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 특징
2.1. 분파
2.2. 교리
2.2.1. 칼리파
2.2.2. 이맘
2.2.3. 마디
- 사상적 차이
- 역사
4.1.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
4.2. 우마이야왕조와 후세인의 죽음(카르발라 참극)
4.3. 우마이야 왕조 치하
4.4. 파티마 왕조
4.5. 사파비 왕조
- 시아파의 분파
5.1. 12이맘파
5.2. 이스마일 파
5.2.1. 드루즈 파
5.2.2. 니자리 파
5.2.3. 아가 칸
5.3. 자이드 파
5.4. 카이산 파
- 영향력
-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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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빠
이슬람교의 종파 중 하나. 한국이슬람중앙회의 공식 표기에
따르면 '쉬아'이다. 영어로는 Shia Islam, Shi'ite[1]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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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와 함께 이슬람교의 주요 양대 종파이다. 양대 종파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슬람 전체로 봤을 때 시아파의 숫자는 상당히 적은 편이다. 전체 무슬림의 10% 정도. 그래도 수니 다음으로 큰 종파가 시아라고 하면 맞는 말이긴 하다.
수니와는 달리 꾸란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에 하위 종파가 많다. 가장 주류는
12이맘파[2]
이고, 그 외에 예멘의 자이디야파, 과격한 이스마일파[3]
그리고
시리아의
알라위파[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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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최고 지도자는 반드시 무함마드의 정통후손이어야 한다는 원리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칼리파를 어떤 위치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수니파는 예언자는 무함마드로 끝이 났으며, 칼리파는 단순히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일 뿐이라고 간주했다. 당연히 쿠란을 해석하거나 법적 판단을 할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시아파는 예언자는 신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자들이며 칼리프는 이 신의 말씀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적용하는 직위라고 생각했다. 시아는 칼리파에 신성을 부여한 것이다. 신성이 있으니 당연히 무함마드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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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파는 이제 없어졌으니 이맘이 이를 대신한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수니파와는 크게 다르다.
수니파에서 이맘은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있는 무슬림이면 아무나 될 수 있는 지위이다. 직위라고 할 것도 없다. 예배의 인도자일 뿐이며 혼자 예배할때는 스스로가 이맘이 되며, 가족이 함께 예배를 할 때는 가족 중에서 가장 웃어른이 이맘이 된다.
시아파에서 이맘은 신성의 직위이며 무함마드로 부터 '비전의 지식'을 물려받은 자들이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무함마드가 무오류의 예언자였음을 상기해본다면, 이맘 역시 무오류의 인간이 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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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개종한 시아파 중에 새로운 예언자(마디)가 강림할 것이라는 구세주신앙 비슷한 것이
있기에 무려 천오백년간 수니파에게 탄압당하면서도 아직도 끈질기게 세를 불려나가고 있다. 시아파로서 수니파인 척 가장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일코교리 덕분이기도 하다.(타끼야)
그런데 이 '마디'를 누구로 보느냐는 점 때문에 시아파는 분열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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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이유로 분리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상적인 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대표적인 차이가 상속론[5]
인데, 무함마드가 죽기 전에 알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하는 것. 이 전통에 따라 시아파의 이맘은 선임자의 유언에 따라 선출된다.
알리에 대한 신격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어 알리의 지위가 무함마드와 비교해 다를것이 없으며, 알리는 무오류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생겨나게 된다.
시아파의 사상을 닦은 자는 예멘 출신 학자인 압둘라 이븐 싸바 알 야흐디인데, 야흐디는 상속론의 이론을 재정비하는 한편, 재림론[6]
을
주장했다. 무함마드가 알리로 재림했다는 것. 이 재림론은 시아파의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 이들의 분파인 12이맘파의 경우에는 구세주가 돌아와
세상을 구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다.
