취와 고참병들로 이루어져 사기가 충천했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16]
도 어김없이 전열을 이루어 싸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의 완벽히 근대적인 국민국가의 병사들이 상당수 자의로 참전한 남북전쟁이나 보불전쟁에서도 여전히 전열이 유지된 것을 보면 단순히 **"사기 엉망인 오합지졸들 탓에 전열을 유지하면서 싸워야 했다"**라는 명제는 전혀 맞지 않다. 프랑스군과 같이 병사 개개인의 사기가 높은 군대나, 영국군처럼 병사들의 훈련 수준이 높은 군대의 경우 당대의 경직된 다른 군대에 비해서 상당히 유연한 대형(지형지물을 이용한 산개 대형이나 빠른 돌격을 위한 느슨한 종대 대형)을 사용하기가 수월하였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야전에서 적과 화력으로 맞서야 할 때는 일반적인 횡대로 전열을 짜 싸웠다. 이는 전술했던 대로 머스킷이라는 화기의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병사들의 낮은 사기'는 경우에 따라 지휘관들이 비효율적인 선형 전술을 고집하게 만드는 원인이나 선형 전술의 부수적인 효과정도는 될 수 있으나 선형 전술의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결국 머스킷의 낮은 연사속도와 부족한 명중률이야말로 숙련병들조차도 야전에서 전열을 이루어 싸울 수밖에 없도록 한 원인이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6)]
전열보병끼리 기동할 공간이 딱히 없는 좁은 전장에서 소규모 제대끼리 싸울 때, 혹은 쌍방의 지휘관들이 전술을 모르는 멍청이들일 때는 그야말로 양쪽이 서로 무너질 때까지 총을 쏘다가 한쪽의 전열이 무너지면 총검돌격으로 마무리되므로 마치 소모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열보병의 시대가 바로 인류사상 최고의 전쟁 천재라 불리는 바로 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대라는 것을 상기하자. 병사 하나하나의 입장에서는 이런 전열보병의 전투가 답답한 싸움법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뒤에서 이를 지휘하는 장군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그리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우선 통신과 도로 사정이 열악한 당시 기준으로는 전장까지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부터 치밀한 전략적 판단을 요하는 일이고, 회전을 벌일 때에도 전장의 상황에 맞추어 보병들을 기동시키고 기병을 투입시키고 예비대를 활용하는 등 끊임없는 계획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의 경우 자신이 수적으로 분명히 열세였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력과 부하 장군들의 용전으로 싸움에서도 이기고 사상자도 적군보다 훨씬 적게 냈다. 아우스터리츠 외에도 전열보병 시대의 많은 주요 전투들이 현재까지도 전쟁사 연구가들이나 각국의 사관학교에서 연구과 교육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전열보병의 싸움이 단순하게 보일지라도 아무 의미 없는 머리수 싸움이나 소모전인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이게 소모전이면 시대를 막론하고 보병전투는 모두 무의미한 소모전이라는 소리와 똑같다.
전열보병의 시대는 전쟁을 개인의 무용이나 일부 지휘관의 카리스마보다는 잘 정비된 보급체계와 관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보고서에 더 의존하게 만들었다. 전술은 단순한 상황 판단력과 임기응변을 넘어서서 수학적 연산을 요구하는 학문체계가 되었고, 결국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wiki/%EC%B9%B4%EB%A5%BC%20%ED%8F%B0%20%ED%81%B4%EB%9D%BC%EC%9A%B0%EC%A0%9C%E B%B9%84%EC%B8%A0)의 전쟁론과 같은 서적이 나오기에 이른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7)]
"전열"은 중요했으며, 전열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그 보병군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는것과 같았다. 1분 1초가 급박한 전투에서 한번 무너진
대형을 다시 가다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전열보병은 머스킷의 조악한 명중률을 집단 사격과 대열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화력을
투사했다. 이를 위한 제식훈련과 행군, 대형 유지는 매우
중요하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가혹한 군기와 세뇌에 가까운 훈련이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했다고 전해지는 명언 "제식은 전력이다." 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17]
단순히 머스킷의 화력 투사에만 관련한 것은 아니고, 보병의 생존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제식 훈련이다. 길게 횡대로 늘어선 선형진의
경우 적의 포병 세력으로부터 받는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기병대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고, 보병들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진을 구성한 방진의 경우 기병의 돌격을 무력화시키는 데에는 좋았지만 포병들의 사격에 무력했고 대열이 좁아지므로 상대적으로 대열이 넓어 더
광범위한 화력을 투사하는 상대 보병의 선형진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 때 상황에 맞추어 능수능란하게 진형을 바꿀 수 있어야 했고,
이를 실패할 경우 해당 제대의 생존률은 극도로 떨어졌다. 당장 위의 Sharpe's Waterloo를 보시라.
