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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전.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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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기본적인 양상

2.1. 방어선 건설

2.2. 공격 전 대규모 포격

2.3. 일제돌격

2.4. 방어사격 및 반격

2.5. 도돌이표

  1. 참상
  2. 변명
  3. 피와 진흙의 요람
  4. 기타
  5. 근미래에 나올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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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Trench Warfare.

http://i.imgur.com/q5zDazD.jpg?1

[JPG external image]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벌인 전투 방식을 일컫는 말. 동부전선과 발칸, 중동에서는 참호전이란 상황이 없었다. 서부전선에 비해 전선이 엄청나게 길거나, 양측의 능력과 장비에 차이가 커서였다. 그래서 설령 참호 전선이 나타나도 중간지대가 너무 넓어, 그 안에 사는 사람이 평상시처럼 사는 모순도 일어났다. 덕택에 동부전선 등에서는 전차 등장 이전부터 장갑차가 전차 노릇을 하며 활약했고, 전통적인 기병도 현역으로 대량 활용했다.

참호전의 발단은 1914년 9월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결정한 후퇴였다. 당시 파리를 50여km 남겨둘 만큼 엄청난 진격속도를 보였던 독일군은 슐리펜계획에 따라서 조기에 영국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러시아와의 전면전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이 전투의 패배로 계획이 틀어져 끝내 양면전쟁 상황에 빠졌다. 이에 독일군은 점령지역 유지와 방어를 위해, 여기에 대응하여 연합군 역시 적의 진공을 저지하러 참호를 팠다. 그리고 상대편 참호의 옆으로 계속해서 기동을 되풀이한 결과 끝내 참호선이 프랑스에서 스위스까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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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본적인 양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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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방어선 건설 ¶

![Vickers_machine_gun_crew_with_gas_masks.jpg](//rv.wkcdn.net/http://rigvedawi ki.net/r1/pds/Vickers_machine_gun_crew_with_gas_mask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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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의 참호선 건설 메뉴얼을 보고 싶은 사람은 이 곳을 참고 바람#

공격군·방어군 모두 지그재그 모양의 최전선을 비롯한 다중의 참호선을 파고 앞에는 대규모 철조망, 참호에는 기관총을 두어 적의 공격을 막는다. 지금 기관총은 소대나 분대 지원 화기지만, 이 무렵에는 대대 지원 화기라서 거의 몇백 m마다 하나씩만 놓았다.

당시에 쓰던 기관총들은 제2차세계대전M2중기관총이나 MG42를 우습게 볼 무게라서 전세대의 기관총인 가드너나 노덴펠트처럼 전용 포가가 필요해, 마치 나폴레옹 시기의 포병처럼 써야 했다. 실제로 기관총반은 포병용 조준기를 받아서 돌려, 광대한 참호망을 다 맡기에는 설치 비용과 효과가 아주 미미했다. 1915년 전후로 참호선 곳곳에 기관총호를 나눠 만들어갔다.

이 과정은 참호에 병력을 두면서 매일 한다. 그래서 뒷날 참호가 거의 미로에 가깝게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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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공격 전 대규모 포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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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군은 이러한 적의 참호를 돌파하러 엄청난 규모의 사전 포격을 편다. 이 때 방어군은 모두 참호로 대피하여 큰 피해 없이 포격을 버텨낸다. 하지만 철조망 같은 방어선은 모두 증발하니 이론상으로 보병들의 진격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다. 즉, 몇 분의 기관총 세례만 버티면 적군 참호를 점령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남은 장애물에 어려움이 급상승하니 문제였다. 당장 솜전투 당시 제대로 포격을 못한 일부 지역은 철조망이 남았고, 그 결과 어떤 곳은 하루만에 중대가 통째로 증발도 했다. 게다가 당시 영국군은 한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을 한 중대에 배치하는 정책을 폈기에, 이런 중대단위 증발은 전후지역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강력한 포격이라고 평가할 만큼 며칠의 포격이 있었는데 정작 철조망 하나 못 치웠다니 심히 미스터리하겠지만, 당시 영국 육군 포병대의 대부분이 유산탄(Shrapnel: 포탄 안에 쇠구슬이나 금속 조각을 가득 넣어서 파편 효과를 극대화한 포탄)을 써서였다. 유산탄은 포탄의 파편으로 하는 인마살상이 주목적이라 개활지에 밀집한 보병들에게 효과적이었지만, 빈약한 폭발력으로 파편 따위를 튕겨내는 구조물에는 비효율적이었다. 참호나 철조망과 같은 구조물에 유효한 고폭탄은 극소수만 썼다. 또한 나중에 조사하니 영국군의 포격은 상당히 부정확했다. 게다가 솜 일대의 토질은 습기가 많아 부드러웠고 영국군 포탄은 질이 떨어져 불발탄도 많았다.