이런 차이가 있어서 수니파는 시아파를 "이런 이단 새끼들!!" 하면서 이를 갈고 시아파는
"저런 덜 떨어진 꼴통들!" 하면서 이를 갈고 있는 실정. 이렇게 자기들끼리 싸우다 보니 현재 시아파랑 수니파는 서로보다
기독교 계통인
가톨릭과 더 친할 지경이다[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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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교조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wiki/%EC%95%8C%EB%A6%AC%20%EC%9D%B4%EB%B8%90%20%EC%95%84%EB%B9%84%20%ED%83%8 8%EB%A6%AC%EB%B8%8C)가 시아파의 시초이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혈연적으로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한 최초의 남성 무슬림이었고, 무함마드에 대한 믿음도 깊었으며 능력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 이었으니 당초부터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주목 받았지만, 무함마드 사후에는 아부바크르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알리 지지파들은 당초부터 이에 불만을 품었는데, 정통 칼리파는 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는 이에 승복하였고, 이후 2대 칼리프 우마르의 즉위도 지지하였다.
제3대 정통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사망한 뒤에, 그 뒤를 이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 시아파 분리의 계기가 되었다.
우스만의 뒤를 이어 당초부터 많은 지지를 받던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있던 우스만의 6촌인 무아위야가 우스만 암살에 복수를 한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다. 궁지에 몰린 무아위야는 쿠란의 낱장을 창 끝에 붙이고 낭송가들이 뒤를 따르면서 쿠란을 낭송하게 하며 알리의 군대로 돌진하도록 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알리의 군대는 쿠란을 더럽힐까봐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알리는 이에 무아위야와 협상을 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알리는 같은 이슬람교도 내에서는 매우 신사적이고 관대한 인물로, 자신의 권력보다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중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거역하는 정적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도 무함마드의 마지막 아내 아이샤와 관대하게 협상한 적이 있었고. 하지만 이런 알리의 관대한 태도에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은 급진적이고 젊은 세력이었다. 이들은 알리에게 실망했다면서 알리 진영에서 이탈하면서 이탈자라는 뜻으로 '하리지파'로 불리게 된다.
알리의 세력이 분열되면서 여유를 얻고 세력을 확대해나가던 무아위야는 예루살렘에서 칼리프를 칭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하리지파는 무아위야를 암살하려 시도하고, 알리는 무아위야와 싸우면서 하리지파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세력이 피폐해졌다.
결국 하리지파의 인물인 Abd-al-Rahman ibn Muljam는 무아위야의 회유에 넘어가서, 모스크에서 기도를 하던 알리를 독을 바른 단검으로 찔러서 살해하고 말았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칼리프 지위를 이어받았다. 무아위야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하산의 세력을 토벌하려 하였고, 하산은 어쩔 수 없이 협상을 할 뜻을 밝혔지만 같은 편에게 공격당해서 부상을 입었다. 몇 차례 전투를 거친 다음 하산은 결국 불리한 상황에서 평화와 화합을 위하여 무아위야에게 항복하고 칼리프 지위를 포기하였다. 하산이 이후 죽게 되자 시아파 내에서는 무아위야의 음모로 인한 독살설에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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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우마이야왕조와 후세인의
죽음(카르발라 참극) ¶
알리의 아들 하산이 죽고 나서 그 동생 후세인이 알리 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680년 다마스쿠스에서 무아위야가 죽고 야지드가 칼리파에 오르는데, 당시까지 칼리파는 공동체에서 투표로 뽑히는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세습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세습 칼리프 왕조인 우마이야왕조의 시작이다.
이라크의 쿠파에서 후세인의 지지자들은 야지드에 대한 반란을 준비하였다. 후세인은 메카에서 야지드의 군대를 피하고 있었는데, 요청을 받고 쿠파로 이동하였다.
이 상황을 알게 된 야지드는 군대를 파견했다. 추종자들과 함께 이동하던 후세인은 쿠파의 도착을 앞두고 야지드가 보낸 3000명의 군대에 포위당했다.
이 때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야지드의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세인의 추종자들은 물을 구할 수 없었다.
후세인의 형제 압바스[9]
가 유프라테스 강으로 물을 구하러 가서 가죽 물통에 물을 채우고 돌아갔다. 압바스는 후세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강에서 물을 뜨면서도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았다. 야지드 군은 압바스가 물을 가지고 돌아가면 후세인과 추종자들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압바스를 공격하였다. 압바스는 왼팔에 물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에 맞아 왼팔이 떨어지자 오른팔로 들었고, 오른팔도 칼에 맞아 잘리자
입으로 물통을 물었다. 그러자 화살을 쏴서 물통이 망가져 물이 쏟아지고 압바스는 눈에 화살을 맞았다. 야지드 군이 머리를
메이스로 내리치자 압바스는 결국 말에서 떨어졌고 "Ya
Akkha!"("형제여!") 라고 외치며 죽음을 맞았다.
