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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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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external image]](http://www.historyplace.com/specials/calendar/docs- pix/h-hoove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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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03.05 촬영.
![http://www.aaa.si.edu/images/moorbens/AAA_moorbens_0003r.jpg](http://www.aaa .si.edu/images/moorbens/AAA_moorbens_0003r.jpg)
애견 킹 투트(King Tut, 저먼 셰퍼드)와 같이 찍은 사진. 킹 투트는 이집트의 파라오로 유명한 투탕카멘에서 따 온 이름이다. 조금 차가운 이미지라 이 투트와의 사진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나의 정적들은 내가 혼자서 전 세계적인 대공황을 일으킬 수 있는 환상적 지성과 경제적 위력을 지녔다고 칭송했습니다."
[1]
[[편집](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7%88%EB%B2%84%ED%8A%B8%20%ED%9B% 84%EB%B2%84?action=edit§ion=1)]
허버트 클라크 후버 Herbert Clark Hoover 1874.08.10~1964.10.20
(대통령 재임 : 1929년-1933년)존에드거 후버와
헷갈리면 곤란하다[2]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미시시피 강 서부 지역에서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이다.
[[편집](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7%88%EB%B2%84%ED%8A%B8%20%ED%9B% 84%EB%B2%84?action=edit§ion=2)]
아이오와 출신으로, 최초의 서부 출신 대통령이다.[3]
8세에 고아가 되어 오리건주로 이동해
퀘이커교도인 삼촌 슬하에서 자랐으며
캘리포니아의 [스탠퍼드 대학교](/wiki
/%EC%8A%A4%ED%83%A0%ED%8D%BC%EB%93%9C%20%EB%8C%80%ED%95%99%EA%B5%90)에
진학하여[4]
광산공학을 전공, 관련 학위를 취득한 이후 광산기사와
국제사업가로 세계를 돌면서 대단한 활약을 펼쳐 30대에 이미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부인에게 청혼도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을 때 국제전보로 했을 정도라고.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 런던에 있었는데 연합국 구제활동의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벨기에 구제위원회 의장직을 맡아 전쟁 중 대규모의 식량분배 계획을 관리하고 활발한 구호활동을 펼쳤으며 구호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1917년 4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미국 식량청 청장이 되어 미국의 식량 생산을 촉진하고 분배하는 일을 하다가 1918년에 다시 유럽으로 가서 사재까지 털어가며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 뒤에 미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위대한 인도주의자로 칭송받았다.
2년 뒤인 1920년, 워런하딩의
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서자 그 내각에서
상무장관이 되었으며 세인트로렌스 해로를 개척하고 당시 최대 규모 댐 공사인 볼더 댐 공사를 지휘,
역시 후버라면 댐이고 댐이라면 후버 건설하는 등 경제 분야에서 뛰어난 수완과 행정능력을 발휘하여 캘빈쿨리지 행정부에서도 중용되다가, 마침내
1928년 대선에서 자타공인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상대
후보(민주당의 앨 스미스)를
금주법 + 상대의
가톨릭 내력 등으로
떡실신(444 대 87, 58.2% 득표) 시키다시피 하여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5]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슬로건을 "쌀밥에고깃국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
자가용을!(A chiken in every pot, a car in every garage!)"로 내걸어 엄청난 지지를 받았고
1929년 3월에 그가 취임할 때 그에 대한 언론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쏟아냈으며 국민들의
기대 역시 대단했다. 또한 그는 단순한 경제적 성장 만이 아니라 우드로윌슨 이래 중단 된 개혁정책 역시
성공시켜 보이겠다고 자신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편집](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7%88%EB%B2%84%ED%8A%B8%20%ED%9B% 84%EB%B2%84?action=edit§ion=3)]
3. 세계 대공황 때문에
망했어요 ¶
1929년 10월 24일 주식 시장의 붕괴로 이른바 대공황크리가 터지고 말았다.
사실 이 대공황은 후버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고 경제 방향으로 무능했던 하딩과 쿨리지 행정부부터 쌓이고 쌓였던 것이 후버의 대에 터진 것.
거대기업의 독점을 방관한 것이나 행정부의 타락 등의 여러 원인이 쌓여서 후버가 취임한지 얼마 안 되어 터지고 만 것. 대공황으로 파산하는
은행, 공장, 기업이 속출했고 실업자는 급증했다. 그러나 후버와 그의 참모들은 이런 악화되는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전망하고 있었다.[6]
후버가 나서서 "이 불경기는 2개월이면 끝날 것입니다."라고 장담했지만 그의 장담과는 달리 경제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JPG external image]](http://ephemeralnewyork.files.wordpress.com/2008/10/cen tralparkhooverv.jpg)
1930년 1월의 후버마을. 이곳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다.
