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공사의 방송 채널
라디오 방송
중파-초단파
제1라디오,
제2라디오 (Happy FM),
제3라디오 (사랑의 소리 방송),
제1FM (Classic FM), 제2FM (Cool FM),
한민족방송,
라디오서울
텔레비전 방송
공중파/DMB 1TV (U-KBS STAR), 2TV (U-KBS HEART)
케이블
(KBS N)
Drama, N Sports, Joy, Prime, Kids, W
인터넷 KBS 24
△2001년부터 한국방송공사 9시 정각 뉴스 시작하기전에 항상 틀어주는 로고송.[1]
△ 1990년대~2001년 버전.[2]``[3]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KBS 한국방송
[4]
원래는 HLKZ소속으로, 불의의 사고로 방송이 중단되었다가, 1961년 KBS-TV로 재개국한 방송,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TBC-
TV가 KBS-2TV로 바뀌면서 KBS-1TV로 명칭을 변경하고, 1994년 10월 1일에 상업광고를 폐지했다. 주로 보도 프로그램과
교양 프로그램을 편성한다.[5]
공중파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규제가 풀리고 2012년 10월8일에 국내 지상파 방송 최초로 상시 24시간 방송을 실시하였다.[6]
- 연혁
1.1. 언론통폐합과 컬러화
1.2. 상업광고 폐지와 그 이후
- 특색
- 본사 1TV 직접수신 가능 지역
- 주요 프로그램
- 종영 프로그램
[edit]
한국방송공사/역사 항목 참조
[edit]
1.1. 언론통폐합과 컬러화 ¶
1980년 11월과 12월, 광주민주화 운동과 서울의 봄을 유혈진압한 전두환 정권이 보다 효과적인 언론통제를 위해 전면적으로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물론 겉으로는 사이비 기자 퇴치, 방송공영화를 내세웠다.) 이로 인해 933명의 언론인들이 해직당하고, 236개의 정기 간행물이 등록취소 당했으며, CBS의 보도기능과 상업광고가 폐지되었고, TBC, DBS가 KBS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KBS는 TV채널 2개(KBS 3TV와 KBS 교육FM은 1981년 2월 2일에 개국),라디오 채널 7개를 가지게 되어 초 거대 방송사로 등극하였고, 이에 따라 기준 KBS-TV는 KBS-1TV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와 동시에 수출의 날 기념식 중계방송을 컬러로 중계함으로써 세계에서 81번째로 컬러방송을 시작하였다.[7]
이후 1980년 12월
9일, 컬러화비용과 TBC, DBS를 인수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상업광고 재개를 허용받고, 동시에 시청료 인상을 추진하였는데,
흑백TV 시청료 인상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각종 로비로 컬러TV 시청료를 월 2500원으로 정하는데 성공하고[8]
동시에 1981년 3월
7일에 광고방송 재개를 하면서 재정을 충당하게 되었다.
1982년 1월에 재정충당을 위해 KBS-2TV의 광고시간을 확대하면서 공영성 강화를 위한다고 개소리를 하면서한다는
명분으로 1TV의 광고시간이 축소되었다가(1일 3블록-> 평일 1블럭, 주말 3블럭) 당년 4월에 평일 오전시간대에 블록광고를 편성하게되어
광고시간이 늘어났다.(평일 1블럭-> 2블럭, 주말 3블럭-> 4블럭) 물론 당시엔
편파방송으로 시청료도 아까워 죽겠는데 광고도 같이
늘어났으니 시청자들이 KBS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이게 곪아 터진게 1985년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이었는데,
[9]
1985년 총선과정에서 KBS는 당시 여당인
민정당을 노골적으로 치켜세우고 야당인
신민당을 대놓고 비하하자 시청료 거부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하며 1985년부터 시청료 수입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에 KBS는 1985년 5월에 술광고를 폐지하고, SA시간대(20:0022:30)의 광고를 줄였다.20:35)를
폐지하였다. 물론 당연히 미봉책에 불과했고 이후에도 KBS 시청료 징수율은 1988년까지 계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한 편 이 시기 편성
가운데서 두드러진 점이 있었는데 스포츠 중계방송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 특히 주말 낮시간대를 거의 스포츠 중계방송으로 때웠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10]
하지만 정작 가장 문제가
되었던 편파보도가 개선되지 않으면서 시청료 거부운동이
확산일로를 걷게되고, 거기에 시민단체까지 나서서 KBS 시청거부운동까지 벌이자 1986년 7월에 평일 오후 블록광고(20:30[11]
이는 5공의 스포츠 장려정책(이른바 86아시안게임-88올림픽 유치)도 있었지만 KBS입장에선 2TV와 다르게 1TV에선
정규 프로그램에 따로 광고를 붙일수는 없었고 프로그램 사이에 방영하는 블록광고도 일정 횟수(82년부터 86년까지 4회, 그 이후에는
3회)이상 편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포츠 중계방송을 편성하는게 훨씬 이득이었던지라 당연히 1TV의 스포츠 중계방송의 비중이 높아졌던 것.