전설에 따르면, 결국 궁지에 몰린 후세인은 단신으로 야지드의 군대에 싸움을 걸었고 무수한 적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적이 많아 후세인은
머리에 돌을 맞고, 가슴에 화살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후세인은 얼굴의 피를 닦고
알라를 향하여 호소하였다. 후세인은 포위를 뚫었지만 결국 큰 부상을 입은 그의 말이
쓰러졌고, 나무 아래에 있던 후세인을 야지드의 군대가 붙잡아 갔다. 후세인은 참수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를 처형하려던 자[10]
에게
"오늘 당신은 기도를 마쳤는가?"라고 물었다. 이 때는 3번째 기도 시간이었다. 후세인은 기도를 할 시간을 요청하였고, Shimr는 후세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 후세인은 참수 되었다.
시아파 신도들은 카르발라의 참극을 애도하며, 후세인을 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과 슬픔을 참회하는 뜻에서 '아슈라(Ashura)'라는 행사를 가진다. 이 의식은 후세인의 순교를 묘사한 '애가'를 낭송하고, 타지예(ta'ziyeh, 수난극)라 불리는 연극으로 이 사건에 대하여 공연을 한다. 또한 단체로 음악 박자에 맞춰 칼이나 채찍으로 스스로를 치면서 자해를 하는 마탐(matam) 의식이 포함되기도 한다.
카르발라의 참극은 단순히 이슬람교가 분열된 '정치적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시아파에서 해석된 이 사건은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과거의 예언자들이 겪었던 수난'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며, 아슈라에서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현세의 불의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내세의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억압받는 '현실'에서 미래의 구세주(마디)를 약속한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그리하여 카르발라의 참극은 '영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게 되며, 시아파의 종교적 정체성, '영성'과 연결된 중대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B%9C%EC%95%84%ED%8C%8C?action= edit§ion=12)]
결국 후세인은 죽고 그 자손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립한 우마이야 왕조는 누가 봐도 정통성이 부족했다. 알리를 지지하던 시아파는 지속적으로 '찬탈자'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서 저항 활동을 벌였다.
시아파가 이렇게 세를 불릴 수 있던 것은 우마이야 시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랍인과 비아랍인 무슬림과 마왈리에 대한 차별이 심한 것을 잘 이용한 덕. 시아파는 '개종자중 구세주 강림설'을 퍼뜨리며 개종자들에게 큰 선교 효과를 가지고 왔다. 8대 칼리파 우마르2세의 3년의 선정으로 인해 이런 현상은 많이 타파됐지만 쉽게 바뀌는게 아니라 시아파는 그 틈을 이용해 세를 꾸준히 불렸다.
한편, 무함마드의 삼촌 압바스의 자손인 압바스 가문은 중앙 정계에서는 멀어졌지만, 무하마드와 비교적 가까워서 하심 가문의 일족이므로 존경 받는 위치에 있었다. 압바스 가문의 당주 무하마드는 '하시미야'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었는데, 이 비밀 결사는 같은 반체제 운동 집단인 시아파와 협력 전선을 펼쳤다. 하시미야의 조직원으로 라산에 파견되었던 아부 무슬림은 8000명을 이끌고 거병하여 세력을 펼쳤고 이라크에 도달했다. 시아파 역시 이 거병에 함께 하였다.