게다가 포격이 너무 세도 문제인데, 진격로에 엄청난 숫자의 구덩이를 만들어서였다. 여기에 더해서 그런 구덩이들은 폭이 넓고 깊이도 깊어서 재수없으면 1번 빠져서 못 나가는 덫이고, 피하려면 멀리 돌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전의 포격 등에 난 구덩이가 물이 고이면, 말 그대로 여러 명을 빠져죽게 하고도 남는 엄청난 장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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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일제돌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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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포격이 끝나면 뒤이어 공격군에서 일제돌격을 편다. 보통 포격이 끝난 직후에 해야 원칙이지만 연락 등의 통신이 불충분하면 포격이 안 끝났는데 돌격해서 아군 포탄에 팀킬을 겪거나, 너무 늦게 돌격을 시작해서 적이 제대로인 기관총 사격의 맛을 보여주는 통에 자주 **적군 최전선 참호까지 가기도 전에 전사**했다. 1차 대전 당시에도 무선 기술이 있었지만 성능이 개차반급이라 자주 못 썼고, 유선반이 만드는 유선망에 기대거나 전서구를 쓴 전통적인 연락방식을 선호했다. 설상가상으로 양측의 포격이 격렬하면 기껏 세운 유선망이 개판으로 바뀌어서 제대간 연락을 못하는 상황이 정말 많았다.

게다가 돌격하는 병력이 쓸 탄환이나 적 참호선 점령과 확보를 위해 필요한 자재를 나르려면 기관총 사격을 뒤집어쓰면서 포격으로 엉망인 땅을 지나가야 한다. 차량이나 수송부대를 쓰기가 어려우니 돌격하는 병력의 각 병사마다 무거운 짐을 나누어주는 때가 있는데, 이러면 당연히 돌격속도가 느리니 그야말로 기관총 입장에서는 정지한 표적 그 자체나 마찬가지다. 2차대전의 군장도 무거워 보이지만 1차대전에는 돌격시에 생필품까지 싸맨 군장을 맬 때가 있었다.(대표적으로 프랑스군) 이는 점령한 참호선을 바로 아군의 것으로 만들려는 전초 작업 때문이었다지만, 이후 참호전의 양상이 바뀌면서 생필품까지 때려박은 군장을 매고 돌격하는 일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일제돌격을 안할 수도 없으니, 산발적으로 돌격하면 적의 방어화력이 해당방면에 집중하면서 확실하게 돌격이 실패한다. 따라서 방어화력으로 일부 인원을 희생하더라도 나머지 병력을 적의 참호선에 육박시키려면 일제돌격을 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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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방어사격 및 반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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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참호로 대피했던 방어군은 포격이 멎으면 다시 와서 돌격하는 적들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이 때 방어의 성공을 가르는 기준은 포격의 충격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서 중기관총을 참호 안의 사격위치로 재빠르게 둔 뒤 쏘는가에 달렸다. 연합군에게는 아쉽게도 이것이 독일의 종특이었다.

그래서 제대로인 훈련을 못 받은 부대라면 우물쭈물하다가 참호에 적 보병이 난입하는 막장을 겪고, 아니더라도 보통 방어전 때 아군 참호 중 최전선의 1개 열 정도의 참호는 잠시 적에게 넘어가는 때가 많았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대개 참호선은 기본적으로 3선 이상을 중첩해서 세우고, 제2선 참호에 이미 예비병력을 두며, 대포들도 적에게 넘어간 제1선 참호를 정확히 명중시키도록 훈련을 받는다.