결국 그가 공황이 수습된다고 했던 12월에는 장담과는 달리, 오히려 실업자가 1백만명을 돌파했고 임기 3년째 되는 1932년에는 1,300만명을 돌파하고 말았다. 자연히 실업자들로 이루어진 빈민층이 늘어 거리를 메웠고 이런 사람들이 판자집을 세웠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후버마을(Hooverville, 후버 빌)'(;;)이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
거기에 그의 평판을 땅에 떨어뜨린 병크를 제대로 저지르고 마는데 바로 보너스군대(Bonus Army) 사건이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제대군인들이 혹독한 불경기에 1945년 지급예정이었던 군인연금 보너스를 미리 지급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워싱턴 D.C로 모여들었다. 자신의 가족들까지 대동한 무려 2만5천여명이 워싱턴 남서부의 아나코스티아 강변을 따라 쓰레기장에서 주어온 잡동사니로 판자집을 만들어 야영지를 세우고 농성을 하였다.
당시 언론과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체제를 위협하는
빨갱이들이라고 매도하였다.이런 역사는 훗날 어느 나라에서도
반복되는데 이에 후버는 더글러스맥아더
당시 육군 참모총장에게 진압명령을 내렸고 맥아더는 그의 부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지 S. 패튼 소령의 지휘하에
있는 제3기병대에 명령해 탱크를 선두로 보병 1개연대와 기병을 착검돌격시켜, 보너스 군대가
머물던 판자촌을 쓸어버렸다. 전차 6대를 이끌고 판자촌을 향해 __돌격 앞으로__를 외쳤다는 가공할 미친짓. 전쟁의 미친개로 불리던
패튼[7]
이 을 시위진압에 동원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막장이다. 참고로 맥아더는 보너스 군대가 공산혁명을 추진한다고 봤고 실제 퇴역병은
1할밖에 안될거라고 주장. 하지만 나중에 조사한 결과 보너스 군대의 95%가 실제 퇴역병과 가족이었다고 밝혀졌다(...) 이 여파로 5여명
이상의 사상자와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8]
사실 후버는 평화적 해산을 맥아더에게 주문했지만 맥아더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이 시위하던 판자촌을 싸그리 불태우고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역시 대통령이고 나발이고 없는 맥원수의 위엄. 노년에 맥아더가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후버는 나쁘지 않았지." ...하긴, 자기 하고 싶은대로 했으니 나쁜 소리 나올 리가 있나... 강제 해산된 보너스
군대는 겨울 내내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취임하자 이들이 다시 워싱턴에 집결했는데, 루즈벨트는 영부인을 보내
이들을 위로했다.보너스 원정대(Bonus Expeditionary Force)에 대한
이야기 [후버는 군대를 보냈고 루스벨트는 아내를 보냈다](http://
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page=9&code=2&gubun=type_code&id=147053)
여하간 후버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국가의 군 통수권자로써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은[9]
당연히 비판거리가 되었고 오히려
여론은 후버에 대해 퇴역군인의 생활에 대해 무감각한 대통령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후버의 대선후보 적수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당시 하버드 법대 교수이자 훗날
연방대법원장을 지내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에게 씨익 웃으며 "그렇군요, 펠릭스. 이번 선거는 저를 선택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0]
계획대로
최고로 기대받던 대통령이 나라의 경제를 거덜낸 원흉으로 취급받다가 퇴역군인 무력진압으로 위신마저 땅에 떨어지게 되자 뒤늦게나마 후버는 나름대로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엄청난 국가 예산을 풀어 부도 직전의 기업에게 나누어 주고 소득세를 인하했으며 많은 일자리 제공을 위해 공공근로사업을 발주시켰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때의 조치가 루스벨트 때에야 빛을 보았다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재임 중 별 효과는 보지 못했고 결국 루스벨트의 말대로 1932년 대선에서 472 대 59, 39.7% 득표로 당선될 때보다 더한 관광을 당하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떡실신. 백악관을 내주고 말았다.
[[편집](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7%88%EB%B2%84%ED%8A%B8%20%ED%9B% 84%EB%B2%84?action=edit§ion=4)]
공황을 초래한 대통령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 루스벨트 정권 때는
버로우타고저술활동을 하며 조용히 살았다. 하지만 대통령
되기 전에 보여준 능력이나 쌓아 둔 명성 때문인지 훗날 해리 S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유럽전쟁물자 수급계획을 조직하는 일을 맡아 38개국을 돌며 그 일을 수행했으며 정부행정분야 조직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는
등[11]
트루먼 정권에서도 중용되었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역시 후버를 중용했다. 이렇게 계속해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1964년 90세까지 장수했다.