물론 우마이야 왕조 역시 이 반체제 운동을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대응에 나섰다. 무하마드의 뒤를 이어 당주가 된 아브라함 이븐 무하마드는 우마이야 왕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동생 '아부 알 압바스' 등 14명은 탈출에 성공하여 후세인과는 달리 잡혀 죽지 않고 이라크 쿠파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라산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쿠파를 점령하였고, 압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압바스가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패배를 거듭하다 대패하였고 결국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어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이렇게 압바스왕조가 성립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힘을 보탠 시아파들은 결국 압바스와는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시아파는 '알리의 후손'을 칼리프로 추대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압바스 가문은 우마이야 가문 보다는 무함마드의 가까운 혈통이지만 '알리의 후손'은 아니기 때문이다. 압바스 왕조는 시아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다시 시아파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물론 칼리프의 권위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개국공신 아부 무슬림 등 역시 탄압을 당했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B%9C%EC%95%84%ED%8C%8C?action= edit§ion=13)]
4.4. 파티마 왕조 ¶
압바스 왕조 치하에서 시아파 이맘들은 탄압받았는데, 감금당하거나 독살당하는 등 영향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이맘의 혈통 임을 주장하는 파티마
왕조가 튀니지에서 봉기, 이집트까지 점령하고 카이로에 도읍을 하고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압바스 왕조의 헤게모니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파티마 왕조에 대항하여 후우마이야 왕조까지 칼리프를 자칭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세
칼리프가 공존하는 삼국시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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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파비 왕조 ¶
시아파인 사파비 가문이 12이맘파를 국교로 하는 사파비 왕조를 이란에 건국하면서 이란 지역에서 12이맘파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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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는 분파가 매우 많다. 기본적으로 알리-알리의 큰 아들 핫산-작은 아들 후세인 순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정하지만, 후세인 다음 '이맘'의 지위를 계승한 자손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논쟁이 많이 있다.
현존하는 쉬아파의 대부분은 이란에서 융성한 12이맘파이다. 이 분파는 지역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예멘의 경우는 자이드파가 주류이다.
크게 보면 10여개 정도 파벌이 되고, 역사적으로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파벌까지 합치면 정말 현기증나게 많은 숫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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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2이맘파는 후세인의 아들들 가운데 알리 이븐 후사인(Ali ibn Husayn Zayn al-Abidin)을 정통으로 보았다.
알리 이븐 후사인은 아버지가 알리이고, 어머니는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III)의 딸로서, 페르시아의 황녀인 샤흐르바누(Shahrbanu)로서, 전설에 따르면 샤흐르바누는 페르시아가 패배한 뒤 우마르 혹은 우스만 혹은 알리의 노예가 되었는데 알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주고 누구와 결혼할 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였다. 샤흐르바누는 알리의 아들 후세인을 선택하여 혼인을 하였다. **"그리하여 알리 이븐 후사인은 아랍인의 최고 혈통인 쿠라이쉬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던 것이다."**라고 12이맘파는 주장한다.
압바스 왕조 치하에서 알리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여겨지는 시아파의 이맘들은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시아파 전설에 따르면 대부분의 이맘이 압바스 왕조에게 독살 당했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의 10대 칼리프 Al-Mutawakkil의 치세에 시아파의 10대 이맘 Ali al-Hadi는 바그다드로 소환되었고, 사마라에 저택을 주워졌는데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알리 하디의 아들 11대 이맘 Hasan al-Askari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자손은 나타나지 않았고 시아파 이맘의 대는 공식적으로는 끊어졌다.
그리고 12대 이맘에 대한 시아파의 전설은 이렇다. 참고로 수니파에서는
12대 이맘의 존재 자체를 헛소리라고 보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산 알 이스카리는 자손이 없이 죽은 듯이 보였지만, 노예를 가장하여 아라비아를 여행[11]
하던 비잔티움제국의 공주
나르지스(Narjis)와 결혼하여 아들을 보았다.[12]
하지만 압바스 왕조의 탄압을 우려하여 아들을 낳은 것을 비밀로 하였다. 그
아들이 바로 12대 이맘 무함마드 이븐 하산 알 마디(Muhammad ibn Hasan al-Mahdī).