이와는 반대로 공격군은 엄청난 손해를 입으며 간신히 참호 하나를 빼앗았으니 후속해서 들어오는 증원병력이 모자라고, 자기가 점령한 참호의 특징도 잘 모른다. 따라서 대형 해프닝만 없다면 일반적으로 방어군이 반격해서 참호를 되찾는다.

이러다보니 적군 참호를 향해 땅굴을 파거나[1] 돌격용 참호로 길도 뚫었다. 끝내 최전방은 적아군 할 것 없이 참호가 복잡하게 얽히거나, 참호 안에서 길을 잃어 헤메다가 어처구니 없게 적군 진영에도 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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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도돌이표 ¶

이러면 공격군은 다시 병력과 물자와 장비를 모으고, 그 사이 방어군은 다시 참호선을 재정비하면서 1번으로 되돌아간다.

가끔 공격이 성공하거나 방어에 실패해서 전선이 몇 km 움직이기도 하지만, 보통 이런 때에는 반격이 들어가거나 하는 등의 까닭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원상복구하는 때가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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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상 ¶

4단계의 무한반복을 4년간 지속했으니 문제였다! 그야말로 무의미한 돌격과 살육의 반복이었고, 제1차 솜므 전투 당시 영국군공세 개시 딱 하루만에 6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오는 엄청난 참사도 있었다. 사망 19,240, 중상 35,493, 포로 및 실종자까지 더해 총 57,470명. 참고로 독일군 사상자는 겨우 8,000명, 모 독일군 연대는 아군 280/ 영국군 5,121이라는 기록적인 교환비도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과 함께 시체를 파먹어 고양이만하게 살찐 들이 돌아다니고, 엄청난 숫자의 벼룩이 득실거리며, 만 오면 참호에 이 가득 차 병사들은 걸레처럼 젖기 일쑤에 심지어 참호 속에서 빠져죽거나 참호가 무너져 묻히는 일이 빈번했다. 거기에 겪는 무시무시한 추위와 더위, 온갖 질병이 만연해 그야말로 참호전은 끔찍했다. 상황이 너무 처참한 나머지 각국은 전선의 병사들이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 **참호전의 지옥 같은 상황**을 못 말하도록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trench-feet.jpg](//rv.wkcdn.net/http://rigvedawiki.net/r1/pds/trench- fee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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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비가 온 뒤 참호에 고이는 물은 그냥 빠질 리가 없으니, 며칠 사이 발을 담그고 있어야 했다. 그런 일도 고역이겠지만 참호 안에 들어온 물이 더럽기에, 참호족(Trench foot)이라는 증상으로 고생했다. 이러한 증세는 유리한 위치에서 후퇴를 멈출 만한 독일군 쪽이 상대적으로 고지대였기에 비교적 나았으나, 대신 이쪽은 만성적인 물자 부족으로 고생했으며 군사들의 참호-후방 교체 주기도 연합군보다 길어서 별 나을 게 없었다. 더구나 솜므 지역에 엄청난 비가 내릴 때는, 고지대도 진창밭이었고 물이 잘 안 빠졌으니 끝내 사이좋게 시궁창.

영국군이 가장 심했는데, 바로 벨기에에서 국토 전역이 뺏길 위기에 놓이자 전선의 모든 운하와 둑을 폭파하거나 밀어젖혀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면서 벨기에 영토의 한 귀퉁이를 보전한 대신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연합군(대부분 벨기에군&영국군)이 매년 홍수로 고생해서였다. 영화 60고지 전투를 보면 뽀송뽀송한 독일군의 참호와 완전 물바다인 영국군 참호를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영국의 근현대 역사상 영국인들에게 가장 쓰라린 기억을 남긴 곳이 바로 이 지역의 이프르, 그리고 솜이다. 영국군은 전쟁 초기에 이프르 전역만 맡다가 이후 병력을 늘려 전선의 1/3이나 맡을 만큼 역할이 중요했다. 이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의 하나인 파스샹달 전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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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진영의 참호건 진흙밭이면 아주 더럽고 위험했는데, 여러 포탄구덩이에 물이 고이면 깊이 모를 죽음의 함정이었다. 나름 참호 안에서 움직이기 편하게 한다고 나무판자들을 깔았는데 잘못 밟으면 놀이터 시소처럼 위로 날아올라 얼굴이나 몸을 후려치는 일이 많았으며[2], 자주 물구덩이 위의 판자가 부서져서 사람이 빠져죽었다. 그리고 많은 배설물 탓에 더욱 안습이었는데, 사방에 물이 고여 진탕이라 똥오줌이 넘쳐 흘러와 범벅인 참호에서 먹고 자며 싸워야 했다.