사실 머스킷의 명중률이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겨우 100야드(90m)떨어진 곳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서 포화를 교환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 태형이 성행했는데, '100% 죽는 사망플래그항명을 선택하느니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는 전열에 서고 말지' 정도의 수준이었다. 영국군 레드코트들이 멋있어 보이지만, 태형으로 인해 죽거나 병신이 되는 비율도 상당히 많았다.
특히 영국군이 악명높았는데 채찍질 100대 정도는 기본이고 300대, 500대, 900대 형도 존재했으며 최고는 1200대까지도 가능했다.
다만 유의할 것은, 전열보병 시대의 체벌은 어디까지나 장교의 명령에 따라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군법상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규정상의 근거 없이 선임병 혹은 상급자의 기분에 따라 아무 기준 없이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본군같은 닥치고 구타와는 다르다. 또한 태형은 국가별 차이가 커서, 모병제로 병력 자원의 질이 상당히 낮았던 영국군이나 봉건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프러시아군 등에서는 태형이 강력했지만 프랑스군의 경우 프랑스 혁명 이후엔 군 내 태형이 아예 금지되었고, 그럼에도 군기가 잘 유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모든 국가 모든 병사들이 쓴 플린트락 머스킷의 경우 지금
가격으로 따지면 개당 100만원을 호가하는 생각보다 비싼 무기였다.[18]
따라서 전투중 머스킷이 불발될 경우의 응급 대처 요령 또한
훈련받았으며, 모든 절차를 밟았음에도 발사가 불가능한 경우 (물론 소대장의
허가를 받고) 전열 이탈도 허용되었다. 물론 그러기 전에 보통 죽거나 다친 동료의 머스킷을 이어받는다(…).[19]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8)]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을 만들어낸 각 요인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기술의 발전과 사회 변화를 통해 하나 하나 제거되었다. 총기의 낮은 명중률은 라이플과 무연화약의 등장으로, 느린 장전 속도는 후장식 소총의 등장으로, 낮은 사기의 병사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지원제 상비군의 등장으로 사라지면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보어전쟁에 이르면 산개 대형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전훈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보어전쟁 이전인 남북전쟁에서도 전열보병식의 전투 방식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이 당시 남군이나 북군의 일부 부대는 후장식 소총으로,
심지어 연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총알이 많이 낭비된다(...)는 이유로 윗대가리들[20]
이 일반 알보병에게 지급한 전장식의 제식
소총도 뇌관식 적용에 미니에탄을 써서 발사속도나 명중력이 크게 향상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구태스런 전투 방식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상했고,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상자의 숫자는 훗날 1,2차 양차대전에 희생된 미군의 숫자보다도 더 많을 정도였다[21]
.
이후 제1차세계대전에서 기관총이 본격적으로 실전에 투입되면서 밀집 대형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자살 행위가 되었으며 실제로 19세기식 구식전술과 상급지휘관들의 병맛 넘치는 감투정신 강조로 인해 많은 전투에서 참호에 설치된 기관총을 향해 무작정 전진하는 병맛 넘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전쟁 후반기 본격적으로 제병협동전술이 발달하게 되면서 전열보병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전열보병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특유의 각잡힌 멋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인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제식을 통한
집단행동은 소속부대원간의 유대감이나 부대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며,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버릇을 몸에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알을 한 탄창에 30발씩 넣으면서 1초에 12발씩 쏟아내는
돌격소총이 판치는 오늘날에도[22]
군대의 열병식이나
'받들어 총'으로 대표되는 제식동작, 그리고 군대의 예식이 있을 때 입는 정복 및 예복
등에 전열보병 시대의 흔적이 면면이 남아 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A0%84%EC%97%B4%EB%B3%B4%EB%B3%9 1?action=edit§ion=9)]
전열보병의 화려한 제복은 위장이 아닌 아군 구별과 사기 증진이 목표이기에 당시 유럽 군사들은 다들 각자 색깔을 정해서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이때의 군복에다가 가슴에 흰색 끈으로 친절하게 / 혹은 X자로 차려입은건 '여길 쏘시오'(...)가 아니라 연기가 자욱한 전장에서 지휘관에게 '우리 여기 있소'의 메세지가 담긴 것이다.