[[편집](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7%88%EB%B2%84%ED%8A%B8%20%ED%9B% 84%EB%B2%84?action=edit§ion=5)]
분명 후버는 대단한 수완가이자 능력자였다. 특히 그는 '위대한 엔지니어'라는 별명도 붙었을 정도로 능력 자체는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기대를 받고 백악관에 입성했던 것이다. 대공황 역시 그의 잘못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가 대공황이라는 대재난을 맞아 대처했던 행동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 특히 위기 때의 지도자보다는 행정관료가 더 적합한 인물이었던 듯.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능력은 있지만 위기에는
적합치 않은 지도자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지도자가 아무리 훌륭한 수완을 가지고 있어도 시대를 잘못 만나거나 위기 상황에 잘못 대처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이후로는 조금씩
재평가되고는 있지만, 후임자인 루스벨트와 비교되어 그런지 업적 평가를 하면 여전히 중하위권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암군
루스벨트를 비판하긴 했지만 자유방임주의자는 아니었다. 1929년 그가 주장한 첫 법률은 수입농산물에
특별 관세를 부여하는 법이었다. 같은 시기 주장된 공산품 관세를 평균 59%, 최대
400% 까지 올리는 ‘스무트 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이
1930년 6월에 통과되었다.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들에겐 신나게 까이는 정책 가운데 하나로,
심지어는 금본위제 붕괴와 제2차세계대전도 이 법으로
인한 세계 무역 감소라고 말하기도 한다.[12]
[[편집](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7%88%EB%B2%84%ED%8A%B8%20%ED%9B% 84%EB%B2%84?action=edit§ion=6)]
개인적 취미는 낚시였다고 한다. 그래서 낚시에 대한 책도 낸 바가 있으며 비공식적으로도 낚시를 예찬하거나 낚시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말이 많이 남아 있다.
하루는 메인주 출신 의원들이 관내 하천에서 잡은 싱싱한 물고기를 대통령에게 직접 선물하려
했는데, 이게 잘못 전해졌는지 백악관 조리실에 먼저 전달되어 버려서 대통령이 보기도 전에 생선요리가 될 뻔 했다. 경호실장 에드워드 스탈링이
발견했을 때는 물고기의 머리가 이미 잘려 있어서 대통령 경호실장이 직접 잘린 물고기 머리를 꿰맸다. 이 때의 일을 스탈링은 "메인
주는 이후 3년간 민주당 편을 안 들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후버는 공화당이다. 주 전체가 빡돌 수도 있었을 사건을 잘 수습한
셈.[13]
사람이 소심한 면이 있었는지 백악관에 있을 때는 백악관 직원들과 말하는 것이나 마주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이는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영부인은 아예 백악관 직원들과 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음식을 내오거나 거두어가라는 등의 수신호를 개발했을 정도였다. 후버가 백악관에 있을 때는 아예 백악관 직원들이 대통령 내외를 마주치면 알아서 피하거나 숨는 일도 있었다고. 대통령 부처도 대화가 남이 듣는 것을 싫어했는지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그 가운데 만다린)로 대화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거운동 때에도 자신을 내세우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루스벨트에게 참패한 이후 집필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에는 국내의 정적들(특히 루스벨트)을 까는 책들을 저술하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뉴욕의 한 호텔에서 한 손님이 나이 든 후버가 화가 난 듯 뭔가 휘갈기고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이 나이 든 전직 대통령은 **"루스벨트에 관한 책을 더욱 더 매섭게 만들고 있소."**라고 대답했다고. 루스벨트에게 참패한 것이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다.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이던 시절 쿨리지가 백악관에 걸린 6대 대통령 존 퀸시애덤스의 초상화를
보고는 당시 상무장관 후버를 불러서 "저 초상화의 머리가 너무 빛나지 않소?"라고 물었다. 후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쿨리지는 사다리를
가져와서 직접 애덤스의 초상화 위로 올라가 대통령이 손수 머리부분에 검정칠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후버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애덤스의 후손이 해군장관이 되었는데 그 장관이 조상의 초상화를 보고 기겁하자 결국 그 사건에 대해 후버가 사과해야만 했다. 말리지
않은 죄? 이 일화로 보면 후버는 아무래도 전임 대통령의 잘못을 덤터기쓰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볼 수 있을 듯.
지못미. 괜찮아 사진이 있잖아
마지막으로 20세기의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제일 늦게 작성된 대통령이다.
안습.
[[편집](http://rigvedawiki.net/r1/wiki.php/%ED%97%88%EB%B2%84%ED%8A%B8%20%ED%9B% 84%EB%B2%84?action=edit§ion=7)]
이런 안습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여러 군데에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라스베이거스 근처 콜로라도 강에 있는 미국 최대의 댐인 후버 댐(높이 221m, 저수량 320억m^3)은 그가 재임 중이던 1931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36년 완공되어 원래는 '볼더 댐'이라고 불렸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건 1949년. 사막 위의 천국이라는 네바다의 라스베이거스나 LA의 발전은 모두 이 댐 덕분에 이루어졌다.