각국 수뇌부도 아주 손을 놓지는 않은지라 물이 고인 참호에 고무장화와 우의, 보온용 의류 등을 줬지만 별다른 쓸모가 없었다. 고무장화는 하루도 못 지나 사방의 날카로운 파편과 못 등에 구멍나 물이 들어오고, 우의나 보온용 의류는 울 등의 두터운 실로 많이 만들었는데 흙탕물에 범벅이던 진흙이 붙어 10kg 단위인 무게로 불어나 병사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덤으로 연기나 불꽃이 올라오는 순간 적 포병에게 좋은 목표였으니 축축한 참호 안에서 불을 피워 발을 말리거나 음식을 따뜻하게 데워먹을 수도 없었다. 또한 참호 전후방에 당연히 포탄이 날아오니 정시에 따뜻한 음식을 보급하러 오다 자주 대포에 맞아 죽거나 도망가서, 딱딱하고 맛없는 밀가루 조각 등의 비상식량으로 며칠에서 몇 주일을 연명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당시 병사들이 가장 바라던 품목 가운데 하나가 연기없이 장시간 태울 만한 고체 알코올... 그건 적 포병에게서 안전하고 체온이 떨어지는 야간에도 유용한지라.

게다가, 참호에 있으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오는 포탄과 탄환 때문에 정신붕괴를 일으키는 병사들도 꽤나 있었다. 이른바 탄환충격(쉘 쇼크, Shell Shock), 정식명칭 CSR(Combat Stress Reaction. PTSD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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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저격수, 영화 60고지 전투중에서)

포탄이 안 날아오는 소강상태일 때도 저격수 탓에 어떤 진영이건 참호 위로 머리를 내밀면 죽음 그 자체였고 마음을 못 놓았다. 독일을 시작으로 각국은 저격수를 키워 교착상태인 참호전에 넣어 적 참호를 노렸다. 따라서 치열한 신경전을 매일 벌이는 사이 하루에 수십명 단위로 몰래 저격을 겪어 죽어나가니 처절했다. 1,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와 각종 사례,정보

그러나 이런 상황을 겪어본 상관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통신수단의 발달로 고위 지휘관들은 최소 몇km 떨어진 곳에 둔, 포격에도 안전한 벙커에서 지도나 보며 작전을 지시했고, 참호전의 특성상 전선이 대규모로 급격하게 안 바뀌어서 지휘관들이 굳이 안전한 벙커와 편리한 숙소를 버리며 최전선으로 갈 까닭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3]

위의 정신붕괴 문제에 심리학자들이 계속 문제를 제기했으나, 당시 인식은 심리학자들을 거의 점술사처럼 봤다. 심리학이란 학문 자체가 막 나왔고,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을 위시한 당시의 심리학자들은 상당히 자의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분석했다. 그래도 병사들의 불만이 증폭한 1916년 이후에는 많은 처우 개선이 있었다. 그나마도 연합군 한정.

게다가 전쟁양상이 총력전으로 바뀌면서 아무리 병력을 잃어도 증원군이 무한정 오다 보니 각군은 참호돌파의 방법으로 압도적인 화력, 즉 머릿수로밀어붙이기만 되풀이했다. 이런 지옥도는 쇼미더머니를 치는 미군과 영국의 전차 출현, 그리고 독일의 국력이 완전히 연소할 때까지 이어졌다.