이는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내려왔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상당히 남아있어서(물론 광고를 붙일수는 없으니 월드컵, 올림픽. WBC나
축구국대전의 경우 2TV에서 편성하는 경우가 많지만) 현재도 KBS1TV에서 스포츠 중계프로그램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민주화 이후에 1988년에 올림픽 특집-중계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편성하였으며, 떠돌이 까지[12]
, 아기공룡둘리, 까치의 날개,
날아라 슈퍼보드 등의 국산 애니메이션들이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되기도 했다.[13]
이후 1989년 3월 봄개편들어, KBS는 1TV를
[보도,교양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하면서](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
=1989022800329212002&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2-28&officeId=000
32&pageNo=12&printNo=13362&publishType=00020) 지금과 비슷한 편성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90년
3월 평일 블록광고를 폐지했다. 하지만 1TV 광고수입은 오히려 급증했는데, 1TV에 스포츠 중계와 특집프로그램을 대량 편성해서 이전보다
광고수익은 [증가](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926002
89111005&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0-09-26&officeId=00028&pageNo=11
&printNo=733&publishType=00010)했다. [14]
SBS 개국이후 한 동안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늘어나기도 했다가
1992년 가을개편과 1993년 봄개편들어 다시 보도프로그램과 오락프로그램의 비중이 높아져 갔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아나운서가 나와서 방송순서를 안내하는 유럽식 방식을 쓴적도 있었다.
△ 1989년 당시 영상. 당시 오후방송 시작하고 10분 뉴스가 끝나면 아나운서가 나와 저녁 7시까지 방송될 프로그램을 안내했다.
[edit]
1993년 수신료 인상드립을 쳤지만 되려 시청자들에게 냉소를 듣는 등 여의치 않자. 수신료 합산징수로 징수액수를 절감하고 징수율을 높여 매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 1994년 7월에 상업광고 폐지가 결정되었다. 이후 1994년 10월 1일부터 광고방송을 편성하지 않게되었다. 이후 징수방식 변경에 따라 징수율이 50%대에서 90%대까지 치솟으며 KBS 수신료 수입이 급증하고 1TV의 공영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당시 1TV의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10% 초반까지 하락한다. 이 전략은 당시 보도 프로그램 중립성 강화와 맞물리면서 대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KBS1TV가 평균 시청률 1위 채널이라는 지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있다.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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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시사, 뉴스, 교양 대부분을 방송하고 오락은 주로 공익성이 있고 건전한 프로그램들이 방송하고 있으며, 음악 프로그램은 가요무대, 콘서트 7080, 전국노래자랑, 열린음악회와 같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있으며, 클래식 프로와 국악 프로를 편성하고 있고, 드라마는 중장년층을 위한
막장일일드라마와 사극을 편성하고 있다. 한마디로 라디오로 말하자면 KBS 제1라디오, KBS 제2라디오, KBS 1FM의 컨셉이 합쳐진 존재. -
위에 적혀있듯이 지상파 TV 채널가운데 유이하게 상업광고가 없다. 그러나 이미 1960년대에 상업광고를 편성했던적이 있고 1981년부터 1994년까지 제한적으로 상업광고를 편성하였다.
[edit]
KBS 경인방송센터 발족으로 경기도, 인천광역시 지역 송신소, 중계소가 경인방송센터 관할로 넘어감에 따라 경기도, 인천광역시 지역은 IPTV, 케이블 기준으로 본사 1TV 대신에 경인 1TV가 나오지만 경우에 따라 본사 1TV 전파의 직접 수신이 가능하다.