- 영국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7/British_old_infantry_unif orms.jpg?width=600](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7/British _old_infantry_uniforms.jpg)
[[JPG external image]](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7/Brit ish_old_infantry_uniforms.jpg)
레드 코트. 이 분야에서는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름대로 제복은 붉은색
계열. 하지만 해군과 특수 병과는 파랑, 경보병은 녹색을 입었다고 한다. 멋진 제복과는 달리 이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위 짤에서는 시대별
변화상을 볼 수 있는데, 18세기에는 검열삭제
같이 생긴 샤코를 쓴 모습을, 19세기 초에는 스펀툰을 든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다.
![http://the89th.uppercanadianheritage.com/images/2006Erie28.jpg?width=500](ht tp://the89th.uppercanadianheritage.com/images/2006Erie28.jpg)
영국 경보병. 단, 모든 경보병이 이런 녹색 제복을 입은 것은 아니며 레드코트를 입은 경우도 많았다. 저 녹색 제복은 경보병 중에서도 라이플
연대만 입었다. 일반적인 머스킷이 아니라 강선이 파인 베이커 라이플[23]
로 무장했고 전열을 이루어 싸우기보다 산개대형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흔히 그린 재킷이라고 불렸고 정예병 취급을 받았다. 위의 샤프 대령의 제복을 보면 이 제복이다. 원래 제95 라이플 연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려 91m에서 274m에 달하는 교전거리를 자랑했고 아서웰즐리 휘하에서 싸운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서는 토머스 플렁켓이라는 병사가 600m에 달하는 거리에서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리 프랑수아 콜베르 장군을 저격하는데에 성공했다. 당시
전열보병들이 쓰던 머스킷 수준이 50m 밖에서 명중을 보장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상기하자. 이렇게 뛰어난 명중률이 보장되었으니 밀집대형보다
산개대형을 선호한 것이고 허용된 것이다. 여담으로 일반적인 전열보병의 총검과는 달리 21인치[24]
짜리 대형 총검이 지급되었는데 라이플이
일반적인 머스킷보다 짧을 뿐더러 워낙 재장전이 늦다보니 자위용 무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즘 미군 보병들이 권총을 따로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단, 이 총검은 일반 전열보병들의 총검과는 달리 단독으로도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상 숏소드 정도의
물건을 따로 들고 다닌 셈. 일반적인 머스킷에 장착하는 총검은 단독으로 쓰기엔 좀 어려운 소켓식 총검인 경우가 많았다.
- 프로이센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img/Prussian_infant ry_1812_14.jpg?width=600](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 .com/img/Prussian_infantry_1812_14.jpg)
[[JPG external image]](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 m/img/Prussian_infantry_1812_14.jpg)
프로이센은 주로 파랑/진녹색 계열의 군복을 착용했다고 한다. **프러시안블루**가 여기다가 쓰려고 나온 색. 짤에서 Musketiere('머스킷총병'의 복수형)로 쓰인 보병들이 전열보병.
- 프랑스
![http://members.upnaway.com/~obees/soldiers/nap_uniforms/n9.jpg?width=500](ht tp://members.upnaway.com/~obees/soldiers/nap_uniforms/n9.jpg)
프랑스 역시 파랑의 군복을 착용. 좌측부터 경보병인 볼티져(Voltigeur), 전열보병인 퓨질리어(Fusilier), 정예 전열보병인 척탄병(Grenadier), 뒤에 깨알같이 선 2명의 스위스 보병(Suisse) 앞치마를 입고 도끼를 든 공병(Sapeur, 영어의 Sapper를 생각하면 된다.), 북을 든 척탄병 드러머다.