덧붙여 그런 참혹한 상황인 사이 전쟁의 포화가 없는 각국의 본토에서 '참호 연습장'이라는 명칭으로 간단하게 만든 참호를 각종 군용장비와 함께 민간인들이 관람하게 만들었다. 이 참호 연습장이란 대체로 일반 공원에 있었는데, 시민이나 심지어는 소위 상류층 사람들이 여기서 소풍을 즐겼다. 카페, 레스토랑, 전쟁영화를 상영하는 극장까지 뒀다. 이런 것에 낚여서 진짜 참호전을 겪고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그렇게 죽은 가족이 어떤 환경이었나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부모들도 엄청나게 많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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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변명 ¶

다만 이러한 비참한 상태를 이었던 까닭은 각군 수뇌부의 무능 탓만은 아니고, 당시로서는 그 방법 뿐이었기 때문이다.[5] 이 당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위력을 떨쳤던 폭격기도, 중전차도, 지진폭탄도, 대전차로켓도, 현대의 벙커버스터도 없었다. 즉 땅을 파서 만든 참호를 뚫을 수단은 보병들이 닥치고 돌격하든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병수준에 비하면 형편없는 포병, 그리고 해안에서나 가능한 전함의 포격[6] 뿐이었다. 보병의 화력도 나빠서 단발인 볼트액션식 소총을 쓰고,[7] 그나마 기관총을 소대별로 보급한 정도였다. 폭탄도 아닌 총기류였기에 참호에 틀어박히면 '제압'은 할지 몰라도 '점령'을 못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심지어 참호전의 해결사인 박격포는 전쟁 중반에 스톡스 박격포가 나오기 전까지, 구형 봄바드는 물론 심지어 투석기와 비슷한 투탄기까지 쓰는 안습한 현실이었다.(투탄기는 소음성 때문에 이후에도 종종 썼다.)

이론상으로는 포병의 철저한 포격과 그에 보조를 맞춘 보병의 진격으로 참호를 돌파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포병이 안 보이던 곳의 적을 정확하게 못 때렸다. 또 목표 좌표를 확보해도 적의 대응 사격이나 누전, 쥐가 주는 피해, 기타 사고 등에 전선의 보병과 후방의 포병은 유기적 통신이 어려웠다. 그렇게 보조가 안 맞아서 일어난 일이 위에 말한 사태이다. 단순히 나폴레옹 시절의 전술을 그대로 적용시킨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 보낸 전 병력에서 전체 사상자의 비율이 나폴레옹전쟁이나 남북전쟁 시기보다도 현저히 낮았고, 어마어마한 사상자는 오직 산업화를 완성하면서 전에 없이 대규모 병력을 넣어서 났다.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난 하루는 D-Day가 아닌, 남북전쟁 중반의 앤티텀전투다.

![http://user.chollian.net/~skidrow6/nondan/somme2.gif](http://user.chollian.n et/~skidrow6/nondan/somme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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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전투 사상율의 변화 - 출처: 무기체계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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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피와 진흙의 요람 ¶

참호전은 그 누구도 안 바라던 교착상태였으며, 이를 벗어나려고 양 진영은 계속해서 전술과 병기를 개발했고... 결국, 피의 요람은 수많은 살인병기들을 탄생시켰다.

먼저 기존에 정찰 임무를 맡던 기병이 참호로 그 능력을 잃자 대신 기구, 그리고 신기술인 항공기로 정찰을 시작했다. 후장식 강선포의 발달로 사거리가 무시무시하게 늘어난 포병은 이제 육안 관측이 아닌 이들이 정찰로 찍어준 좌표에 맞추어 보이지도 않는 적을 공격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포병은 사전 포격에 그치지 않고 전쟁 후반기에는 보병의 진격 속도에 정확히 맞춰 이동 화망을 줄 만큼 전술이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항공 전력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서, 처음에는 정찰로 좌표를 찍어주기가 목표였던 항공대는 서로를 견제하려던 공중전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전술 폭격을 할 만큼 대규모로 컸다. **공군**의 탄생이었다.

포병을 쓴 참호 밖의 지원이 아닌, 참호 그 자체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시도 또한 여럿이었다.

연합군은 적 참호 지하까지 여러 갱도를 파서 폭약을 많이 묻어 폭파도 시켰다. 광산 노동자와 기술자들을 훈련시킨 뒤 공병부대로 참전시켰는데 그 가운데 호주군 공병대가 낀 60고지 전투가 매우 유명하다. 당시 전장이었던 곳에는 아직도 거대 지뢰 2개가 남아서, 50년대에 그 하나가 낙뢰로 폭발했다. 덕분에 참호와 그 파괴 공작을 위한 이런 대공사를 거치면서 공병은 전에 없이 조직이 커졌다.