마디는 5살 때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다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는 알라가 마디를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 모습을 감춘 것("Ghaybah")이며, 마디는 미래에 이사(예수)와 함께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인류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압바스 왕조가 우마이야를 답습해 더 쎈 수니파 제국을 건설해버렸기에 저항은 끊어지지 않았고 이집트나 페르시아 같은 비아랍계 지방과 동아나톨리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산골 깡촌에서 세력을 불렸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B%9C%EC%95%84%ED%8C%8C?action= edit§ion=17)]
Isma'ilism
8세기 후반에 성립하였다. 7이맘파라고도 불린다.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Ja'far al-Sadiq)의 장남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Muhammad ibn Ismail)을 7대 이맘으로 추종한 분파. 이와는 달리 12이맘파는 무사 카딤(Musa al-Kadhim)을 7대 이맘으로 세웠다.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도 영지주의, 신비주의 경향이 강하며, 분파가 매우 많다.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의 사후에 그 자손이 이맘을 계승하였는데, 이스마일 파의 전승에서는 이들은 아바스 왕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정체를 숨겼다고 알려져 있다. 8대 이맘, 9대 이맘, 10대 이맘이 정체를 숨겼으며, 이들은 스스로 이맘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기록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반인 신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Abdullah al-Mahdi Billah가 스스로 이맘임을 드러내고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가
되었다.[13]
카이로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하킴의 실종 이후 실권을 잃었고 군인과 관료들에게 휘둘렸다. 살라딘의 아이유브왕조가 압바스 칼리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파티마 칼리프를 더 이상 세우지 않음으로서 사실상 멸망하였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B%9C%EC%95%84%ED%8C%8C?action= edit§ion=18)]
시리아에 주로 분포한다. 실종된 파티마 왕조 6대 칼리프 하킴이 사실 마흐디이며, 그는 지금 모습을 감추고 있고 언젠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는 파벌이다. 교리적으로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매우 강하며, 교리적으로 이슬람에서 동떨어진 것이 많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B%9C%EC%95%84%ED%8C%8C?action= edit§ion=19)]
Nizāri
파티마 8대 칼리프 Al-Mustansir Billah 사후 자식 형제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분쟁에서 형 니자르(Nizar)를 추종한 자들의 집단이다.
반란 직후 니자르는 유폐되어 생을 마감했지만, 추종자들은 니자르는 모습을 감췄을 뿐이고 언젠가는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맘'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하산사바흐이며, 유명한 어새신들이 바로 이들이다. 한때 상당한 세력을 쌓아올렸지만 홀라구의 서정으로 참패하여 정권이 붕괴하였다.
[[edit](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B%9C%EC%95%84%ED%8C%8C?action= edit§ion=20)]
페르시아로 이동한 니자르 파에서 44대 이맘 Ḥassan ʻAlī Shāh가 페르시아의 샤의 공주와 결혼하고 아가칸(Aga Khan)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아가칸은 나중에 인도로 이동하엿으며, 아가 칸의 지위는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현재 아가 칸 4세)
'아가 칸'은 영토는 없지만 막대한 부와 엄청난 수의 추종자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일국의 군주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본래 아가 칸 파벌은 이스마일=니자리 파의 한 갈래였지만, 이스마일=니자리 파 가운데 가장 확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보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시리아 등에 퍼져 있던 니자리 계 분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가 칸을 이맘으로 인정하고 따르게 되어서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사실상 현재 이스마일파의 분파 가운데서는 가장 세력이 크며, 이스마일=니자리 파의 종주를 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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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ydīyah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 이븐 알리(Zayd ibn Ali)를 이맘으로 추종하는 파벌. 12이맘파와 자이드파의 분리는 5대 이맘인 무함마드 알 바키르(Muhammad al-Baqir)를 놓고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둘 다 알리 이븐 후사인의 아들인데, 무함마드 알 바키르는 우마야 왕조 치하에서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재야에 머물려 하였고, 자이드는 스스로 반란을 일으켜서 대항했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자이드 파는 사파비 왕조 이전까지는 시아파 가운데 가장 큰 그룹이었으며, 현재도 시아파에서 12이맘파에 이어서 두 번째로 큰 그룹이다. 예멘에 자이드 파 신도가 많다. 2014년에 벌어진 예멘의 하티 반란은 시아파 자이드 파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교리상의 특징은, 자이드 파는 후세인 이후의 이맘은 '무오성'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마르, 우스만 등 수니파 정통 칼리프나 그들의 가르침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자이드 파의 교리는 시아파 가운데서는 비교적 수니파에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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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의 셋째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Muhammad ibn al-Hanafiyyah)를 이맘으로 추종하는 집단이다. 근데 다른 시아파와는 달리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의 어머니 후나피야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가 죽은 다음 알리가 결혼한 아내로서 이 사람은 알리의 자손이긴 하지만 무함마드의 자손은 아니다. 후나피야는 카르발라의 참극으로 후세인이 죽은 뒤 알리 가의 당주가 되었고, 그 부하 알 무크타르 (Al-Mukhtar)가 후세인의 복수를 내걸고 무아위야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마디'로 추앙받았다. 무크타르는 일시적으로 거대한 카이산 파 세력권을 건설햇지만 무아위야 왕조에 토벌되어 전멸당했다.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가 죽은 뒤 카이산 파는 그가 죽은게 아니라 모습을 감춘 것이며, '마디'로서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파벌, 무함마드의 자식을 이맘으로서 세우려는 파벌 등으로 분열이 계속되었다. 압바스왕조의 성립에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다른 시아파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받았다.