- 오스트리아
![http://i.piccy.info/i4/cf/ae/dd3a8f0fdb35da4db14c6b03636d.jpeg?width=600](ht tp://i.piccy.info/i4/cf/ae/dd3a8f0fdb35da4db14c6b03636d.jpeg)
오스트리아는 흰색의 군복을 착용해서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작센과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 왕국, 나폴레옹 휘하의 이탈리아 출신 보병들도 흰 색의 군복을 착용한 것을 보면 그리 특이하다고 볼 수 없다. 작센군의 경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 측에서 싸웠다. 앞서말했던대로 작센군이 오스트리아와 같은 흰색[25]
제복을 입은 탓에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받아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 양측에게 사격을 여러번 당해서 전열을 무너뜨리고 패주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군과 싸우다가 수적으로 밀려 프랑스군 쪽으로 퇴각했더니 프랑스군이 작센군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오인하고
신나게 쏴제꼈던 것. 게다가 뒤에서는 진짜 오스트리아군이 추격하며 역시 신나게 쏴제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프랑스군도 작센군을 아군으로 쓸
생각이 있었다면 자기네 푸른 제복을 줬어야 했다. 군복의 통일과 제식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부분.[26]
\----
[1]
이 영상에서 영국군 군악대가 연주하고있는 음악이 그 유명한 The British Grenadiers이다.[2]
당시 영국의 전열보병은 영국의 막대한 군비에 힘입어 유일하게 실탄을 이용하여 훈련했기에 당대 유럽에서 뛰어난 훈련도와 강함으로 위명을 떨쳤다. 민병대 수준을 겨우 벗어난 당시 미국 전열보병들이 전면전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위 영상에도 아래 영상에도 미국 병사들이 머스켓을 쏠 때 화약접시의 불꽃에 겁먹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사격할 때는 눈만 질끈 감아도 조준선이 흐트러지기 쉬운데, 안그래도 잘 안맞는 머스켓으로 저래대니 사격 명중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그만큼 훈련도가 처참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또 미군은 보병뿐인데, 영국군은 포병과 기병대까지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저 전장에 미군이 영국군보다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전면전을 벌이니 보는 사람이 멍청하다고 한탄할 수밖에.[3]
"라인 오브 배틀(Line of Battle)"은 어떤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형성되는 "전선(戰線)"을 통칭하는 용어이며 군사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널리 사용된다. 애초에 우리가 한국어로 '전선'이라고 쓰는 것 부터가 'line of battle'을 '戰線'으로 번역한 일본인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근대 이후 양차세계대전처럼 몇 개 국가에 걸쳐 대규모로 나타나든, 전근대 시절에 벌이는 회전에서 두 군대가 맞붙으면서 형성되든, 해상에서 전근대의 함선들이 맞붙으며 만들어지든간에 두 세력의 접전 결과 만들어지는 그 '선'은 모두 다 'line of battle/battle lines'로 불린다.[4]
전열보병의 프로토타입 격 전술이다. 16열로 늘어서는 기존 총병대와는 달리 2~3열로 늘어서는 선형진을 선보였지만 이 시절만 해도 아직 보병 화력이 강력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테르시오에게 당해버려 당분간 사장되었었다. 선형진과 테르시오가 처음 맞붙은건 '니우포르트 전투'인데, 테르시오의 병사들이 선형진을 거의 밀어내자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해 전리품 챙기겠다고 대거 전열을 이탈하는 뻘짓을 해서 네덜란드군이 승리했다 (...) 그리고 마우리츠는 이 전투는 이겼지만 네덜란드 육군이 스페인 육군을 상대하는건 무리라 여겨 이후에는 회전을 최대한 피했다고.[5]
이 때문에 초기의 머스킷의 정착과정에서 머스킷은 창의 대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총검술의 근간이 된건 창술이었고, 중국에서는 지금도 총을 창이라고 부른다.[6]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이야기지만, 볼테르에 따르면 영국 제1 근위보병연대(1st Foot Guards)의 사령관 찰스 헤이 경(Sir Charles Hay)은 "프랑스 근위 연대의 신사들이여 먼저 사격하시오" 라고 권했고, 이에 프랑스 장교 드 안테로셰 백작는 "말씀은 고맙지만 우리는 먼저 사격하지 않겠소. 그쪽이 먼저 사격하시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영국군이 먼저 사격해서 프랑스군의 1열이 증발해버렸다.(...) 당시는 '상대의 총신을 비운 후 우리가 더 가까이 가서 사격하면 우리쪽 명중률이 더 높게 나오겠지?' 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장교도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순차사격술이 퍼진 뒤엔 이런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당신이 먼저 쏘라"라는 말은 동양의 송양지인(宋襄之仁)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그러나 퐁투누아 전투에서 이긴건 프랑스군이었다[7]