독일군은 참호 안의 병력 그 자체를 무력화시키려고 **독가스**를 썼으며, 기관총 진지를 공략하게 부대 단위를 소규모로 줄여 수류탄과 경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돌격대**도 창설했다. 반면 연합군은 기관총에 방호력을 갖추며 더 확실한 지원 화력과 함께 보병을 전진시키려고 전차를 발명하여 넣었다.

이 모든 난장판이 끝난 뒤, 1918년의 각국 군대는 이미 1914년 처음 전쟁했던 그 군대와 질적으로 전혀 달라졌다. 보병과 기갑, 항공, 포병을 유기적으로 조합해 적 전선을 돌파하고 목표를 타격하는 현대전의 기본적인 양상이 바로 참호전이라는 강철과 진흙, 피로 도배한 요람 속에서 태어났다. 당연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얻은 경험을 거쳐 더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죽일 방법을 배웠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각국 수뇌부가 당시로서는 최선의 대응을 했다는 식으로 면죄부를 주기란 매우 어렵다. 당장 프랑스군의 공세숭배(Culte de l'offensive) 사상만 살펴봐도 엄청난 막장인데, 공격제일주의의 창시자 그랑메종 대령은 이런 사상을 극대화시켜 교본에도 **"전통으로 돌아가는 프랑스군은 공세외에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같은 구절을 넣고야 말았다. 묘하게 자신은 듣보잡인데 스승 페르디낭포슈만 온갖 욕을 먹는다. 엘랑 비탈 사상으로 잘못 알려진 공격제일주의 교리는 전초 프랑스군의 극심한 인명피해의 주범으로 평가받는다. 포슈의 군사이론마저 '이길 수 있다고 믿으면서 돌진하면 이길 수 있다'라는, 맨 땅에 헤딩하는 수준의 발상이라고 오해해서 문제인데, 원문은 '전의야 말로 승리의 첫번째 조건이다(The will to conquer is the first condition of victory)'로 뉘앙스가 매우 다르다. 포슈는 두 피크의 영향으로 화력, 보급, 전술, 전략 외에 전쟁의 인적요소를 강조했는데 그걸 근성이론으로 왜곡하다니. 정신승리 항목의 주석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니 참고. 일본군이 공격제일주의를 수입해서 반자이돌격을 만든 것은 꽤 유명한 사례다. 영국군 또한 포병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부정확하고 포탄은 품질이 낮았으며 지휘부에서는 피해상황조차 제대로 모르는 등, 전장에서 다소 혼란이 있을 만함을 고려해도 도저히 못 옹호할 행태를 보였다.

덕분에 영국과 프랑스는 젊은 청년층을 너무 많이 잃어서 뒷날 일어나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시 엄청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방어전 일변으로 나섰다. 분명 전투의 전사자 비율 자체는 줄었지만, 과거의 상비군은 민간인과 완전히 다르게 운영했던 반면, 1차대전부터는 전쟁의 양상이 총력전으로 바뀌면서 투입 병력 자체의 규모가 못 비교할 만큼 늘었고 노동 인구에 직접적인 타격을 줘서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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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

참호전의 생생한 묘사를 알고 싶다면 에리히 M.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보자. 그 밖에 스탠리큐브릭 감독의 영광의길, 최근 영화로는 프랑스영화 '인게이지먼트(Un Long Dimanche De Fiancailles, A Very Long Engagement)'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워호스(War Horse)'가 참호전의 완벽한 재현을 보여준다.

폴 그로스 감독의 2008년작 영화 '파스샹달(Passchendaele)'의 참호전 장면.

제1차 세계대전과 병기와 전술이 다르지만 '참호전'은 고대에도 있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상 최초의 참호전은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쓴 것이었다. 그는 첫번째 회전에서 참호에 병사를 대기시킨 뒤 미트리다테스군을 맞아 싸워 격퇴하였고, 두번째 회전에선 참호를 판 뒤 미트리다테스군을 그 쪽으로 몰아붙여 패배시켰다.