여담으로 후버댐은 최중심부의 시멘트는 마르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며, 지금 당장 인류가 사라진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버틸 발전소이자, 가장 오래 버틸 구조물 가운데 하나라고 알려져있다. 이 소재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인류 멸망 그후(Life After People)"에 따르면 이 거대한 발전소가 작동을 중단하게 되는 원인은 배수파이프를 침범한 홍합 등의 수중생명체 때문일 거라고.
그가 1919년에 5만 달러로 설립한 후버 도서관에서 비롯된 후버 연구소(Hoover Institution)는 설립 2년만에 8만부의 장서를 확보하였으며, 1921년~1923년의 소련 기근 지원 등을 비롯해 현재까지 폭넓은 국제적 연구 및 학술활동을 보이는 미국의 대표적 씽크탱크이다. 친공화당 성향이 있지만 그렇게 절대적이진 않다고 한다.
후버볼[14]
은 이 인간이 백악관 관리들을 굴리기 위해의 체력 증진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물론 후버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
[1]
노년의 후버가 대공황 시대 자신에게로 향한 비난들을 회상하면서 한 말.자학드립[2]
재밌는 점은 생년 21년 몰년 8년 차이라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보니 허버트 후버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수사국장이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건 그 이후지만.[3]
남북전쟁이래 이어지는 오하이오 출신 공화당 대통령의 맥을 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를 제외하고 서부 출신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캘리포니아 출신) 정도고, 굳이 더 따진다면 주지사를 지낸 일리노이(동부) 출신 로널드 레이건이 있다.결국 서부출신은 제 임기 못마쳤구나[4]
1891년. 스탠퍼드가 설립 된 해에 들어간 것이다.[5]
후에 앨 스미스는 역사상 대통령이 되지 않아 가장 행복한 후보(...)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비슷한 케이스로 이름이 같은 앨 고어가 있다카더라그래서 후버를 동정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하딩 대신) 1921년이나 (루스벨트 대신) 1937년에 취임했으면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라고.[6]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존의 경제 이론들이 죄다 그런 식이었다. 미국의 대공황은 사실 원인은 여전히 불명이지만 몇달 앞서 예고된 측면도 있었다. 후버 행정부는 경기 과열을 예측하고 있었으나, 초기의 몇몇 땜질 정책으로 잡힐 것이라고 확신하였고 결국 대공황까지 불러오고 만다.[7]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Joe Angelo라는 병사는 세계 1차대전때 패튼의 목숨을 구하고 패튼이 개인적으로 "용감하다"라고 칭찬받은 군인이였지만, 민간인으로 돌아온 이후 대공항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서 보너스 군대에 참가했다. Joe Angelo(조 안젤로)가 개인적으로 패튼을 설득하러 갔을 때 패튼은 "난 이새끼 모르니까 당장 쫓아내라"라고 주문했다.이뭐병패튼은 후에 "내가 그 새끼 전쟁 이후에 돈도 대주고 얼마나 잘 해줬는데 뒷통수 친다"하고 투덜거렸다고 한다(...)[8]
또 한 진압군 측에서도 60여명의 부상자가 났다.[9]
이 사건으로 결국 맥아더는 예편되고 한직인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갔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현역복귀.[10]
정작 루즈벨트는 선거 초기에는 보너스 군대에게 돈을 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였다. 그러나, 정부의 강경 진압 이후로 자신의 아내를 보너스 군대에 보내는등 노선을 변경한다.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11]
통칭 '후버 위원회'였다. 1947년 이후 그가 은퇴하고 2년 후인 1957년 10년간이나 운영되었다. 주요 업무는 2차대전 후 지나치게 방만해진 조직들을 효과적으로 개혁하는 것.[12]
'관세인상을 가정상비약으로 여기는 미국 공화당의 전통'이라는 비판도 있는데, 실제로 오랜 역사동안 관세를 지지하는 중상주의 정당이 공화당이었고, 거꾸로 관세를 반대하는 정당이 민주당이었다. 이런 흐름은 1930년대까지도 이례적이지 않았다.[13]
이런 거 없어도 메인주 및 뉴잉글랜드 주들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표밭이었지만. 물론 오늘날에는 아니다.[14]
배구와 테니스를 합쳐서 만든 스포츠. 3인이 플레이를 하며 상대가 던진 공을 받지 못하면 실점하는 것으로 4파운드 공을 사용했지만, 운동효과를 올리기 위해 현재 6파운드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