참고로 우리 조상들은 화승총의 명중률에 감탄해서 나는 새도 쏘아 맞춘다는 의미로 조총이라 불렀다. 물론 사냥의 경우 20m 내외의 근거리에서 행해지며, 활보다는 총의 화력이 뛰어나기에 대체한 측면도 고려되어야 한다.[8]
그래서 유럽 각국은 평소에 사냥으로 총기를 항상 다루고 그만큼 숙련이 된 사냥꾼들을 징집하여 "샤쇠르"나 "예거"같은 엽(獵, 사냥 렵)병부대로 편성하여 군의 정예부대로 운용했다.[9]
대규모 상비군 체계로 전환된 당대 유럽에서, 십만 단위로 증가한 군대에 당시까지도 여전히 고가였던 화약을 대량으로 소모하는 사격훈련은 비효율 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다보니 실제 사격훈련이란게 달랑 장전연습과 화승총의 지향연습이 전부인 상황까지 나타나게 된다.[10]
프랑스군의 경우 장전하지 않은 총으로 사격연습을 하면서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웠을 정도였다. 당대에 실사격으로 훈련을 한 국가는 영국 밖에 없었다.[11]
사실 보병을 제압할 수 있는 수류탄이 있긴했지만 현대의 수류탄과는 달리 사용하기가 까다로웠고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척탄병들이 따로 존재했다.[12]
그나마 화약은 흘려 넣기만 하면 되지만, 탄환은 굴러나오지 않도록 가죽끈으로 감싸 넣다보니 총구에 꽉 막혀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13]
http://kalnaf.egloos.com/1679206[14]
프랑스 혁명 당시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이 프랑스를 조지려고 연합했는데, 이는 프랑스를 가만히 놔두면 나라가 더 이상 왕의 소유물이 아니다라는 사상이 유럽 전체로 퍼질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이 때 프랑스를 조지러 출정한 군대들은 프랑스 국민들이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장면을 보고 아주 크게 멘붕했다.[15]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미니트맨같은 경보병의 유격전에 정석적인 전열보병은 의외로 취약했고, 결국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에는 그 영국군에도 그린 자켓(Green Jackets)과 같은 경보병 부대가 만들어지게 된다.[16]
워털루 전투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고참 근위대는 항복하느니 대포알 맞아 죽는 쪽을 선택한 인간흉기들이었다.[17]
이는 물론 유연한 산개 대형이 일반적인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는 얘기지만 여전히 한국군에서는 제식훈련을 할때 이 말을 쓰고 있다(…).[18]
국군 제식 소총인 K2 자동소총의 납품가는 처음 생산된 80년대는 30만원 가량이었으나 물가가 오른 2010년대를 기준으로 80만원 정도하니 큰 차이는 없다. 단 당대의 경제력과 현대의 경제력이 차이가 있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비싼 무기인 것이 맞다.[19]
다만 전황에 따라서는 그러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벌어진 전역에서 총을 쏘지 않는 병사에게 마르몽 원수가 이유를 묻자 "쏘는 방법만 알면 쏘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20]
장교들은 세이버와 연발이 되는 리볼버로 무장했다. 역시 간부는 사병의 적이다.(...)[21]
미국 의학계는 남북전쟁을 계기로 크게 발전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틀리지도 않는게임상실험 시료로 써먹을총상환자가 널리고 널렸으니...[22]
라인배틀 시절의 관점으로 보면 이거 모든 병사들이 개틀링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라인배틀 시기의 기관총의 정의를 그대로 적용하면 모든 돌격소총은 기관총이 된다![23]
사실 후대의 혁신적인 후장식 소총같은 물건은 이니고 플린트락 방식의 강선 파인 머스킷으로 보는 편이 맞다.[24]
감이 안 오는가? 무려 53.34cm다![25]
흰색보다는 정확히 말해서 작센군은 회색굼복을 입었다. 다만 문제는 전시에는 흰색,회색을 분간하기 어려우니...[26]
하지만 전성기에는 50만이 넘었던 대육군 군복도 챙겨주기 힘든 마당의 다른 나라 제식 군복까지 입혀줘야하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도 있다.영국은 반도전쟁에서 포르투갈 보병에게 영국 군복을 입혀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