삼국지의 조조도 참호를 쓴 전투방식을 보였다. 그는 완성 전투에서 장수와 싸운 뒤 패주하는 과정에서 추격해온 유표, 장수 연합군을 맞아 참호를 팠다. 그 뒤 병사를 그 밑에 대기시켜 연합군이 다가오자 그 참호에서 병사를 내보내는 기습작전으로 성과를 거뒀다.

또한 이슬람을 세운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쳐들어온 메카의 원정군을 상대로 참호전을 펼친 끝에 이겼다는 기록도 있다.

미니어처 게임 워머신의 국가 시그나에서는 참호전 당시의 병사의 모습을 딴 참호병이라는 병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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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근미래에 나올 가능성 ¶

확실히 고착상태를 타개할 방법이 너무나도 많다.

현대전에서는 1차대전 이래 참호를 돌파하려는 노력을 이으면서 각종 화기 및 기갑 전력이 발전해, 참호전이 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한다. 제대로인 산악 지대라면 참호 형성 자체를 못하고, 평지에서는 참호를 돌파할 수단이 넘쳐나서다.

그러나 지형적 유리함을 선점하면 나올 장점은 당연히 있으니, 비록 엄밀히는 교리도 형태도 전술도 다르지만 자연 및 인공적 장애물을 쓴 방어자의 철저한 은,엄폐 아래 공격자는 지형 및 노출의 불리함을 안고 보병 중심의 전력으로 대치 및 교전을 거쳐 조금씩 전진한다는 면에서 비슷한 새 전장바로 다음전쟁부터 새롭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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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상대 참호를 점령하거나, 포탄을 매설해 날려버리려는 목적이었다. 청진기를 들고 땅의 진동을 감청하거나 방어용 땅굴을 뚫어 땅굴을 파고 들어오는 적군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 [2] 톰과 제리에서 제리가 갈퀴나 삽, 나무판자등으로 자주 만드는 톰이 밟으면 벌떡 일어서며 면상이나 뒤통수를 후려치는 트랩을 생각하면 쉽다.
  • [3]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전방 지대에서는 오히려 수십 km에 달하는 전 전선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만한 통신 수단이 없었으니 문제였다. 유선 전화야 있었지만 적의 공격준비 포격이 참호 가까이 떨어지면 단선하기 일쑤였고, 이는 아군의 공격 때도 지속적으로 올라온 문제였다. 확보한 적의 참호에 유선 전화망을 깔아도 아주 당연히 단락했고, 전선과의 통신은 문서수발병을 거쳐야만 했다. 당연히 전방이 일선 보고를 수합하고 상부에 보고하며 상부가 계획을 세운 다음, 다시 일선부대에 하달하면 상황에서 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각군 수뇌부는 수만 명에서 수십 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지휘하는 핵심 지휘관이 이 따위 말도 안되는 통신 두절 상태에 놓이는 위험을 못 감수했다는 쪽이 정확하다.
  • [4] 캐나다 BBC 라디오 방송(당시 영국군이었음)에서도 이러한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지금까지 장렬히 전사한 줄 알았던 고조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 다쳐서 참호 안에 뒀다가 의무대로 옮기는 사이 눈먼 포탄에 죽었다라 한다.
  • [5] 스타로 치면 벙커와 해병 뿐인데, 탱크가 없는 셈. 정확히 말하자면 뒤에 탱크는 있지만, 시즈모드 고정이라고 보면 좋다.
  • [6] 이 당시 세계 최강 전함인 후드급 순양전함은 사거리가 30Km 정도였으니, 해안진지가 아니면 참호 돌파에 전함의 포격을 못 썼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시기 나온 일본 제국야마토급 전함과 더불어 세계 최강 전함으로 대접받는 아이오와급 전함의 최고 사정거리가 기상 양호, 45도 기준 40Km 정도였다.
  • [7] 반자동소총제2차 세계대전 때, 자동소총은 더 뒤에 나왔다.
  • [8] 당장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8만명 가까운 병력이 아예 몰살을 겪었음에도, 전쟁을 이어나가면서 새로 군단을 편성했음을 생각해 보자.