- 남산 송출 (UHF 22ch) : 서울특별시·광명시·부천시 일대, 인천광역시·김포시·고양시·구리시·의정부시·하남시·시흥시·과천시·성남시 일부
- 관악산 송출 (UHF 15ch) : 서울특별시·광명시·부천시·안양시·과천시·군포시 일대, 인천광역시·김포시·고양시·구리시·파주시·의정부시·양주시·하남시·성남시·남양주시·시흥시·안산시·화성시·수원시·오산시·평택시·의왕시·용인시·안성시 일부, 충청남도 천안시·서산시 일부
[edit]
- KBS 뉴스9 (1993~)
- 생방송 심야토론 (1987~)
- 전국 노래자랑 (1980~)
- 인간극장 (2000~)
[15]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1983~)
[16]
- 아침마당 (1991~)
- 우리말 겨루기 (2003~)
[17]
- KBS 뉴스광장 (1991~)
- TV동화 행복한세상 (2001~)
- 열린음악회 (1993~)
- 6시 내고향 (1991~)
- TV쇼 진품명품 (1995~)
- KBS 뉴스라인 (1994~)
- 세상은 넓다 (1995~)
- 가요 무대 (1984~)
- 소비자 고발 (2007~)
- 한국인의 밥상 (2011~)
- 비바! K리그 (2005~)
- 별도 달도 따줄게 (2012~)
- 사랑의 리퀘스트 (1997~)
- 산 너머 남촌에는/시즌 2 (2012~)
- 이웃집 찰스 (2015~)
[edit]
- 사랑방 중계 (1983~1993)
[18]
- 뉴스 파노라마 (1980~1987)
- 정책진단 (1995~1999)
- 너는 내 운명 (2008~2009)
- 웃어라 동해야 (2010~2011)
- KBS 일요스페셜 (1991~2004)
- 아기공룡 둘리 (1987,1988)
- 태조 왕건 (2000~2002)
- TV는 사랑을 싣고 (1994~2009)
- 미래소년 코난 (1983~1983,1994)
- 역사추적 (2008~2009)
- 용의 눈물 (1996~1998)
- 왕과 비 (1998~2000)
- 제국의 아침 (2002~2003)
- 무인시대 (2003~2004)
- 불멸의 이순신 (2004~2005)
- 대조영 (2006~2008)
- 우리집 여자들 (2011)
- 산 너머 남촌에는/시즌 1 (2007~2012)
- 당신뿐이야 (2011~2012)
- 낭만을 부탁해 (2011)
-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1990~2007)
- 퀴즈 대한민국 (2002~2013)
-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1984~2004)
- 정도전 (2014)
- 지금 평양에선
- 찬란한 여명(1995-1996)
광고(19631972, 198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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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1년에 KBS 한국방송으로 사명을 변경해서 기존 로고송에서 음색을 바꾸고 가사 뒤에 한국방송을 덧붙었다. 참고로 이 ID 영상에 나오는 길이는 2014년 현재에는 KBS 뉴스 9 전에만 볼 수 있다. 나머지 시간대에는 축약버전이 나옴.사실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에도 나온다.[2]
참고로 이 시기에 KBS 2TV에서도 같은 합창단이 부른 로고송이 쓰였다. 그쪽은 "좋은 방송 밝은 세상 KBS" 였다.[3]
영상을 보면 종전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ID에서 벗어나열린음악회를 관람 중인국민이 차례대로 등장하는데, 이는 KBS가 국민과 함께 하겠다라는걸 의미하는듯 하다.실은 열린음악회 홍보용 ID라 카더라[4]
KBS 1TV의 슬로건이다. 위 동영상처럼 공식 로고송의 가사로도 오랫동안 쓰였다.[5]
참고로 KBS 2TV에선 오락 프로그램을 주로 편성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양프로그램의 비중이 더 높다. 하지만 (공영방송치고)상업성이 강한건 사실이다.(아무래도 광고를 편성하다 보니 시청률에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수 없으니...)[6]
그 이전에 공중파 텔레비전의 24시간 방송을 허용한 나라는 있었다.(이를테면 미국, 일본,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등) 한국에서는 규제가 풀리기 이전에는 공중파 텔레비전이 새벽에 방송하려면 사전에 허가가 필요했다.[7]
이렇게 컬러방송 시행이 늦어진건 1970년대 초반부터 컬러방송 시행논의가 있었지만 이에 박정희가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면서 반대해서라는 후문이 있다.[8]
참고로 동시기 해외 TV시청료를 본다면 영국은 월 2.83파운드(당시 한화로 4300원), 일본은 월 880엔(2830원)선이고 뉴질랜드는 월 2300원 선이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을 생각해본다면(...)[9]
사실 TV 시청료 징수 거부운동이 시작된건 1982년부터지만, 당시 여러가지 한계점들로 인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10]
기존에 1블록당 10개씩 묽어 편성됐던걸 1블록당 8개로 줄였다.[11]
물론 이는 당시 MBC도 마찬기지였긴 했다. 다만 MBC의 겨우, MBC청룡이라는 야구팀을 소유했었다는 점이 가장 컸긴 했지만(...)[12]
다만 떠돌이 까치는 1987년 5월 5일에 방영되었으니 민주화 이전의 일[13]
다만 달려라 하니나 천방지축 하니, 영심이, 2020 우주의 원더키디 같은 시리즈물은 첫방영은 2TV에서 했다.(다만 아기공룡 둘리의 경우 첫 방영은 6-7개 에피소드를 여러개 묶어서 방영하였고. 그래서 1TV에서 방영했던 것.)[14]
다만 91년부터 93년까지는 광고수입이 감소세에 접어들기도 했다.[15]
2000년부터 2001년 11월, 2002년 10월부터 2009년 봄개편 전까지 2TV에서 방영되었으나, 2009년 봄개편 때 1TV로 이동.[16]
1998년 6월까지 2TV에서 방영, 이후 1TV로 이동.[17]
2004년 10월까지 2TV에서 방영, 이후 1TV로 이동.[18]
1990년 봄개편 전까지는 2TV에서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