누구를 이맘으로 세우느냐는 문제로 분열이 많아 세력이 쇠퇴하다가 결국 12이맘파에 흡수되어 소멸하게 된다. 사실 카이산 파가 '숨겨진 이맘' 이론과 '마디 재림론'의 원조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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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는 소수로 활동하면서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꾸준히 발휘하곤 하였다. 압바스 이슬람 제국은 중기에 시아파 맘루크들에 의해 통치된 적이 있으며, 이집트에 세워졌던 파티미 칼리파조는 시아파가 주도하여 건설한 왕국이었다. 현대 이란의 시조, 대한민국으로 치면 조선 격에 해당하는 사파비 왕조는 시아-수피 교단에서 출발한 이맘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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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은 수니파였기에 이라크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
factbook/geos/iz.html) 시아파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학살한 것 때문에 결국 은둔하고 있던 곳을 시아파 무슬림이 찔러서
체포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때문에 후세인이 사형당한 날, 시아파는 열렬히 환호하고 수니파 원리주의자들은 자폭테러를 결의하는
등[14]
, 한나라에서도 이 정도로 극하게 여론이 갈린 이유는 다 이 종파 싸움이 원인이다.
수니파 만큼이나 과격하다. 이란-이라크전쟁 때 이라크군의 전차를 잡기 위해 어린애들에게 자폭돌격을 많이 시켜서 유명해졌다. 그래도 아제르바이잔같은 나라는 이슬람권에서 몇안되는 안정적인 세속국가이고 이라크나 시리아의 시아파 정권도 종교원리주의 신정국가 만들기 성향은 아닌걸로봐서 수니파보단 약간 덜 원리주의 적이긴 하다.
단 국제사회에서는 수니파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세계구급 화제를 자주 몰고다니는(…)
**이란**과
**헤즈볼라**가 시아파가 득세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세는 하마스,
알카에다,
알샤바브,
보코하람, IS 등의
대활약깽판으로 수니파의 이미지 역시 크게 유악명해졌다(…).
\----
[1]
'~ite'는 '추종자'를 뜻하는 접미사[2]
이마미야[3]
이 종파에는 니자르파라는 분파가 있는데, 이들이 그 유명한 암살단파, 즉 **어쌔신**이다.[4]
알라위테[5]
al-wasiya[6]
al-rajah[7]
다만,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 와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과거 오스만 제국과 잉글랜드가 우호관계를 맺었을 때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거기에는 천주교와 개신교보다 개신교와 이슬람이 더 공통점이 많다는. 흠좀무한 주장이 적혀 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게 똑같다나. 다만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온 말일 뿐이라는 건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8]
물론 개인적으로 만날 경우엔 "오 이슬람을 믿는 형제여"라며 매우 반기는 경우가 있다. 특히 같은 반미 성향일 경우 파트너가 되기도 한다.[9]
알리가 파티마 전에 결혼한 여자의 아들이다.[10]
Shimr ibn Dhiljawshan[11]
이 시점에서 굉장히 윤색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종교적인 설화니까 그렇다고 치자.(…)[12]
조상의 아내는 페르시아 왕녀, 직계 모친은 비잔티움 왕녀라는 점에서 역시 종교적으로 윤색한 경향이 엄청 많이 느껴지지만(…)[13]
여기서 "아무리 봐도 이거 족보 날조한거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종교적 신념이니 그렇다고 치자.(…)[14]
하지만 모든 수니파가 이러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수니파들은 시아파 주민들과 얼싸안고 기뻐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